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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해 님의 서재입니다.

전쟁이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관해
작품등록일 :
2011.11.10 19:59
최근연재일 :
2015.12.11 00:45
연재수 :
296 회
조회수 :
2,953,691
추천수 :
22,779
글자수 :
2,466,673

작성
08.10.20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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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글자
22쪽

전쟁이야기 60 - 위험한 순간2

DUMMY

친구가 크게 기뻐하니 싫지 않았지만 왕세자의 일이 속을 태워 쉽사리 웃지 못했다. 가슴만 답답한 황보중건은 방금 들어왔건만 앉아 있지 못하고 집무실을 벗어나려고 문을 열었다. 그보다 먼저 세차게 문이 열려 황보중건의 머리를 박았다.

``여기에 철장패백작이라는 애송이가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어디에 있나? 당장 나와서 결투하자! 기사단의 총사령 묵대형이 결투를 신청한다!"

분노를 식히지 못하고 콧김부터 뿜어내는 묵대형은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며 근위대장실의 문을 막아섰다.

아침에 기사총단에 출근하여 집무실을 열었더니 세자궁으로 출두하라는 명령부터 떨어졌다. 삼왕자와 칠왕자에게 아부하며 붙은 적도 없었고 열심히 근무만 했던 터라 크게 신경도 쓰지 않고 세자궁으로 갔다. 왕세자에게서 들은 말은 통합참모본부로 이관하라는 명령이었다.

일반적으로 보다 높은 직장으로 올라가니 기뻐해야 옳았지만 목대형은 무관이었다. 조용하게 지내며 열심히 머리를 돌려야 생존하는 통합참모본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근무가 끝나면 기사들과 함께 시원하게 술이나 마시며 털털 웃는 용맹스런 무장이었다. 생각할 것도 없이 묵대형은 무릎을 꿇었다. 왕세자에게 명령만 내리면 무조건 따를 테니 이관하지 말아 달라고 탄원했다. 왕세자는 옆에 있던 하량과 신중하게 이야기를 나누더니 기사총단을 맡게 될 철장패백작과 이야기를 나누라는 지시였다.

세자궁에서 조용히 나왔지만 생각할수록 분하고 억울했다. 묵대형은 의외로 화끈하고 단순했다. 기사총사령이 된 것도 남들이 모두 피하자 얼씨구나 하고 맡게 된 자리였다. 갑작스런 왕세자의 죽음으로 새로운 왕세자가 결정되기 전까지 생각이 있는 무장이었다면 일부러 기사총사령의 자리를 피했다. 새롭게 등장할 왕세자에 의해 기사총사령의 자리가 바뀔 것은 당연했다. 고작 몇 달이나 하자고 기사총사령을 맡고 퇴역할 생각도 없고 잘못하면 눈 먼 도끼자루에 맞아 죽을 자리이기에 피한 자리였다. 하지만 묵대형은 기사단을 열심히 꾸린다면 알아주리라 믿고 자리를 맡았다. 기사총사령이 된 날짜가 50일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화끈한 남자 묵대형, 그제야 어떻게 돌아가는 줄 알게 되자 화부터 났다. 기사총단에 큰 변화조차 주지 못하던 묵대형은 화끈한 성격만큼은 궁궐 내에서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알아주었다. 철장패의 행방을 찾는 순간부터 점점 열이 솟구치다가 부하를 통해 위치를 확인하자 흑백쌍룡에 위치한 기사총단에서부터 근위대까지 달려와 벌컥 문을 연 상태였다.

불안한 마음에 심사가 복잡했던 황보중건은 열이 솟구쳤다. 명색이 근위대장실인데 함부로 들어온 묵대형백작에게 자존심에 상처를 입자 빨갛게 부어오른 이마부터 앞세워 소리쳤다.

``아무리 기사총사령이라도 그렇지, 이곳이 묵대형의 집이라도 되는 줄 알아? 누군 성질이 없어서 고분고분하게 지내는 줄 아냐고?"

묵대형은 화를 내고 싶은 애송이는 나서지 않고 엉뚱한 근위대장이 화를 내자 눈만 끔벅끔벅하다가 치뜬 눈망울을 억지로 내렸다.

``선배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잠시 철장패라는 애송이한테 할 말이 억수로 많습니다. 선배는 옆에서 구경이나 하십시오."

아무래도 큰 사단을 낼 분위기라 황보중건은 묵대형의 팔을 붙잡고 건물 밖으로 부리나케 나왔다.

