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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해 님의 서재입니다.

전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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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해
작품등록일 :
2011.11.10 19:59
최근연재일 :
2015.12.11 00:45
연재수 :
29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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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4,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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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6,673

작성
09.03.0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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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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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전쟁이야기 88 - 후미를 치다

DUMMY

*

산등성이에 오른 철장패는 가장 먼저 부하들의 휴식을 명령했다.

``소변 마려운 걸 참고 있었다면 지금 마갑기에서 내려 적군 앞에서 시원하게 해결하라. 한 시간 동안 휴식하겠다. 잔챙이들이 다가와도 아까운 휴식시간을 놓치지 말고 구경만 해라. 내가 잠시 갖고 놀겠다. 시행하라!"

철장패의 고함은 패왕대에게만 들린 게 아니었다. 세인트 도시를 약탈하던 적군도 들었다. 패왕대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적군의 기사단은 하나였다. 적군의 마갑기에 새겨진 문장이 두 개의 검과 방패가 기하학적으로 새겨진 기사단이었다. 평지에서 산등성이로 오르는 길목을 철장패 혼자 막아서자 어이가 없어 말을 잊었다. 무엇보다 마갑기를 세운 채 몸뚱이만 달랑 내려서 실버머니와 레드머니가 육포를 뜯거나 물통을 기울여 입을 축인 채 낄낄거리며 휴식하자 분노의 눈길를 마구 뿜었다.

코브라기사단과 서유의 수하 천 대가 어쩔 줄 모르고 무리의 대장인 서유와 총사령인 철장패의 얼굴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명령이 없자 패왕대를 대신해 경계를 서려고 휴식하는 장소 주변을 둘러쌓으려 했다.

철장패는 서유를 돌아보았다.

``너희들도 쉬어라. 특히 코브라기사단은 지금 쉬어야 나중에 힘을 쓸 거다."

총사령의 명령에 서유는 부하들에게 휴식할 것을 명령했다. 삼 일 만에 새롭게 받은 수하들을 온전히 휘어잡은 모양이었다. 서유의 명령이 떨어지자 `거인대'라고 스스로 칭하는 마갑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패왕대 곁에 엉덩이를 붙이고 휴식하는 모양새를 냈다.

패왕대처럼 느긋하게까지 긴장을 푼 상태는 아니었다. 이틀 동안의 전투로 잔뜩 독기가 오른 눈매로 가까운 적군을 살폈다. 패왕대의 시끄러운 잡음에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레 빵을 입에 대고 배고픔을 해결했다.

막상, 총사령의 명령을 따라 거인대에게 휴식할 것을 명령한 서유였지만 쉽게 엉덩이가 땅바닥에 닿지 않았다. 그렇다고 총사령을 믿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건 아니었다. 이틀 동안의 전투가 너무 치열했기에 쉽게 휴식하기가 두려웠다. 잠시 총사령이 타고 있는 월령이라는 마갑기의 옆 얼굴을 바라보던 서유는 편안한 마음으로 휴식했다.

패군이 모두 휴식하자 하타곤군의 타래기사단은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오른쪽과 왼쪽으로 가파른 지형이라 기어오르지 못했지만 산등성이로 오르는 정면은 오직 하나의 마갑기만 지켰다. 그 뒤로 수 천의 마갑기가 마갑기에서 내려 휴식했다. 개중에 실력이 낮아 마갑기를 역소환하고 땅바닥에 앉아 쉬는 마갑기사도 보였다. 화려하게 장식된 한 대의 마갑기만 넘어서면 패군의 수많은 마갑기사들은 죽은 목숨처럼 느껴졌다.

주변의 하타곤군은 멀리서 패군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보다 먼저 전공을 세우고 싶었다. 하타곤군의 타래기사단을 이끄는 기사단장과 부단장은 명령을 내리고 말 것도 없이 산등성이로 오르는 길목으로 성큼성큼 오르기 시작했다. 그 뒤를 구십구 대의 마갑기가 쫓았다. 생각과 달리 직접 산등성이로 오르자 길목은 좁았다. 혼자 오르면 편했지만 둘이 같이 걸으면 비좁아 마갑대검을 휘두르기 불편했다. 그래도 혼자 보다는 둘이 안전하다는 생각에 하타곤군의 기사단장과 부단장은 의미심장하게 서로의 어깨를 믿음직하게 느끼며 소드마스터의 상징인 검강을 뿜었다.

