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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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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182
글자수 :
530,484

작성
18.02.03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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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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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44화

DUMMY

“아저씨, 저 사람한테서 떨어져요!”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봄이의 간절한 외침은 마치 먼지가 공기 중으로 흩어지듯이 허공에 있던 알 수 없는 벽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상훈은 피범벅이 된 손을 움켜잡고 있는 정 씨를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고, 그의 표정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을 바라보는 표정이 아니었다. 어쩌면 자각할 수 없는 외부 요인에 의한 압박감이 그의 목소리를 강제로 짓누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마치 혼이 팔려나간 듯이 멍하니 서 있는 상훈의 팔을 잡아끌고 한순간이라도 더 빨리 정 씨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봄이는 두 남자들이 서 있던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정 씨가 그들을 향해 한 발자국 내딛었다. 그의 오른손에 들려 있던 칼이 핏빛 반사광을 내뿜었다. 얼어붙은 마네킹 같았던 상훈의 다리도 조금씩 움직였다. 마치 드리우는 맹수의 그림자에 의한 공포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이끌고 필사적으로 벗어나려는 사냥감의 운명인 것 같았다.


봄이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두 남자의 거리는 가까워져 있었다. 그리고 봄이가 다시 한 번 손을 뻗으려 했을 때, 두 남자의 의지는 이미 충돌하고 난 뒤였다.


“아저씨!”


봄이의 두 번째 외침 역시 그들을 삼켜버릴 듯 조여오는 공기의 무게감에 짓눌려 흩어져 버렸다. 정 씨가 휘두른 첫 번째 공격이 미처 예측하지 못한 상훈의 허벅지에 스쳤다. 두 번째로 공격하기 위해 그가 칼을 치켜들었을 때, 피묻은 칼을 움켜쥔 그의 손목과 팔뚝은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상훈에 의해 가로막혔다. 상훈의 입은 무슨 말을 하고 싶기라도 한 듯 열렸지만 곧 허벅지에 전해지는 고통을 악물기 위해 다물렸다. 피가 묻은 칼을 마주 잡고 안간힘을 쓰던 그들의 중심 감각은 일정하지 않았다. 이윽고 상훈의 등은 근처 담벼락에 몰려 부딪혀 버렸다.


그 믿기지 않는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쳐다보고 있던 봄이의 심장이 바깥으로 터져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아까 전 자신을 믿어주지 않던 상훈에게 쏘아붙였던 말조차 모두 잊은 채로 봄이는 재빠르게 치마폭에서 권총을 빼들어 그를 겨누며 소리쳤다.


“그에게서 떨어져!”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권총을 뽑아들기는 했지만 봄이는 선뜻 방아쇠를 당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봄이의 손과 두 다리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또 다시 살인을 저지른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무서울 정도로 그녀의 머릿속을 조여들었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주저하는 이유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권총의 가늠쇠는 목표와 겹쳐지기 힘들 만큼 어긋나 있었다. 봄이도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동시에 이 정도의 혼란감에 짓눌린 채로 사격을 할 수는 없다는 사실 역시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봄이는 머릿속이 하얘지고 정상적인 호흡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호흡량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봄이의 동공 역시 이마에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내리는 식은땀과 함께 커졌다. 그녀의 손가락은 더 이상 그녀의 통제를 거부하기라도 하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미칠 듯이 그녀의 머릿속을 무겁게 짓누르는 혼란 속에서도 매정한 공기의 흐름은 단 1초의 시간조차도 멈춰 주지 않았다. 더 이상 고민할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에 이끌린 것이었을까? 봄이는 권총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먹잇감의 운명을 서서히 옥죄고 있던 맹수를 향해 온 몸으로 달려들었다. 봄이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대로 온 몸의 체중을 실어 뛰어들자 정 씨의 중심 감각은 급격히 무너져 내렸고, 두 사람은 함께 눈길 한복판에 꼴사납게 엎어져 버렸다. 맹수의 손아귀에서 피 묻은 칼이 떨어져 나갔고, 튕겨져 나간 칼은 두 사람의 훨씬 먼 곳에 쇳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봄이는 온 몸에 눈이 녹은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로 중심을 잃고 넘어진 맹수의 위에 올라타 그의 얼굴을 힘껏 주먹으로 가격했다.


