퀵바

노란커피 님의 서재입니다.

강과 먼지의 왕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노란커피
작품등록일 :
2016.09.24 16:04
최근연재일 :
2022.01.30 09:00
연재수 :
177 회
조회수 :
499,998
추천수 :
23,924
글자수 :
1,255,524

작성
21.08.08 09:00
조회
788
추천
59
글자
12쪽

2-151. 증명하는 자 (1)

DUMMY

2-53. 증명하는 자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왔지만,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분위기 역시 무거웠는데, 그러한 분위기에 압사한 건지 숲의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주위는 조용했다.


참으로 기묘했다. 라기아족은 적막과 인연이 없는데..... 거기에 수많은 부족이 모인 점을 고려하면 더욱 기묘했다.


허나, 그 자세한 내막을 안다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라기아족의 운명이 결정짓는 첫 단추가 채워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긴 침묵 중 마침내 누군가 용기 내 입을 열었다.


“괜찮나?”


입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줄무늬 뱀 부족의 슈닐로, 그는 기대와 걱정이 섞인 눈으로 베르겐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검을 쥔 채 눈을 감은 베르겐은 천천히 눈을 뜨며 대답했다.


“예..... 이상하게 괜찮네요.”


그 말에 슈닐은 안심한 듯 한숨을 토했다.


아니 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슈닐의 조카 야크만, 기안느 공주, 에야 공주, 그 외에도 긴 발톱 부족과 줄무늬뱀 부족의 왕, 회색 마녀 부족의 여왕, 하스, 퀘렐, 하돌스 파돌스 형제, 파맨, 에단, 쏘른, 가르가브, 바르하텐 등등 수많은 이름난 전사들이 슈닐과 같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들은 부족도 나이도 성향도 제각기 달랐으나, 단 하나 베르겐의 지지자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작은 가지에 불과한 베르겐의 지지자!


베르겐은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이 이겨야 하는 이유를 다시 확인했다.


이들이 바로 자신이 싸워 이겨야 하는 이유였다.


그러던 중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조심스레 나타났다. 결투 준비 일꾼으로, 날이 날인 만큼 그는 긴장한 채 조심히 말을 걸었다..


“어.... 저기, 이제 이제 나오시면 된다고 합니다.”


어색한 존댓말.


베르겐은 항아리에 담긴 모래를 한 움큼 집어 손에 문지른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길이 저절로 생겼는데, 베르겐이 그 길을 따라 걷자 모두 한마디씩 응원했다.


“전 당신을 믿습니다! 돌파자!”


“저도요! 당신이 최강입니다!”


“비록, 첫 번째라 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장검의 베르겐!”


“여태까지 하던 대로만 하십시오! 당신은 위대한 전사입니다!”


“당신은 이 늙은이가 봐온 그 어떠한 전사보다도 강하고 용감하오. 그대가 이길 것이오.”


“꼭 이기세요. 베르겐.”


“베르겐! 베르겐! 장검의 베르겐!”


수많은 전사들의 목소리.


이들 중 베르겐과 칼을 섞어본 이름난 전사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


허나, 그런 것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베테랑이든 애송이든 강하건 약하건 그들은 모두 라기아족 전사였으며, 베르겐을 지지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거였다.


사람들의 응원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들으며 앞으로 걸어가자 인파의 길 그 끝에 다다르며 어느새 결투장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나무와 흙을 쌓아 올려 급하게 만들었지만, 결투장은 이번 행사에 걸맞은 위압감이 서려 있었는데, 그 탓인지 결투장 위에 서 있는 드루이들 역시 평소보다 거대해 보였다.


평소 가까이 지내 잊고는 하였지만, 확실히 이들 라기아족의 존경을 받는 드루이드가 맞는 거 같았다.


드루이드 멀리보는 자가 말했다.


“첫 번째 전사 베르겐.... 준비되었는가?”


위엄 있는 드루이드의 목소리. 베르겐은 고개를 끄덕여 엄숙히 대답했다.


