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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빈 님의 서재입니다.

베나레스의총사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최근연재일 :
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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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1.14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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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레스의 총사(161)

DUMMY

머리털을 풀어헤친 갈색머리 청년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거울 화장대로 군살 없이 단단한 옅은 구리 빛 나신이 드러났다.

“아침부터 무슨 일입니까, 박사.”

벨린 데 란테가 탁자에 놓인 주전자를 들어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자코모 다빈치 박사가 총사의 맨 가슴에 드러난 흉터자국에 눈을 고정했다.

“이거.”

다빈치가 벨린의 가슴에서 오래된 흉터를 발견했다.

“란츠베르크에서 당했던 거군. 내가 수술한 자국이야.”

벨린은 말없이 옷걸이에서 바지를 빼내어 입기 시작했다. 박사가 반짝이는 눈으로 말을 이었다.

“아주 어려웠던 수술이었지. 자네는 그때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했었네. 피를 수혈하고 특제 약품을 썼으니 망정이지. 아리엘이 조금이라도 늦게 자네를 구했었다면, 자네는 십중팔구 죽었어.”

벨린 데 란테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불안하게도 그의 손동작이 더욱 빨라졌다. 그러나 정확하지 못했다. 그는 벨트를 조이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금속제 버클 부분이 손에서 자꾸만 미끄러졌다.

박사가 모자를 벗고 정중히 말했다.

“아리엘의 일은 안 됐네. 대위.”

벨린은 허망한 얼굴로 침대에 앉았다. 노인답지 않게 꼿꼿이 선 마법사가 그를 내려 보며 말했다.

“그녀는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즉사했을 거야. 해부학적인 소견으로는 그렇네. 자네의 그 숙적은 자네와 그녀가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바라지 않았던 거야.”

벨린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용무로 온 거죠?”

“자네가 긴 휴가를 간다는 소리를 들었네. 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큰 전투를 앞두고 있으면서, 거의 무한정에 가까운 휴가를 여제에게 받았다지?”

갈색머리 총사가 솔직한 어조로 말했다.

“고향으로 돌아갈 겁니다.”

“가서 뭐할 셈인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릴 겁니다. 란테 지방의 처녀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사냥꾼이 될 거예요.”

“자네를 사랑하는 여제는 어떡하고?”

벨린은 대답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당신이 있잖습니까.”

“상사병은 어떤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어.”

“정말 무슨 용무로 아침부터 찾아온 거죠? 내 마음을 돌려놓으라는 이사벨의 지시입니까?”

갈색머리 총사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마법사가 안경을 벗어 닦으며 대꾸했다.

“환자를 살피려고 왔지.”

“내 부상은 다 나았어요. 당신의 그 놀라운 특제 마법약과 외과 수술 덕분에 말이지요.”

안경을 다시 쓴 다빈치가 웃으며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그래 맞아. 자네의 몸은 분명 튼튼해.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아 어떤 마법의 영향을 받지도 않을 뿐더러, 술을 그렇게 퍼마셔도 민첩하고 빠른 몸매를 유지할 수 있지.”

바닥을 내려 보던 벨린은 다빈치와 눈을 마주쳤다. 다빈치가 웃음을 거두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자네는 분명 병에 걸려 있어. 이른바 마음의 병이라는 거지. 이 병은 아주 오래 전에 발병했던 걸세. 자네가 숲속에서 원수가 된 옛 연인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그 대리복수를 다른 여자들에게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벨린이 뭐라 항의하려 하자 다빈치가 재빨리 설명했다.

“나는 자네의 그 병을 란츠베르크에서 자네를 치료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네. 자네는 혼수상태인 와중에 계속 한 사람의 이름을 되풀이해서 말했지. 죽음의 순간에서 조차 사람의 이름을 잠꼬대처럼 말한다는 건 정말 그 인물에게 사무친 기억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로 인해 나는 자네의 정신 상태에 흥미를 느꼈고, 자네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동안 여러 번 정신 탐사를 시도했지.”

벨린이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내 머릿속을 들여다봤단 말입니까?”

“나는 자네의 비밀을 다 알고 있어.”

다빈치가 다리를 꼬아 앉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 자네는 그 여자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하고 있었네. 이 이율배반적인 병은 자네가 그 여자를 살려 보냈을 때부터 시작되었지. 자네는 그녀가 옛 전우들을 모두 죽여 버렸을 때 큰 죄책감과 배신감에 사로잡혀 있었어. 왜냐하면 자네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녀를 부대에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던 이가 바로 자네였으니까.”

벨린은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마법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갔다.

“그 사랑이 배반당했다고 여겨졌을 때, 자네는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적의 소년이 응당 할 수 있는 판단을 했지. 복수를 다짐한 거야. 하지만 자네의 첫 번째 복수는 결과적으로 실패한 꼴이 되었어. 그녀를 죽이지 못했거든.”

