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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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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글자수 :
530,484

작성
18.01.21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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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43火

DUMMY

그들은 눈 덮힌 횡단보도에 남은 희미한 자국을 따라 계속해서 걸어갔다. 봄이는 알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들을 쏟아내며 주절대는 정 씨를 계속해서 경계했다. 그런 그를 언짢아하는 봄이와는 다르게 상훈은 어딘가 홀린 사람처럼 그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 있었다. 어쩔 때는 맞장구를 치기도 했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봄이의 눈에는 그들이 어린애를 재워 놓고 어른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부부 같아 보이기도 했다. 상훈의 표정은 심각한 듯 어두워져 있었고, 정 씨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그의 얼굴 곳곳에 뻗어 있는 핏줄에 흐르고 있던 생혈이 모두 얼어붙어 있는 것 같았다. 봄이는 말없이 뒤에서 그들이 남기는 발자국만을 따라 걸었다. 아니면 자신의 발 밑에 보이는 희미한 타이어 자국을 따라가는 것일지도 몰랐다.


타이어 자국은 계속해서 이어져 있었고, 내려앉은 아스팔트 도로의 지하 차도에까지도 남아 있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양갈래 지하 차도를 따라 걸어갔다. 사실 이것은 문명이 드리운 원래의 21세기 도시였다면 절대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예전 세상에서 봄이가 지금처럼 지하 차도 한가운데에서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걸어가고 있었다면, 경찰서부터 시작해서 지하 차도에까지 빼곡이 늘어선 차량들이 찢어지는 경적을 울리며 그들을 방해했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화난 운전자와 다투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은 인류가 24만 년 동안 일구어낸 문명이라는 단 두 글자와 함께 송두리째 뽑혀 사라져 버렸다.


큰길을 따라 걸어가던 두 사람이 갑자기 멈췄다. 뒤에서 걸어가던 봄이도 그들의 움직임이 멈춘 것을 보고 따라 멈췄다. 두 사람의 행동을 멀리서 지켜보던 봄이가 그들에게 소리쳤다.


“무슨 일이에요?”


봄이는 그렇게 말하고 조금 그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정 씨가 발목을 잡은 채로 주저앉아 있었다. 상훈이 그의 어깨를 잡고 부축해주는 걸 보자 봄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미안해요. 다리가 조금 아파서.”


상훈이 그의 말을 듣고 봄이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제 곧 날이 저뭅니다. 오늘은 근처 적당한 곳에서 쉬고, 내일 이른 아침에 다시 통제소를 찾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상훈이 등을 돌리려는데 정 씨가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 그럴 필요 없소.”


정 씨는 그렇게 말하며 다리를 감싸쥐고 일어섰다. 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반들거렸다. 특별히 앓는 소리를 냈다거나 했던 건 아니었지만 누가 보기에도 그의 얼굴은 힘겨워 보였다. 그가 이빨을 악물자 잇몸 사이에 비치는 누런 이가 보였다. 마치 어떤 고통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난 괜찮으니까..... 어서 갑시다.”


그의 무거운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벅지에 티타늄을 둘둘 두르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매우 부자연스런 모양새로 절뚝거리며 힘겹게 걸어가는 그를 보고 있던 상훈이 걱정스런 어조로 그의 등 뒤에다 대고 말했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다리는 무리하면 무리할수록 더 악화됩니다. 몇 시간만 쉬었다가 가는 게 더......”


“괜찮다고 하지 않았소!”


가만히 서서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봄이는 난데없이 소리치는 정 씨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재빨리 땅바닥에서 시선을 치우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소리치자마자 그들을 감싸고 있던 공기의 흐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봄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한기에 소름마저 돋을 지경이었다. 정 씨의 얼굴은 그늘에 가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을 똑바로 뜬 채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분명히 봄이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몇 분 동안이나 그들 위에 내려앉아 있던 침묵 속에서 봄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것은 정 씨였다. 그는 얼굴을 그늘 뒤로 돌리며 돌아섰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러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그렇지만 가야 해요. 아니, 가야만 합니다.”


아까 전보다는 진정된 목소리로 정 씨가 이어붙인 말을 듣고도 봄이와 상훈은 벙찐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 씨는 몇 걸음 더 걸어가다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오늘 안에.”


