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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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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30,484

작성
18.04.11 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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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59화

DUMMY

갑작스런 노인의 말에 당황한 봄이는 눈동자를 크게 뜨고 상훈을 쳐다보았다. 상훈도 봄이가 보내는 시선을 마주 보다가, 이내 옅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어르신.”


“.....혼자서도 할 수 있다구요.”


봄이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리자 노인은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얼굴로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저 아가씨가 자네한테 신세 진 게 있나?”


“제가 말하긴 뭐하지만, 셀 수도 없을 겁니다.”


봄이의 눈썹이 올라가는 걸 본 상훈이 어깨를 으쓱였다. 봄이는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부정하려 들지는 않았다. 딱히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상훈이 묘하게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이 들자 봄이는 재빨리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내가 지독하게 쌓인 눈길 차도에서 자네들을 처음 봤을 때부터 궁금했던 건데 자네 둘은 도대체 무슨 관계인가?”


의외로 대답하지 않을 것 같던 노인이 그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 노인의 말을 들은 상훈이 봄이에게 눈길을 주다가 팔짱을 꼈다. 그리고는 아직까지도 인파가 빠질 줄 모르게 북적거리는 건물 앞 넓은 공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굳이 말하자면......”


“아무런 관계도 아니죠.”


상훈이 말하려고 숨을 들이쉬는 찰나의 순간 봄이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예상치 못하게 말문이 가로막힌 상훈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지. 아무런 관계도 아닌 건 아니지.”


“그럼 무슨 관곈데요? 얘기해 봐요.”


“도움은 도움대로 받고, 먹을 건 먹을것대로 다 얻어먹기만 하면서도 자기 혼자만 잘난, 일방적인 숙주와 기생충 같은 관계지.”


“약간 거슬리네요.”


봄이와 상훈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약한 전류가 흘렀다. 노인은 그들의 말뜻을 이해 못하겠다는 듯 그저 눈을 멀뚱멀뚱 뜬 채로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잠겨 있던 노인의 입이 움직였다.


“....남매?”


“아닌데요.”


봄이가 즉답하자 상훈이 뒷머리를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노인의 표정이 여러 차례 변하더니 마침내 봄이를 진정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누그러졌다.


“말하기 곤란하면 안 말해도 돼. 딱히 널 들볶아서 캐묻고 싶은 건 아니야. 내 말은 그저...... 요즘 세상에는 보기 힘든 광경이라서. 남매라던가 가족이 아닌 이상 말이야. 물론 그런 경우도 굉장히 드물긴 하지만.”


노인이 무심코 말한 ‘가족’이라는 단어를 들은 봄이의 가슴이 크게 울렸다. 하지만 그러는 게 괴롭지는 않았다. 가족을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 물론 매우 희박한 가능성이었지만 봄이에게는 그마저도 절실했다. 봄이는 예전에 노인이 말했던, 인간은 반드시 의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 때는 솔직히 노인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봄이도 의지할 만한 무언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싶었다.


“일단 추우니까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최근 들어 부쩍 쌀쌀해진 것 같으니까.”


상훈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까딱이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어느새 넓은 공터의 귀퉁이를 가로지른 채로 넓게 펼쳐진 천막이 있었다. 천막의 기둥은 녹이 슬었고 허술했다. 지붕도 천쪼가리들을 내키는 대로 마구 이어붙인 것처럼 조잡했다. 천막의 크기를 보아 개인 숙박용 천막은 아니고 공용 천막 같았다.


봄이는 천막으로 다가가 입구를 확 열어젖혔다. 천장에서는 미처 녹지 못한 고드름 같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천막 내부 중간에는 긴 대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테이블 양 옆에는 나뭇가지나 어디에서 가져온지도 알 수 없는 목재 가구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바깥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공용 천막 내부에도 군중들은 꽤나 많았다.


군중들은 모두 테이블 중간마다 놓인 불 붙은 드럼통 주위에 몰려 있었다. 그들은 모두들 하나같이 몸 전신에 두꺼운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그걸 본 상훈은 천막 한 쪽 귀퉁이에 걸려 있던 망토들을 발견하고 봄이와 노인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들도 자리를 잡고 테이블에 앉았다. 봄이는 천쪼가리 망토를 걸친 다음 불 붙은 드럼통에 빨갛게 튼 손을 녹였다. 불을 쬐던 봄이의 얼굴이 열기로 인해 누렇게 물들었다. 상훈은 그런 봄이를 잠깐 동안 쳐다보고 있다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옆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군중들이 유난히 밀집해 있던 곳이었다. 그들은 항의하는 것 같기도 했고, 싸우는 것 같기도 했다. 봄이가 불을 쬐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에 상훈이 노인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은 뭘 하는 겁니까?”


