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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사탕의 책장입니다.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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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사탕
작품등록일 :
2014.06.28 12:48
최근연재일 :
2015.10.05 14:53
연재수 :
27 회
조회수 :
11,205
추천수 :
63
글자수 :
141,630

작성
14.09.03 18:25
조회
395
추천
1
글자
11쪽

첫 번째 이야기 (17)

DUMMY

이야기의 시작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분명 존재 할 테지만 그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을 한번 뜬 순간 그는 그곳에 존재했다. 푸른 눈의 라샤와, 검은 눈의 루쉐가 그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는 제 손에 들려 있던 검이 자신의 것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그들이 하는 대화에서 매우 단편적인 정보들을 알아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원래 인간이었고, 스스로 그들을 찾아왔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제 모든 것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에겐 윤회의 고리를 찾아갈 영혼도, 과거를 알 수 있는 기억도 없었다. 소중한 것을 이루기 위해 모두 제 손으로 바친 것이라 했다.


그들이 비웃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라는 존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라샤는 그에게 불로와 불사의 힘을 주었다. 그것은 많은 인간들이 바래 마지않던 것이지만,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다. 이전의 그를 지탱하던 강인한 정신은 기억의 상실과 동시에 흔적도 없이 휘발되어 있었다. 불완전한 정신에 불노불사. 그 결과는 참담했다.


존재의 이유도 바라는 무언가도 없이 그저 그는 그곳에 사라질 권리마저 빼앗긴 채 방황할 뿐이었다.


“솔리에르, 그 계집애가 알면 얼마나 불쌍한 표정으로 울지.”


루쉐가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솔리에르가 누구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라샤는 그저 빙긋이 웃으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기억을 앗아간 것이, 그리고 불노불사의 저주를 내린 것이 라샤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했다.


굉장히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때때로 그들은 그에게 장난감을 건네주었다. 그가 아는 것은 고기를 찢고 먹어치우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굉장히 화가 난 모습으로 루쉐가 그에게 오더니 여느 때처럼 고기를 던지고 그가 가지고 노는 것을 본 뒤, 입을 열었다.


“너, 솔리에르가 누군지 아느냐?”

“모른다.”


피 칠갑을 한 채 그는 대답했다. 낮게 그르렁 거리는 목소리와 그에 어울리는 짐승의 모습으로, 방금 막 살점에서 발라낸 뼈를 깨물며. 화가의 서투른 붓질로 덮인 것처럼 그의 온 몸은 본래 색인 검은 빛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네가 무얼 위해 네 모든 것을 버렸는지는 아느냐?”


루쉐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다시 물었다. 물론 그가 할 대답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무관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른다. 그대들이 내 기억을 가져갔으니까.”


루쉐는 마침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깔깔대며 웃었다. 과거 몇 번이나 그랬던 적이 있는지라, 이제는 익숙해 질대로 익숙해진 그는 무심하게 그저 기다렸다. 다시 그가 인간의 모습이 되어 뼈를 한 구석으로 집어던지는 모습을 보더니, 마침내 웃음을 그친 루쉐가 그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평소였다면 이 시점에서 그녀는 몸을 홱 돌려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제 오라비에게로 걸음을 옮겼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웃음을 멈춘 그녀는 그가 있는 곳으로 들어올 때보다는 좀 나아졌지만 여전히 화가 난 것이 분명한 표정으로 혼자 중얼중얼 거리고 있었다.


“오라버니는 그 계집이 어디가….”


그의 청력은 루쉐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하나하나 잡아내기에 충분할 정도로 좋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기둥에 몸을 기대며 손에 묻은 피를 문질러 지우려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마법적인 물건이라 스스로 얼룩을 지우지만 몸은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손에 묻은 얼룩을 지웠지만 곧, 제 온몸이 피범벅이라는 것을 깨닫고 몸을 씻으러 움직였다. 그리고 그 때 루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궁금하지 않으냐? 네가 무엇을 위해 모든 것을 저버렸는지.”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알고 싶다.”


기나긴 세월동안 그들은 저런 질문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농담으로나마 알려주마 말하지도 않았다. 세계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자인 그들은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가리며 기대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루쉐는 아름다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가련하기 짝이 없는 남자를 비웃으며.


“한 여자 때문이다. 네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그는 두근거리던 심장이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런 이유에서였나. 내 모든 것을 이들에게 내놓을 정도로 사랑한 여자가 있었는가. 루쉐가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낯설게 그의 머리를 때리듯이 다가왔다.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새조차 도달하지 못하는 세계의 가장 높은 곳, 헤페르티나는 그야말로 정적에 휩싸였다. 곧 루쉐가 말을 이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솔리에르. 오라버니의 유일무이한 성녀라 이름 받은 계집이다.”


그의 심장이 다시 두근대기 시작했다. 아까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감정 때문이었다. 그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지만, 아마 다른 이들이 붙인 이름으로 말하자면 불안이 가장 정확했을 것이다.


그 정체도 없는 두근거림에 그는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루쉐는 정말로 즐거운 듯이 그 표정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녀는 흘깃 방금 그가 집어던진 뼈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정체모를 두근거림은 더욱 커졌다. 이제는 고동소리가 귀에 직접 들릴 지경이었다.


“그럼 방금 네가 찢어발긴 것은 무엇인줄 아느냐?”