봄이가 상훈의 재킷 소매를 툭툭 건드렸다. 그런 상훈은 봄이의 얼굴을 돌아보고는 말없이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묻겠소. 정말로 통제소의 위치를...... 모릅니까?”


상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씨는 상훈이 동작을 끝내기도 전에 고개를 그에게서 홱 돌렸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알겠소.”


봄이는 한순간에 뒤바뀌어 버린 분위기가 적응되지 않는지 두 사람을 계속해서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들은 말이 없어져 버렸고, 다시 시작되게 된 침묵은 깨지지 않았다. 찬 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했다. 동시에 찬 바람은 얼마 남지 않았던 그들의 메마른 감정마저 전부 흩트려 없애 버렸다.


눈이 녹기 시작했다. 낮아진 눈길을 그들이 한 발자국씩 밟을 때마다 안 그래도 희미했던 타이어 자국이 점점 더 옅어졌다. 그들의 무감정했던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무력하고 절망스러운 얼굴로 바뀌어갔다. 봄이는 일말의 확신조차 없이 무계획적으로 정처 없는 발걸음만을 반복하는 행위에 해탈감을 느꼈다. 봄이의 그 해탈감은 곧 무기력함으로 바뀌었다. 지치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왜 저 정 씨라는 남자 때문에 하룻밤 쉬지도 못한 채로 떠돌아야 하는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그를 째려보며 발산하던 원망감은 짜증으로 바뀌었고, 봄이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짜증은 곧 의지 상실로 이어졌다.


“아저씨! 조금만 쉬었다 가요.”


봄이는 깊은 숨을 내쉬며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헤져 버린 스타킹에 길바닥에 남아있던 눈이 스며들어 다리가 저렸다. 봄이가 그렇게 말했지만 누구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봄이는 은근히 화가 나서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아저씨! 좀만 쉬자구요. 힘들어 죽겠어요!”


그제서야 앞서 가던 상훈이 씩씩거리는 봄이를 돌아보고 봄이에게로 걸어왔다. 하지만 정 씨는 앞을 향해 걸어가는 도중 그대로 걸음만을 멈춰섰을 뿐이었다. 상훈이 그녀에게로 걸어와서 허리를 숙인 채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조금만 쉬어요. 진짜 나 이러다가 발목 삐겠어요.”


상훈이 봄이를 일으키려 하자 봄이가 마구 몸부림쳤다. 상훈은 그런 봄이를 보고 깊게 한숨을 내쉰 뒤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 봄이에게 내밀었다. 봄이는 물통과 그의 얼굴을 한번씩 힐끗 쳐다보고는 그에게서 물을 낚아채듯이 빼앗아 벌컥벌컥 마셨다.


“저 아저씨는 아까부터 저기 가만히 서서 뭐 한대요?”


봄이가 그렇게 말하며 정 씨를 가리켰다. 그는 봄이와 상훈을 등진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봄이는 그의 움직임을 자세히 보려고 눈을 찡그렸다.


자세히 보니 그의 어깨와 등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마치 그의 몸 속에 있던 모든 관절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불규칙적으로 뒤틀리던 몸의 떨림은 이내 멎어들었다. 상훈이 그를 부축하기 위해 봄이에게서 등을 돌리고 일어났다. 봄이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었다.


순간, 봄이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째서 그랬는지는 자신도 몰랐지만, 어딘가 안 좋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 그에게로 다가가는 상훈을 막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이 역시 이유는 알지 못했다. 가슴 속에서 어떠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슨 감정이었을까, 초조함이었을까?


봄이는 불길한 느낌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봄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봄이는 일어서서 소리쳤다. 크게 소리치자 자신도 자신의 목소리에 깜짝 놀랄 정도였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마치 지금부터 닥칠 위험을 경고하기라도 하듯이.


“아저씨, 거기서 뭐 해요?”


봄이가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그 남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응?”


남자는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고개를 돌렸다. 몸도 같이 돌렸다. 이상하게도 그의 소매는 걷혀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풀려 있었고, 그의 왼 손바닥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칼은 벨트 뒤에 없었다. 그의 오른손에 들려 있었다. 그는 봄이의 말에 대답하려는 듯이 핏기 없는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아니란다.”


“아저씨, 저 사람한테서 떨어져요!”


작가의말

사실 전편 영문제목은 실수가 아닙니다.


정말로요.


정말.


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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