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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커피 님의 서재입니다.

도시 던전3: 까마귀와 뱀들의 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노란커피
작품등록일 :
2021.01.25 01:00
최근연재일 :
2021.04.30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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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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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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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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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42. 2분의 키스

DUMMY

벤자민은 폴켓 가문의 저택 뒤쪽 정원 나무 그늘 아래 서 있었다.


혹시 몰라 겉옷에 숨겨놓은 마법 지팡이를 헐겁게 풀어놨는데, 다행히 기우에 불과했다.


좀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큰 누님인 앤드리가 나온 것이다.


벤자민이 부탁했던 대로 수행원 하나 없이.


“베니...”


“아, 누님.”


벤자민은 미소지어 보였지만, 사실 그냥 웃을 수 없었다. 누님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았기에.


안생은 창백했으며, 눈은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탁해져 있었다. 어깨는 소심하게 움츠러들었으며, 다리는 당장 도망치려고 했다.


그녀의 약해진 모습에 벤자민은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기, 베니... 난-”


“-날씨가 좋네.”


“응?”


“날씨가 좋다고. 산책하기 딱 좋을 정도로. 미안한데, 같이 산책 좀 해줄래? 한... 57분 동안?”



***



자로 잰 듯 잘 다듬어진 나무 주변. 벤자민과 앤드리는 같이 걸었다. 이렇게 같이 걷는 것이 얼마만 인지 모를 정도였다.


“이렇게 같이 걷는 게 얼마 만이지?”


벤자민의 질문에 앤드리가 그녀답지 않게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 오래됐지?”


“아.... 하긴. 어릴 때는 참 같이 잘 놀았는데. 같이 술래잡기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고, 목욕이나, 의사 놀이도 했지. 나중에 작은아버지가 훼방을 놓긴 했지만.”


아름다운 추억이 떠올랐는지, 앤드리가 얼굴이 빨개졌다.


“그 이야기는....”


“아, 왜? 나도 좋았어. 새로운 취향이 생겼거든... 그런 날이 영원할 것 같았지.”


앤드리가 침묵했다. 차마 변명조차 못 하는 듯. 벤자민은 계속해 말을 이었다.


“그 외에도 누님은 내게 공부도 가르쳐줬지. 아델라 누님이랑 번갈아 가면서. 내 학년 수업뿐 아니라, 고학년 수업도 말이야.”


실로, 그랬다. 필기와 이론밖에 내세울 게 없던 벤자민은 그거라도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앤드리나 아델라에게 공부를 배웠다. 어렵긴 했지만, 꽤 괜찮은 시간이었다. 고학년 수업 자체가 재밌을 뿐 아니라 누님들을 독점할 수 있었으니.


앤드리가 대답했다.


“... 그리고 넌 그걸로 앤젤라나, 앤을 도와줬지. 덕분에 걔들은 낙제를 면했고.”


“별거 아니야. 누님이 날 잘 가르쳐준 덕분이지..”


“... 또, 넌 앤의 난독증도 고칠 수 있게 도와줬지. 하루종일 곁에 붙어서 동화책이나, 소설책을 읽어줘서.”


“아, 그건, 나도 좋은 시간이었는데. 책 읽어줄 때는 등 뒤에서 안은 채 몇 시간씩 있을 수 있었거든. 온기, 체취, 목소리.... 모든 게 행복했어. 특히, ‘꼬마 마법사 안나’ 읽을 때는 푹 빠지는 게 귀엽더라고... 근데, 이해가 안 돼.”


“뭐가?”


“마지막에 자매 둘이 진실한 사랑의 키스를 나눠 저주를 푸는데, 왜 그게 권장 도서지? 우리나라는 좀 검열할 필요성이 있는 거 같아. 너무 개방적이야.”


앤드리가 피식 웃었다. 거의 처음으로 진짜 웃는 거 같았다.


갑자기 터져 나온 웃음이 감당이 안 되는지 앤드리의 키득키득거리더니 이윽고 소리 내 크게 웃었고, 뒤이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가 축 처진 채 말했다.


