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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빈 님의 서재입니다.

베나레스의총사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최근연재일 :
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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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1.18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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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레스의 총사(163)

DUMMY

이사벨 여제가 주먹을 쥐며 기침했다.

“언제 아스티아노에서 여기로 왔느냐.”

“하루 종일 말을 타고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폐하.”

벨린이 가만히 서서 말했다.

“폐하의 주치의가 휴가를 떠나려던 저를 찾아 왔었지요. 말씀드릴 게 있어 이 야심한 시간에 온 것입니다.”

“앉아서 얘기하거라.”

벨린 데 란테는 의자에 앉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웃거나, 달콤한 말로 분위기를 에로틱하게 환기하지 않았다. 여제는 그것에 더 매료되었다.

벨린이 반짝이는 갈색눈으로 여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제게 주신 휴가는 반납하겠습니다.”

벨린이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폐하의 곁에 있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이사벨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기침이 저절러 멈출 지경이었다. ‘죄송합니다.’라니. 그녀가 아는 벨린 데 란테는 결코 그런 말을 쓸 위인이 아니었다. 벨린의 입술 끝이 무언가 나오려는 말로 살짝 떨렸다. 당황한 여제는 가슴이 시큰해지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에게 이런 말을 쓰게 할 정도로 절박함을 선사할 것일까.

벨린이 냉정을 되찾으며 말했다.

“한때 제가 받은 배신을 세상의 모든 여인들에게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습니다. 폐하를 뵙기 전에는, 그 복수를 착실히 이행해나갔었지요. 저는 그녀들의 마음을 빼앗는 대로 그녀들을 버리고는 했던 것입니다. 그녀들의 긍지를 타락시키고, 애정을 빼앗아먹으며 본능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건 옛날 일이다.”

이사벨이 에멜무지로 한마디 했다.

“짐의 성은을 얻은 네게 그 정도의 사면도 못해주랴.”

벨린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처음에는 폐하도 제 표적이었지요. 그러면서 동시에 다른 여인들도 덫에 걸려들었던 것입니다. 비록 원수의 용모와 닮았음에도, 제 종 노릇을 충실히 했던 아리엘과 저와 함께 싸웠던 까트린 데 세비아노 대위가 그런 여인들이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녀들을 사랑했던 적이 없습니다. 단지 가지고 놀고 싶었을 뿐이지요. 죄책감과 복수심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저는 그녀들에게도 사과할 예정입니다.”

이사벨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주먹을 꼭 쥐며 입을 열었다.

“그럼 네가 정녕 사랑했던 여인은 오직 하나, 네 종을 죽이고, 지금도 짐의 반대편에서 짐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그 마녀뿐이라는 게냐?”

벨린이 진솔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폐하께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폐하는 이제 진정 제 유일한 여인입니다.”

이사벨이 울음을 터트리며 외쳤다.

“그렇다면 왜, 짐을 떠나려고 한단 말이냐?”

그녀가 얼굴을 감싸고 흐느꼈다. 벨린 데 란테는 여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황실인장반지를 낀 손목을 잡아 부드럽게 내렸다. 눈물 가득한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망울이 드러났다.

그녀의 눈망울이 슬그머니 밑을 내려 보는 가운데 벨린이 그녀의 반지에 키스했다.

벨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안젤라 노스트윈드는 제가 만든 유령입니다. 그 유령이 다른 이들을 헤치기 전에 처치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폐하의 옥체를 보존함과 동시에 제가 정을 나눈 다른 이들이 더 이상 피해보지 않게 하려는 겁니다. 제가 이 전쟁터로 돌아온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녀가 아직 이 제국에 있는 이상 그곳에서 저와 격돌하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벨린이 문가로 물러났다. 여제가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다가서려 했다. 갈색머리 총사가 절을 하며 말했다.

“그 괴물을 처치하면 돌아오겠나이다. 허나 폐하께서 전쟁터에 계신다면 언제나 저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만. 아디오스.”

그러나 벨린은 조용히 사라질 수 없었다. 여제가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벨린 데 란테를 안고 키스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마지막 선물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사벨 여제는 벨린 데 란테의 온기로 몸이 훈훈해질 때까지 그를 놔주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온기가 온몸으로 퍼지자 여제는 그를 풀어주었다.

벨린은 유령처럼 문을 열고 달빛 속으로 사라졌다. 침대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던 이사벨 여제는 창문을 통해 그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서 있었다.

* * *

이튿날, 아침 벨린 데 란테는 호세 데 카라카스 대령에게 찾아갔다. 들판에는 펠리페 총사연대의 잿빛 막사가 수십 채도 넘게 세워져 있었다. 총사대원들은 머스킷총을 사총하여 곳곳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다. 각 대대의 의장대 기수들은 사브레와 복장을 점검하고 있었으며, 나팔수와 드럼 주자를 비롯한 군악병들은 군가를 연주하는 중이었다.

벨린은 란츠베르크 전투에서 그 유명한 지휘관과 인면을 나눈 적이 있었다. 연대장의 막사에서 그들은 히스파니아식으로 서로를 껴안고 인사했다.

카라카스 대령이 성을 냈다.

“고생이 많았군, 대위. 주안 스피놀라 그 개자식이 폐하의 근위대를 말아먹었다고 들었네.”