근위기사들이 수근거리며 떠들다가 근위대장이 다가오자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흐르는 시냇물을 품은 잔디밭에 멈추고 근처의 긴 의자에 앉았다.

묵대형은 힘을 주어 팔을 풀려고 했지만 황보중건이 억세게 손목을 쥐고 놓지 않아 말이라도 듣자는 심산으로 저항을 포기했다. 황보중건은 묵대형을 잘 알고 있었다. 알다 뿐인가, 기사총사령이 될 때는 두 손과 두 발을 들면서 하지 마라고 말렸다. 하지만 황소같은 고집의 묵대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말해 봐라."

학교 선배에게 차마 험한 소리를 못하고 아침부터 있었던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그리고 황보중건에게 억울한 목소리로 사정했다.

``너무 열 나서 못 살겠습니다. 결투신청하고 깨끗하게 물러나겠습니다."

황보중건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열리지도 않았다.

``네가 하고 있는 행동을, 제 스스로 무덤을 판다고 한다. 무슨 뜻인지 아냐? 내가 그렇게 하지 마라고 외쳤는데 네놈이 듣지 않더니만 이렇게 된 게 아니야. 아이고 내가 미친다."

``그래도 열심히 근무하면 알아주지 않겠습니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는데 왜 열심히 살라고 하는 저를 세상은 건드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숨부터 나오던 황보중건은 대뜸 물었다.

``너의 등을 밀어주는 후작이나 공작은 있냐?"

엉뚱한 질문에 묵대형은 하소연을 멈추고 탄식했다.

``선배님, 저에게 그런 든든한 배경이 있었다면 이렇게 저를 무시하는 명령이 떨어졌겠습니까. 저처럼 성격이 불같은 놈을 누가 쓰겠습니까. 사실, 기사총사령이 되고 얼마 후부터 밀어주겠다는 대신들이 있었지만 제 성격에 일일이 간섭 받는 걸 싫어해서 헛소리는 그만하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후부터는 헛소리 따위는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그때 아무에게나 밀어달라고 하지 못해서 후회가 밀려옵니다."

``아니다, 네놈이 그나마 잘한 게 배경이 없다는 것이다. 누가 밀기라도 했다면 퇴역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말을 꺼내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표정이 근위대장의 얼굴에서 묻어 나오자 묵대형은 뜨겁던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조용히 통합참모본부로 가서 일해라. 며칠 일하고 못하겠으면 사직서를 내라. 그게 최선의 방법이다."

우울한 말이었지만 묵대형은 화끈한 남자였다.

``선배님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못 참겠습니다. 깨끗하게 결투신청을 하고 철장패백작의 목을 벤 다음 물러나겠습니다."

근위대장의 집무실에서 내려오다가 듣게 된 말에 철장패는 무뚝뚝하게 되물었다.

``저를 어떻게 하시겠다고요?"

묵대형은 철장패를 보자마자 목덜미를 부여잡고 흔들었다. 호흡을 점점 하기 힘들게 되자 철장패는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손을 놓으시지요. 저도 백작입니다. 제 명예를 존중해 주십시오."

``네놈같은 버러지가 있으니 세상이 흐려지는 거야. 더러운 간신배는 왕세자님의 곁에서 사라져야 해. 네놈을 죽이고 나까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서 요절내마."

벌레에서 간신까지 오른 철장패는 난감했다. 오히려 철장패보다 당황한 사람은 황보중건이었다. 거칠게 묵대형의 손에서 철장패를 풀어내고 철장패의 안전부터 살폈다.

``괜찮나? 어이, 죽지 않은 거지?"

뻔히 서서 아픈 목을 매만지는 철장패에게 얼마나 놀랐으면 죽지 않았나 물었을까.

``선배님! 제 손에서 저놈이 죽도록 놓아두십시오. 너무 화가 치밀어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가만히 있다가는 이런 애송이에게 패나라의 모든 기사들의 목숨이 맡겨 질 판입니다. 저 혼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솜털도 가시지 않은 놈에게 기사총단을 맡길 수 없습니다."

입에 거품을 물며 하소연을 하는 묵대형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살피던 철장패는 뒷짐을 졌다.

``저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투신... 웁, 웁... 선배님 입 좀 열어 주십시오. 웁, 웁!"

황보중건이 중간에 덥석 묵대형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이 친구가 통합참모본부로 가게 생겼네. 그런데 화끈한 이놈에게는 그곳이 안 맞아서 자네를 찾아오게 되었네. 계속해서 기사총단에서 근무하고 싶은데 말재주가 없어서 거칠게 말하는 거네.... 가슴이 넓은 자네가 이해를 하여 주게!"