두 대의 마갑기에서 빨갛고 노란 검강이 치솟자 휴식하던 패왕대와 거인대는 먹던 빵을 들고 긴장했다. 뒤를 따르는 하타곤군도 흥분의 함성을 지르며 죽여라를 연호했다.

두 개의 마갑대검에서 뿜어지는 검강이 철장패가 탄 월령의 몸체를 수직으로 갈랐다.

검강과 검강이 부딪히자 강렬한 빛줄기가 서서히 어둡게 변하는 산등성이를 환하게 밝혔다. 두 대의 마갑기에서 쏟아지는 검강을 월령의 세이버에서 발출된 시뻘건 검강이 힘차게 솟구치며 막았다. 의외라는 느낌이 들 철장패가 손쉽게 대응하자 혼자보다 둘이 강하다는 판단에 하타곤군의 기사단장과 부단장은 온 힘을 다해 밀었다. 주거니 받거니 밀며 땡기던 검강의 부딪힘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움직이지 않던 월령의 왼 주먹이 하타곤군 기사단장의 얼굴에 거대한 충돌음을 발생시키며 박혔다. 얼굴이 함몰된 적군은 쏜살같이 뒤로 튕겨졌다. 단순하게 주먹에 맞았을 뿐인데 마갑기 전체가 수 미터 뒤로 날아갔다. 옆에서 뻣뻣하게 몸이 굳은 적군의 부단장에게 다시 한 번 철장패의 왼 주먹은 옆구리에 작렬했다. 강한 힘으로 밀기보다는 강렬한 충격에 초점을 맞추어 타격한 적군이 몸을 웅크리자 가르기 자세로 변한 철장패의 세이버는 적군의 몸통을 갈랐다.

몸체가 두 조각으로 갈라져 지저분하게 길목을 막아선 적군의 마갑기를 월령의 발로 힘껏 걷어찼다.

``다음 나와라. 될 수 있으면 소드마스터 이하는 오지 마라. 싸우기 귀찮다!"

긴장하며 총사령의 전투를 구경하던 패왕대는 소리치며 함성을 질렀다. 닭살스럽게 `우리 멋쟁이 대장 이뻐해줄게', `오빠오빠 멋있어'를 연호하는 놈들도 있었다. 부하들의 농담 짓거리에 싸우는 것보다 철장패는 근지러운 귀부터 긁어야 했다.

사람이란 한 대를 엉겁결에 맞았다고 쉽게 정신을 차리는 존재가 아니었다. 정신이 바짝 들려면 싸움이 끝날 쯤이었다.

부단장의 죽음에 울컥한 적군은 맹렬히 철장패에게 돌격했다. 두 명씩 올라오는 적군을 검강으로 베었다. 등뒤에서 떠미는 동료들의 힘에 어쩔 수 없이 올라갔던 적군은 싸늘하게 식은 몸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뭇매에 당할 장사는 없다고 하지만 올라오는 길목이 한정된 곳에서 실력 차이가 많이 난다면 못 싸울 것도 없었다.

산등성이의 길목에 서서 적군을 막아내는 철장패. 그는 한 마리 사자였다. 그는 거대한 벽이었다. 기사단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죽어 흙바닥은 사람의 피로 흥건하게 변해 산길을 타고 평지로 흘렀다.

다가서지 못하는 골드나이트가 검풍탄을 철장패에게 날렸지만 맞아도 맞은 티가 나지 않았다. 쇳덩어리마저 잘리는 검풍탄이,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수십 발을 맞으면 죽는데 철장패는 아무렇지 않게 서서 적군을 노려보았다. 점점 산언저리는 어둡게 변하는 가운데 산등성이 길목을 막은 철장패는 죽음의 사신처럼 적군의 가슴을 차디차게 만들었다.

