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관해 님의 서재입니다.

전쟁이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관해
작품등록일 :
2011.11.10 19:59
최근연재일 :
2015.12.11 00:45
연재수 :
296 회
조회수 :
2,953,687
추천수 :
22,779
글자수 :
2,466,673

작성
08.10.19 18:07
조회
12,669
추천
75
글자
25쪽

전쟁이야기 59 - 위험한 순간

DUMMY

패나라의 수도에 와서 보름이 지났다. 왕세자가 된 독고명린은 내전에서 외전의 세자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량은 독고명린의 손과 발이 되어 함께 움직였다. 그것도 왕세자 책봉식에서부터 시작한 한 달 동안의 연회를 꾸준히 쫓아다녀야 할 입장이었다.

철장패는 올라온 날에 검치자작과 같이 국왕을 뵙고 간소한 의례를 통해 백작이 되었다. 영지를 받는 일이 아니었기에 귀족 총회당에 설 이유는 없었다. 단지 대귀족원탁회의에 소속된 9인의 상임귀족이 참석한 가운데 집전실에서 작위를 받아야 했다. 물론 국왕 뒤에는 국무대신, 군부대신, 재무대신, 칙령대신이 함께 했다.

이튿날 왕세자 책봉식에만 참석하고 근위대가 머무는 관사에서 조용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같이 왔던 기사들은 왕세자가 된 독고명린의 호위기사로 호종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다섯 명의 부사관마저 호위기사로 동행하도록 지시한 상태였다. 지금은 전쟁 중이었다. 어떤 위험한 사태가 발생할지 몰랐다. 오직 루아족 청오만이 남아 철장패의 등뒤를 지켰다.

굳이 모든 기사를 왕세자를 호위하도록 지시한 것은 왕국군을 장악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왕세자를 호위하면서 기사들의 얼굴은 알게 모르게 귀족에게 눈도장을 찍을 것이다. 왕국군의 고위귀족과 많이 접촉할수록 스스로 존재를 드러낼 것이다. 그래서 오자마자 한 것이 실력에 맞게 기사제복을 다시 맞추었다. 소드마스터라면 자주색 깃털투구와 망토, 갑옷에 문양까지 입히도록 했다. 대부분 군생활이 3년이 넘었고 8년이 넘으면 골드나이트는 물론이고 소드마스터의 상징까지 자유로웠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군생활이 딱 두 달밖에 안 되는 철장패와 장동수와 다르게 마음껏 실력을 증명할 수 있었다. 물론 써니로즈의 기사단장인 소용후는 제외되었다. 아직 군생활 8년을 채우지 못해 실력은 소드마스터였지만 실버나이트의 제복을 입어야 했다. 하지만 소용후는 기사단장이었다. 수도에 와서 기사단장의 상징을 입었으니 무시할 귀족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루아족 청오마저 레드나이트였다. 패나라의 군인으로서 군생활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과거 한때는 실력에 따라 골드나이트와 소드마스터가 결정이 되었다. 하지만 결정을 바꿔야 했다. 세도가의 자식들이 레드나이트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소드마스터의 장식을 달기 시작했다. 물론 군생활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 행태였다. 나중에는 돈을 주고 실력을 속여 기사제도는 물론이고 군 제도 자체에 큰 구멍을 만들었다. 그때는 실력에 따라 지위를 주는 제도가 있어 악용된 사례였다. 그 이후로 무조건 3년과 5년이 지나야 자격을 인정했다. 예외 규정이 없었다. 대체로 불만이 없는 규정이라 꾸준히 이어졌다. 누가 20대의 나이에 소드마스터에 오르겠는가. 있더라도 소드마스터의 장식을 달아주라고 외치는 무장은 없었다. 오히려 레드나이트의 상징을 달고 상대의 허점을 유도해 의외로 득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이십대 초반에 소드마스터를 내는 세가는 몇 곳이 있었다. 모두 실력이 쟁쟁한 세가들이다. 특히 검각세가와 적양세가 그리고 하령의 하후세가에서는 꾸준히 나왔다. 그 외에도 패나라에는 실력을 감춘 실력자들이 많았다. 세상을 자유롭게 부대끼며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을 기인이나 괴짜라고 불렀다. 그중에 한 명이 철패왕의 후예들이었다.

아직 왕세자로 보름밖에 지나지 않아 독고명린은 한참 업무를 받고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저녁부터 밤까지 연회에 참석해 자신만의 세력을 넓혀야 했다.