루쉐는 진정으로 즐거운 듯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는 다급히 몸을 돌려 듣지 않으려 했지만, 루쉐가 한발 빨리 그 답을 말했다. 등 돌린 그를 향해 맑은 목소리가 마치 칼날처럼 그를 꿰뚫었다.


“솔리에르, 그 계집이란다!”


그는 제 몸에서 풍기는 피 냄새를 맡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등 뒤에서 루쉐는 다시 한번 높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네 모든 것을 바쳐 지키려던 것을 네 손으로 부수는 것은 즐겁더냐?”

“닥쳐!”


그는 날카롭게 외치며 다시 몸을 돌려 루쉐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가 채 루쉐의 목 줄기를 움켜쥐어 부러트리기 전에 그 팔은 다른이에게 잡혀 기괴하게 비틀렸다.


“오라버니!”


루쉐가 화색을 지으며 반겼다. 하지만 라샤는 그녀를 흘깃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 이름마저 잃어버린 그는 붉은 눈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꺾인 팔은 뼈가 살 밖으로 튀어 나왔지만 아픈 기색은 전혀 없었다.


라샤가 손을 놓자 그는 성한 팔로 비틀린 팔 뼈를 다시 맞추었다. 그것만으로도 뼈는 스스로 붙고 상처는 아물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라샤는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네 스스로 택한 길이 아니던가? 이름마저 잃어버린 자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를 타이르듯 말했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부숴버릴 것 같은 눈으로 라샤를 노려볼 뿐이었다. 라샤는 빙긋 웃었다.


“가거라. 네가 잃어버린 모든 것은 네가 선택한 일이니까.”


그는 라샤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라샤의 부드러운 미소는 그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한 비웃음이었다. 루쉐의 간사한 목소리보다 더욱더 끔찍했다. 루쉐는 오라비의 팔에 매달렸다. 혐오감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그는 그들에게서 멀어져갔다.


세상에 이름 드높은 단 둘뿐인 아름답고 자애로운 신들에게서.


그들이 만들어낸 그는 괴물이었다. 제가 부수는 것이 소중했던 것인지 조차 알지 못하는 괴물을. 그리고 그들은 분명 그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아무 목표도 없이 존재할 뿐이던 그가 죽음을 추구하게 된 것은 그 시점부터였다.


하지만 그의 불사는 라샤로 부터 받은 것. 그는 죽음조차도 원해는 대로 가질 수 없었다. 스스로를 부정하고 신들과 자기 자신을 혐오했지만, 그는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그를 비웃던 그들은 그에게 게임을 제안했다.


“인간을 죽여. 사랑하는 이의 앞에서 가장 잔혹하게.”


루쉐가 사랑하는 오라비의 옆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듯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미의 앞에서 자식을, 오라비의 앞에서 여동생을, 자식의 앞에서 부모를, 혹은 연인의 눈앞에서 연인을 죽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는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루쉐는 마저 말을 이었다.


“그렇게 수백만쯤 죽이다 보면 한명쯤, 너를 죽이려 드는 자가 있겠지.”


그녀는 성화에 그려진 모습처럼 자애로운 얼굴과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뱀처럼 요사스러운 말을. 라샤는 그 옆 한단 높은 곳에 앉아 제 팔에 기대오는 루쉐의 검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그럼 내가 그자에게 너를 죽일 힘을 내려주지.”

“어째서 라샤가 아니라 네가?”

“오라버니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셨으니까.”


남자의 일그러진 얼굴과 대조적으로 루쉐는 당당한 미소를 띤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가 제 오라비에게 요청하는 것을 그는 무엇이던 들어주었다. 솔리에르, 그 계집아이에 관한 것만을 제외하고. 그래서 그녀는 차선으로 그를 달라고 했다. 그녀를 위해 제 모든 것을 버린 남자를.


라샤는 흔쾌히 제 동생의 요청을 들어주었고, 그녀는 제 즐거움을 위해 그에게 이런 게임을 제시한 것이다. 그가 몸부림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진실로 즐거웠다.


“네가 죽음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이것뿐이야.”


그녀는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라샤는 단지 아름다운 미소를 얼굴에 그렸다.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라샤도 루쉐도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답했다.


“좋아. 끔찍한 것들아. 너희에게서 도망쳐 보이겠다.”


그것이 설령 저들이 파놓은 유일한 함정이라 할지라도. 남자는 찌푸린 인상을 풀지 않았다. 자주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향해 루쉐가 손을 들어 가리켰다. 손목을 장식한 금색의 장신구가 서로 부딪혀 짤랑, 하는 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다시 가. 네가 스스로 떠나온 인세로. 가서 어디한번 마음껏 뛰어 보거라.”


밤의 여신은 끝까지 그를 조롱하며 말했다. 그가 이루었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가 저곳에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도 알려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제게 소중했던 모든 것들을 직접 부수게 될 것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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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4.09.04 17:12
    No. 1

    이야기의 신은 독자가 아닐까했는데...음 작가도 독자이니 신들에게서 도망가긴 너무 어렵겠죠? 제 멋대로 읽고 있답니다. 재미있는 글 감사해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5 꿈꾸는사탕
    작성일
    14.09.04 19:06
    No. 2

    매번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상상할 여지를 마음 껏 드리고 싶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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