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에 의한 적의
-=애정에 의한 적의=-
하르시아스에게로 돌아가는 길은 조심해야 한다. 둠캐스터 일당이 활개 치던 쪽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레피온은 말의 속도를 늦추고 주변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나아갈 생각이다.
그전에 조용히 다니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는 요정을 정리하기로 했다. 말을 멈추고 말 뒷다리에 묶어둔 가죽 주머니를 꺼내 들고 말한다.
"이제 단념하고 조용히 떠나준다면 널 팔아먹는 대신에 풀어줄 건데, 어때?"
이렇게 회유하는 게 처음은 아니다.
말 뒷다리에 묶고 달린 지 몇 분 안 됐을 때도 풀어줄까 물어봤지만, 요정은 기죽긴 커녕 아주 기세 좋게 악담을 퍼부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많은 기대는 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평화롭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소리가 안 들리게 옷가지에 꽁꽁 싸매서 등짐에 넣은 뒤 하르시아스에게 처분을 물어볼 생각이다.
그래서 가죽 주머니를 들어서 대답을 기다리는데...
"......."
그러나 가죽 주머니 안은 죽은 듯이 조용했다.
'뭐지, 죽은 척?'
레피온은 속임수를 의심했다. 가죽 주머니를 한참 지켜보다가 갑자기 놀라게 해보고, 손가락으로 숨을 쉬는지도 확인해봤지만 아무런 생명반응이 없었다.
상대를 헤칠 생각까지는 없었기에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말 뒷다리에 몇 분 묶어뒀을 때는 더 기가 세지더니, 그게 설마 '초식동물의 화병'이었나!?'
사람들은 흔히 육식동물이 사납고 초식동물이 온순하리라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그 반대다.
사람들이 흔히 접하는 초식동물은 길들여진 가축이다. 그런 온순한 성질로 야생에서 살면 살아남지 못한다.
자연환경에서 초식동물은 성격이 예민해야 사소한 자극에도 잘 도망쳐서 잘 살아남는다.
거기에 체격이 작으면 외부 자극에 더 민감한 면도 있어서, 작은 동물일수록 위기에 몰리면 예민하게 반응하다가 제풀에 죽기도 한다. 그걸 레피온이 살던 곳에선 초식동물의 화병이라고 불렀다.
'그게 요정도 포함하는 이야기였나...!'
레피온은 서둘러 가죽 주머니를 풀어 요정을 꺼내 보았다. 요정은 부드럽긴 했지만 아무런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그저 살로 만든 인형 같았다.
레피온은 후회하며 요정의 호흡이나 심장박동을 확인했다. 너무 작아서인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기에 손바닥에 얹어 귀에 가져대고 뭔가 들리나 집중해보았다.
그러고 있는 사이 요정의 눈이 스르륵 떠졌다. 그때 레피온은 무언가 느껴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여 더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끼아아아아아!!!!"
요정은 고성을 지르고.....
"아아아악!"
놀라서 당황하는 레피온의 귓바퀴를 깨물고는 달아났다. 달아났으니 어쩔 수 없다. 레피온은 얼얼한 귀를 어루만지며 길을 갔다.
말이 앞발을 들며 비명을 지른다.
말의 놀람은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도를 따라 하르시아스에게 돌아와는데 숲이었던 주변 환경이 나아갈수록 흐려지며 일렁이는 회색으로 변하는 것이다. 레피온에겐 너머에 있을 하르시아스를 만나고 싶지만, 말에게는 너무나도 낯설어 무서울 뿐이다.
이번만큼은 레피온도 말을 진정시킬 수 없어 좀 멀찌감치에 말을 묶어놓고 결계 안으로 달려간다.
"누나, 하르시아스 누나! 누나가 말한 것을 가져왔어요."
레피온은 품에서 카드를 꺼냈다. 하르시아스가 미소 지으며 서 있었기에 바로 카드를 꺼냈는데....
'어랏? 두 걸음 걸으면 닿을 줄 알았는데 거리를 잘못 쟀나...?'
레피온은 카드를 손에 든 채 하르시아스에게 몇 발자국 더 걷는다. 그러고 나서야 하르시아스와의 거리가 좁혀진다. 하르시아스는 레피온에게 손을 뻗으며 칭찬했다.
