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관해 님의 서재입니다.

전쟁이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관해
작품등록일 :
2011.11.10 19:59
최근연재일 :
2015.12.11 00:45
연재수 :
296 회
조회수 :
2,954,536
추천수 :
22,779
글자수 :
2,466,673

작성
08.11.14 22:34
조회
11,180
추천
71
글자
37쪽

전쟁이야기 80 - 하량의 작전3

DUMMY

며칠 사이로 일군부터 육군까지의 격렬한 전투가 끊이지 않아 세 왕국을 들썩였다.

패나라의 수도 중경, 세자궁에서 독고명린은 하량의 작전계획서를 읽었다.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안색은 굳었다가 풀어졌다가 긴장한 상태를 유지하며 살폈다.

``온통 부정적인 내용밖에 없어. 그렇게 상황이 비관적이야?"

``유리하게 싸우는 곳은 사군밖에 없어. 실버스톤을 점령한 이군은 지키기 바쁘고 나머지는 모두 조금씩 후퇴하고 있어."

하량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눈살을 찌푸린 독고명린은 계획서를 탁자에 올렸다.

``계획서에 따르면 붕린형님은 하노버성과 주변 두 개의 성을 지키는 것으로 되어 있던데 너무 위험하지 않아? 당장 후퇴하라고 말해!"

``이미 후퇴하라고 부탁했어. 하지만 옹고집을 부리며 지킨다고 하길레 지킬 생각이면 하노버성을 지켜달라고 했지. 위험하다고 판단이 되면 알아서 후퇴하라고 했어."

``왜 붕린형님은 후퇴하지 않는 거야?"

조마조마한 심정에 독고명린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후퇴를 하는 순간, 점령했던 땅은 적군의 땅이야. 그동안 노력한 8개월이 허공으로 사라져. 중부의 거대한 영지를 움켜쥘 기회가 사라지니 당연히 아깝겠지. 아까우니 사력을 다해 적군에게 대항하는 거야."

``땅이야 다시 점령하면 그만이잖아. 잘못해서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버티는 거야."

삼왕자를 걱정하는 독고명린에게 하량은 단언했다.

``삼왕자가 하노버성을 나가지 않는다면 죽지 않아. 설혹 적군에게 온통 포위가 된다 해도 죽지 않아. 삼왕자의 세력과 함상세가가 합친 일군은 약한 집단이 아니야. 오히려 적군의 기세가 죽는 순간 공격할 힘마저 갖추고 있어!"

불안하던 독고명린은 그제야 안심이 되어 평안하게 의자에 몸을 묻었다.

``함상세가, 그들이 무서워... 그들이 붕린형님을 부추길까 겁이 나. 그래서 괜히 불안했던 거야. 어쨌든 작전을 허용한다. 추가로 투입될 칠군과 팔군도 허락한다. 그리고 기사단 백 개와 왕국군 오십만의 소집도 허락한다. 그래 끝장을 봐야겠지. 허술하게 싸웠다가 뒤통수를 맞기 보다 이번 기회에 끝장을 보자. 지금부터 패나라 모든 지역은 전시체제에 돌입한다."

왕세자의 허락이 떨어지자 하량은 왕세자와 함께 국왕에게 달려가 작전계획서의 승인을 받았다. 작전계획서는 서류 상의 계획으로 끝나지 않고 패나라의 미래가 되어 하량의 발걸음을 뛰어다니게 만들었다. 제후령을 지배하는 월령공작, 월령후작, 월령백작에게 왕성으로 오르라고 연락하고, 국왕령에 속한 주요 대신과 후작과 백작도 빠지지 않았다. 흑백쌍룡에 속한 관료와 늙은 대신마저 지방에서 왕성으로 소집했다. 소집이 되는 날짜는 12월 20일이었다.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열리는 총회의사당의 문이 열리려고 했다.

국왕령이던 제후령이던 어느 영지를 막론하고 패나라에 속한 모든 영지에서 병력을 이끌고 출발했다. 지휘관은 왕성으로 들어갔고 병사는 국경선을 향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전쟁은 또다시 새로운 국면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아직은 수면 아래에서 흐르는 물결이었지만 12월 20일을 기점으로 패나라의 저력은 적군을 향해 쏟아질 예정이었다.

바르쏭왕국의 마샬공작은 수도 할로우킹을 점령하여 영웅으로 떠올랐다. 물결치며 일어나는 수많은 백성의 환호를 받았다. 충성을 다짐하는 기사들이 줄지어 마샬공작에게 향했다.

할로우킹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는 확신이 서자 마샬공작과 하고스티후작은 패군에게 점령된 중부로 본격적으로 달렸다. 일군이 온전히 점령을 하지 못한 발패리스, 롱기쉬, 핫세를 시작으로 패군을 물리쳤다.

창해력 980년 12월 5일 일요일, 하량의 작전이 공식적으로 국왕에게 허락을 받은 날에 마샬공작은 하노버성을 목표로 진격했다. 강력하게 저항하는 삼왕자의 일군을 맞이하자 마샬공작은 하고스티후작에게 하노버성을 맡기고 우회하여 캐리쿡, 츄왈츠먼을 도모했다.

창해력 980년 12월 6일 월요일 한밤중, 숨가쁘게 바르쏭왕국의 전황이 펼쳐질 때 선발대를 이끈 묵대형과 말리크백인장은 와이번나이트 스물다섯의 도움으로 공작성 인근의 야산으로 숨어들었다. 마갑기를 꺼내기 위한 갑옷을 제외한 투구, 견갑, 각반까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온 상태라 선발대의 우락부락한 얼굴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날이 어두웠다. 근처의 산 중턱까지 와이번나이트의 도움을 받았지만 산에서 내려가 공작성 안으로 들어가는 건 오직 말리크백인장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말리크백인장은 모처에 도착하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잠시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변화가 없자 부엉이소리를 냈다. 이내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인근에서 부스럭부스럭 낙엽을 밟는 소리가 들리더니 얼굴을 내민 건 늙은 사냥꾼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아들인 말리크백인장과 반갑게 해후했다.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결정했구나. 후회하지 않겠느냐?"

