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이가빈 님의 서재입니다.

베나레스의총사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최근연재일 :
2009.04.08 21:55
연재수 :
177 회
조회수 :
987,412
추천수 :
2,493
글자수 :
702,223

작성
09.01.29 00:24
조회
2,668
추천
12
글자
12쪽

베나레스의 총사(167)

DUMMY

오후 9시. 히스파니아군의 기습적인 포격으로 전투는 개시되었다. 여제의 윤허를 받아 톨레도 공작이 명령한 이 포격은 꽤나 적절한 시기에 이루어진 선제공격이었다. 이미 모든 히스파니아군 연대는 공격에 유리한 3오 횡대의 대열을 갖추었고, 이 기습적인 포격은 적의 견고해 보이는 인간 벽을 깨부수려는 첫 번째 시도였다.

히스파니아군 포병대의 포격은 일품이었다. 최전선의 5파운드포가 먼저 불을 뿜었고, 그 다음으로 보병부대 대열 뒤에 자리 잡은 12파운드 중포가 거대한 폭음과 함께 포탄을 날렸다. 포탄은 화려하게 작렬하지는 않았지만 흙먼지를 일으키며 공중으로 튀어 올라 대열을 덮쳤고, 적의 사기를 저하하는데 충분한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그 강철제 포탄을 막아내기에 빌랜드 레드코트들의 육체는 너무도 물렀으며 매번 빌랜드군 대열을 관통한 포탄들은 여러 번의 충격에 산산조각 파열되고 나서야 저지되곤 했던 거였다.

그러나 빌랜드군 또한 이러한 장거리 소모전에 있어 어마어마한 인내심과 뚝심을 자랑하는 부대였다. 포격이 계속되고, 빌랜드군의 대열 곳곳에 일직선의 틈이 생겼지만, 일선부대의 야전지휘관들은 신속히 병력을 보충하였고. 길고 긴 이오 횡대 대열을 사수하였다. 단창을 든 부사관들은 대열을 사수하도록 목이 쉴 때까지 외쳐댔으며, 포탄에 다리가 날아간 대대 기수는 다른 병사가 매번 대체하였고, 군악대는 다시 사기를 북돋울 군가를 연주했고 잠시 후 보급부대에서 그들의 잠재된 공포를 조금이나마 달랠만한 구세주가 보급되었으니, 바로 럼주였다. 눈앞에서 불을 뿜어대는 스페냐드 드라고니스(히스파니아의 용)에 견딜 가장 강력한 힘은 애국심도, 승리에 대한 의지도 아닌 바로 적정량의 알코올이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빌랜드군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빌랜드군 포병대는 히스파니아군에 비해 열세로 평가되었지만 가공할 위력을 지닌 숙련된 부대임에는 틀림없었다. 빌랜드 포병의 강점은 사거리였다. 그들은 일반적인 야포 외에도 하우잇져(howitzer)라 부르는 곡사포를 배치하였는데 이 포는 사거리가 히스파니아군 야포보다 사거리가 더 길었다. 이러한 이점으로 빌랜드군 포병의 주력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보병부대의 후미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것은 히스파니아군의 전방 포병대가 적 포병을 초반에 제압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빌랜드군의 포격에 히스파니아군도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카라카스 대령의 전령을 기다리는 동안 펠리페 총사연대 제1대대는 브랜디를 배급받고 있었다. 오늘을 위해 번쩍이는 녹색 제복을 차려입은 병사들은 3오 횡대로 길게 늘어서서 보급담당 부사관들이 따라주는 브랜디를 받아 마시고 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술은 오직 한 잔이었다. 장교나, 부사관이나, 병사들이나 모두들 갈증에 마른 사람들처럼 그 독한 증류주를 꿀꺽 삼켰다.

벨린 데 란테는 700여 명이 넘는 대대 대열의 맨 우측 앞에 서 있었다. 연대 깃발과 국기를 든 기수 두 명과 중대장이 그의 옆에 서 있었다. 백마를 탄 까트린 데 세비아노는 그 주변을 맴돌았고, 포탄이 떨어지는 빌랜드군의 붉은 물결을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그녀는 적이 아니게 놀랐다.