"잘했어, 레피온. 그리고...."
카드가 레피온의 손에서 하르시아스의 손으로 옮겨지려는 순간...
"이 카드는 내가 가져간다!!"
어디선가 요정이 나타나 카드를 낚아채 레피온이 들어온 방향으로 날아 달아났다. 황급히 돌아서려는 레피온을 하르시아스가 잡는다.
"요정은 신경 쓰지 말렴."
하르시아스는 처음부터 레피온이 전해준 카드가 아니라 레피온의 어깨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요정이 이 결계 안을 보게 되었으니 그걸로 됐단다. 카드는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사람을 통해 쓸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
레피온은 하르시아스를 믿는다. 하르시아스는 레피온이 본 가장 뛰어난 사람이니까.
가끔씩 알 수 없는 말을 할 때도 있지만 다 생각이 있을 테니 굳이 질문하지도 않는다. 알아야 할 게 있다면 알려줄 테니까.
하지만 문뜩 궁금한 게 생길 때도 있다. 그러면 레피온은 스스럼없이 질문한다.
"누나는 숲의 여왕이란 사람을 아나요?"
하르시아스는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잘 알지. 아마 세상 그 누구보다도...."
레피온은 하르시아스와 숲의 여왕이 안면이 있다고 생각하고 진지히 물어본다.
"그럼 믿어도 되는 사람인가요? 나중에 힘을 빌려야 할 사람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나중에 힘을 빌려야 할 사람이라면 조금은 눈치를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질문한 것이다. 레피온은 요정이 처음 만났을 때 숲의 여왕을 들먹였던 게 신경 쓰였다.
하르시아스는 레피온에겐 한결같은 미소를 띠고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번만은 어딘가 아파 보인다.
무엇 때문에 하르시아스가 아파서 눈썹을 미세하게 찡그렸는지 지금의 레피온으로서는 알 수 없다.
지금의 하르시아스는 그저 레피온에게 사랑을 담아 대답한다.
"그건 네가 판단해야 한단다, 레피온. 나와 상관없이 너의 문제로서 말이야."
그리고는 덧붙인다.
"나쁘진······. 않을 거야······. 분명히..."
대답을 듣고 무언가 생각을 품게 된 레피온을 보고 하르시아스는 자신이 감정을 감추지 못한 걸 탓하며 씁쓸히 웃었다.
레피온이 하르시아스에게 읽은 건 고통이다. 마치 집을 떠날 때 어머니나 아버지에게서 느낀 것 같은.
"알겠어요. 상황에 따라 현장에서 직접 판단할게요."
레피온의 눈빛은 눈앞에 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따스함과, 그녀의 고통을 유발하는 뭔가에 대한 서늘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엔 뭘 하면 되죠?"
하르시아스는 언제나 차분하고 고요해 보인다. 만난 직후가 특히 무감정해 보인다. 그러나 레피온과 있으면 점점 시선과 목소리에 애정과 따스함이 담긴다. 사랑하는 사람이 앞에 있으니까.
그 시선이 레피온에게는 보상이 되어 그 무엇도 감수할 수 있게 한다. 그 감수할 수 있는 것에는 하르시아스의 시선을 등지고 떠나는 것도 포함된다.
"이리얏!"
레피온은 말을 타고 어디론가 달려 나갔다.
-=늪과 동굴=-
생명체는 매우 섬세한 존재이다.
뇌가 심장을 제어하고, 심장이 피를 몸에 돌리며, 피는 뇌와 심장에 영양분을 준다.
이 순환의 마디 중 하나만 끊어져도 생명은 멸망한다. 이 순환을 끊는데 특화된 도구가 바로 검. 지금 레피온이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데드란 잃어버릴 혈액도 없고, 딱히 장기가 기능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검은 생각 외로 잘 들지 않는다. 그게 당황스럽다.
'출혈도 없고... 찌르기도 소용없나...!?'
외형은 이미 파손된 신체 같아 보는 사람을 겁에 질리게 한다.
용감한 인간은 언데드를 만나도 한번 정도는 공포를 억누르고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무기를 휘둘러본다. 그러다가 지금 레피온처럼 통하지 않으면 겨우 억누른 공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런 공포가 바로 언데드의 무기다.