전직 기사단장이었던 늙은 사냥꾼은 안쓰럽게 아들의 얼굴을 만졌다.

``저는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말리크백인장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결의에 찬 아들의 각오에 늙은 사냥꾼 엔도르크는 결심을 굳히며 무리를 인솔해서 앞장섰다. 그나마 공작성의 관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간혹 순찰병만 돌아다녔다.

늙은 사냥꾼은 공작성의 성벽에 바짝 다가서자 긴 부엉이소리를 냈다. 순간, 높은 성벽 위에서 누군가 얼굴을 내밀더니 오십 미터의 성벽에서 밧줄을 늘어뜨렸다.

``제가 신호를 보낼 때마다 한 명씩 올라와야 합니다. 연이어 두 명씩 밧줄을 타고 오를 수 없습니다. 오르는 시간은 2분 10초를 넘어서면 안 됩니다. 시간을 초과했다면 성벽을 넘지 말고 중간에 기다려야 합니다. 때에 따라서 새소리나 고양이 울음소리가 나면 오르는 걸 멈추어야 합니다. 순찰병을 제외한 병사가 오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선발대의 기사들이 한 명씩 밧줄을 타고 공작성을 넘었다. 때로는 주변의 순찰대가 지나가면 밧줄을 부여잡고 성벽 중간에서 꼼짝도 못하는 기사와 어두운 지역에 올려진 밧줄을 순찰대가 발견하고 고함을 치는 순간 덮치려고 대기 중인 선발대로 나뉘었다.

입안을 바짝 마르게 하는 시간이 지나자 다람쥐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성벽을 재빨리 올랐다. 한 명씩 성벽을 모두 오르자 공작성의 개구멍을 통과하기도 했고 순찰하는 빈 순간을 노려 통과할 때도 있었다. 간신히 주민들이 사는 마을까지 도착해서야 도움을 준 다섯 명과 수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밝은 표정으로 힘차게 살아가는 사람만 세상에 있는 건 아니었다.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는 존재들이 있었다. 태양이 높이 뜬 양지에서 밝고 활달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음지에서 어둠을 등에 지고 평생을 보내야 하는 존재도 살았다. 특히, 세상이 썩으면 썩을수록 음지에서 살아야 하는 백성은 많아졌다.

도우미 다섯 명은 늙은 사냥꾼과 비슷한 처지의 사연을 갖고 있었다. 감옥에 갇힌 아들을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던 중에 알게 된 인연이었다. 네 명이 원하는 소원은 늙은 사냥꾼과 비슷했다. 단 한 사람만큼은 돈을 요구했다. 그것도 많은 돈을 요구해 다른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만 사연을 알고 있는 늙은 사냥꾼은 아무 말도 안 했다.

협상이 끝나자 큰 창고에 들어선 선발대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오직 묵대형과 말리크, 도우미 다섯 명, 늙은 사냥꾼만 간혹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밤에 도착해 아침이 되고 낮이 왔다. 예정된 시간이 되자 곡식창고로 이용하던 큰 창고에는 선발대의 마갑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선발대가 일분일초를 세며 숨가쁘게 긴장하는 가운데 철장패는 새벽부터 느릿느릿 키퍼벌처 성채를 빠져나와 살파성에 장난쳤다. 살파성에서는 기사단을 내보내 패왕대와 싸울 생각은 없었다. 패왕대를 향해 싸워봤자 재미가 없었다. 합심해서 타넬라공작이 나서면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고 혼자 나서서 만만하게 보이면 공격해서 죽였다. 지금은 패군이 방어벽을 넘지 못하게 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패왕대는 반나절을 소비해 알파벌처 요새에 도착하자 욕을 잘하지 못하지만 목소리가 우렁찬 거인기사를 앞세워 욕하다가 싸우러 나오지도 않고 지키자 공작성으로 향했다.

일주일 동안 패왕대가 한 일은 아침에는 살파성에, 점심에는 알파벌처 요새에, 저녁에는 공작성과 싸움을 붙이다가 밤에는 돌아갔다. 이제는 식상한 패왕대의 행동에 적군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공작성을 향해 힘차게 패왕대가 달려도 무신경하게 각자의 성과 방어벽만 굳건히 지켰다. 무엇보다 공작성을 지켜야 할 타넬라공작은 살파성이 뚫리는 게 두려워 살파성에 있었다. 살파성이 점령되고 블랙벌처마저 뚫리면 하피쉬영지를 통해 패군이 물밀듯이 몰려올 게 분명했다. 그래서 살파성에 가장 많은 병력이 모여 있었다. 철옹성의 공작성을 목표로 패군이 달린다고 상상하지 못했다. 일주일 동안 패군의 어리석은 행동을 보아왔기에 오늘도 패군의 행동을 바보와 같다고 웃으며 옆 동료와 떠들 따름이었다.

시간은 째깍째깍 흘렀다. 공작성에 가까이 갈수록 패왕대는 마갑대검을 굳건히 잡았다. 그리고 언제나 했던 행동이던 공작성의 정문을 두드려야 했다.