“이런 광경…. 난생 처음이야.”

바로 그때 빌랜드 포병이 쏘아올린 첫 번째 포탄이 떨어졌다. 벨린 데 란테의 대대 바로 좌측이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피어오르면서 왼쪽 맨 끝에서 브랜디를 마시던 총사 여럿이 뒤로 튕겨 쓰려졌다.

사상자가 발생하자 대대원들은 바짝 긴장했다. 근처에서 들것을 들고 서 있던 외과의사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총사들을 들것에 실었다.

부사관들이 각자 맡은 분대원들에게 외쳤다.

“대열을 정비하라! 물러서는 놈들은 비겁자로 간주한다!”

한편, 아군이 적의 포격에 피탄 당하자, 대대 앞에 서 있던 히스파니아군의 전방 포병대가 분기탱천하여 포를 조작했다. 포병들은 능숙하고 재빠르고 포를 재장전하였고, 포병대를 지휘하던 젊은 소령이 검을 뽑아 휘두르자 히스파니아군 포병대가 다시 한 번 일제히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적의 포격은 계속 되었고 연속적인 폭발음이 일어났다. 비록 벨린의 대대로 집중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히스파니아군도 포격에 안전할 수 없었다. 곳곳에서 포탄이 굴러 떨어져 높고 짙은 흙먼지를 일으켰다.

까트린 데 세비아노가 초조하게 말했다.

“전진하지 않으면 저 포격이 우리들을 계속 겁먹게 만들 거야.”

“전령이 오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어.”

벨린이 포격을 가하는 아군 포병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푸른 군모를 쓴 젊은 소령이 또 한 번 사브레를 휘두르자 수십여 문의 5파운드 포가 쾅 하고 연기를 뿜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적군도 겁을 먹기는 마찬가지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정적인 순간에 저들의 대열을 먼저 무너뜨리는 거야. 저들이 겁에 질려 인내심을 잃고 먼저 돌격한다면 승리는 우리 것이 되니까. 다만.”

벨린 데 란테가 쓸쓸히 웃었다.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는 건 변하지 않아. 그것을 감내할 수 있겠어, 까트린 데 세비아노?”

까트린은 용감무쌍하게도 흔들리지 않았다. 투구를 쓴 그 여 기병은 등자를 밟아 말에서 내려서는 벨린 데 란테 앞에 섰다. 그녀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려는 듯이 갈색머리 총사의 제복 가슴 부분을 움켜잡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제발, 내 용기를, 시험하지 마, 벨린.”

그녀가 또박 또박 그렇게 말하고 말 위로 다시 오르려던 참이었다. 대대의 대열 뒤로 푸른 제복을 입은 근위총사가 나타났다. 근처에 서 있던 중대장이 벨린에게 알렸다. 제복을 입은 덩치가 큰 거인과 금발머리 총사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까트린은 총사들을 알아보고 뒤로 물러났다. 벨린이 반가운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알레한드로, 조안. 오랜만이군. 올 줄 알고 있었어. 내가 아는 위병이 자네들이 이곳으로 왔다고 어제 밤에 보고를 했었거든.”

“왜 몰래 전장에 나가려고 했던 거지?”

알레한드로가 대뜸 화를 냈다.

“우리보고 전우를 혼자 전쟁터에 보낸 겁쟁이가 되라는 거야? 그건 우리를 마치 경멸하는 거나….”

조안이 알레한드로의 앞에 서서 그를 가로막았다. 부상에서 회복된 그 금발머리 총사는 벨린 데 란테를 똑바로 노려보더니 외쳤다.

“이 위선자 같으니, 벨린 데 란테. 나는 이제 네 비밀을 알아.”

벨린은 전혀 놀라워하지 않았다. 그가 웃으며 물었다.

“누가 말해줬지? 다빈치 박사인가?”

“박사는 네가 모든 업보를 씻으러 갔다고 말했지. 거기다 자기가 아는 진실도 다 말해줬어. 네가 혼자 목숨을 바친다고 그녀들에게 저질렀던 죄가 청산될 줄 알아? 자신의 그 죄책감을 무마하려고 괴물을 만들어내고 불쌍한 자기 노예까지 죽였으면서.”