그와 달리 철장패는 긴장이 되려는 마음을 억지로 풀며 느긋하게 때가 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왕국군을 지배하려면 최소한 후작의 직위가 필요했다. 하지만 백작이 된 게 며칠이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기사단이었다. 왕국군의 기사단을 먼저 철장패의 손아귀에 쥐어주기로 했는데 감감무소식이었다. 아마도 난항에 빠진 게 분명했다. 기사단이야말로 무력의 근간이었다. 후작이나 공작들의 손길이 뻗어 있을 게 명약관화했다.

철장패가 걱정하는 건 다른 게 아니었다. 같은 편에 의한 암살이었다. 또는 반란이었다.

삼왕자가 국왕이 될 줄 알았는데 칠왕자가 된 상태였다. 자리가 위태롭게 변한 귀족들이 어떤 수단을 벌일지 안개속처럼 불명했다.

예를 들어 한 능력이 있는 귀족이 왕국군을 지휘하는 후작이라고 한다면 그가 다음 세대나 능력있는 부하에게 자리를 빼앗기기 싫어 삼왕자에게 있는 돈과 없는 돈을 퍼 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면 들키지 않아야 할 파렴치한 죄악도 저지르게 된다. 모든 정성을 쏟아 삼왕자를 밀었는데 갑자기 칠왕자가 나타나 군권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 어차피 내놓는 과정에서 들키지 말아야 할 치부도 들어날지 모른다. 그럼 지금이야말로 눈앞이 노란 상태로 변해 칠왕자를 노려볼 게 당연했다. 칠왕자를 우연한 죽음을 맞게 해 삼왕자를 다시 왕세자로 모시거나 그것도 안 되면 사왕자를 왕세자로 내세울 수 있다.

어떠한 반란이 일어나던 막으려면 무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기사단이라도 장악해야 했다. 그럼 설사 공작령이나 백작령에서 반란을 일으켜도 막을 수단이 생긴다.

왕국군의 기사단을 책임지는 사람은 묵대형백작이었다. 다혈질에 화끈하기로 유명했다. 그에게 말이라도 꺼냈을 텐데 소식이 없었다. 뭔가 위험한 느낌이 자꾸 철장패의 뇌리를 후려갈겼다.

지휘계통에 있는 지휘자는 매사에 조심해야 했다. 갑작스런 변화를 부하들에게 요구하면 위험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다. 위험한 일을 할 때는 부하들이 알아도 될 일이라면 설명하고 나야 큰 반항이 없었다. 무턱대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힘든 명령을 내린다면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강렬하게 반항했다. 지금이 딱 그와 같은 상태였다. 삼왕자에게 무리해서라도 물심양면으로 밀었던 자들의 반란이 있을 때였다. 칠왕자는 왕세자가 되어 무도회에 흠뻑 빠져 있었고 하량은 왕세자의 수발을 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부러 믿을 수 있는 기사들로 호위병력을 구성했는데도 철장패는 쉬이 긴장감이 가라앉지 않았다.

왕세자에게는 인재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인재라도 많다면 보다 신축적으로 대응할 텐데 답답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서성거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은 기다려야 할 때였다. 만약에라도 발생할 위기를 빠르게 대처하려면 연회에도 참가하지 않고 묵묵히 참아야 했다. 지금은 조바심을 내서 삼백 개의 왕국군 기사단을 총괄하는 총사령 목대형백작과 담판을 지어도 안 되고 연회에서 술을 마시며 취해도 될 상황이 아니었다. 그나마 하량과 호위장 한이염에게 예상되는 상황에 대해 말했다는 게 안심이었지만 걱정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선은 근위대장과 담소라도 나누며 붙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철장패는 망토를 어깨에 걸쳤다.

백작이 되면서 제복은 완연히 바뀌었다. 갑옷과 투구마저 호화찬란하게 변했지만 모두 취소했다. 간단하게 신분을 상징하는 계급장만 붙였다. 깃털투구는 새롭게 장만했다. 전처럼 깃털만 달린 민투구를 쓰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아 대장장이에게 말해 비싼 돈을 주고 샀다. 물고기 꼬리와 같은 장식에는 음성증폭마법이 걸려 있어 일부러 크게 고함을 지르지 않아도 되었다. 원하는 크기의 소리만큼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었다. 양귀에 달린 물고기 꼬리를 크게 넓힐수록 소리는 커졌다. 가끔 마나석을 교체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철장패의 마음에 들었다.