“널 늘 우릴 도와주고, 위로해 줬지. 웃게 해 줬고. 그런데, 우린-”


“-잠깐.”


벤자민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마치 할 말이 있다는 듯.


“누님. 미안한데, 나 먼저 이야기 좀 해도 될까?”


“... 이야기?”


“응. 추수감사절이잖아? 서로 막말하고 주먹다짐으로 끝나는 우리의 아름다운 명절 말이야. 미안하지만, 나 먼저 말하고 싶은데, 막내한테 양보 좀 해주겠어?”


앤드리는 심호흡을 하고는 눈가를 닦은 다음 바로 섰다. 각오를 다진 표정이었다.


“응. 말해.”


“음... 뭐부터 이야기할까? 누님은 혹시 알아? 내가 누님들이 한때 내 소유물이라고 생각한 적 있는 거?”


앤드리가 고개를 갸웃댔다.


“아니... 넌 그런 적-”


“-있었어. 물론, 대놓고 티 낸 적은 없지만. 있었어. 시간이 좀 흐르고 차근차근 생각해 보니까. 그런 적이 있더라고. 왜? 있잖아? 안 좋은 일을 겪으면, 초콜릿을 먹어 자신에게 보상을 주는 거..... 내가 누님들을 그런 초콜릿으로 생각한 거 같아. 내 인생의 초콜릿.”


앤드리는 침묵하고, 벤자민의 한 박자 쉬었다. 자기 말을 음미하듯.


“지금 생각하면 너무 창피한 일이지. 하지만, 그랬던 거 같아. 난 마법을 못 쓰는 대가로, 누님들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믿었어. 그게 공평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베니. 그건-”


벤자민이 손을 내밀며 앤드리의 말을 막았다. 단호한 눈빛 때문에 그녀가 멈칫했다.


“아아. 미안하지만, 일단, 내 이야기부터 들어줘. 나도 쉽게 말하는 게 아니거든... 어쨌건 난 그게 내 권리라고 생각했어. 누님들을 마치 물건처럼 생각했지. 아닌 척했지만, 속마음을 하나씩 까보면 결국 그게 진심이었어.”


앤드리는 뭔가 말하고자 했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벤자민이 계속 말했다.


“그래서 누님들이 잘난 남자들과 어울릴 때마다 바보처럼 굴었어. 내 것을 빼앗긴다는 생각에... 못났지. 특히, 누님한테 그랬어. 몰딘 선배와 사귈 때. 매일 둘이 헤어지게 해달라고 신께 빌었지.... 마법을 쓰게 해달라고 빌었을 때 이후로는 기도드린 적이 없는데 말이야. 그러다 문득 화가 나더라.”


“화?”


“응, 어이없는 이야기지만. 화가 났어. 내 물건을 빼앗겼다는 사실에, 누님이 날 배신했다는 사실에. 실상은 빼앗긴 것도 없고, 배신당한 것도 없는데. 나 혼자 화가 난 거지. 왜냐면 누님들은 내 것이 아닌 스스로의 주인인데.

그런데, 난 이것을 인정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이 사실을 입 밖에 낼 용기도 없었지.... 그러다 누님이 결혼했고.”


벤자민이 말하다 말고 한숨을 뱉었다. 그 공기에는 정말 많은 감정이 농축된 거 같았다.


“내 말의 요점인 결국.... 나도 누님에게 죄를 지었다는 거야. 누님들을 나와 같이 생각하지 않고, 내 중심으로 대했으니까. 물건처럼. 아주 저열하지.”


앤드리가 대답했다.


“.... 아냐, 애당초 원인을 따지자면 나한테, 우리한테 있어.”


“그런 식으로 따지면 모든 건 날 낳으신 내 어머니에게 있지. 누님이 말했지? 누님에겐 누님의 업이 있다고, 그럼, 이건 내 업이야. 가져가려고 하지 마.”


앤드리가 힘겨워하며 말했다.


“... 우리 역시 너에게 죄를 지었어.”


“좋네. 그럼, 뻔뻔하지만, 그냥 비긴 셈 치면 어떨까?”