벨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조안이 성난 어조로 말했다.

“혼자서 모든 걸 갚으려는 건 비겁한 짓이야. 나 또한 아리엘을 보호하지 못했으니 책임이 있지. 그녀 대신 내가 죽었어야 했어. 그래서 이 자리에 온 거야. 너 혼자 죽으려는 꼴은 죽어도 보지 못할 것 같아서.”

“좋아.”

벨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너희들이 그렇게 원한다면 참가시켜주지. 하지만 말이야.”

벨린이 옆에 서 있던 보급계 상사에게 눈짓했다.

“그 전에 마지막 여생을 즐겁게 보내는 뜻에서 우리도 한잔 하는 게 어떨까?”

늙은 상사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잔에 브랜디를 가득 따랐다. 상사가 술잔이 담긴 쟁반을 내밀자 벨린은 전우들에게 술잔을 나누어주었다.

벨린이 잔을 들고 웃어보였다. 그제야 서운한 감정이 모두 씻어진 벨린의 두 동료가 따라 웃었다. 잔을 받아든 까트린은 마지못해 웃어 보이기는 했지만 숨이 턱 막혀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갈색머리 총사가 모두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더니 말했다.

“건배.”

모두들 단숨에 브랜디를 들이켰다. 독한 증류주 때문에 목이 타들어가기 시작하자 벨린 데 란테는 잔을 쟁반 위에 내려놓고 품 안에서 편지 봉투 두 장을 꺼냈다.

그가 편지 하나를 알레한드로의 코트 속으로 집어넣었다.

“이것을 잘 가지고 있다가 이곳을 벗어나거든 여제 폐하께 드리게. 그녀가 내게 말하곤 했던 감정이 진실이라면, 곧 깊은 상심에 빠질 테니 말이야. 자네에게도 한마디 하자면 말일세. 그 큰 덩치를 가지고 지금껏 살아남은 것을 감사히 여기게나. 만약 신이 있다면 신께서 자네를 보필한다는 증거밖에 더 되겠나.”

술 한 잔에 얼굴이 붉어진 알레한드로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반문했다.

“마치 자네 혼자 죽는 것처럼 말하는 걸, 벨린 데 란테?”

“맞아.”

그때 옆에서 풀썩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안이었다. 잔을 손에 꾹 쥔 채로 그는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몇 초 후 말에 도로 오르려던 까트린도 말 앞에서 힘없이 주저앉아 버렸다.

알레한드로는 벨린의 간계를 눈치 채었다.

“빌어먹을, 저번에 항구에서 했던 것처럼…. 잔에다 그 마법약을 탄거군.”

벨린이 슬픈 표정으로 나직이 말했다.

“자네들이 이 전투에서 죽는다면 나는 무척 슬플 거야. 조안에게 미안했다고 전해주게. 그는 이미 완전히 뻗어버렸으니 내가 진정 사과할 시기를 놓쳐버린 셈이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알레한드로는 바닥으로 쓰러져 눈을 감았다. 벨린은 까트린 데 세비아노에게 돌아갔다. 까트린은 아직 의식이 끊어지지 않았다.

벨린이 다가오자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가 불분명한 의식으로 물었다.

“어째서….”

“네 잔에는 약을 조금밖에 타지 않았어.”

벨린이 그녀의 투구를 벗긴 다음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고는 설명했다.

“네가 품고 있는 내 마지막 유산이 약의 영향을 받게 할 수는 없었거든.”

“그…그게 무슨 소리야….”

벨린은 대답없이 남은 편지 한 장을 까트린의 외투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지려는 까트린의 두 눈에 눈물이 한가득 솟았다.

갈색머리 총사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깨어나는 대로 아스티아노에 가서 이 편지를 다빈치 박사보고 읽어달라고 해. 그는 네게 설명을 해줄 테고, 그렇게 되면 난 모든 빚을 갚는 거야.”

“아니야….”

까트린이 눈을 감는 순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건 아냐….”