쉽게 산등성이로 오르지 못하는 적군과 그 앞을 묵묵히 지키는 철장패.

휴식하는 패군과 이제는 가까이 다가온 하고스티후작의 군대. 그들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이제는 소드마스터가 아니면 산등성이 길목으로 오르지 않았다.

가끔, 한 명씩 투지를 불사르며 철장패에게 돌진했다. 그때마다 터지는 단 한 번의 굉렬한 섬광으로 전투는 끝이 났다. 잠시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바닥에 몸을 뒹군 적군의 소드마스터는 아홉 명에 달했다.

패군에게 있어 총사령의 모습은 긍지와 자부심으로 다가왔다. 수많은 적군을 가로막고 당당하게 섰다. 오히려 혼자서 적군을 상대해도 이길 것 같다는 착각마저 일으켰다.

소드마스터는 시장통 어느 곳에나 있는 상품이 아니었다. 수만 명 중에 한 명이 나올까 말까 하는 존재였다. 소드마스터가 아닌 일반 마갑기가 한꺼번에 돌진한 경우도 있었다. 그때마다 일어나는 수십 개의 검풍탄으로 적군은 쓰러졌다. 철장패에게 다가서지도 못했다.

``소드마스터가 아닌 자를 직접 상대하기 싫다. 스스로 소드마스터가 아닌 기사는 뒤로 물러서라!"

굉렬하게 터지는 철장패의 외침에 적군의 심장은 오그라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적군의 오그라든 심장은 부풀어 올라 커졌다. 눈앞 평지에 적군이 빽빽하게 가득차기 시작했다. 패군을 향해 원독의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철장패를 향해 달려들 생각은 못했다. 잠시의 소강상태가 눈깜짝할 사이에 길어져 적군과 대치한 시간이 한 시간 반이 넘어섰다.

눈앞에 적군을 두고 사방을 훑어 보던 철장패에게 멀리 하고스트후작을 상징하는 깃발이 보이자 패왕대에게 명령했다.

``일어나라, 충성스런 부하들이여. 이제부터 싸울 준비를 한다. 저곳에 하고스티후작이란 놈이 있다. 어떤 놈인지 직접 대면하고 싶다."

쩌렁쩌렁하게 철장패의 목소리가 산을 울리자 하고스티후작의 발걸음은 멈추어졌다. 곧 있으면 밤이었다. 아무리 늦은 저녁이라고 해도 멀리 있다면 깃발만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의 먼 거리였다. 그런데 패군으로 보이는 적진에서 자신의 얼굴을 정확하게 보며 소리치는 장수가 있었다.

뱀파이어는 밤에 활동하는 종족이었다. 그만큼 밤에는 시야가 넓었다. 그래서 패군을 눈으로 살필 수 있었지만 인간의 눈으로 자신을 볼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그것도 어둡게 변하는 저녁이었다. 갑자기 피부 곳곳에 소름이 끼쳤다. 이해할 수 없는 위기의식이 회오리치며 가슴 속으로 솟구쳤다. 멋도 모르고 상한 음식을 먹고 뱃속이 부글부글 끓었던 기억을 다시 떠올랐다. 패군을 발견했다는 보고에 다가서던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멈추어졌다.

신경질적으로 부하에게 소리쳤다.

``오늘밤 이곳에서 머문다."

``패군은 어떻게 할까요?"

``놈들이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사방을 막아라. 그리고 감시만 해라. 싸우지 말고 감시해라."

불쾌한 기분에 언성을 높이던 하고스티후작은 철장패가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화들짝 놀란 하고스티후작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곳에 철장패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그것도 정확히 자신의 얼굴을 주시하며 웃고 있었다. 고작, 사천의 병력을 갖고 움직이면서 웃다니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불쾌했다.

``머무는 진지를 뒤로 물린다. 이곳에 있다가는 기분만 더러워져 잠도 오지 않을 것 같다."

부하들이 열심히 막사를 만드는 걸 보면서 하고스티후작은 철장패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물러섰다. 뱀파이어인 자신의 눈으로 철장패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도착하자 안심이 되었다.