어린 시절 저질렀던 죄를 넘어가 주겠다는 말에 앤드리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잠시 후, 그녀가 품 안에서 어렵사리 한 약병을 꺼냈다. 홈이 파인 파란색 약병. 그걸 벤자민에게 내밀었다.


“먹어줘.”


벤자민이 약병을 건네받았다.


“뭔지 물어봐도 될까?”


“해독제야....”


“사랑의 묘약 해독제?”


“응, 내가 연구해 만든... 시장에 판매되는 사랑의 묘약은 모두 해독했어. 마셔줘. 부탁이야. 풀릴 거야. 설사 안 풀린다 해도 내가 반드시 풀어줄 테니까....”


대답을 들은 벤자민은 약병을 열더니, 그대로 바닥에 쏟아버렸다.


깜짝 놀라며 앤드리가 물었다.


“뭐, 하는 거야?!”


“누님에게 미안하지만, 난 딱히 이 감정을 없애고 싶지 않거든.”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넌 이해하지 못해.”


“아니, 내 지성은 멀쩡해. 다 이해하고 있어. 누님들이 내게 약을 먹이고, 난 누님을 사랑하고, 누님들도 날 사랑해줬지.”


너무 당당한 말투에 앤드리가 뭐라 말을 못 했다.


“미안하지만, 누님... 난 내 감정이 좋아.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난 이 감정이 좋아. 날 버티게 해 주거든. 재능만을 요구하는 미친 집구석과 죽은 어머니만 붙잡고 사는 아버지, 던전에서의 고단한 삶, 과도한 업무, 마법사의 위협, 불확실한 미래...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날 버티게 해 줘. 미안하지만, 난 이 감정이 좋아.”


“그건 우리가 만든 가짜야...”


“내가 결정할 문제지. 난 그냥 이게 진짜라고 생각할래. 그러고 싶어. 그러니... 이제부터 누님은 나한테 안 미안해해도 되고, 책임감도 안 느껴도 돼. 내가 선택한 거야. 그러니 빼앗지 마.”


벤자민의 그 말에 앤드리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미, 미안... 갑자기 눈물이... 그냥 나와. 미안해. 멈추지 않아.”


벤자민이 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그리곤 말했다.


“이제 2분 남았네. 키스해도 될까?”


앤드리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벤자민은 그녀를 잡아당겨 그녀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보겠다. 정확히 2분 동안.



***



추수감사절이 끝난 나른한 아침. 다행히, 롭 앤 포터 법률 사무소 직원들은 모두 출근을 마쳤다.


비록, 긴 연휴로 인한 후유증이 안 풀리긴 했지만 말이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 제레미, 괜찮나?”


“말 타고 본가로 잠시 갔다가 어제 새벽에 간신히 도착했습니다. 좀 많이 피곤하네요.”


“그런 것 치고는 기분은 좋아 보이는군.”


“예, 기분은 좋습니다. 안 그럴 이유가 뭐겠어요? 절 무시하던 형제들한테 제 성공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큰형은 여전히 아버지가 물려준 조그마한 땅을 관리 중이고, 둘째 형과 셋째 형은 큰 형한테 아부나 하고 있죠. 그에 반해 전 맨손으로 시작해 이 나라 가장 잘 나가는 법률 사무소 간부가 됐고요. 헤어질 때 '잘 있어라! 좆만이들’이라고 해줬습니다.”


“걱정이군. 자네가 마스터를 닮아가니.”


“하하, 그건 감봉당할 언사인데요?”


“괜찮아. 보너스로 메꾸고도 남으니.”


“그럼, 앨빈은 잘 보냈어요?”


“나? 뭐. 잘 보냈지. 솔직히 고민 중이야. 아예, 이쪽으로 터를 잡을까 해.”


“예?”


“나와 내 아내는 던전 출신이지 않나? 처음에는 여기 적응 못 했는데, 슬슬 적응하는 거 같아서. 애들 교육을 생각하면, 아예 이쪽으로 옮기는 것도 방법일 거 같거든.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지금, 총각한테 애들 교육을 묻는 겁니까? 차라리 해럴드에게 물어보죠. 해럴드? 해럴드? 일어나 보세요.”