궁궐 안에서까지 갑옷을 착용하기 민망해서 제복을 입어야 했다. 그리고 옷걸이에 걸어진 삼각모자를 집어들고 머리에 썼다.

근위대 관사를 나와 훈련하는 기사들을 보며 근위대장이 머무는 집무실로 올랐다.

근위대는 단순히 국왕의 호위만 하지 않는다. 왕성의 치안은 물론 수도 중경의 불온한 움직임까지 미연에 방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규모가 컸다. 궁궐의 내성문은 3개, 외성문은 15개, 수도 중경으로 들어오는 235개의 문을 관리했다. 중경문으로 통하는 235개의 문은 패나라의 건국에 참여한 235명의 무장을 기념하는 뜻으로 숫자를 맞추었다. 실제로 사용되는 중경문은 189개였다. 나머지 46개는 사용되지 않고 닫혔다. 모든 문에 근위대가 파견된 상태였다. 내성문 3개는 근위대가 아닌 집사장의 권한에 속해 요청이 있는 경우만 지원했다.

패나라의 궁성이 갖는 가장 특이함은 내성에 있었다. 내전이자 내성은 칠백 미터의 천왕산을 깎아 만들었다. 평야 한가운데에 건립한 수도에 천왕산을 통째로 깎아 내성은 우뚝 솟았다. 내성 자체가 또 하나의 성채이자 패나라의 상징이었다. 아무리 먼 곳에 있더라도 날씨가 맑은 날에는 궁궐 내성인 천왕산이 보였다. 천왕산의 지세는 삼각형을 취했다. 암산인 천왕산의 지세를 따라 3개의 문을 냈는데 그곳이 내성문이었다. 내성문을 열고 들어가면 암벽동굴부터 나온다. 오랜 세월을 장인들이 갈고 매만져 평범한 복도처럼 보이는 길을 따라 높이 칠백 미터의 천왕산을 오르면 내전이 나왔다. 그곳에 왕실 가족이 살았다.

국왕과 왕세자는 외성에 궁을 짓고 살았다. 궁전에서 발원한 15층 건물 두 개는 등용대로를 마주 보며 외성을 뚫고 천왕문 광장까지 길게 이어졌다. 이 두 개의 건물을 달리 흑백쌍룡이라고 불렀다. 국가의 큰 대사가 생기면 광장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국왕에게 신문고를 울리거나 함성을 질러 소원을 빌었다.

광장 너머로는 수많은 상점들이 사통팔달로 이루어진 도로망을 따라 끝없이 이어졌다.

근위대장이 머무는 집무실은 두 개였다. 하나는 궐 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문 밖이었다. 궐 내에 있는 흑백쌍룡 집무실에는 근위부대장이 상주했고 궐 밖의 북흑룡이라고 불리는 구역에 근위대장의 집무실이 있었다. 북흑룡의 크기는 의외로 넓었다. 궁전이나 천왕문 광장과 비슷할 정도로 넓었다. 왕성을 지키는 모든 병력이 이곳에서 숙식하며 훈련했다.

그중에 근위대가 사용하는 장소는 북문 바로 우측이었다. 궁궐을 통과할 때마다 신분패를 보여야 했던 철장패는 근위대장을 만나기 전까지 꼼꼼하게 신분패를 살피는 기사를 앞에 두어야 했다. 북문이기에 통과절차가 복잡했다. 남문이거나 동문이라면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대체로 문관들이 동문을 사용했고 백성들이 남문으로 출입했다.

근위대를 책임지고 있는 황보중건백작은 나타난 19세 백작에게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정중하게 일어나 자리를 권했다.

``어서... 와, 오십시오."

반말을 할지 존댓말을 할지 무척이나 난처하게 만드는 철장패에게 공손한 어투로 대하기로 작정하고 자리를 권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철장패가 내민 신분패로 인해 함부로 말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같은 백작이라도 신분패가 증명하는 육대봉공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공작보다 낮고 후작보다 높은 직위였다.