철장패는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분명히 하고스티후작은 뱀파이어였다. 어두운 밤에 멀리 보는 시야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늑대종족이나 사자종족도 어두운 밤에 먼 시야를 갖고 있었다. 패나라에서는 다양한 종족이 사는 땅인 만큼 멀리 본다는 건 대수로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뱀파이어만이 갖는 특징은 있었다. 일반 사람에 비해 하얀 얼굴, 뾰족한 송곳니, 눈 가에 흐르는 붉은 기운, 가벼운 몸놀림 등이 모여 뱀파이어라는 특징을 설명한다. 이야기를 하면 구분이 어렵지만 직접 보면 알 수 있었다. 어떤 종족인지 구분이 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확인할 게 남아 있었다.

눈앞에 세인트 도시는 불탔다. 굳이 하타곤군이 같은 민족을 죽일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하고스티후작은 약탈을 자행했다. 베이모스 소환에 필요한 인간의 영혼과 피가 필요하다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수많은 죽은 자의 원망과 저주가 세인트 도시 곳곳에 흐르고 있었다. 오늘은 베이모스 종족을 소환하기 적당한 날이었다. 철장패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음으로 보는 새로운 종족이자 마수였다. 어두운 창공으로 시선을 돌리자 초생달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베이모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마수였다. 마역을 만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베이모스가 사는 땅은 마계와 비슷하게 변했다. 저주를 받은 땅으로 변했다. 오늘 처음으로 베이모스의 모습을 보게 될 거 같았다. 이미 두 번 나타났었다고 한다. 그중에 한 번은 오군과의 전투에서 소환돼 오군의 상당수가 죽은 계기였다. 검풍탄이 아니면 상처를 입지 않았고 소드마스터의 검강이 아니면 신체가 잘라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트롤처럼 끊임없이 재생하기에 죽일 수 없었다고 밝혀졌다. 베이모스에 관한 사항이 패나라 세자궁에 전해지면서 은밀하게 흑마법사 세 명이 쿠타하타영지에 왔다. 베이모스의 시체를 얻을 가능성이 철패왕의 후예인 철장패에게서 가장 높았기 때문이었다.

매서운 한기가 잠시 다른 생각을 했던 철장패의 어깨를 노리고 달려 들었다. 생각하기 이전에 몸이 반응해 적장의 검강을 피했다. 검강을 내려치기한 적장의 얼굴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 몸을 뒤로 돌려 꺾었다. 마갑기의 얼굴 부분을 우악스럽게 뜯었다. 적장의 신체가 있는 부위는 마갑기의 몸통이었지만 마갑기의 시야를 잃은 적장은 이어지는 공격에 목숨을 잃었다.

망연하게 가만히 있다가 공격하는 철장패의 모습에 숨을 죽였던 하타곤군은 아쉬움과 두려움으로 벌벌 떨었다. 두려움도 잠시였다. 집단을 이루는 사회적 동물의 공통점으로 동료가 적보다 많으면 쉽게 안정을 찾는 습성이 있었다. 하타곤군은 두려움을 떨치고 철장패를 향해 또다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묵묵히 적군을 보는 철장패 곁으로 서유와 이훈장이 다가섰다.

``준비가 끝났다면 적군과 한바탕 싸워야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모두 산을 통해 거인성으로 후퇴한다. 나는 조용히 확인할 게 있다."

``적군과 씨우지 않습니까?"

이훈장이 의문을 제기했다.

``평상시라면 싸웠을 것이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아군에게 많은 피해가 발생할 것 같다. 하고스티후작이 베이모스 종족을 소환하려고 한다. 나는 구경 좀 하다가 가려고 한다."

``베이모스? 무슨 말씀입니까?"

철장패는 궁금한 표정의 이훈장과 서유에게 슬며시 웃었다.

``궁금하다면 너희도 남아라. 그런데 숫자가 많으면 적군에게 들킬 위험이 높다. 나머지 부하들을 돌려보내고 너희 둘만 남아라. 그럼 재밌는 걸 구경할 수 있다."