제레미가 옆에서 졸고 있는 해럴드를 툭툭 건드렸다.


“끄으으응... 왜 깨우나?”


“첫 번째, 근무시간이니까요. 두 번째, 앨빈이 애들 교육 때문에 이쪽으로 아예 옮길까 고민 중이라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 왜 그걸 나한테 묻나? 내키는 대로 해.”


“던전 출신이라고 무시당할까 봐 그러오. 솔직히 그런 게 없잖아 있지 않소? 슬슬 애들이 학교 갈 시기라, 결정해야 하오. 던전으로 다시 보낼지. 여기 새로이 뿌리내리게 할지.”


“솔직히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나도 애를 안 키워 봐서... 머리가 깨질 거 같구만.”


숙취 탓인지 해럴드가 머리를 쥐었다. 제레미가 차가운 물을 가져다주며 물었다.


“도대체 추수감사절을 어떻게 보냈길래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겁니까?”


“... 친구랑 술 좀 마셨지.”


“해럴드 씨가 친구가 있었어요?”


“.... 자넨 정말 마스터를 닮아가는군. 때려주고 싶어. 그런데 마스터는?”


“아직, 안 오셨소. 그러니 우리가 여기서 수다 떨고 있는 거지.”


제레미가 말했다.


“뭐, 요즘은 익숙해졌지만요... 하지만 동시에 무섭습니다. 마스터가 늦을 때마다 뭐 하나씩 들고 오던데.”


“오, 꽤 감 좋은데?”


갑자기 들린 목소리. 모두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 오랜만에 다크서클이 낀 벤자민이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두통으로 괴로워하는 존이 있었고. 그도 숙취인 듯했다.


“마스터?”


벤자민이 바로 본론을 말했다.


“중요한 회의 시작할 겁니다. 5분 안에 모두 제정신 차리고, 준비 마쳐서 사무실에 올라오세요.”


그렇게 제 할 말만 하면 올라간 그를 보며 제레미, 앨빈, 해럴드가 말했다.


“뭔가 재밌는 일이 또 있을 거 같은데요?”


“아니면, 더 미친 짓이나.”


“혹은 둘 다일 수도 있지.”


그리고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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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52. 후계자 +35 21.03.15 756 61 13쪽
52 51. 질문 +12 21.03.14 724 50 14쪽
51 50. 호출 +16 21.03.13 721 52 13쪽
50 49. 첫번째 자리 +15 21.03.12 747 49 13쪽
49 48. 마법 개혁 위원회 +25 21.03.11 745 51 15쪽
48 47. 분노 +16 21.03.10 731 52 14쪽
47 46. 공개 채용 +20 21.03.09 792 55 17쪽
46 45. 할아버지와 손자 +12 21.03.08 716 52 13쪽
45 44. 책임 +29 21.03.07 734 52 13쪽
44 43. 청사진 +18 21.03.06 749 51 15쪽
» 42. 2분의 키스 +19 21.03.05 750 49 12쪽
42 41. 티내기 +16 21.03.04 732 49 13쪽
41 40. 약 +20 21.03.03 804 53 15쪽
40 39. 명절 +10 21.03.02 808 47 13쪽
39 38. 새로운 일거리 +26 21.03.01 819 53 14쪽
38 37. 교장과 문제아 +17 21.02.28 788 52 13쪽
37 36. 모교 +16 21.02.27 775 61 13쪽
36 35. 진실쟁이 +20 21.02.26 767 61 13쪽
35 34. 마법 개혁 위원회 뭐 그런 거 +14 21.02.25 770 56 13쪽
34 33. 첫 걸음 +14 21.02.24 778 61 13쪽
33 32. 마부 휴잇 +16 21.02.23 786 58 13쪽
32 31. 지나가며 말한 약속 +16 21.02.22 796 54 14쪽
31 30. 정쟁의 서막 +22 21.02.21 811 55 15쪽
30 29. 판 +28 21.02.20 814 49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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