육각형 모양의 신분패를 처음 본 기사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지만 이내 신분패를 증명하는 서식을 확인하고 서류를 작성했다. 신분패는 직사각형이었다. 육각형은 없었다. 그럼에도 존재하는 신분패였으니 그것이 국왕에 소속된 육대봉공이었다. 육대봉공 중에 두 명만이 무장이었고 나머지 네 명은 문관이었다. 각각 제갈가문의 가주와 초민정, 원철윤 그리고 박오독이었다. 모두 백작이나 후작의 관직에 있었지만 육대봉공으로서 대우하고 있었다. 이 네 명의 문관이 있었기에 왕족인 독고가문은 오랜 세월을 무너지지 않았다.

나머지 두 명의 무장은 관리로 나선 적이 없었다. 건국 시조와 같은 무장으로서 꿀릴 것이 없었기에 나서지 않았다. 그것은 무장으로서의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천 년이 가까운 세월이 흐르자 무색해졌다. 지금의 철장패는 과거에 갖고 있던 철패왕의 자존심은 없었다. 단순하게 잘못 엮여 여기까지 온 것뿐이었다.

집무실에는 근위대장 혼자만 있지 않았다. 친구로 보이는 세 명이 함께 의논하고 있었다.

``제가 나이도 어린데 편안하게 말씀하십시오. 저도 그렇게 막힌 놈은 아닙니다."

평소에 잘하지도 않던 환한 웃음을 지으며 철장패는 수더분하게 푼수를 떨었다.

``말을 편하게 하라고 하니 부담없이 하지. 여기에 앉지... 육대봉공을 보게 되다니 상상하지도 못했다."

자리를 권유하며 앉힌 황보중건은 자리를 파하지 않고 한 사람씩 소개했다. 철장패를 나쁘지 않게 본 모양이었다.

``여기에 있는 친구들은 모두 뜻이 맞아서 함께 떠드는 친구들이다. 직위만 상관하지 않는다면 이야기하기 편하다. 나름대로 대단한 친구들이다."

황보중건은 철장패의 싫지 않은 태도에 조심스럽던 자세를 버리고 화끈하게 자리에 앉혔다. 원래 무장이란 마음만 통하면 쉽게 사귈 수 있었다. 화끈한 성격 탓에 곤욕을 치르기도 하지만 무장들의 장점이기도 했다.

시골아저씨와 같은 푸근한 인상의 중년인을 가리켰다.

``이 친구는 토목건축업자이자 장사꾼이다. 사업이 썩 좋지 않다고 일감이나 물으러 궁궐에 왔다가 허탕 치고 나를 찾아온 불알친구이고, 이름은 서상득이다."

이어 철장패를 보면서도 담담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음료를 마시는 무게감이 넘치는 남자였다.

``한염도백작, 검 대신에 칼을 주로 쓰는 엉뚱한 친구라서 한직에 눌러앉은 상태이다. 서부왕국군에 소속되어 움직이고 있다."

황보중건이 묘한 얼굴로 구석에 파묻혀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한 남자를 잠시 보더니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마지막으로 문인개치라고 한다. 딱히 잘난 게 없는 친구이다만 못하는 것도 없는 친구이다. 일명, 중경 마당발이라고 불린다. 중경이 돌아가는 사정이라도 알아볼 요량이면 이 친구에게 부탁한다."

철장패의 어깨에 팔까지 두른 황보중건은 자랑스럽게 친구들을 보았다.

``아아, 그리고 지금 찾아온 청년 백작을 소개해야겠지. 일일이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왕세자의 오른팔이다. 이 친구만 잘 물고 있으면 출세길은 걱정없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친구들이여... 잘 꼬시어 인생이 풀리길 바란다. 나도 청년 백작에게 얼굴이라도 잘 보이려고 너희들을 소개한 것이니깐 난처하게만 만들지 말아라. 하하하."

전도양양한 귀족이라면 알아서 친구들이 모인다. 몇몇 자존심이 강한 인물만 침묵할 따름이었다. 지금처럼 첫 만남을 가진 첫 얼굴이라도 무조건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잘 나가는 친구를 사귀어 나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우르르 달라붙는다. 다가오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었다. 세상사에 나쁜 사람은 없었다. 나쁜 짓을 벌이는 게 죄악이지, 사람이 나쁘겠는가.

``그래, 찾아온 이유가 뭔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황보중건을 보다가 잠시 주위를 살폈다. 의자에 앉은 세 명마저도 궁금한 모양이었다. 별로 큰 문제가 될 이야기도 아닌 거 같아 말문을 열었다.

``수상한 움직임이 있나 궁금해서 왔습니다."