억지로 말을 만든다는 게 눈에 보였지만 철장패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아까 결투 뭐뭐라고 말하면서 이름을 밝히셨는데 누구십니까? 근위대장님의 친구분들과 이야기를 하느라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얄밉게 들리는 철장패의 말에 묵대형은 불끈 힘을 쓰며 황보중건의 손바닥을 치웠다.

``내가 기사총사령 묵대형이다. 네놈이 원하던 자리에 있던 묵대형이란 분이시다. 이놈아 이제야 제대로 귓구멍이 뚫렸느냐!"

묵대형의 이름을 듣고서야 철장패는 대충 어떻게 돌아갔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저를 굳이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또다시 같은 질문이 나오자 묵대형은 결투신청이라고 외치지도 못하고 황보중건에게 막혔다.

``왕세자께서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라고 하셨네. 통합참모본부에서는 이 친구가 제대로 힘을 못 써서 말이야. 그래서 자네의 의견을 듣고자 왔지만 제대로 말할 재주가 없다보니 이렇게 성가신 연극을 펼친다네."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는 묵대형을 앞에 두자 철장패는 고민이 됐다.

``저에게 결투신청이라도 하러 오신 모양입니다.... 제가 그렇게 얕보이는 존재였습니까?"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위험한 냄새가 풍겼다. 주위로 구경을 나온 기사들이 있자 서둘러 근위대장 황보중건은 손을 크게 흔들어 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철장패는 묵대형을 노려보았다.

묵대형은 비릿하게 웃었다. 황보중건은 선배라서 함부로 몸부림치지 못했지만 주위의 기사들을 쫓느라 제압은 풀렸다.

``실력도 없는 놈이 기사총사령의 자리에 앉는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이름이 철장패라고 했나. 어떻게 왕세자님을 꼬셨는지 모르겠다만 기사총사령의 자리는 배경이 든든하다고 앉는 자리가 아니란 말씀이다. 나이가 어리면 어린 대로 주제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 너같은 버러지는 일찌감치 죽어야 세상이 조용하다."

구경꾼은 오히려 점점 늘어났다. 부하들을 시켜 막아도 이곳은 북흑룡이었다. 근위대 맞은편을 사용하던 군부의 사람마저 창문을 열고 구경하자 황보중건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었다. 백작들의 대결은 좀체 구경하기 힘든 사건이었다. 그래서 쉬고 있거나 근무하던 기사마저 모두 나왔다. 점점 많아지는 구경꾼과 상관없이 묵대형은 구겨진 옷주름을 제대로 펴고 외쳤다.

``기사총사령 목대형이 철장패백작에게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한다. 받아주겠나? 애송이...."

화끈한 남자로 유명한 묵대형의 커다란 외침이 울리자 주변의 건물들은 시끄럽게 웅성거렸다.

한염도백작은 건물 계단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한염도의 시선 속에 뒷짐을 풀지 않고 차분하게 서서 고민하는 철장패가 있었다. 결투신청을 받은 기사가 갖게 되는 긴장감이 그에게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게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묵대형백작은 실력으로서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술에 밝은 지장이 아니었다. 용맹스럽게 부하들을 이끌고 나서는 용장이었다. 그런 만큼 실전에 강했다. 그를 앞에 둔 젊은 백작은 너무나 침착하기만 했다. 오히려 불안하고 위험스러운 기운이 스멀스멀 피워 올랐다. 건들지 말아야 할 물건을 만졌을 때처럼 불안감이 스쳤다. 손바닥에 흐른 땀방울까지 발견하자 침중한 얼굴로 변해 철장패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떼는 순간 죽을 거 같은 기분이었다.

마당발 문인개치는 엿들은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철장패백작의 신분이었다. 육대봉공이 괜히 육대봉공이 된 게 아니었다.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 육대봉공이었다. 하지만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소문은 어디까지나 믿을 게 못 되었다. 진실이 하나라면 나머지 모두 거짓인 게 소문이었다.

군부대신 도룡검은 철장패의 실력을 보고 싶었다. 흑백쌍룡의 집무실이 아닌 별관에 온 것은 잠시 쉬기 위해서 왔다. 소란스러운 무장들의 소란에 창문만 열었다. 결투신청을 하는 묵대형의 외침에 귀가 솔깃했다. 철패왕의 후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이름이 묵대형이라고 했지... 내가 너무 조용히 있었던 모양이다."