봄이의 작은 고사리 같은 주먹이 한 번 더 치켜올려졌을 때, 봄이는 아래에서 뻗어나온 팔에 의해 멱살째로 잡혀 그의 머리 위로 넘겨졌다. 봄이는 엄청난 힘에 의해 길바닥에 내팽개져졌고, 그녀의 몸은 흙탕물이 흥건한 바닥에 몇 번이고 구른 다음에야 멈춰졌다. 봄이의 후드 재킷은 물론이고 와이셔츠 속에까지 미칠 정도로 차가운 얼음물이 스며들어왔다. 혈관 마디 속까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봄이는 입 속에 들어간 흙먼지를 침과 함께 뱉어내고 나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봄이보다 먼저 일어난 상태였다. 봄이는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가 다가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봄이의 얼굴을 가차없이 발로 걷어차 버렸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뇌속까지 전해져오는 엄청난 충격에 봄이는 눈앞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그는 힘없이 나동그라진 봄이에게서 시선을 치우고 하수구 옆에 떨어져 있던 피묻은 칼을 주워들었다. 그가 상훈에게로 눈을 돌렸을 때는 이미 상훈은 그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당신, 움직이지 마.”


그는 순순히 따랐다. 하지만 손에 든 피묻은 칼을 놓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상훈은 그의 걷혀진 소매와 칼자국으로 피범벅이 된 왼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방금 전과는 다르게, 어딘가 안타깝다는 듯한 말투로 다시 말했다.


“........꼭 이런 방법밖에는 없었던 건가?”


그의 걷혀진 소매로 인해 드러난 팔뚝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고, 피가 흐를 정도로 긁어댄 듯한 손톱 자국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팔뚝을 머쓱한 얼굴로 한 번 살펴보고는 상훈의 눈을 마주보았다.


“.......난 이제 틀렸소. 쏘시오.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지금 날 쏘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요.”


“꼭 이렇게 해야만 했냐고 묻고 있잖아!”


그렇게 소리치는 상훈의 눈동자는 확고했다. 단단히 지면에 고정된 그의 다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인간이란 참 짓궂은 동물이오. 그렇지 않소? 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뭉치고, 뭉친 이유인 그 같은 목표 때문에 배신하지요. 이제는 당신도 깨닫지 않았소? 사람들 사이의 신뢰와 배신은 고작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오. 어서 쏘시오. 뭘 망설이시오? 이미 내 몸은 흑사병이 반쯤 집어삼켰소. 아직까지는 걸을 수는 있다만, 그게 얼마나 갈지 역시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동물과 같은 인간의 본질로 돌아가라는 말이오. 지금 세상에서 모든 인간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을 집어삼키며 살아가는 것처럼, 당신의 생존을 위해 내 머리를 쏴버리란 말이오. 생태계가 생겨난 이후로, 지금껏 늘 그래왔듯이......”


“그 주둥아리 닥치고 빨리 그 칼 내려놔!”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오. 아끼던 모든 것을, 지켜야 했던 모든 것을 잃고 난 사람은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다고들 하지. 끔찍한 고통을 눈 앞에서 겪고 나서, 죽음이 코 앞까지 다가온 사람에게 더 이상 무엇이 두려울 것 같소? 죽음을 앞둔 내가 그깟 총구를 무서워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어서 쏘시오. 내가 제 정신으로 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요. 빨리 날 이 미칠 듯한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켜 달란 말이오!”


상훈은 말없이 총구를 더 세게 치켜들 뿐이었다. 상훈이 피가 흐르는 허벅지 상처를 움켜쥐자 그가 상처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에게도 죽음의 모래시계는 이미 엎어졌소. 내 피가 묻은 칼로 인해 상처가 났으니 말이오. 더 늦기 전에 어서 통제소를 찾아가시오. 저 불쌍한 아이를 데리고 말이오. 나는 이미 늦었소. 아니, 늦어 버렸어.......”


그는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며 고통스러워 하다가 쓰러져 있는 봄이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칼을 높이 치켜들어 그녀에게로 던지려 했다. 그가 칼을 던지기 위해 팔을 뒤로 젖힘과 함께, 그의 등 뒤에서 온 도시를 울릴 정도로 거대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그 굉음이 건물에 부딪혀 메아리쳐 돌아오자,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떨어뜨렸다.


그는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세상의 한복판에서 잠들었다.


영원히 잠들고 말았다.



- 뒤틀린 희망 - 마침.


작가의말

쿄쿄쿄쿄쿄ㅛ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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