궁전 연회에 휩쓸려 춤추며 노래하고 있을 청년백작이 와서 한다는 소리가 수상한 움직임이었다. 앉아 있던 사람들은 싸늘한 기운이 가슴을 후볐다가 사라졌다.

분위기는 차갑게 굳었다. 서로 웃으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할 것처럼 보이던 장소가 조용해졌다. 근위대장의 집무실이라 근위대장의 일을 보조하던 기사들마저 일손을 멈추고 소파에 둘러앉은 다섯 명을 주시했다.

``근거가 있는 말인가?"

어눌하게 말을 꺼내는 황보중건의 얼굴이 한껏 긴장된 눈치였다.

``그렇게 긴장할 것은 없습니다... 육감입니다. 조용히 쉬지도 못할 정도로 뇌리를 후벼 파는 육감이라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수상한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이 되어 앉아 있지 못하고 왔습니다. 어쨌든 잘 모르겠습니다."

이어지는 철장패의 말에 긴장감이 와르르 풀리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단, 세 명만이 얼굴이 굳어져 무거운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중에 한 명이 되물었다.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라도 있나?"

한염도백작이었다. 그 곁을 실실거리며 입을 다물지 못하던 마당발 문인개치마저 얼굴이 굳은 채 날카로운 눈매를 빛냈다.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철장패를 대신해 마당발 문인개치가 들고 있던 컵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요새 중경이 약간 이상해. 설명하기 어렵지만 뭔가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찝찝했어. 그래서 나도 이곳을 찾아온 거야. 무슨 단서라도 얻을까 싶어서... 그런데 막상 철백작님에게서 나와 비슷한 느낌을 입으로 들을 줄은 몰랐네."

바늘 하나 떨어져도 들릴 정도로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너무 느낌만 믿다가는 아무 짓도 못해. 여편네의 잔소리를 들으며 깨어나서 비몽사몽으로 헤매는 격이야. 갑자기 여편네가 큰소리로 길바닥에 황금이 떨어졌다고 외치면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잖아. 정신을 차리면 아무 것도 없는 거야. 괜히 밑에 있는 부하들 힘들게 얼굴을 굳히지 마라고...."

황보중건의 불알친구 서상득의 잔투정이었다.

한염도백작은 젊은 백작에게서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그건 문관이 아닌 무장만이 갖는 육감이었다. 이 육감으로 무장들은 전쟁에서 살아남는다. 근거와 이유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육감이었다. 육감마저 없다면 살벌한 싸움에서 무장이 살아남기 힘들었다. 아마 육감이 없는 무장만 세상에 있다면 문관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자네가 고민하는 이유를 듣고 싶군. 그 이야기를 마음 편하게 풀어 놓게. 우리도 왕세자의 부하들이네. 맞지? 자네가 걱정하는 분은 왕세자이지?"

굳이 정확하게 꼬집어 말하지 못하는 젊은 백작에게 한염도는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젊은 백작이 고민하는 이유는 왕세자였다. 그렇지 않으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왕세자가 나온지 이제 보름이 지나네요. 처음에는 멋모르고 왕세자의 등장을 기뻐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삼왕자가 아니고 칠왕자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지 못할 겁니다.... 소식을 듣고 준비를 갖추려면 이삼일에서 일주일 정도가 걸립니다. 이곳 수도까지 오는 시간을 합한다면 늦어도 보름이면 도착합니다. 네, 그렇죠. 왕세자를 암살할 계획이 있는 자들이 있다면 지금 나설 시기입니다."

중간마다 입에 담지 못하는 생략어가 있었지만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알아들었다. 차마 입으로 반란이라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잘못 입을 열면 꺼냈다는 이유로 사단이 발생했다. 그것도 위험한 시기일수록 반란이라는 단어는 꺼내지 않는 게 오래 사는 길이었다.

``그럼 이곳에 온 이유가?"

심각한 이야기를 겨우 속으로 삭이고 황보중건은 차마 꺼내기 힘든 질문을 해야 했다.

``네, 그렇습니다. 만약의 사태에 가장 빠르게 대응하려고 왔습니다."

이제는 가볍게 서로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얼굴이 까맣게 죽은 기사마저 생겨 벌벌 떨었다.

``그렇지... 이곳이야말로 가장 빠르게 대처할 곳이 분명해."

