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9. 대비하는 자 (3)
“...... 괜찮으세요?”
아내 안토니아가 깊은 회상에서 깨어난 방크스에게 물었다.
막 잠에서 깬 듯 방크스는 몽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괘, 괜찮소.... 내가 혹시 잠들었소?”
“눈을 좀 깊게 감으시긴 했죠.... 많이 피곤하셨나 보네요.”
“별로 안 피곤하오.”
통하지도 않을 거짓말. 허나, 어쩔 수 없었다.
아들을 셋이나 보고 더 이상 빈말로도 젊다고 할 수 없는 나이였지만, 그럼에도 방크스는 처음 아내를 만났을 때처럼 강한 척 허세를 떨 수밖에 없었다.
나약한 모습을 보여도 아내는 자신을 사랑할 테지만, 이는 본능과 같은 거였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강한 척하고 싶어 하는 남자의 어리석은 본능.
물론 현명한 안토니아는 이 어리석은 거짓말에 넘어가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따뜻하게 감싸줄 뿐이었다.
“예, 당신께선 이 정도로 피곤할 리 없죠. 성실과 근면함은 우즈리스 가문의 무기이고, 당신은 그 무기를 가장 강하게 물려받았으니까요. 그래도 아이들이 올 때까지 한숨 주무시는 건 어떻겠어요?”
“부인.... 난 정말 괜찮소.”
“알아요. 괜찮으신 거. 그저 제가 원해서 그런 거예요. 거기다 생각해보세요. 아이들이 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르는데, 한숨 눈 붙이는 것도 솔직히 나쁘지 않잖아요? 전 오늘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랫동안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여보.”
안토니아는 마치 뿔이 난 세 살 아이를 달래듯 정성스럽게 말했다.
아이를 달래주되 아이의 치기 어린 자존심이 다치지 않게.
문득, 방크스는 나이를 먹으면 아이처럼 된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와 함께 지금 부리고 있는 작은 고집마저 어리석게 느껴졌다.
도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건지. 이미 마음먹지 않았는가?
“듣고 보니 틀린 말 같지 않구려. 충분히 쉴 줄도 알아야지.”
“물론요.”
“.... 그럼, 아이들이 오기 전에 깨워줄 수 있소? 같이 먹을 만찬 준비도-”
“-제가 맡도록 하죠. 약속할게요. 결코, 실망하게 하지 않도록요.”
안토니아의 부탁에 결국 방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침실로 가 한숨 눈을 붙였다.
아내에게 일을 떠넘긴 게 찝찝하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육체는 정신은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에 크나큰 기쁨을 느꼈다.
타르처럼 온몸에 쌓여있던 끈적이는 피로는 조금씩 녹아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기분이 들었으며, 몸과 정신은 점차 가벼워졌다.
그 상태로 방크스는 점차 정신을 잃으며,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 보. 여보. 여보!”
방크스가 눈을 떴을 때는 늦은 오후 시간 때로 황금빛 저녁노을이 지평선 너머 땅 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방크스는 창피하게도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게으름뱅이처럼 간신히 몸을 일으킬 뿐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볼썽사납게 하품까지 했다.
“하아아아.... 내가 늦게 일어난 거요?”
“설마요. 이제 슬슬 씻으시고 일어나면 시간이 딱 맞아요.”
아내의 말에 방크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들에게 이런 한심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니 천만다행이었다.
“혹시 안 좋은 꿈 꾸셨나요?”
“안 좋은 꿈? 그게 무슨 말이오?”
“아뇨, 아니면 됐고요. 미간을 찌푸린 채 알 수 없는 말로 웅얼거리셔서 혹시 악몽을 꾸셨나 해서요.”
아내의 말에 방크스는 자신이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해보려고 했다. 악몽을 꿨나? 뭐, 그럴지도.... 붉은 방패에서 시리온과 헤어진 후 매일같이 가문과 가족,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느라 간혹 악몽에 시달리곤 했으니.
허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았다. 악몽을 꾼 것 치고는 어째 푹 잤기 때문이었다.
“잘..... 모르겠소. 무슨 꿈을 꿨는지.”