공작성의 성문은 모두 강철이었다. 그것도 마법으로 처리가 된 괴물 철판이었다. 7서클에서나 가능하다는 경량화마법이 정문에 걸려 있었다. 그것도 이십 미터의 높이에 마갑기 열 대가 한꺼번에 설 수 있는 삼십 미터의 길이였다. 최소한 성문을 만들기 위해 7서클 마법사가 열 명이 필요할 정도로 컸다. 그런 성문이 자그마치 앞문 두 개, 뒷문 두 개, 관문 하나였다. 그 외에 작은 문은 수십 개가 되었지만 7서클 마법사라면 혼자라도 가능한 크기였다.

오랜 세월이 걸쳐 보완되고 완성된 공작성은 말 그대로 철옹성이었다. 시범적으로 소드마스터 다섯 명이 성문을 부수었지만 작은 흔적만 남았다. 그리고 다음 날 와서 보면 말끔해졌다. 재생마법까지 곁들여진 성문이었다. 마갑기에나 사용하는 고급마법이 성문에 새겨져 있었다. 시범적으로 1미터를 깬 적도 있었다. 하지만 서서히 아물더니 나중에는 부순 흠집마저 나지 않았다. 궁금해서 알아본 정보에 의하면 성문의 두께가 5미터라고 한다. 1미터를 깬 것도 반나절을 몰두한 끝에 얻은 깊이였다. 철장패를 난감하게 만드는 성문이었다.

그래서 공격목표를 수십 개의 작은 성문으로 정했지만 성벽 위에서 쏟는 기름통과 옆에서 공격하는 적군의 위협으로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성문을 5미터가 넘게 고생해서 깼더니 성문은 아직도 철벽으로 남아 그대로 버텼다. 더 이상의 여력이 안 돼 후퇴하고 알아보니 성문이 열리는 방식이 앞뒤로 미는 미닫이 식으로 10미터 두께였다.

그 후로는 성문만 두드리다가 떠났다. 적군이 나오게 할 생각이면 작은 성문을 두드리다가 나오는 적군만 잡았다. 그것도 이제는 통하지 않아 나오지도 않았다.

성문 대신에 돌벽을 부술 결심도 들었지만 몇 번의 고생으로 두께를 첩자를 통해 살피니 장장 삼십 미터였다. 그것도 속까지 돌벽이었다. 암담하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의 문제는 성벽을 넘으면 있다는 물구덩이였다. 평시에는 위에 두꺼운 돌판을 올려놓아 상수도원으로 쓰고 전쟁이 터지면 성문을 제외한 모든 곳에 올려진 돌판을 치운다고 한다. 문제는 단순하게 물 웅덩이라면 상관이 없지만 이와 비슷한 성벽이 뒤에 또 나타났다. 정문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수십 미터를 다시 기어올라야 했다.

일반인들은 상상하지 못할 금액이 발라진 공작성이었다. 설혹 돈이 있다고 해도 평생을 공작성을 만드는 데 바칠 7서클 마법사와 수많은 공성장치에 필요한 자재를 구하지 못하면 만들지 못하는 공작성이었다.

마침내 공작성을 눈앞에 두자 철장패는 고고한 태도로 내려다보는 공작성을 향해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번에도 안 되면 혼자서 넘어가 꺾어주마."

월령의 마갑기 내부에 놓여진 두꺼운 밧줄을 보며 이를 앙다물었다. 공성용으로 마갑기에 맞추어 제작된 밧줄이었다.

혼자 성벽을 넘는다는 건 선발대의 전멸을 의미했다. 덧없이 선발대가 죽었다면 기필코 오늘은 넘어야 했다. 독불장군이 되어 싸우는 것처럼 어리석은 지휘관은 없겠지만 선발대의 죽은 영혼이라도 위로하고 싶었다. 잘못해 적군에 둘러쌓여 죽을 수 있었다. 자신이 죽게 된다면 패나라의 앞날은 예측불허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허망하게 물러설 수 없었다. 시도는 해봐야 했다. 혼자 성벽으로 올라가 후퇴하는 한이 있어도 모험할 때였다. 최후의 패가 꺼내어지지 않기를 원했다. 지금은 선발대가 성공하기를 굳게 희망할 뿐이었다.

예정된 신호를 보내기 위해 철장패가 탄 월령은 공작성의 정문을 강하게 갈겼다. 성문을 찢기 위함이 아닌 두드리기 위한 소리라 유난히 크게 공작성을 울렸다. 이어서 여포의 마갑기가 정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거인기사가 정문을 후려쳤다.

예정된 신호는 세 번이었다. 그것도 가장 힘이 센 장수가 두들겼다. 이어서 5분을 쉬고 또다시 세 번 두드렸다.

마침내 선발대가 출동하며 부딪히는 괴성이 정문까지 들려왔다.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패왕대는 작은 성문 12번째로 달렸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확인했다.

아쉽게도 작은 성문은 열려 있지 않았다. 오직 공작성에서 들리는 외침과 비명뿐이었다. 시간은 째깍째깍 흘렀다. 사람의 심장을 멈추게 하는 지도 모르고 쉼없이 흘렀다.

갑자기 성벽 너머에서 묵대형의 고함이 들렸다.

``적군이 너무 많아서 성문을 열 수 없습니다. 넘어 오십시오. 당장 죽을 거 같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서둘러 월령의 내부에서 두꺼운 밧줄을 꺼내어 들고는 성벽을 올려보았다.

``모두 내가 오르면 밧줄을 잡고 올라와라. 빠르게 올라야 한다. 늦으면 선발대가 죽는다!"

총사령의 외침이 터지자 패왕대는 총사령에게서 뿜어지는 수십 개 검풍탄에 놀라 서둘러 뒤로 피했다. 성벽의 높이는 무려 오십 미터였다. 까마득하게 높았다. 말이 오십 미터이지 올려다보려니 고개가 아팠다.