“예. 드루이드여.”


“그럼, 올라오라.”


짧고 단호한 어조에 베르겐은 결투장 위에 올라갔다.


몇 개 되지도 않는 계단을 오르는 게 영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생각한 것보다는 별 탈 없이 잘 올라갈 수 있었다.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었다.


승리자로 내려가던가, 시체로 끌려가던가 둘 중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이러지 못한다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침략자에 패해 파멸하는 것뿐일 테니까.


그때 둥-! 둥-! 둥-! 거리는 북소리와 뿌아아아앙-! 거리는 뿔나팔 소리가 들렸다.


오늘따라 거센 바람과 합쳐지자 위압적이면서도, 음울한 하모니가 숲 전체에 울려 퍼졌는데, 겨울잠에서 일찍 깨어난 짐승들이 깜짝 놀라 저 멀리 도망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러한 영향력은 비단 짐승에서 멈추지 않고 사람에게도 미치는 것 같았다.


결투장 아래의 수많은 구경꾼들은 표정은 사뭇 비장했으며, 결투장에 첫 번째로 선 베르겐 역시 북소리와 뿔나팔 소리가 울릴 때마다 어깨에 납이 올린 듯한 묵직한 감각을 느꼈다.


일부러 무장을 가볍게 하고 오길 잘한 거 같았다. 이러한 압박감에서 중무장까지 했으면 금방 지칠 텐니.


펄럭이는 가죽 깃발과 서서히 작아지는 북소리, 뿔나팔 소리....


긴장감이 점점 고조 됐는데, 이번 행사 고대의 대결을 주최하는 드루이드들이 입을 열었다.


첫 번째로 입을 연 것은 멀리보는 자였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수많은 왕들의 동의하에 고대의 대결을 시작한다!”


베르겐는 결투장 위 휘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회상했다.


연회 도중 첫 번째 전사로 자처했을 때를.


그때 왕들의 표정은 모두 어둡기 그지없었다. 연회장에 거지 떼라도 난입한 것처럼 말이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건가?


모두가 고대의 대결 그 특성 탓에 시작조차 불가능하다고 비웃는 와중 베르겐이 첫 번째 문을 열어버렸으니까.


여러 분쟁자를 모아 한 명씩 결투장에 올려보내 마지막 한 명이 승리할 때까지 싸워 살아남는 단순하면서도 불합리한 대결.


그중 죽는 것이 당연한 첫 번째 전사를 베르겐이 자처했으니.


그로 인해 연회에 참석한 왕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대의 대결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작은 가지인 베르겐이 먼저 참가하겠다고 의사를 밝힌 와중에 뒤로 물러난다면 스스로 작은 가지만도 못한 겁쟁이라고 시인하는 꼴이었으니.


즉 베르겐의 그 한마디에 수많은 권력자들이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는 거였다.


그것은 뭐랄까.....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어....’


휘이이이이잉 바람 소리와 함께 드루이드 시험하는 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고로 우리는 현재의 위기에 통감하는바, 고대의 결투를 주최한다! 우리의 아버지 영웅신 라기아의 이름으로 모두 동의하며, 이 결투에서 승리한 자에게 지휘권을 넘기며, 이는 전사로서의 맹세이다! 이를 어긴 자 영웅신 라기아에게 천벌을 받아 자신은 물론 그 후세까지 크나큰 고통과 모욕을 얻을 것임을 이 자리에서 선언한다! 그리고 그것은 늙은 산에서 나온 우리 두 드루이드 ‘멀리보는 자’와 ‘시험하는 자’ 역시 포함된다!”


단순한 전사와 왕뿐 아닌 드루이드까지 포함한 고대의 대결이라.


어째 그 무게가 한 단계 더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는데, 결투장 주변에 모인 전사, 여자, 아이, 노인도 비슷한 생각인지 더욱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더이상 이 자리에 부족은 없었다.