바짝 속이 타기 시작하던 황보중건은 새삼스럽게 앞에 앉은 젊은 백작을 다시 보아야 했다. 그가 얼마나 새까맣게 속이 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도 애써 차분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근위대장실은 침묵의 도가니였다. 말을 꺼내고 싶어도 사안이 너무 큰 이야기였다. 웬만한 자는 말만 꺼내도 감옥에 갇히고 질문부터 받아야 할 사안이었다.

창해력 980년 4월 9일 금요일, 점심을 먹은 둥 마는 둥 뱃속을 때워도 시간의 초침은 무척이나 크게 울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도저히 답답해서 참지 못한 토목건축업자 서상득은 벌컥 화를 냈다.

``아, 미치겠네. 뭐가 이리도 덥고 찌뿌둥하냐, 환장하겄네."

``집을 짓는 것밖에 모르는 네놈이 뭘 알겠냐... 답답하면 집에라도 기어들어 가라. 괜히 큰 사건에 휘말리지 말고... 친구란 놈이 근위대장의 얼굴을 먹칠이나 하고 있어요."

너무 긴장한 탓인지 화를 쉽게 내지 않을 것 같은 황보중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고 싶지만 이번 일처럼 나를 흥분시키는 것도 없다. 옆에 꼭 붙어 있을란다. 어느 싸가지없는 새끼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나서 들어갈란다."

철장패는 토목건축업자 서상득의 옷매무새를 살폈다. 겉저고리를 대충 걸치고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갈라진 손톱과 억세게 일을 하지 않으면 나오지 못할 고생한 손바닥이 비단바지 위에 턱 올려졌다. 아마도 오랜만에 친우를 찾은 모양이었다. 옷이라도 제대로 갖추고 찾아온 모양새였다.

``혹시, 선박을 만드실 줄 압니까?"

난데없는 질문에 서상득은 의자에 앉아 있기 불편해서 이리저리 엉덩이를 움직이다 멀뚱히 큰 눈을 떴다.

``무슨 소리란가요?"

``몇백 척의 배가 필요해서요. 뭐 시간이 지나면 방법이야 나오겠죠."

지나가는 소리로 말한 것에 불과했지만 서상득은 진한 돈냄새를 맡았다. 장사꾼이라면 돈냄새에 민감하기 마련이지 않겠는가. 돈냄새가 날아가기 전에 얼른 물었다.

``강에서 타는 작은 배를 말한다면야 제 밑에 있는 녀석들이 만들기야 하죠."

``최소 천 명이 넘게 타는 배가 필요합니다. 나중에는 군선으로 활용할 생각입니다."

패나라는 사방이 육지였다. 군선을 운용할 만큼 큰 강도 없었다. 국경선인 후항강이 있었지만 그곳마저도 군선으로 사용하는 배는 없었다.

철장패와 서상득이 잡답을 하는 사이에 황보중건은 서둘러 근위대에 비상대기를 명령했다. 밤새워 근무하고 퇴근하는 근위대원마저 붙잡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리는 대원이 발생하자 근위대장 황보중건의 입에서 폭언이 터졌다.

``이 자슥들아, 누구 모가지가 떨어지는 걸 봐야 정신을 차리겠냐.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 줄 알기나 해. 까딱 잘못하면 이거야."

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해보였다.

``농담이 아니다.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무조건 대기해라. 일이 잘못되면 인생을 조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제야 예사롭지 않은 상황을 감지한 근위대는 빠른 속도로 부하들을 단속하며 대기했다.

아무래도 이대로 대기만 해서도 불안하자 황보중건은 세자궁으로 연락했다. 근위대를 늘려 배치하겠다고 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그대로 있으라는 지시였다. 근위대를 많이 배치해 귀족에게 나쁜 인상을 심어줄 수 없다는 뜻과 늘어난 손님으로 인해 배치할 공간마저 없다는 통보였다.

뒤늦게 하나의 쪽지가 근위대장 황보중건에 도착했다. 발신지는 세자궁의 책사 하량이었다. 서둘러 펼쳐 읽었다. 은밀하게 소집하여 소드마스터 서른 명을 일반인 복장으로 바꾸어 입고 저녁에 열릴 무도회 전까지 대연회장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젠장할, 소드마스터가 누구 집 강아지 이름이라도 되는 줄 아나."

명령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189개의 문을 지키는 중경 관문에서 소드마스터들을 끌어모았다. 정신없이 뛰어 준비가 되자 쉴 생각으로 집무실로 들어갔다. 어쩐지 전에 비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황보중건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가 자신의 집무실이 맞나 확인했다. 맞았다. 잘못하면 반란이 일어날지 모를 판국에 크게 웃다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니 지금 어느 때인데 커다랗게 웃고 있어. 정신을 차려야지! 안 그래?"