밧줄을 어깨에 메고 돌벽에 박힌 마나구를 밟았다. 한 걸음을 조심스레 밟고 다시 하나의 마나구에 발을 올렸다. 천천히 마나구가 돌벽에 박히며 월령의 체중을 지탱하자 점점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성벽 위에 있던 적군은 인형이 아니었다. 눈앞에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성벽을 오르는 패군의 장수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못했다. 월령을 향해 기름통이 쏟아졌다. 마갑기를 뚫기 위해 만들어진 공성용 작살창이 성벽 위에서 떨어졌다. 한 번 사용되면 버려지는 일회용에 불과한 창이었지만 비싼 만큼 철장패의 목숨을 가장 위협했다. 평상시에는 마갑대검으로 막거나 피하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마나구를 계단으로 사용하며 오르는 상황에서는 위험했다.

유난히 날카로운 기운을 뿜으며 다가오는 작살창이 얼굴과 몸통을 한꺼번에 뚫으려 하자 손바닥에 마나구를 덮어씌운 채 방향을 틀었다. 작살창에 의한 충격으로 몸뚱이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떨어지는 와중에 마나구를 발밑으로 박았다. 힘차게 마나구가 돌벽에 박히자 가까스로 휘청이며 몸을 지탱했다. 잠시의 쉴 틈도 없이 선발대에서 울리는 비명에 철장패는 눈을 부릅떴다.

검풍탄의 마나구는 한 번에 두 가지의 성질을 갖을 수 없었다. 공격하는 성질과 방어하는 성질은 서로 섞일 수 없었다. 마나가 체내를 회전하여 마나로드를 통해 마나구로 뽑아내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마갑기를 가르는 검풍탄은 적을 죽이기 위한 마나로드였고 마나구를 계단처럼 사용하는 마나로드는 다른 방법으로 체내에 형성되는 마나로드였다. 지금의 마나구로 다가오는 작살창을 자르지 못했다. 하지만 막을 수 있었다.

새삼 공격을 못한다는 생각에 화가 솟구치던 철장패는 막을 수 있다는 것까지 생각이 미치자 떨어지는 기름통과 작살창을 계단을 박기 위해 사용하던 마나구로 막았다. 굳이 자를 필요는 없었다. 막아서 방향만 튼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한 걸음씩 다시 올랐다. 점점 속도가 붙자 기름통과 작살창을 피하는 재주까지 부리며 속도를 잃지 않았다. 오기로 성벽 끝까지 오르자 작살포를 쏘던 적군의 마갑기부터 두 쪽으로 갈랐다.

주변의 마갑기는 새롭게 변한 마나로드를 따라 힘차게 용솟음치는 검풍탄에 의해 몸뚱이가 갈라졌다. 멀리서 소드마스터가 다가오자 서둘러 성벽 밑으로 밧줄을 내렸다.

``어서 올라와라!"

밧줄이 모두 내려가자 서둘러 작살포의 밑기둥에 밧줄을 묶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적군을 죽이기 보다 오십 미터 높이의 성벽 밑으로 밀쳐서 떨구었다. 그게 빠르게 적군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이었다.

가장 먼저 세창기사단을 맡고 있는 민우성이 올라왔다. 패왕대에서 몸놀림이 가장 빠른 소드마스터였다. 그 다음으로 오른 소드마스터는 롱팔로우였다. 한창기사단의 기사단장이었다. 이 둘은 아직도 마갑대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마갑창을 기사단의 상징으로 했다. 패왕대에서 유일한 마갑창기사단이었다. 여포, 장료, 고순이 오르자 그나마 적군을 상대하기 편해졌다.

선발대는 2차성문에서 돌판이 내리고 적군이 쏟아지는 걸 막고 있었다. 주변은 모두 상수도원으로 쓰는 깊은 강물이었지만 선발대가 막고 있는 곳만은 2차성문을 열고 선발대가 지켰다. 철장패는 당장이라도 선발대에게 달려가 돕고 싶었지만 지금은 1차 성벽 위의 적군을 없애는 게 우선이었다.

서른 대의 마갑기가 오르자 주저하지 않고 선발대가 있는 성문으로 뛰었다. 오십 미터의 성벽에서 2차 성문으로 뛰어내리는 조준이 잘못 되어 공중에서 마나를 강하게 품은 폭렬탄을 사용하며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선발대를 공격하는 한 소드마스터의 얼굴을 짓뭉개며 떨어졌다.

``고작 이 정도의 실력으로 우리를 물 먹이며 공작성을 지켰단 말이지...."

전력으로 뿜어낸 검풍탄이 서른 개에서 오십 개에 이르자 선발대를 향하던 적군의 마갑기가 무참하게 갈라졌다. 레드나이트가 우르르 죽고 실버나이트와 골드나이트가 견디자 세이버의 예리한 날로 재차 갈랐다. 적군이 날리는 여러 개의 검풍탄은 세이버에 의해 잘려 공기 중으로 힘없이 흩어졌다.

적군이 갈라지며 화려한 모습을 자랑하는 무장이 나타났다.

``이놈 패군의 적장 주제에 건방을 떨고 있구나. 내 검에 죽지 않고 살아난다면 종으로 삼아주마. 나는 공작성의 총관을 맡고 있다. 네놈은 누구냐?"

``사군 사령관이다."

``푸하하하~~ 대어였구나! 모두 합세해서 적장을 잡아라!"

적군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가운데 시선을 공작성의 총관에게 떼지 않았다.

``나에게 덤빌 자신은 없나? 총관!"

``이미 죽은 놈과 붙어서 무엇하겠냐. 어서 저놈을 죽여라!"

총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적군은 쏟아졌다. 다가오는 적군 중에는 소드마스터가 세 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총관의 목숨은 잠시 뒤로 미루어야 했다.