오직 라기아족만 있을 뿐.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아니지.... 당연한 건가? 비록 늙은 산 전체가 참가한 것은 아니지만, 오랜 칩거 생활에서 나온 드루이드. 그것도 한 명이 아닌 둘이나 참가했으니.’


드루이드 멀리보는 자가 시험하는 자에게서 바통을 건네받아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 고대의 결투를 선언한다! 첫 번째 전사 베르겐 준비되었는가!”


부족의 이름과 직위를 뺀 순수한 이름. 이 결투장이 어떤 곳인지 말해주었다.


베르겐은 장검을 뽑으며 답했다.


“예, 준비되었습니다.”


“두 번째 전사 나오라!”


그 말에 검은 황소 부족의 전투 귀족 하울로가 나왔다.


정확히는 곤봉의 하울로로, 그는 햇볕에 그을린 검은 피부와 거름 황소 부족 특유의 덩치가 특징인 자였다.


그는 덩치와 이름에 걸맞은 나무 곤봉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냥 나무 곤봉이 아닌 오래된 고목을 통째로 깎은 아주 거대한 곤봉이었다.


웬만한 검은 물론, 방패 역시 한 번에 부술 것 같았는데, 그런 무기를 한 번에 드는 것을 보아 그의 무력이 쉬이 예상됐다.


‘하지만 진심이 아니야.’


베르겐은 공포도 흥분도 자만심도 없는 차갑고 차분한 눈으로 상대를 보며 생각했다.


물론, 그가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죽일 마음이 만반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왕, 검은 황소 부족의 왕 그라우에게 그러한 명을 받았을 테니까.


아니 그라우 뿐만이 아니었다.


연회에 참석한 왕들을 모두 난감하게 했는데, 어찌 그만이 자신을 죽이고 싶을까?


그라우를 비롯한 연회에 참석한 왕들 대다수가 베르겐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대결에 뛰어난 전사들을 대거 보냈다. 베르겐을 죽이기 위해.


‘하지만 의문이군. 대결이 시작되면 좋든 싫든 승자는 단 한 명만 남을 텐데.’


드루이드 멀리보는 자가 두 번째 전사 하울로에게 싸울 준비가 됐는지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에 걸친 나무 몽둥이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베르겐 역시 그 모습을 보며 장검을 고쳐 잡았다.


누군가 마법이라도 부린 듯 적막이 감돌았는데, 그때, 이틀 전 찾아온 할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 녀석은 몰래 베르겐을 불러내 욕하며 말렸다.


지금 넌 미친 짓을 하는 거라고, 같잖은 전공을 세우고 주변에서 몇 번 치켜세워줘 정신이 나간 거라고.


결코, 고대의 대결에서 베르겐이 살아남을 길은 없으며, 자신의 목숨만 잃을 뿐 아니라, 라기아족에게 크나큰 혼란과 파멸을 가져올 뿐이라고 그는 몰아붙였다.


그리고는 명령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여태까지 내뱉은 말을 전부 취소하고 사죄하라고.


과거 베르겐이 누님을 외면했을 때처럼.


베르겐은 묵묵히 그 말을 듣다가 마침내 한마디 했다. 무슨 말을 했냐면.....


“그럼, 대결을 시작한다!”


드루이드 멀리보는 자의 선언에 두 번째 전사 하울로가 굉음을 지르며 앞으로 돌진했다.


그는 다짜고짜 좌에서 우로 나무 곤봉을 휘둘렀다.


단순하지만 길쭉한 팔과 거대한 나무 곤봉을 잘 이용한 공격이었는데, 일반적인 공격보다 사거리가 두 세배는 되었으며, 위력까지 상당해 절로 사람을 움츠러들게 했다.


아마 베르겐 역시 사전에 그에 대해 듣지 못했다면 본능적으로 물러났을 터였다.


‘그리고 구석에 몰려 무기와 함께 박살 났겠지.’


베르겐은 몸을 낮춰 휘두르는 몽둥이 아래로 파고들었다.


곤봉의 풍압에 머리가 흩날리며 죽음이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칫거리지 않고 더 깊이 파고들었다.