그런 언데드의 무기가 통하지 않는 때도 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인 어떤 소년처럼. 돌파구를 찾는 데 열중해 겁먹을 틈이 없었다.
'저항감은 있지만, 칼날 자체가 들지 않는 건 아니다...!'
"우워어어어어!"
언데드는 가끔씩 소리를 내며 괴력을 발휘한다. 발성 기관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시체 안에 자리 잡은 사기가 진동하며 내는 소리이다.
심연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포효 소리 역시 사람의 마음속 공포를 폭발시키는 힘이 있었지만, 레피온에겐 의문뿐이다.
'저런 소리는 왜 내는가? 혹시 소리를 낼 때 약해지는 건 아닐까?'
괴성과 함께 언데드가 휘두르는 팔.
레피온이 숙여서 피하니 대신 맞은 나무는 와그작! 하는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그 모습을 본 소년은 곧 이해했다.
저 괴음이 거센 일격의 신호라는 걸. 두 번째 괴성부터는 어렵지 않게 피하면서 2단 연속베기로 언데드의 양팔을 몸통에서 떼어냈다.
언데드는 단단하고 괴력을 발휘하곤 하지만 생명체 특유의 섬세하고 기민한 움직임은 없다.
생물처럼 한 번의 검격으로 살상할 수는 없지만, 머리와 양어깨를 자르고 다리를 살짝 베어 놓으면 아무것도 못하고 꿈틀거리는 못 먹는 살 조각이 될 뿐인 것이다.
"열다섯..."
-오와아아아!!-
안개로 덮인 주변을 울리는 괴음이 한번 들리고, 이어 금속이 살 조각을 가르는 살벌한 서걱거림이 울린 다음....
"스물하나..."
아까보다 좀 더 숨이 찬 소년의 말소리..
이 과정이 소년이 '쉰다섯'을 셀 때까지 반복되고서, 소년 주변에 움직이는 것은 없어졌다.
레피온은 품속에서 카드를 하나 꺼내 들고 늪 앞에 서서 하르시아스가 알려준 주문을 말해보았다.
그러자 늪지의 안개가 레피온의 주변을 소용돌이치며 늪 바닥으로부터 무언가 희미한 빛이 수면 위로 떠 오르더니 레피온의 카드에 담긴다.
하르시아스가 늪에 걸어둔 마법을 카드에 담은 것이다. 하르시아스가 마법을 쓰기 위해 필요한 재료 중 하나이며, 모아와야 할 재료는 앞으로도 많이 남았다.
레피온은 카드를 다시 품 안에 챙기고 잠깐 고민한다. 아까부터 미행자가 있는 것 같은데 못본 척 놔둘지 경고할지 하는 고민이다.
레피온은 일단 경고하기로 했다. 갑자기 뒤를 돌며 칼을 꺼내 상공에 겨눈다.
"또 남의 물건을 손댈 생각 하지 마라. 널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레피온이 칼을 뻗은 방향엔 요정이 날고 있었다. 얼마 전에 만났던 그 요정이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위협이 불쾌해 팔짱을 끼고 말한다.
"너야말로 숲을 파괴하는 짓은 그만두지 그래? 넌 네가 방금 한 일이 뭔지는 알고 있는 거야?"
"마력을 원래 주인에게 가져다주고 있지."
"늪의 괴물들을 가둬두고 있던 마법을 해제했다고! 이젠 여기서 나온 괴물들이 주변에 퍼질 거야.
이 숲에 사는 생명들은 물론이고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도 위협할 거야. 그러다 언젠가는 희생자가 생기겠지.
그걸 넌 책임질 수 있어? 넌 지금 살기 좋던 숲을 파괴하고 있는 거야!"
요정의 맹렬한 비난에 레피온은 냉담하게 대꾸한다.
"아는 게 없는 건 너다."
소용돌이 치던 안개는 옅어져 저무는 태양 빛이 들어오고, 늪은 말라붙어 땅이 되어간다. 그 위로 시체들이 떠올랐지만 다 삭아 뼈만 남은 채고, 곧 뼈마저 무너지며 먼지가 되었다.
그 광경에 요정은 불편해했다. 이러면 자신이 한 비난이 잘못된 게 되니까.
아니나 다를까 레피온은 낮고 무똑똑하고 불쾌감을 겨우 억누른 저기압의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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