철장패는 황보중건의 말에 웃다가 얼른 입을 닫았다.

``친구분께서 재미있는 분이십니다."

토목건축업자 서상득은 황보중건이 들어오자 환한 얼굴로 크게 외쳤다.

``중건아, 드디어 일이 생겼다. 그것도 아주 큰 건수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크게 웃어?"

``선착장을 짓기로 했다. 선박이야 보통 재주로는 어려운 것이니 넘어가고 선착장이야 사람이 많이 들어서 문제지 못할 거 없다."

서부왕국군의 한 축을 이끄는 한염도백작은 철장패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함께 하고 싶었다. 지루하게 서부전선이나 지키며 하루를 때우다 끝나는 게 생활인 상태에서 바르쏭을 향해 진군해 영지라도 하나 얻고 싶어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전쟁이야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7 전쟁이야기 87 - 퇴각, 퇴각, 고립된 독고붕린3 +3 09.03.02 9,948 64 20쪽
86 전쟁이야기 86 - 퇴각, 퇴각, 고립된 독고붕린2 +5 09.02.27 9,733 70 16쪽
85 전쟁이야기 85 - 퇴각, 퇴각, 고립된 독고붕린 +4 09.02.20 10,246 69 16쪽
84 전쟁이야기 84 - 전사의 외침4 +4 09.02.19 10,132 74 19쪽
83 전쟁이야기 83 - 전사의 외침3 +3 09.02.17 10,097 73 18쪽
82 전쟁이야기 82 - 전사의 외침2 +4 09.02.13 10,026 76 20쪽
81 전쟁이야기 81 - 전사의 외침 +4 09.02.13 10,621 68 24쪽
80 전쟁이야기 80 - 하량의 작전3 +16 08.11.14 11,175 71 37쪽
79 전쟁이야기 79 - 하량의 작전2 +6 08.11.12 10,761 73 13쪽
78 전쟁이야기 78 - 하량의 작전 +7 08.11.11 11,187 73 22쪽
77 전쟁이야기 77 - 오군과 육군의 거병4 +9 08.11.10 11,041 68 16쪽
76 전쟁이야기 76 - 오군과 육군의 거병3 +6 08.11.07 11,170 73 13쪽
75 전쟁이야기 75 - 오군과 육군의 거병2 +8 08.11.06 11,286 74 16쪽
74 전쟁이야기 74 - 오군과 육군의 거병 +8 08.11.05 11,364 78 16쪽
73 전쟁이야기 73 - 불타오르는 전쟁4 +7 08.11.04 11,511 79 16쪽
72 전쟁이야기 72 - 불타오르는 전쟁3 +10 08.11.03 11,602 73 19쪽
71 전쟁이야기 71 - 불타오르는 전쟁2 +5 08.10.31 11,736 81 15쪽
70 전쟁이야기 70 - 불타오르는 전쟁 +11 08.10.30 12,008 66 13쪽
69 전쟁이야기 69 - 수도 함락, 환호6 +4 08.10.29 12,030 76 13쪽
68 전쟁이야기 68 - 수도 함락, 환호5 +8 08.10.28 11,921 76 16쪽
67 전쟁이야기 67 - 수도 함락, 환호4 +8 08.10.27 12,317 110 15쪽
66 전쟁이야기 66 - 수도 함락, 환호3 +7 08.10.26 12,177 72 15쪽
65 전쟁이야기 65 - 수도 함락, 환호2 +13 08.10.25 12,495 71 15쪽
64 전쟁이야기 64 - 수도 함락, 환호 +6 08.10.24 12,853 73 12쪽
63 전쟁이야기 63 - 위험한 순간5 +8 08.10.23 12,298 73 21쪽
62 전쟁이야기 62 - 위험한 순간4 +7 08.10.22 11,985 71 16쪽
61 전쟁이야기 61 - 위험한 순간3 +9 08.10.21 11,919 78 19쪽
60 전쟁이야기 60 - 위험한 순간2 +7 08.10.20 11,846 76 22쪽
» 전쟁이야기 59 - 위험한 순간 +6 08.10.19 12,670 75 25쪽
58 전쟁이야기 58 - 연합작전 그리고 전복4 +12 08.10.17 12,335 68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