베기. 베기의 자세와 형태는 너무나 고전적이고 단순했다. 그래서 대규모 병력과 싸우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이기도 했다. 검날에 검강이 솟구치고 서서히 길어졌다. 철장패는 수십 대의 마갑기라도 한꺼번에 날릴 수 있는 힘으로 적군을 베였다. 손끝으로 두드득두드득 걸림이 느껴질 때마다 검강의 농도를 더욱 짙게 했다. 예리하면 할수록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간혹 정련된 검기와 강렬한 검풍탄이 검날에 부딪혔지만 속도를 약간 늦출 뿐이었다. 엄청난 힘이 가미된 검강의 베기를 막으려면 그만한 힘으로 막아야 했다. 아니라면 검기를 뿜는 마갑대검이라도 베어졌다. 굳이 전투에 화려한 기교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전투의 목적은 살인이었다. 화려한 기교도, 멋진 기술도, 모두 죽이기 위한 속임수였다. 전투의 근본적인 목적은 적군에게서 들리는 패배했다는 답변이 아니었다. 오직, 싸늘하게 식은 시신의 침묵만 요구했다. 그 기본 전투방법은 가르기, 베기, 찌르기였다. 하수는 기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만 고수는 기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수 미터의 검강이 주변을 감싸자 소드마스터를 제외한 적군의 허리가 갈라졌다. 분명히 막는 자세를 취했는 데도 불구하고 마갑대검과 함께 허리가 꺾였다. 철장패의 강력한 힘에 알아서 적군은 벗어났다.

잔챙이가 물러서고 굵직한 소드마스터만 남자 오른쪽 소드마스터에게 급속히 다가섰다. 마갑대검을 찌르려는 시늉을 하자 둥글게 마갑대검을 돌리는 자세를 취했다. 마갑대검을 쥔 적군의 주먹은 무게추의 중심으로 변했다. 마갑대검을 돌리려는 적군의 주먹을 순식간에 뻗어 왼손으로 움켜쥐고 역수로 쥔 세이버를 목을 감아 돌렸다. 소드마스터 한 명이 죽었다.

적군의 주먹을 거머쥔 방법은 백발연격타의 서른세 번째 나한금나수였다. 누구나 비슷한 동작을 하지만 거센 파도를 풀잎으로 막을 수 없었다. 같은 동작이라도 거센 힘이 담겨져 있다면 단순하게 기교만으로 막는 건 어리석었다. 오히려 기교를 발휘하도록 요구하고 바위도 맨손으로 부스러뜨리는 힘으로 적군의 주먹을 쥔다면 승부는 그것으로 끝났다. 마갑대검을 돌리기 위해 기교를 사용하는 적군의 힘은 그 순간만큼 들어간 힘이 고작 물방울 하나에 불과했다. 상대가 아무리 여유의 힘이 많이 남아서 억울하다고 외쳐도 일순간 주춤거리는 순간 목은 떨어진 후였다.

고수는 될 수 있으면 동작의 간소화를 원했다. 그 대신 기본을 튼튼히 했다. 기본 기술에 성질을 더하거나 빼기도 했다. 같은 주먹이 나가더라도 불처럼 뜨거울 때도 있었고 얼음처럼 차가울 수도 있었다. 분명히 옆에서 보면 단순하게 주먹이 나가는 것이지만 그 속에는 용암이 담겨 있고 거대한 빙산의 힘이 숨었다.

철장패의 행동에는 위험한 기운이 숨어 있었다. 수많은 적군을 앞에 두고도 여유롭게 걷는 동작이나 순식간에 적군의 기세를 눌러버리는 파괴력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불러왔다. 조용할 때는 자세히 보아도 드러나지 않던 기세가 적군을 앞에 두자 돌변했다.

``빨리 덤벼라! 일일이 다가서기 귀찮다!"

잔잔한 목소리가 주변을 압도하며 터졌다.

선발대마저 적군과 싸우다가 힐끔 총사령에게 고개를 돌렸다. 적군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려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위험한 순간을 스스로 불렀다. 묵대형은 소리를 벌컥 질렀다.

``이 자식들아 정신차려! 너희들 앞에는 적군이 있어, 멍청하게 총사령을 구경하지 말고 앞에 있는 적군이나 죽여라! 총사령이야 괴물이니 내버려 두고 너희들 목숨이나 챙겨!"

고래고래 소리치는 선발대장의 고함에 정신을 차리고 적군의 공격을 되받아쳤다.

괴물이란 소리에 철장패는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묵대형을 힐끔 보다가 적군을 향해 걸었다. 소드마스터 하나를 더 죽이기 위해 걷던 철장패는 멈춰야 했다.

여포가 성벽 위에서 뛰어내려 적군의 소드마스터를 밟아버린 후였다. 그 뒤를 소용후가 뒤따라 쫓아와 멍청하게 구경하던 어느 적군의 얼굴을 밟은 후에 남은 소드마스터와 상대했다.

앞장서서 나서려던 철장패는 전사에서 지휘관으로 돌아왔다. 당장이라도 총관의 멱살을 붙잡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었지만 사소한 일이었다. 냉정을 되찾았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직도 작은 성문이 열리지 않은 걸 보고 뛰어가 힘차게 성문을 열었다.

패왕대가 속속 들어서자 싸움은 본격적으로 전개가 되었다.

그나마 공작성의 안정성을 믿은 나머지 병력이 많지 않다는 게 다행이었다. 오천 대의 마갑기가 지키는 공작성에 때 아닌 피바람이 불었다. 그만큼 안전하다고 믿었던 곳이라 주변에서 구경하는 백성들이 많았다.

``백성들은 죽이지 마라. 검을 들고 덤비지 않는 이상은 다치게 마라!"