어차피 이곳에 올라오고 난 뒤 살고자 하는 마음은 포기했으니까. 베르겐은 이길 마음뿐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하울로는 공포에 물든 눈으로 베르겐을 봤는데, 베르겐은 그 눈을 마주했음에도 일말의 자비 없이 장검을 휘둘러 하울로를 지나쳤다.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 다음에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다들 정신을 차리자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곤 장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는 베르겐과 피와 내장을 흘린 채 쓰러진 하울로 뿐이었다.


결투장 위에 있는 드루이드를 제외하고는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그것은 베르겐의 반대파 전사들과 따로 좌석을 마련해 지켜보는 왕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표정에는 충격이 가득했다.


이윽고 드루이드는 소리쳐 선언했다.


“..... 승자! 베르겐! 세 번째 전사 올라오도록!”


일꾼들이 죽은 하울로를 데리고 가는 사이 세 번째 전사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올라왔다.


베르겐은 그런 그를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거야.”


작가의말

읽어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일요일 잘 보내십시오!


폴피리 님, 투투리 님. 응원 감사합니다. 덕분에 계속 쓸 수 있습니다. 다음 주 또 찾아 뵙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강과 먼지의 왕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강과 먼지의 왕자 장기 휴재 공지 사항입니다. +9 22.02.06 2,540 0 -
공지 강과 먼지의 왕자 휴재 공지 사항입니다.(8월 22일 ~ 9월 12일) +15 21.08.21 981 0 -
공지 녹색땅 동부 지도 입니다. +2 20.12.25 2,183 0 -
공지 연재주기 변경에 관련된 공지사항 입니다.(금요일 에서 일요일로.) 20.08.14 1,889 0 -
177 2-162. 공화국의 장군 (3) +6 22.01.30 1,002 44 10쪽
176 2-161. 공화국의 장군 (2) +3 22.01.23 514 36 13쪽
175 2-160. 공화국의 장군 (1) +6 22.01.16 535 42 12쪽
174 2-159. 협력자 (5) +14 22.01.09 537 43 12쪽
173 2-158. 협력자 (4) +11 21.10.31 716 45 12쪽
172 2-157. 협력자 (3) +7 21.10.17 685 47 14쪽
171 2-156. 협력자 (2) +5 21.10.10 611 49 10쪽
170 2-155. 협력자 (1) +9 21.10.03 694 48 12쪽
169 2-154. 침략자 (2) +5 21.09.26 670 46 13쪽
168 2-153. 침략자 (1) +5 21.09.19 730 47 14쪽
167 2-152. 증명하는 자 (2) +12 21.08.15 837 55 14쪽
» 2-151. 증명하는 자 (1) +10 21.08.08 789 59 12쪽
165 2-150. 대비하는 자 (4) +13 21.08.01 758 51 19쪽
164 2-149. 대비하는 자 (3) +13 21.07.25 773 59 12쪽
163 2-148. 대비하는 자 (2) +21 21.07.18 806 68 12쪽
162 2-147. 대비하는 자 (1) +10 21.07.11 907 65 12쪽
161 2-146. 성공한 사업가 (4) +10 21.07.04 906 68 19쪽
160 2-145. 성공한 사업가 (3) +10 21.06.27 909 60 14쪽
159 2-144. 성공한 사업가 (2) +14 21.06.20 853 61 19쪽
158 2-143. 성공한 사업가 (1) +11 21.06.13 916 62 16쪽
157 2-142. 올라서는 자 (3) +14 21.06.06 816 64 15쪽
156 2-141. 올라서는 자 (2) +6 21.05.30 800 49 13쪽
155 2-140. 올라서는 자 (1) +6 21.05.23 908 56 14쪽
154 2-139. 여인 (4) +28 21.05.16 972 73 16쪽
153 2-138. 여인 (3) +9 21.05.09 909 55 16쪽
152 2-137. 여인 (2) +11 21.05.02 946 60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