“그는 죽었습니다, 대령. 응당 그 댓가를 치른 거지요.”

벨린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오늘 오후에, 펠리페 공작이 대군을 이끌고 합류한다지요? 빌랜드군과 동방회사 잔당들은 산 마리아를 통해 이곳으로 올라오고 있고요. 멋진 전투가 있을 겁니다. 그 전투를 위해 옛날처럼 야전총사연대에서 싸우고 싶습니다만….”

“그대는 폐하의 사람이 아닌가? 자네가 몸담았던 근위총사연대는 어쩌고?”

벨린이 조용히 웃었다.

“저는 폐하의 눈 밖에 났답니다. 그녀를 위해 새로이 백의종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전투는 필시 톨레도 공작이 지휘할 텐데 근위총사연대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앞으로 나설 수 없어요. 나설 수 없다면 전투를 못하는 것이고, 전투를 못한다면 제 죄를 씻을 길이 없죠. 만약에 이번 전투에서 살아남는다면 저는 다시 한 번 폐하와 함께 하는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카라카스 대령이 팔짱을 끼며 걸걸한 어조로 말했다.

“안 그래도 우리 연대는 경험 많은 장교들이 부족하네. 란츠베르크에서 피해를 입은 이후 신병들로 대체되었지만 저들은 아직 실전경험이 없네. 톨레도 공작의 군대라고 다른 건 아닐세. 병력이 부족하여 모두가 선형대열을 유지해야 하는 판국이니, 우리라고 어쩔 수는 없는 거야. 아무튼 그는 우리 연대를 최정예로 알고 전장에 내보낼 텐데 숙련된 대원들이 없이 어떻게 버틸 수 있겠나?”

벨린이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며 말했다.

“제가 최전방 대열을 맡을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놈들에게 한방 먹이겠습니다. 히스파니아 총사대원에게 대열 전투는 사치지만, 그렇다고 못할 것도 없지요.”

대령이 벨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귀관을 우리 연대 소령으로 임명하지. 녹색 제복을 입던 시절을 떠올릴 수 있도록 새 제복도 지급하겠네. 이번 분란으로 자네의 제복이 꽤 많이 낡은 것 같아서 말이야.”

그날 하루, 벨린 데 란테는 그가 맡은 최정예 대대를 점검하며 돌아다녔다. 그 대대의 대대장은 지난 전투에서 전사하여 공석이었다. 오후 내내 숙영지에서, 새 젊은 대대장은 장교들과 부사관, 고참병들을 한 군데로 모았다.

“귀관들도 알다시피, 1만이 넘는 빌랜드인들과 동방회사의 반역자들이 수도를 점령하고 폐하를 폐위하기 위해 저 산기슭 너머로 병력을 집결시켰다. 우리의 임무는 간단하다. 저들이 자신들의 무강선 머스킷총을 쏘기 위해 다가오기 전에 멀리서 우리의 바인 베스 강선총으로 갈겨버리는 거다. 질문 있는 사람 있나?”

대대의 총사대원들은 저 갈색머리의 젊은 소령이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벨린 데 란테였다. 펠리페 연대에서 그의 이름은 ‘란츠베르크 전투의 선봉자’, 혹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갖다 올 총사’ 따위로 알려져 있었다. 물론 병사들에게 가장 위안이 될 만한 별명이라면 ‘곁에 있다면 총알도 피해갈 여제의 사냥꾼’이란 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경외를 드러냈고 아무도 질문도 해서는 안 되는 분위기가 흘렀다. 그러나 어디에나 분위기를 깨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었고, 고참병들 틈에 있던 그런 자 가운데 하나가 질문했다.

“당신이 정말 벨린 데 란테입니까?”

벨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려진 이름은 그렇다. 다른 질문?”

“까살라에 있었을 때 400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다니치 귀족들을 저격했다면서요?”

“200미터가 한계야.”

벨린이 안광을 번뜩이며 강조했다.

“내 아버지였던 빈센초 상사는 300미터까지 성공했지만 내 눈으로 그 이상은 어렵지. 다른 질문?”

“여제 폐하께 간택받아 근위총사연대로 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왜 이 연대로 돌아온 거요?”

“폐하께서 내게 흥미를 잃으셨거든. 다른 질문 또 있나?”

총사들이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새로 온 벨린 데 란테에게 경의하는 뜻으로 모자를 벗고 경례하는 대원들도 있었다. 누구는 새 대대장의 임명을 축하하며 유쾌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견장을 찬 부사관들이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고참병들에게 조용히 할 것을 강요하고 있는데 불현듯 앳되고 여린 느낌을 주는 목소리가 질문했다.

“너는 이 싸움을 왜 하러 나왔지?”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벨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병사들의 틈을 바라보았다. 흉갑을 착용하고 긴 승마용 부츠와 장갑을 낀 기병대원이 총사들 사이에서 나왔다. 술이 달린 금속 투구를 옆구리에 끼었고, 허리에는 미려한 곡선을 자랑하는 골동품 같은 기병도를 차고 있었다.

벨린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 기병을 응시했다. 까트린 데 세비아노. 그 금발머리 여기병이 진지한 얼굴로 걸어나오며 한마디 더 했다.

“벨린 데 란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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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마무리가 잘 되어가나 모르겠네요. 리플좀 부탁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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