“뭐, 그러실 수도 있죠. 괜찮으시다면 이제 일어나셔서 준비해 주시겠어요? 곧 우리 사랑하는 아이들이 오니까요.”
“부인의 명을 따르겠소. 늦지 않게 준비하리라.”
“감사해요.”
안토니아는 그대로 방크스의 뺨에 키스한 후 나가보았다.
방크스는 뺨에 느껴지는 사랑의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일어났다.
아무래도 아내의 말을 따른 것은 여러모로 훌륭한 생각이었다.
아직도 안토니아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일을 떠넘긴 게 약간 창피했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기력이 돌아온 것도 사실이었다.
10년은 젊어진 기분과 같은 말도 안 되는 기분은 아니었으나, 몸은 한결 가볍고, 머리고 시원하고 가벼웠다.
체력도 상당히 회복해 밤늦게까지 아들들도 대화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이는 중요한 거였다.
독립한 두 아들을 부른 것은 비단 가족과의 친목을 다지기 위해서만이 아니었으니, 그보다 더 무겁고 진지한 이유가 있었다.
다름 아닌 가문의 미래와 안녕이 달린.
그 순간 방크스는 아까 전 꿨던 꿈이 무엇인지 떠올랐다.
그 꿈은 다름 아닌 아버지에 대한 꿈이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가문과 가문의 재산을 지키라는 아버지의 유언.
“아버지....”
방크스는 저도 모르게 아버지를 읊조렸다.
“주인님. 도련님들께서 오셨습니다.”
방크스가 목욕을 마치고 몸단장을 끝냈을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두 아들놈이 왔다.
“아버지.”
첫 번째로 들어온 이는 첫째인 프리미스였다. 프리미스 우즈리스.
장남이라 그런지 방크스 자신을 가장 많이 닮았는데, 이는 애석한 부분이었다.
평균에 약간 못 미치는 키, 매력 없는 허연 피부,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격.
방크스는 정말 미안할 따름이었다. 이왕이면 아름다운 제 어미를 닮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외모뿐 아니라 성격과 능력 역시 똑같이 물려줘 은행업에 관해서는 방크스도 인정할 정도로 잘 수행하고 있다는 거였다.
아마, 몇 년만 더 경험을 쌓으면 가업을 그냥 물려줘도 될 정도로.
형제들 중 유일하게 결혼한 이 아이는 현재 탐블스 반도와 조각난 땅 가운데에서 두 지역의 가문 사업을 관리 중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늘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뵙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장남답게 그는 누구보다 예로 부모를 대했다.
방크스는 기특한 장남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별일 없다. 그리고 오지 말라고 한 건 나고. 매주 보내주는 편지만으로 나와 네 어미는 충분했다.”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래. 여하튼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귀여운 손자랑 며늘아기는 잘 지내지?”
“물론입니다.”
서로 너무나도 닮은 두 부자가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눌 때, 제3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같은 우즈리스 가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경박.... 아니, 유쾌하고 감정적이었다.
“와..... 같이 들어왔는데, 아버지는 내가 안 보이시나 봅니다? 이 집은 늘 형만 이뻐해. 난 바다 건너에서 왔는데... 와.....”
목소리의 주인은 차남이 세쿠디우스 우즈리스였다.
탐블스 반도와 조각난 땅 사이에서 근무하는 형과 달리 이 아이는 바다 건너 이국의 땅인 히드라 반도에서 외가와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비록 차남이긴 했지만, 형과 달리 어미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아 우즈리스 가문에서도 보기 드문 장신의 미남이었다.
우즈리스 가문의 허연 피부는 큰 키와 골격 탓에 나름대로 매력적이었고,
머리카락과 얼굴은 어미의 것을 꼭 빼닮아 잘생긴 것을 넘어 아름다워 보일 지경이었다. 성격 역시 유쾌하고 매력적이었다.
비록, 가문의 조심성은 덜 물려받아 때때로 지나칠 정도로 과감했지만, 사교성이 높고 업무 능력도 탁월해 이 아이가 파견된 후 히드라 반도에서 리브라 은행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그런 탓인지, 공화국은 물론, 히드라 반도에서도 적잖은 혼사가 들어올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참으로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그럼에도 이 아이는 늘 자신이 가족들 사이에서 소외당한다고 불평을 했다. 뭐, 반은 농담이었지만.