젊은 백작의 작은 목소리는 분명하게 묵대형의 귀에 들렸다. 애송이의 반말에 당장이라도 화를 내야 했지만 무장으로서의 육감이 말렸다. 오히려 담담히 바라보는 철장패의 시선에 반응하며 저절로 방어를 위해 몸을 숙였다. 상대는 먼 거리를 단번에 압축해 다가왔다.

고수에게 일정한 거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거리가 멀다고 안심하는 순간 검에 의해 목이 잘렸다. 그처럼 위험을 느꼈던 묵대형이었지만 늦었다.

``나에게 뭐라고 했지? 결투신청? 그렇게 빨리 죽고 싶은 이유가 뭐야. 내가 가만히 있으니깐 몸이 근질거리면서 심심해?"

장난처럼 가벼운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목덜미를 잡힌 거구의 묵대형은 한 손에 잡혀 점점 들려졌다. 다급한 상황이 되자 주먹을 쥐고 철장패의 얼굴을 힘껏 내려쳤다. 분명히 맞혔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았다.

``좀 더 세게 쳐 봐. 이런 솜뭉치로 싸우자는 건 아니겠지?"

까만 흑진주처럼 맑은 철장패의 눈동자가 묵대형의 얼굴 앞에 다가왔다.

``이것 봐, 묵대형씨.... 너에게는 철패왕의 후예가 가벼운 장난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내가 결투신청이나 받아야 할 입장이야? 응?"

점점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자 뭐라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강렬한 충격이 복부에서 느껴지며 뒤로 날아갔다. 철장패의 뒷발차기에 허공으로 떴다가 바닥으로 굴렀다.

잠시 틈이 생기자 묵대형은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켜 황급히 몸을 굴렀다. 하지만 그림자처럼 쫓는 철장패의 발길질에 또다시 날아가야 했다.

저벅저벅, 철장패가 걷는 발걸음은 흙바닥인데도 불구하고 주변을 울렸다. 묵대형의 몸뚱이를 걷어차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 발로 내리눌렀다.

``이 새끼 말고 나에게 감정이 있는 놈들은 모두 나와라. 한꺼번에 해결하자. 일일이 상대하는 것도 귀찮다. 이놈 말고 어느 잡것들이 나에게 얼토당토않는 소리를 지껄이고 싶냐? 나에게 결투신청을 하다니...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내가 얕보였단 말이지. 결투신청을 하고 싶은 놈들은 모두 나와라. 이번만큼은 한 놈도 남김없이 상대하겠다."

잔잔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북흑룡에서 구경하는 모든 기사들의 귓속에는 파고들었다.

``제가 한 번 도전하고 싶습니다."

발끝에서 꿈틀거리는 묵대형을 다시 한 번 걷어차고 시선을 돌렸다.

``이름만 크게 외쳐라. 어떤 낯짝이 결투하고 싶은지 이름이면 충분하다. 덤벼라, 철패왕의 후예인 나에게 덤벼라. 오늘만큼은 죽이지 않고 밟아주마."

근위대 소속인 구룡현이었다. 나서서 싸우는 이유는 없었다. 강한 상대가 눈앞에 있었다. 싸우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렸다. 그게 이유였다.

``저는 검이 특기입니다. 맨손으로는 제대로 싸우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만 검을 들고 싸우겠습니다."

``상관없다. 검강이라도 마구 사용해라. 다만 그만큼 얻어터질 각오는 해야 한다."

싸움의 발단은 간단했다. 묵대형의 결투신청이었다. 하지만 싸움의 내용은 변질되었다. 나중에라도 결투신청을 일일이 받기 싫은 철장패의 성격 때문이었다. 귀찮은 게 싫어 한꺼번에 해결하고 조용하게 지내기를 원했다. 구경하던 기사들의 뜨거운 가슴은 지칠 줄 모르고 철장패에게 도전하게 만들었다. 어쩌겠는가 남자의 가슴은 뜨거움, 그 자체였다. 남자에게 뜨거운 욕망이 사라지면 그때의 남자라고 불리는 동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한 명씩 추가되던 결투신청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대기하는 기사마저 생겼다. 그곳에는 한염도백작마저 기다렸다. 어쩔 수 없었다. 싸우지 않고는 쉽게 흥분이 가라앉을 상태가 아니었다.

간혹 길게 승부가 이어지기도 했지만 한염도의 차례는 금방 다가왔다.