철장패의 호통은 공기를 타고 넓게 퍼졌다. 싸우는 패왕대에게 들렸다. 또한 구경하는 백성들에게도 들렸다. 겁을 먹고 몸을 떨던 백성들은 그제야 두려운 시선을 던지고 뒤로 크게 물러나 멀리서 구경했다.

마갑기와 마갑기가 부딪히는 요란한 소리에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패군이 이기면 안타까워 부르짖었고 적군이 승세를 보이면 환호하며 이겨라를 외쳤다. 하지만 환호성은 일순간이었다. 패왕대는 그야말로 철장패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기사단이었다. 한 달을 버티어도 전장에서 버티는데 훈련을 일곱 달이나 시켜 완전한 정예기사로 탈바꿈시켰다. 실력만 정예기사였던 패왕대는 실전을 통해 진정한 전사로서 태어나고 있었다. 개인의 실력도 대단한데 진형을 통한, 동료의 믿음을 통한, 자긍심을 통한 자신감은 적군에게 패배를 선사했다.

저녁부터 시작된 전투는 한밤중에도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무엇보다 이백 만의 인구를 품고 있는 공작성의 성문을 빼앗고 지키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우선 정문과 후문을 점령했다. 그리고 쿠타하타관문마저 제압했다. 이어 오십두 개의 성문을 제압하자 아침이 되었다. 별동대와 왕국군 4만이 들이닥치기로 예정된 시각인 아침이 되어서야 수많은 곳의 성문이 온전히 지켜졌다. 마법통신으로 불렀다면 늦은 오후에서야 도착할 거리였다. 미리 출발한 다음 실패할 경우 와이번나이트를 통해 회군할 계획이었다. 다행히 계획은 성공해 쿠타하타관문이자 공작성을 점령했다.

이윽고 점심 무렵이 되자 패왕대는 휴식도 제대로 못하고 성난 모습으로 나타난 타넬라공작을 맞이했다.

``이놈들아, 네놈들이 그러고도 기사냐? 어떻게 우리와 싸우지 않고 이곳으로 왔냐?"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모양이었다. 이후로도 침을 튀기며 외쳤지만 해석하기 힘든 욕이라 알아듣지 못했다.

나가서 싸우고 싶었지만 적군의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황금독수리와 대머리독수리 다섯 마리는 눈에 광기마저 엿보였다. 그나마 타스쿼럴후작이 이끄는 오우거만이 침착했다.

``나가서 죽일까 말까?"

철장패는 주변에 모인 지휘관에게 물었다.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나가기 싫다고 외쳤다. 특히 선발대를 이끄는 묵대형은 지금은 못 나간다고 꽥꽥 우겼다. 부하들이 운신을 못할 정도로 다친 상태였다. 몇 명은 죽기까지 해서 눈알이 붉었다. 다친 부하들은 의료병단에 의해 치유가 되고 있었지만 시간이 걸렸다. 의료병단의 치료가 어려울 정도로 중상을 입은 두 명은 와이번나이트 두 명에 의해 소하란으로 날아간 상태였다. 치유할 수 있는 장비가 의료병단에 없기 때문이었다.

패왕대에 속한 지휘관들은 묵묵히 침묵을 지키며 성벽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강한 적과 싸우는 기회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그것도 불이 붙은 적이었다. 용장인 여포, 설호룡, 버팔로잭, 혁무광, 타이탄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적군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간다면 어느 정도의 피해도 감수해야 했다. 그래서 차마 당장 싸우자고 입으로 꺼내지 못했다. 뜨거운 열정을 담고 총사령 철장패의 명령만 기다렸다.

``지금 나간다면 타넬라공작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 분노가 식은 타넬라공작이라면 잡기 어렵다. 지금이니깐 물불을 안 가리고 덤비겠지. 죽이기 딱 좋은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도 많이 죽을 것이다. 패왕대에서 한 명이라도 나가기 싫다면 가지 않겠다. 나가기 싫은 지휘관은 손을 들어라.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내라. 이번은 탓하지 않겠다."

듣고 있던 묵대형이 소리쳤다.

``아니, 그럼 패왕대만 나가는 것입니까?"

``그렇다. 나머지 기사단이 나간다면 죽기밖에 더하겠냐. 패왕대니깐 잡으러 가는 거지."

당연하다는 되물음에 왕국군의 지휘관과 별동대의 지휘관들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너희들의 얼굴이 왜 그래? 너희들은 싸우고 싶지 않잖아. 하지만 패왕대의 지휘관을 보아라. 싸우고 싶어 참고 있잖아. 묵대형 저놈이야 부하들 걱정하느라고 못 간다고 소리치는 거지. 결국에는 부하들이 완쾌되면 당장이라도 싸우고 싶다는 소리야. 어쨌든 강해지려면 강한 자와 붙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뜨거운 열정으로 싸우지 않는다면 지금보다 강해지는 건 포기해야 해. 그게 골드나이트 이후의 길이다. 싸우지 않고 소드마스터가 된다고 해도 기술만 오를 뿐이지 강한 건 아니야. 한마디로 죽음을 각오한 골드나이트와 싸우게 된다면 죽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총사령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싸우기 싫어도 싸우고 싶은 욕망을 부추긴다. 지휘관들은 서로를 보며 빙긋 웃었다. 별동대를 이끄는 포암영백작도 두려웠지만 총사령이 금별을 얕보는 것 같아 싸우고 싶어졌다.

``진정으로 강해지고 싶다면 지금 싸워야 한다. 아니면 영원히 강해지는 건 포기해야 해. 왜냐면 패왕대와 같은 기사들은 오늘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싸운다. 그래서 좀 더 강해진다. 나머지는 지금과 같은 기회를 놓친다. 제자리에 서서 안주한다는 소리지. 나쁜 건 아니다만 강해지려면 지금과 같은 기회는 돈을 주고라도 얻기 힘든 기회다. 적군이 뜨겁다 못해 타오르고 있다. 이런 적군과 싸워 이긴다면 패왕대는 또 하나의 전설이 될 것이다."