하타곤군이 노려보는 가운데 패군이 산 위로 올라가며 철군하자 일단의 무리들이 패군의 뒤를 쫓았다. 꾸역꾸역 어두운 산길을 타고 적군이 올라가는 사이 철장패는 마갑기를 역소환하고 숨은 상태였다. 그 곁으로 서유, 이훈장, 부관 김현우, 부장 심안호가 긴장한 표정으로 적군의 동태를 눈으로 쫓았다. 잠시 한적해지자 세인트 도시가 한눈에 보이는 절벽바위 근처로 이동했다. 까닭도 모르고 총사령을 쫓는 네 명은 마갑기도 없이 빈 몸으로 움직이자 몹시 불안했다. 언제 적군에게 들켜 죽을 지 모른다는 위가감에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그렇다고 총사령이 맨몸으로 움직이는데 투정을 부릴 수 없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철장패를 째려볼 뿐이었다.

안전한 장소까지 도착하자 조용히 철장패는 뇌까렸다.

``베이모스라고 들어봤냐? 천 년 전에 일어난 마계마수 세계대전이라고 들어봤어? 그때는 패나라가 생기지 않았지. 마계마수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패나라는 건국할 수 있었다. 그때로부터 꼭 천 년이 흘렀다. 천 년 전에 마계의 문을 열었던 놈들이 또다시 돌아온 어둠의 재림을 이용해 마계의 문을 열려고 시도하고 있다. 하고스티후작도 그런 놈 중에 하나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리고 오늘 하고스티후작이 베이모스를 소환할 모양이다. 저번에 오군이 하고스티후작에게 크게 패배했다고 했지? 그때 베이모스가 소환되어 오군을 잡아먹었다고 한다. 삼만이라는 대군이 움직였는데 베이모스 한 마리가 나타났다고 진 모양이드라. 아마, 지금 하타곤군과 싸웠다면 우리는 베이모스와 싸워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병력을 후퇴시켰다. 어차피 삼 일 정도만 방어선을 지키면 된다. 굳이 피를 흘리면서 적군과 싸워야 할 이유는 없다."

갑작스런 철장패의 이야기를 네 명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훈장이 대표로 궁금증을 물었다.

``베이모스가 신화 속에 나오는 그 베이모스를 말씀하십니까?"

``그래! 그 놈이야."

``그놈이 어떻게 지금 소환된다는 걸 아십니까?"

아직도 실감하지 못했던 서유가 어리벙벙한 상태에서 입에 나오는 대로 질문했다.

``베이모스를 소환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해. 최소 이천 명이 넘는 인간들의 죽은 영혼, 수많은 피, 저주와 같은 원념 등이 있어야 돼. 재료가 갖추어지면 소환마법진을 펼쳐야겠지. 소환마법진은 뱀파이어인 하고스티후작이 아무 때나 펼쳐도 인간들의 죽은 영혼과 저주의 원념은 오늘 밖에 안 돼. 그것도 내일 해가 뜨기 전까지 해야 베이모스를 소환할 수 있어."

자세한 건 알 수 없었지만 베이모스가 소환될 지 모른다고 이훈장과 서유는 생각했다. 총사령의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다른 때와 달리 크게 기대하며 어린아이처럼 흥분해 있었다. 저와 같은 표정일 때는 큰 사건이 터졌다.

침을 꿀꺽 삼키며 황폐한 세인트 도시를 살폈다. 한 시간이 가고 두 시간이 갔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다. 초생달만 허공에 걸려 몸뚱이만 추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철장패 앞에서 투덜거리는 소리는 커졌다.

``아니, 베이모스가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추워 죽겠는데 이런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없을 거 같습니다. 이만 돌아가죠."

속으로 욱하며 입술로만 중얼거리던 서유가 드디어 참지 못했다.

평안한 자세로 누워 눈을 끔벅끔벅 뜬 철장패는 인상을 쓰는 서유에게 웃었다.

``가고 싶으면 혼자 가라. 나는 구경해야겠다."

능력이 된다면 혼자라도 가고 싶지만 서유는 자신이 없었다. 마갑기를 뚫고 지나갈 자신이 없었다. 총사령과 함께 있다면 어디에선가 방법이 나타나 탈출할 게 분명했다. 뭐라 말은 못하고 입술이 튀어나온 서유에게 철장패는 육포를 길게 찢어 건네주었다.