마법사를 노려보는 벨린의 불쾌한 얼굴에는 마치 ‘저 자가 어디까지 가는지 한 번 보자’ 하는 식의 자포자기가 내포되어 있었다.

“왜냐. 죽은 이들의 유령이 자네에게 복수를 부채질하고 자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지만 정말이지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그러나 자네의 정신이 위안을 얻으려면 좀 더 강한 자기 세뇌가 필요했네. 그녀가 자네에게 했던 것처럼, 오직 자기 자신의 입장으로 정당화해야 했던 거지. 그래서 자네의 기억 속에 그녀는 완벽한 악녀가 되었던 거야. 그 악녀를 혐오한 덕분에 난봉꾼이 되었고 진정한 사랑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거 아닌가?”

별안간 벨린 데 란테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마루를 지나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밖으로 향하는 목조건물의 마루 복도가 드러났다.

벨린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외쳤다.

“나가요. 당장!”

다빈치는 여유로웠다. 그가 천천히 물었다.

“정녕 그렇게 도망칠 셈인가, 벨린 데 란테?”

그 말에 벨린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외쳤다.

“도망이요? 나는 이미 총사로서 충분히 공적을 세웠어요. 반역자를 처단했고, 그녀는 여제로 등극했습니다. 내게 그 이상 뭘 바라는 겁니까?”

다빈치가 한마디 했다.

“자네는 지금 겁먹었어.”

벨린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박사가 말했다.

“피도 눈물도 없다고 믿어왔던 그 마녀가 무고함을 주장하니 잔뜩 겁을 먹은 거지. 거기다 그녀는 아리엘을 죽여 자기가 지나간 과거의 망령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었을 거야.”

벨린은 고개를 저으며 허탈한 얼굴로 벽에 기댔다. 그가 미끄러지듯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나는 파산했어요. 아리엘은 내 전 재산으로 산 여자였죠.”

다빈치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한때나마 자네를 치료해줬던 여자였겠지. 하지만 아리엘은 죽었어. 더구나 설상가상으로 그 마녀는 아리엘 때문에 복수에 눈을 떴지. 사랑했던 사람조차 자신의 결백을 믿어주지 않은 것에 대한 그 억한 마음 속 트라우마를 자각한 걸세.”

벨린이 정신 나간 사람 마냥 외쳤다.

“이것이 결국, 나의 복수가 아닌 그녀의 복수가 되었다는 말인가요? 자기를 믿어주지 않은 벨린 데 란테에게 쓴 맛을 보여줘서 그를 영원히 나락에 빠트리겠다는?”

다빈치가 앞으로 걸었다. 그 늙은 마법사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벨린 앞에 섰다.

“그 마녀는 자네의 딜레마가 만든 걸세. 자네는 그때 그녀를 죽임으로써 모든 관계를 끝내야 했어. 아니면 그녀를 진심으로 보듬어주었거나. 그렇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거야.”

“둘 다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눈물이 벨린의 눈매에 가득 고였다. 다빈치가 그를 흥미로운 얼굴로 내려 보았다. 벨린의 낯에서 마치 새로운 경험을 앞둔 유년기 소년의 두려움이 떠올랐다.

다빈치가 말했다.

“나는 자네가 아스티아노에서 그녀와 격돌했을 때, 이 모든 걸 눈치 채기 전에 그녀를 죽이길 바랬어.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자네는 복수를 완료해야 해. 만약 여기서 도망친다면 그 여자의 방식이 옳다는 것밖에 증명이 안 돼.”

마법사의 목소리가 확고하게 종지부를 찍었다.

“그 여자의 방식이라면 나도 아네. 이기적이고 무자비한데다 사악하고 파괴적이지. 자네가 그녀를 막지 못한다면, 그녀는 자신의 상관을 잃은 슬픔을 자네에 대한 복수와 연관 지을 거야. 이미 한번 당했으면서 또 그것을 원하는 건가?”

다빈치가 열린 문 앞에 섰다. 벨린은 아무 대꾸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마법사가 이렇게 단정 지으면서 떠났다.

“다음 희생자는 여제가 될 걸세. 자네가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


이것도 사실은 숨겨졌던 반전입니다. 주인공에 의해, 천성적으로 악녀로만 묘사되었던 안젤라가 사실 벨린 데 란테의 딜레마로 인해 생겨난 마녀였다는 것이지요.

벨린의 입장에서 안젤라가 저지른 짓은 아무리 자기방위의 정당성이 있다 해도 용납할 수 없었겠지요. 안젤라는 거기에 충격을 받고,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복수에 칼을 갈면서도, 한편으로는 약간의 사랑하는 마음을 화석처럼 간직하고 있달까요.

그러나 아리엘의 죽음으로 인해, 두 남녀가 화해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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