패왕대의 지휘관들은 좀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총사령의 말에 적군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공작성을 빼앗겨 적군은 분노했다. 모든 힘을 다해 싸울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보다 강해질 방법이 적군과 싸우면서 나올 게 분명했다.

패왕대의 지휘관들이 또렷이 철장패만 노려보았다.

``문제는 말야, 쉽지 않다는 거야. 내 새끼들인 패왕대의 기사들이 죽어. 전사로서는 싸우고 싶지만 지휘관으로서는 판단을 못하겠다. 그래서 너희에게 맡기는 거다. 싸우기 싫은 놈이 하나라도 나온다면 그걸 핑계로 나가지 않을 생각이다. 자, 앞으로 나와라! 나와서 활활 타오르는 적군과 싸우지 마라고 외쳐라."

총사령의 말을 듣다가 나서려던 롬멜은 참았다. 싸우고 싶지만 부하들이 죽는 게 두려웠다. 하지만 총사령은 좀 더 강해지길 원하는 거 같았다. 부하의 죽음이냐 아니면 죽음을 대가로 강해지느냐. 물론 강해지고 싶었다. 골드나이트에서 소드마스터로 오른 게 얼마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넘어야 할 산이 패왕대에는 많았다. 어쩌면 지금의 기회를 놓친다면 영원히 따라 잡지 못할 벽일지도 몰랐다. 그만큼 적군은 정예기사였다. 그들이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롬멜의 눈동자는 자꾸 적군과 붙고 싶었다. 그리고 소드마스터로서 한 단계 오르고 싶었다.

``저희 금별도 싸우겠습니다!"

금별을 이끄는 포암영백작이 두려움을 참고 외쳤다.

``안 된다. 아직 금별의 실력이 되지 않는다. 뻔히 죽을 자리로 부하를 내몰지 못한다. 그만큼 적군은 활활 타고 있다. 그 사실은 백작 본인이 알고 있을 것이다. 마음에서 외치는 소리를 무시하지 마라. 그 소리부터 들어라. 나중에 더 강해진다면, 지금과 같은 기회가 생긴다면 싸우길 바란다. 지금은 이곳을 지켜라. 그게 백작이 할 일이다. 안타깝지만 너희들은 아직 적군의 뜨거운 불에 달구어져 단련될 자격이 없다. 자격은 패왕대뿐이다. 그들에게 지금의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을 정도로 적군은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말리크백인장은 두려웠다. 아니 몸서리치게 화났다. 타넬라공작의 기세에 숨이 막혀 다리가 떨리는데 오히려 총사령은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났다. 자신은 약해서 두려웠다. 그래서 화났다. 총사령의 분위기에 휩싸여 서서히 지휘관들은 싸우고 싶어 했다. 특히 패왕대에 속한 지휘관들은 아까부터 침묵했다. 단순한 침묵이 아닌 싸우기 전의 침묵이었다. 기사라면 충분히 느껴질 정도로 투기가 점점 뻗어나오고 있었다. 강하면 피하는 게 당연하지 않았나. 그게 당연했다. 하지만 전사이기에 강한 자를 찾아 나선다. 강한 불을 찾아 헤맨다. 싸우고 싶으니깐 전사였다. 나약한 몸은 두려움에 떨었지만 가슴만큼은 충분히 총사령의 말을 납득했다. 적군이 강하기에 싸우고 싶다고 외치고 있었다.

``까짓것, 한 번 죽어보자!"

결정을 내린 총사령이 읊조렸다.

``패왕대는 출전한다. 지금 모여라... 기사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켜라... 한 번 죽어보자!"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패왕대의 지휘관들이 후다닥 지휘막사를 벗어났다. 그리고 부리나케 기사단을 모아 설명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도 패왕대의 기사들이 조용히 휴식하던 눈동자가 확 달아올랐다.

``싫습니다! 빠지지 않겠습니다!"

``야, 이 새꺄. 네놈은 약해서 안 돼. 여기서 쉬어라."

``싫습니다, 저도 기사입니다. 저도 근성이 있는 놈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빼시는 겁니까?"

기사단장에게 반항하는 외침이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패왕대에서 벌어지는 일은 보고 있던 기사들의 가슴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수많은 적군이 몰려와 두렵던 마음이 사라졌다. 오히려 같이 싸우지 못한 게 창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패왕대가 도열했다.

수군거림도 없었다.

입을 앙다물고 섰다.

한 걸음씩 지휘막사에서 내려오는 총사령에게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시끄럽게 성밖에서 떠드는 고함에 불끈 검집을 꼭 잡았다.

철장패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패왕대 앞에 섰다.

``지휘관으로서 싸우지 않는 게 좋다고 잠깐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전사이다.... 전사로서 판단한다면 패왕대를 이끌고 싸울 만하다고 느꼈다. 오히려 이 순간을 넘긴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강해지리라 판단했다. 지금과 같은 좋은 기회를 놓치면 너희들은 더 이상 강해지지 못한다. 그 정도로 너희들은 강해진 상태이다. 지금처럼 적군을 분노하게 만드는 건 쉽지 않다. 무엇보다 적군의 정예기사가 적당하게 물이 올랐다. 숫자도 적당하다. 전투하는 도중에 많이 죽을 수도 있다. 또는 몇 명에 그칠 수도 있다. 그만큼 적군은 활활 타오르고 있다.... 이번 전투를 이겨낸다면 너희들은 진정한 전사로 다시 태어난다. 그 하나의 사실이 너희들을 이끌고 전투하도록 만들었다. 레드나이트인 녀석들은 갑자기 실버나이트가 되어 검기를 쓸 지도 모른다. 골드나이트는 깨달음을 얻어 갑자기 소드마스터가 될 지도 모른다. 그 경우에는 침착하게 자신의 경지를 받아들여라. 아마도 이 자리에 있는 상당수는 그런 혜택을 받으리라 예상한다. 부단하게 실력을 닦았다면 이번의 전투로 확연히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총사령의 눈동자가 패왕대의 기사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한 번 죽자! 그리고 멋지게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나자! 싸우기 전에 너희들에게 하나 묻겠다... 죽지 않을 자신이 있나?"