``이거라도 씹어. 늦어도 한 시간 안에 보게 될 거야."

``네?"

붕어눈이 되어 반문하는 서유에게 손가락을 들어 먼 허공을 가리킨 철장패는 질겅질겅 육포를 씹었다.

``저기에서 소환마법진의 마력이 느껴진다. 저게 완성이 되는 순간, 베이모스는 나타난다."

지나가는 말투로 가볍게 말하고 있었지만 듣는 서유로서는 화들짝 놀랐다.

``진짜입니까?"

``언제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 것처럼 들린다."

살짝 기분이 상한 듯 눈을 야릿하게 쏘아보는 철장패의 시선에 서유는 눈을 피했다.

시간은 한없이 늦게만 흐르던 것이 이상한 기류가 흐르는 걸 느낀 순간부터 한없이 빠르게 흘렀다. 소환마법진 위에서 펼쳐지는 거센 바람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맑은 하늘에 갑자기 생성된 검은 먹구름이 소환마법진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먹구름이 소환마법진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바람소리가 매섭게 울렸다. 마침내 먹구름이 연보라빛에 휩싸인 마법진에 갇히자 모든 바람소리가 멈췄다. 고요함이 십오분이 넘어가자 아무런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마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땅이 울렸다. 실제적으로 땅이 울리지 않았지만 거센 충격이 땅바닥을 타고 온 것은 분명했다. 이상한 현상에 놀라 소환마법진을 살피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그 사이로 무언가 몸을 비집고 나왔다.

처음에는 순진하게 느껴지는 커다란 눈망울이었다. 점점 나오자 커다란 검은 소의 뿔과 눈동자가 사방을 살폈다. 이내 주변에 퍼진 인간의 냄새를 맡았는지 눈이 초식동물에서 육식동물로 변했다. 한없이 순수하게 느껴졌던 눈망울이 한순간에 광기에 번질거렸다. 이어 어깨로 좁은 문을 비집고 나오자 몸통이 드러났다. 몸통이 드러날 수록 생경한 모습이었다. 다리가 지네처럼 여럿이었다. 몸통에 드러난 털은 분명히 소의 긴 털이었는데 다시 보면 지네의 몸이었다. 드문드문 반짝이는 갑각류의 거센 껍질이 조약돌처럼 몸통에 박혀 있었다. 마침내 꼬리 부위가 나왔지만 꼬리가 아니었다. 그건 머리였다. 황소와 같은 얼굴이 아닌 악마의 얼굴이었다. 베이모스 종족 중에서 쌍면갑우였다.

마갑기 열 대를 늘어붙이면 적당하게 크기가 비슷했다. 천 년 전의 전쟁에서는 저런 마수들이 인간들의 땅을 헤집고 다녔다고 한다. 단순히 상상 속의 마수가 아니었다. 이제는 눈으로 확인한 마수였다. 신화 속에 파묻힌 존재가 아니었다.

온몸을 드러낸 베이모스는 가까이 있는 하타곤군의 마갑기에 달렸다. 커다란 소리로 받아버린 베이모스는 한방에 쓰러진 마갑기 속에서 인간을 끄집어 내어 씹었다. 마갑기마저 뜯다가 먹기 귀찮아서 버렸다. 때 아닌 베이모스의 등장에 뒤늦게 하타곤군은 정신을 차리고 공격했다. 그러나 가볍게 몸을 흔드는 것만으로도 마갑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주변에 있는 마갑기라고 해야 기사단 하나였다. 별로 실력이 없는 백 대의 마갑기가 베이모스에게 쓰러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마갑기에서 인간을 빼어 맛있게 먹은 베이모스는 길게 하품하며 땅바닥에 누웠다.

멀리서 하고스티후작이 먹이로 던져진 기사단은 신경도 쓰지 않고 베이모스를 귀엽다는 듯 살피고는 하타곤군을 세인트 도시에서 철군시켰다.