그리고는 의식을 잃었다.

벨린은 기절한 까트린 데 세비아노를 번쩍 들어 말안장 위에 얹었다. 장교들의 외침에 셔츠만 입은 외과의사들이 들것을 들고 뛰어왔다.

벨린 데 란테가 나직이 설명했다.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주게. 적군의 포탄이 닿지 않는 아주 안전한 곳이어야 해.”

외과의사들은 그의 지시를 따랐다. 그들이 까트린과 두 총사를 후방으로 이송하자, 벨린 데 란테는 옆에 있던 중대장에게로 몸을 돌렸다.

“지금 몇 시지, 대위?”

중대장이 회중시계를 꺼내어 보았다.

“아홉시 이십분입니다. 대대장.”

“카라카스 대령에게 약속한 시간이 되었군.”

벨린이 애당초 명령을 전달할 전령 따위는 없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말했다. 그는 경직된 얼굴로 꼿꼿이 서 있는 대대원들에게로 몸을 돌렸고, 차렷 자세를 취하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픽스 바이요네타!(전원 착검!)”

장교들이 검을 뽑으며 명령을 복창했다. 총사들이 짧은 총신을 만회할 긴 총검을 일제히 장착했다. 쇠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총사들이 착검을 끝내자, 포성도 잠시 멈춰버렸고 대대 주변은 순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벨린 데 란테가 머스킷총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며 외쳤다.

“바탈리아노, 마체!(대대, 앞으로 갓!)”


-----


결전의 시작.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베나레스의총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77 외전 - 긴귀쟁이 독립전쟁(1) +15 09.04.08 2,768 12 7쪽
176 베나레스의 총사 후기 +52 09.03.19 4,323 10 6쪽
175 베나레스의 총사(172, 마지막화) +93 09.02.23 5,034 16 15쪽
174 베나레스의 총사(171) +25 09.02.15 2,947 10 8쪽
173 베나레스의 총사(170) +21 09.02.10 2,850 11 9쪽
172 베나레스의 총사(169) +24 09.02.07 2,604 12 7쪽
171 베나레스의 총사(168) +27 09.02.03 2,634 9 7쪽
» 베나레스의 총사(167) +30 09.01.29 2,669 12 12쪽
169 베나레스의 총사(166) +26 09.01.26 2,726 12 10쪽
168 베나레스의 총사(165) +33 09.01.22 2,810 12 10쪽
167 베나레스의 총사(164) +28 09.01.22 2,737 9 7쪽
166 베나레스의 총사(163) +27 09.01.18 2,692 11 10쪽
165 베나레스의 총사(162) +22 09.01.16 2,558 12 8쪽
164 베나레스의 총사(161) +21 09.01.14 2,595 10 9쪽
163 베나레스의 총사(160) +20 09.01.13 2,634 13 9쪽
162 베나레스의 총사(159) +34 09.01.12 2,715 10 7쪽
161 베나레스의 총사(158) +31 09.01.09 2,845 12 10쪽
160 베나레스의 총사(157) +14 09.01.09 2,672 13 8쪽
159 베나레스의 총사(156) +22 09.01.07 2,695 13 8쪽
158 베나레스의 총사(155) +21 09.01.06 2,748 9 8쪽
157 베나레스의 총사(154) +19 09.01.04 2,567 12 7쪽
156 베나레스의 총사(153) +28 08.12.31 2,659 13 12쪽
155 베나레스의 총사(152) +25 08.12.25 2,729 12 9쪽
154 베나레스의 총사(151) +21 08.12.22 2,468 11 10쪽
153 베나레스의 총사(150) +26 08.12.21 2,577 12 8쪽
152 베나레스의 총사(149) +23 08.12.18 2,720 12 9쪽
151 베나레스의 총사(148) +17 08.12.15 2,572 10 9쪽
150 베나레스의 총사(147) +24 08.12.12 2,696 9 9쪽
149 [부록]베나레스의 총사에 대한 작가의 덧붙임(1) +14 08.12.12 3,481 5 15쪽
148 베나레스의 총사(146) +19 08.12.12 2,784 12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