``아니, 저에게 나쁜 감정이 있었습니까? 영 생각하지도 못했네요. 기분이 더 찝찝하게 변합니다."

철장패의 너스레에 빙긋 웃었다.

``나도 사내거든. 강한 무사를 보았는데 이대로 놓치면 다음은 없을 거야. 한 번 싸우게 해주게."

``저는 결투신청을 하는 자와 싸우고 있습니다. 무사로서 싸우는 게 아닙니다."

``...결투신청을 하네. 잘 부탁하네."

난감해서 뒷머리를 긁적인 철장패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왕에 말을 꺼내셨으니 얻어터질 각오를 새롭게 하십시오."

근위대장 황보중건도 몸이 근질근질했다. 함께 싸우고 싶었지만 왕세자의 일로 참았다.

``무기를 관사에 놓고 왔습니다. 맨손으로는 어려운 분이라서 검이라도 잡겠습니다. 근위대장님, 남는 검이나 하나 주십시오."

서둘러 무기고에서 검을 꺼내어 건넸다.

궁궐 내에서는 무기의 착용이 금지된 상태였다. 근위대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장봉을 들고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한염도의 특기는 도를 다루는 기술이었다. 파르스름한 도강이 칼날에 입혀지자 번개같은 속도로 공격부터 했다. 시작한다는 말도 없이 득달같이 달려드는 칼날을 철장패는 검강을 일으켜 차분하게 막았다. 기다렸다는 태도로 공격을 방어하자 한염도의 칼날은 나비가 꽃밭을 날아가듯 자연스럽게 흘렀다. 안정된 자세에서 매끈한 공격이 쉬지 않고 나왔다.

``지금은 결투 중입니다. 보통 때의 대련이라면 계속 상대를 하겠지만 이만 승부를 가르겠습니다."

유연하게 방어만 하던 철장패가 땅바닥에 검을 꽂아 기합을 주자 땅바닥이 갈라지며 커다란 지진을 일으켰다. 울퉁불퉁한 땅바닥으로 인해 한염도는 안정된 자세의 공격을 펼칠 수 없게 되었다.

불안정한 자세의 한염도에게 하나의 검이 느리게 다가왔다. 평소와 같이 가볍게 막으려고 했지만 검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검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무게감에 서둘러 뒤로 피했다. 하지만 검날은 계속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점점 칼날을 붙잡고 오르던 검날은 한염도의 목에서 멈추었다. 뻔히 보면서도, 빠르게 피했는데도, 강한 힘으로 막았는데도 도저히 피하거나 막을 수 없었다. 검날이 칼날에 달라붙은 상태에서 아무리 피해도 정지된 상태에 있는 것처럼 올라왔다.

``전쟁터였다면 죽은 목숨입니다. 실제의 전투였다면 지금보다 다섯 배는 빠르게 움직입니다. 더 위험하다 싶으면 열 배의 속도까지 냅니다. 너무 규칙적인 공격이라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이제는 변화를 추구할 단계까지 오셨습니다."

담담하게 이어지는 설명에도 한염도는 아무 말도 못했다. 승부가 너무 빠르게 끝난 것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기술에 문제가 있다는 걸 발견했기에 암담했다.

``...살려 주어 감사하네."

한명도백작이 패배해 물러섰는데도 도전자는 끊이지 않았다. 결투신청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죽이지 않는다는 호언장담을 들은 후였다. 오십 명에서 육십 명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백 명이 넘게 근위대 앞 거리를 뒤덮자 승부는 끝이 났다. 자그마치 네 시간에 걸친 결전이었다.

``앞으로 나를 귀찮게 하지 마라. 결투신청과 같은 섣부른 짓을 걸고 온다면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가문까지 책임을 묻겠다. 이것은 철패왕의 후예로서 하는 경고다. 철패왕의 후예에게 걸린 명예를 가볍게 여기는 기사가 있다면 적으로 판단하고 목을 떨구겠다."

또다시 크지도 않은 잔잔한 말이 북흑룡을 메아리쳤다. 이번에는 구경하는 선에서 가볍게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맴도는 묵직한 울림이었다.

철장패는 일부러 묵대형백작 앞으로 다가섰다.

``정신을 차린 것을 알고 있다. 너는 앞으로 나의 부하다. 이미 목은 땅바닥에 떨어진 것으로 생각해라. 새로운 육신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나를 호종하라. 이것은 백작으로서 하는 말이 아니다. 철패왕의 후예로서 하는 말이다."