마지막에 묻는 목소리는 영혼을 자극했다. 총사령의 물음에 패왕대는 화답했다.

``자신이 있습니다!"

``죽지 않을 자신이 있나?"

격동을 참으며 터진 총사령의 외침에 패왕대는 부르짖었다.

``자신이... 있습니다!"

마침내 쇄기진형을 갖춘 패왕대 앞에서 공작성의 정문이 열렸다.

갑자기 열리는 정문으로 적군이 달려들었다.

``돌격준비~~~~~~!"

총사령의 외침이 터졌다. 패왕대의 전용 전투자세를 취하던 기사들은 늘어뜨린 왼손을 허리에 붙이고 왼쪽 다리를 살짝 굽혔다. 오른쪽 다리를 뒤로 살짝 밀어 땅을 박차기 직전의 자세가 되었다. 마갑대검이 허리에 바짝 붙었다.

``돌격~~~~~~~~~~~~~~~~!"

목이 터지도록 외치는 총사령을 쫓아 쇄기진형이 정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패왕대가 나간 정문은 닫혔다.

전쟁의 진정한 정체는 유아독존이었다. 너무나 잔인한 전쟁이 싫어 정치라는 조율장치가 태어났다. 정치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더러운 정치가 싫다면 유아독존을 원하는 전쟁이 기다렸다.

보통 전사들은 머리 아픈 건 질색이었다. 모든 걸 요모조모 따지기 전에 가슴으로 느끼고 판단한다. 그래서 전쟁이 무엇인지 따진 적은 없다. 단지, 전쟁에서 강한 전사가 살아남는다는 건 분명했다. 웃기게 들리는 말일지 몰라도 전사는 피가 말리는 전쟁터에서 살아 있다는 걸 느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전쟁이야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7 전쟁이야기 87 - 퇴각, 퇴각, 고립된 독고붕린3 +3 09.03.02 9,954 64 20쪽
86 전쟁이야기 86 - 퇴각, 퇴각, 고립된 독고붕린2 +5 09.02.27 9,736 70 16쪽
85 전쟁이야기 85 - 퇴각, 퇴각, 고립된 독고붕린 +4 09.02.20 10,250 69 16쪽
84 전쟁이야기 84 - 전사의 외침4 +4 09.02.19 10,135 74 19쪽
83 전쟁이야기 83 - 전사의 외침3 +3 09.02.17 10,101 73 18쪽
82 전쟁이야기 82 - 전사의 외침2 +4 09.02.13 10,030 76 20쪽
81 전쟁이야기 81 - 전사의 외침 +4 09.02.13 10,624 68 24쪽
» 전쟁이야기 80 - 하량의 작전3 +16 08.11.14 11,181 71 37쪽
79 전쟁이야기 79 - 하량의 작전2 +6 08.11.12 10,766 73 13쪽
78 전쟁이야기 78 - 하량의 작전 +7 08.11.11 11,192 73 22쪽
77 전쟁이야기 77 - 오군과 육군의 거병4 +9 08.11.10 11,048 68 16쪽
76 전쟁이야기 76 - 오군과 육군의 거병3 +6 08.11.07 11,175 73 13쪽
75 전쟁이야기 75 - 오군과 육군의 거병2 +8 08.11.06 11,289 74 16쪽
74 전쟁이야기 74 - 오군과 육군의 거병 +8 08.11.05 11,368 78 16쪽
73 전쟁이야기 73 - 불타오르는 전쟁4 +7 08.11.04 11,514 79 16쪽
72 전쟁이야기 72 - 불타오르는 전쟁3 +10 08.11.03 11,605 73 19쪽
71 전쟁이야기 71 - 불타오르는 전쟁2 +5 08.10.31 11,743 81 15쪽
70 전쟁이야기 70 - 불타오르는 전쟁 +11 08.10.30 12,012 66 13쪽
69 전쟁이야기 69 - 수도 함락, 환호6 +4 08.10.29 12,035 76 13쪽
68 전쟁이야기 68 - 수도 함락, 환호5 +8 08.10.28 11,925 76 16쪽
67 전쟁이야기 67 - 수도 함락, 환호4 +8 08.10.27 12,320 110 15쪽
66 전쟁이야기 66 - 수도 함락, 환호3 +7 08.10.26 12,180 72 15쪽
65 전쟁이야기 65 - 수도 함락, 환호2 +13 08.10.25 12,500 71 15쪽
64 전쟁이야기 64 - 수도 함락, 환호 +6 08.10.24 12,856 73 12쪽
63 전쟁이야기 63 - 위험한 순간5 +8 08.10.23 12,301 73 21쪽
62 전쟁이야기 62 - 위험한 순간4 +7 08.10.22 11,988 71 16쪽
61 전쟁이야기 61 - 위험한 순간3 +9 08.10.21 11,923 78 19쪽
60 전쟁이야기 60 - 위험한 순간2 +7 08.10.20 11,851 76 22쪽
59 전쟁이야기 59 - 위험한 순간 +6 08.10.19 12,674 75 25쪽
58 전쟁이야기 58 - 연합작전 그리고 전복4 +12 08.10.17 12,339 68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