노인도 봄이와 함께 손을 녹이다가 상훈이 묻자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서 말했다.


“저들이 뭘 하는 거냐고? 아직 모르고 있었나? 지금 세상은 화폐보다 생필품이 더 중요한 세상이 되어버렸어. 그로 인해 화폐의 가치는 점차 낮아져만 갔지. 이제 사람들은 화폐 같은 건 잘 안 써. 이제 사람들과의 거래는 문명이 자리잡기 전 시절처럼 물물교환 위주로 바뀌었어. 원시적인 방법으로 돌아가버린 거지. 그리고 정부도 그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어. 그래서 정책을 하나 내놓았는데, 더 이상 쓰이지 않는 화폐를 조금이라도 돌게 만들려고 통제소 내에 장터를 세웠어. 그리고 그 장터에서는 오직 화폐로만 거래 가능해. 정부 입장에서는 이미 무너져 버린 금융기준을 어떻게 해서든지 붙잡고 싶었던 거야. 어떻게 생각하나? 완전히 바보 같은 짓이지 않나?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집단 단위의 생존보다 개인의 안보가 더 우선시되는 상황인데도 말이야. 물론 상당히 안타까운 상황이기는 하지만 무슨 생각으로 그런 정책을 내놓은 걸까? 당연히 사람들의 원성도 크겠지.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는답시고 완전히 이용 가치가 떨어져 버린 그 종잇조각을 요구하고 있으니. 덕분에 별다른 효과도 없는 정책이 되어버렸어. 가방을 화폐로 가득 채워서 도망친 머저리들은 애초에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테니까.”


봄이는 누렇게 뜬 얼굴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노인의 얼굴 주름이 그 순간만큼은 짙게 내려앉은 것처럼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기운을 띠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노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봄이 자신도 덩달아 기운이 빠지는 듯했다. 봄이는 가만히 앉아 고개를 숙이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거 아나? 나는 이렇게 되어버리기 전의 세상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인류가 하나님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한 걸까? 어쩌면 인류는 오래 전부터 끝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암흑의 길을 걸어오고 있었는지도 몰라. 단 한 평의 빛조차 들지 않는, 설사 빛이 들어오더라도 그 빛조차도 전부 삼켜버릴 암흑만이 도사리고 있는 길 말이야. 몇몇 예언자들은 이 사태를 예언하기도 했어. 하지만 누구도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지. 눈만 감으면 아직도 내 눈 앞에 생생히 떠오르는 것 같아. 깜빡이는 불빛이 사그라들 줄 몰랐던 차도, 그런 차도를 멋지게 가로지르던 자동차들, 벤치에 앉아 웃으며 대화하던 젊은 남녀들, 사람들을 보고 반가워 꼬리를 치던 강아지들........”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노인은 슬픈 눈을 한 채 계속 이어갔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어쩌면 우리들의 운명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걸지도 몰라. 자네들에게는 이 늙은이의 말이 당치도 않게 들리겠지. 아니, 자넨 어쩌면 기억하고 있을 거야. 기억나나? 불빛으로 빽빽이 늘어서서 야경을 이루던 고층 건물들, 그 건물들 너머로 아름답게 걸린 채 밤하늘을 수놓고 있던 별빛들이.......”


봄이는 자신이 깔고 앉은 의자가 마치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사실 봄이는 이렇게 변해버리기 전 세상의 기억은 머릿속에 그다지 남아 있지 않았다. 단지 흩어져버린 예전 기억을 되살릴 수 있을 만한 물건을 보면 이따금씩 그녀의 뇌리에 짧게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이었다. 봄이는 자신의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지만, 과거의 일이 떠오를 때마다 속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런 방식으로 예전 기억이 떠오르는 게 싫었다.


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금껏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주섬주섬 뜯어 놓았다. 상자 안에는 통조림 한 캔과 에너지 바 두 개가 들어 있었다. 300밀리리터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생수병도 있었다.


봄이는 음식들을 입에 넣으며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봄이가 알고 있던 이야기가 오갔고, 전혀 모르고 있던 이야기도 오르내렸다. 그녀는 남의 말을 가만히 듣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이야기에는 어딘가 신기한 매력이 있었다.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이야기에 빨려들었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이윽고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노인은 실컷 떠들다가 기운이 빠졌는지 먼저 천막으로 돌아가 버렸다. 노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함께 대화하던 상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봄이는 그가 일어나고 나서도 한참 후에 일어났다.


봄이는 대충 걸친 망토를 부여잡고 공용 천막을 나섰다. 봄이는 그날따라 유난히 바깥 순찰을 도는 경찰관들이 많아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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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101화 20.12.16 64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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