“정말 실망입니다. 아버지. 전 바다 건너 무덥고, 땀내 나는 곳에서 공용어도 못하는 야만인들을 상대하며 고생하는데, 형만 안아주시고 전 본척만척 하시는군요. 이러면 울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설마 아버님께서 형만 이뻐할 리가 있니?”
안토니아는 자신을 가장 닮은 아들은 부드럽게 안아주며 달래줬다.
그녀는 장남 차남 삼남 아들 모두를 잘 다루는 진정한 어머니였지만, 그중 차남을 가장 잘 다뤘는데, 그 탓인지 둘째 역시 안토니아에겐 별달리 저항하거나 투정 부리지 못했다.
아내가 둘째를 달랠 때 방크스가 말했다.
“미안하구나. 세디스(세쿠디우스의 애칭) 결코, 널 못 본 게 아니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 거라. 네가 바다 건너 이국땅에서 얼마나 고생하는지 처남들에게 들어 알고 있다. 늘 네가 자랑스럽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는지, 둘째인 세쿠디우스는 겸연쩍은 듯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뭐.... 그냥 해본 말입니다. 그리 반응하니, 좀 민망하네요.... 히드라 반도도 뭐 꽤 살만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바다 건너오기 힘들었지? 일단, 다 같이 식사부터 하자꾸나.”
방크스의 제안대로 오랜만에 모인 가족은 다 같이 식사를 하러 갔다. 연회장에 인원수에 맞춰 길스 와상이 놓여 있었다.
자리에 앉기 전 둘째 세쿠디우스가 형인 프리미스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말을 걸었다.
“그건 그렇고 형수님은 왜 안 데려왔어? 심지어 조카님도. 그러고 보니 막내 놈도 안 보이네? 날 불러서 오늘 다 같이 모이는 날인 줄 알았는데, 다들 어디 있는 거야?”
동생이 형에게 보이는 태도로 다소 무례할지도 몰랐지만, 프리미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신의 축복인지 방스크의 세 아들은 모두 적잖은 나이 차가 남에도 사이가 좋았기 때문이다.
결코 빈말이나 과장이 아니었는데, 그 덕분에 아들들을 따로 근무지를 파견할 수 있었다.
방크스는 이 사실에 다시 한번 신들께 감사를 올렸다.
“글쎄, 그건-”
“-내가 그리 명했기 때문이다.”
방크스가 끼어들며 말했다
“아버지께서요?”
“그래. 물론 나 역시 며늘아기도 귀여운 손자도, 칼리지에서 공부 중인 너희 동생도 부르고 싶었지만, 꾹 참고 너희만 불렀다.”
그 말에 미소를 짓고 있던 두 아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현재 가문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구성원은 가주인 방크스와 성인이 된 이 두 아들뿐.
그런 그들만 부른 것은 결코 가족 간의 정을 다지기 위한 것만이 아닌 걸 알았다.
하긴, 이 둘도 우즈리스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니.
지나칠 정도로 형에게 엉겨 붙던 둘째는 팔을 내리더니, 자세를 고치며 물었다. 제법 은행가티가 났다.
“음...... 무슨 일로 저희를 부르신 건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아버지. 가만 생각해 보니. 이런 식으로 만나기 적당한 때는 아닌 거 같은데.”
방크스가 먼저 본론부터 이야기할까 고민하는 그때, 작지만 선명하고 부드럽지만 단호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짝-!
소리가 난 방향으로 세 부자가 고개를 돌리자 아내이자 어머니인 안토니아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우선 식사부터 하고 가족 간의 밀린 이야기부터 나누도록 하는 건 어떨까요. 아내이자, 어머니 우즈리스 가문의 안주인으로 이건 절대 양보 못 하겠는데?”
세 부자는 눈을 마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이 집안의 여신이 하는 말인데, 그 누가 토를 달 수 있겠는가?
- 작가의말
읽어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일요일 잘 보내십시오.
나무젓가락 님, 스트롱맨박 님. 응원 감사합니다. 보다 나은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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