자기 할 말만 하고 근위대장실로 올라가는 철장패를 보며 묵대형은 눈물이 나왔다. 철패왕의 후예란 것도 모르고 결투신청을 했다. 싸우지도 못하고 얻어맞기만 하다가 끝난 싸움이었다. 어디에 하소연을 하기에도 너무 창피한 상황이었다. 욱신거리는 몸뚱이를 억지로 끌며 한 계단씩 올라섰다. 마지막 근위대장실을 앞에 두자 얼른 눈물을 훔치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묵대형마저 근위대장실로 사라지자 북흑룡을 뒤덮었던 기사와 병사들의 가슴에는 묘한 기쁨과 설레임이 꿈틀거렸다. 왕세자의 오른팔로 알려진 철백작의 신위를 직접 본 탓이었다. 단순하게 운이 좋은 귀족이라고 생각했지 철패왕의 후예로까지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것보다 철백작에게는 병사들의 가슴을 크게 울리게 하는 설레임이 있었다. 무턱대고 기대하게 만드는 설레임이었다. 북흑룡의 수군거림은 들뜬 상태로 변해 쉬이 가라앉지 못했다.

군부대신 도룡검은 어린 왕세자의 출현으로 불안하다가 철장패의 행동을 직접 보자 안심이 되었다. 국왕의 나이는 칠십이었다. 곧 죽어도 할 말이 없는 나이였다. 군부대신도 젊은 날의 국왕과 함께 해서 나이가 일흔셋이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억지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국왕에 소속된 대신들의 나이가 많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자 서서히 불안한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었다. 지금부터 국정을 왕세자에게 물려주어도 늦은 시기였다. 그나마 군권만큼은 확실하게 물려줄 수 있을 것으로 보여 다행이었다.

이상하게 번진 한판의 싸움으로 북흑룡은 철백작을 중심으로 빠르게 안정감을 되찾았다. 단순하게 왕세자의 오른팔이던 철백작으로서가 아닌 기사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존재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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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전쟁이야기 80 - 하량의 작전3 +16 08.11.14 11,175 71 37쪽
79 전쟁이야기 79 - 하량의 작전2 +6 08.11.12 10,761 73 13쪽
78 전쟁이야기 78 - 하량의 작전 +7 08.11.11 11,187 73 22쪽
77 전쟁이야기 77 - 오군과 육군의 거병4 +9 08.11.10 11,041 68 16쪽
76 전쟁이야기 76 - 오군과 육군의 거병3 +6 08.11.07 11,170 73 13쪽
75 전쟁이야기 75 - 오군과 육군의 거병2 +8 08.11.06 11,286 74 16쪽
74 전쟁이야기 74 - 오군과 육군의 거병 +8 08.11.05 11,364 78 16쪽
73 전쟁이야기 73 - 불타오르는 전쟁4 +7 08.11.04 11,511 79 16쪽
72 전쟁이야기 72 - 불타오르는 전쟁3 +10 08.11.03 11,602 73 19쪽
71 전쟁이야기 71 - 불타오르는 전쟁2 +5 08.10.31 11,736 81 15쪽
70 전쟁이야기 70 - 불타오르는 전쟁 +11 08.10.30 12,008 66 13쪽
69 전쟁이야기 69 - 수도 함락, 환호6 +4 08.10.29 12,030 76 13쪽
68 전쟁이야기 68 - 수도 함락, 환호5 +8 08.10.28 11,921 76 16쪽
67 전쟁이야기 67 - 수도 함락, 환호4 +8 08.10.27 12,317 110 15쪽
66 전쟁이야기 66 - 수도 함락, 환호3 +7 08.10.26 12,177 72 15쪽
65 전쟁이야기 65 - 수도 함락, 환호2 +13 08.10.25 12,495 71 15쪽
64 전쟁이야기 64 - 수도 함락, 환호 +6 08.10.24 12,853 73 12쪽
63 전쟁이야기 63 - 위험한 순간5 +8 08.10.23 12,298 73 21쪽
62 전쟁이야기 62 - 위험한 순간4 +7 08.10.22 11,985 71 16쪽
61 전쟁이야기 61 - 위험한 순간3 +9 08.10.21 11,919 78 19쪽
» 전쟁이야기 60 - 위험한 순간2 +7 08.10.20 11,847 76 22쪽
59 전쟁이야기 59 - 위험한 순간 +6 08.10.19 12,670 75 25쪽
58 전쟁이야기 58 - 연합작전 그리고 전복4 +12 08.10.17 12,335 6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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