북방협곡을 나서면 공작성으로 가는 길과 알파벌처요새로 가는 길, 레드벌처요새로 가는 길로 나누어진다. 그 길목마다 거인성, 거한성, 거목성이 지켰다. 세 곳을 지나지 않으면 쿠타하타영지로 들어설 수 없었다. 들어서려면 산을 넘어야 했다. 마갑기를 타고 산을 넘을 수는 없었다. 빠르게 산을 넘으려면 마갑기를 역소환하고 도보로 지나면 되었지만 패군에게 들키면 죽은 목숨이었다. 그래서 가는 길목은 세 곳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하고스티후작이 가는 곳은 가까운 거인성이었다.

베이모스, 막상 눈으로 확인하자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섣부른 판단은 위험했지만 드래곤처럼 강대한 마수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덩치만 큰 몬스터도 아니었다. 직접 싸워야 알 것 같았다. 철장패는 입맛을 다시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베이모스를 노려보다가 작심한 철장패는 손에서 도깨비 불 하나를 생성시켰다. 그리고 쌍면갑우를 향해 날렸다. 모기처럼 작은 도깨비 불이 악마 면상의 귓털에 달라붙었지만 큰 귀를 가볍게 털고 무심하게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돌아가자. 저 놈을 상대할 방법은 천천히 궁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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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전쟁이야기 83 - 전사의 외침3 +3 09.02.17 10,098 73 18쪽
82 전쟁이야기 82 - 전사의 외침2 +4 09.02.13 10,029 76 20쪽
81 전쟁이야기 81 - 전사의 외침 +4 09.02.13 10,622 68 24쪽
80 전쟁이야기 80 - 하량의 작전3 +16 08.11.14 11,177 71 37쪽
79 전쟁이야기 79 - 하량의 작전2 +6 08.11.12 10,763 73 13쪽
78 전쟁이야기 78 - 하량의 작전 +7 08.11.11 11,189 73 22쪽
77 전쟁이야기 77 - 오군과 육군의 거병4 +9 08.11.10 11,044 68 16쪽
76 전쟁이야기 76 - 오군과 육군의 거병3 +6 08.11.07 11,172 73 13쪽
75 전쟁이야기 75 - 오군과 육군의 거병2 +8 08.11.06 11,287 74 16쪽
74 전쟁이야기 74 - 오군과 육군의 거병 +8 08.11.05 11,365 78 16쪽
73 전쟁이야기 73 - 불타오르는 전쟁4 +7 08.11.04 11,512 79 16쪽
72 전쟁이야기 72 - 불타오르는 전쟁3 +10 08.11.03 11,603 73 19쪽
71 전쟁이야기 71 - 불타오르는 전쟁2 +5 08.10.31 11,739 81 15쪽
70 전쟁이야기 70 - 불타오르는 전쟁 +11 08.10.30 12,009 66 13쪽
69 전쟁이야기 69 - 수도 함락, 환호6 +4 08.10.29 12,032 76 13쪽
68 전쟁이야기 68 - 수도 함락, 환호5 +8 08.10.28 11,923 76 16쪽
67 전쟁이야기 67 - 수도 함락, 환호4 +8 08.10.27 12,319 110 15쪽
66 전쟁이야기 66 - 수도 함락, 환호3 +7 08.10.26 12,179 72 15쪽
65 전쟁이야기 65 - 수도 함락, 환호2 +13 08.10.25 12,497 71 15쪽
64 전쟁이야기 64 - 수도 함락, 환호 +6 08.10.24 12,855 73 12쪽
63 전쟁이야기 63 - 위험한 순간5 +8 08.10.23 12,300 73 21쪽
62 전쟁이야기 62 - 위험한 순간4 +7 08.10.22 11,987 71 16쪽
61 전쟁이야기 61 - 위험한 순간3 +9 08.10.21 11,922 78 19쪽
60 전쟁이야기 60 - 위험한 순간2 +7 08.10.20 11,850 76 22쪽
59 전쟁이야기 59 - 위험한 순간 +6 08.10.19 12,673 75 25쪽
58 전쟁이야기 58 - 연합작전 그리고 전복4 +12 08.10.17 12,337 6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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