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꿈꾸는사탕의 책장입니다.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꿈꾸는사탕
작품등록일 :
2014.06.28 12:48
최근연재일 :
2015.10.05 14:53
연재수 :
27 회
조회수 :
11,191
추천수 :
63
글자수 :
141,630

작성
14.08.18 20:20
조회
217
추천
1
글자
13쪽

첫 번째 이야기 (14)

DUMMY

마치 기억이 바래어가듯 조용하고도 분명하게 태양은 점차 대지의 아래로 자취를 감추었다. 세상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다가, 곧 자색으로 바뀌어갔다. 사람의 흔적이 없어 마을은 어두웠다. 기사단이 묵는 장소만 불빛이 밝혀져 있는 것은 오히려 마을의 황폐함을 대조적으로 부각시켰다.


리지는 이제는 거의 무너져가는 울타리를 지나 정원의 의자에 앉았다. 체중이 실리자 삐이걱하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그 난리통에 의자도 부서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이안은 이 의자에 앉아 그녀의 혀엔 너무 쓴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곤 했었다.


리지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얼마만의 미소인지 너무 오랜만에 지어 보는 미소여서 오히려 웃는 입가가 어색했다. 하지만 미소는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즐거웠던 기억은 오히려 상실의 차가움을 더욱 날카롭게 갈고 닦을 뿐이었다.


이제 이 장소는 더 이상 풀과 꽃이 흩날리지 않았고,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져줄 남편도 사라졌다. 그녀를 향해 윙크하며 웃음 짓는 마가렛도, 새침하게 눈을 흘기지만 그녀를 위해 옷을 만들던 글랜도 마찬가지였다.


혀에는 쓰지만 코에는 달콤한 차 향기도 없었고, 아침이면 지저귀던 새소리도, 이안과 함께 산책을 하며 느꼈던 시원했던 바람 한줄기조차도 이제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칼날처럼 그녀의 심장을 옭아맸다. 그녀는 가슴에 울컥하는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말로 내뱉어지는 순간 그녀를 지탱하는 것이 무너질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지는 다만 무너지기 일보직전의 의자에 앉아 한때는 아름다웠던 정원을 돌아보고 있었다. 아름답고 행복했었던 그 시절을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 애쓰며. 어느새 하늘은 까맣게 물들어 어둠을 드리우고 있었다. 마치 이 어둠에 쫓기듯 태양은 사라졌다.


“밤….”


리지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두운 하늘에 사람들이 피워놓은 불꽃이 어른거리며 연기와 불똥을 날려 올리고 있었다. 밤과 불꽃…. 리지는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가장 끔찍한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번뜩이며 지나갔다.


“안돼!”


리지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자는 그 급격한 운동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넘어지더니 결국에는 와르르 부서져 버렸다. 하지만 리지는 그 의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등에 메고 있던 활을 손에 쥐고 걸음을 빨리 하기 시작했다.


이사카, 밤의 마수. 그 이름에 걸맞게 그가 움직인 것은 언제나 밤이었다.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그가 이 마을에서 리지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에야 그의 발톱을 드러낼 것이 분명했다.


올 때는 그리 먼 길이 아니었지만 마음이 급할 때는 왜 이리 길이 멀고도 험한지, 리지는 급해지는 숨을 억누르며 다리를 재게 놀렸다.


기사단의 야영지에 가까워질수록 불빛은 더욱 환해졌지만 그만큼이나 리지의 마음에 불안도 차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거친 숨이 무색할 정도로 야영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기사의 종자들 여럿이 모닥불의 근처에 서서 큰 냄비에다 요리를 하고 있었고, 몇몇 기사들은 경갑차림으로 허리에 검을, 또는 등에 창을 들고 야영장을 돌아다니며 저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야영장 한켠에서 그 짧은 휴식을 틈타 검을 맞대어보는 이들까지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그 공간에서 리지만 손에 활을 들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괜찮으신가요, 성녀님?”


덩치는 크지만 처진 눈을 가진 친절한 인상의 기사 한명이 걷다 말고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몸을 움직이러 가는지 갑주를 껴입고 한 쪽 옆구리에 투구를 끼고 있었다.


그의 친절한 물음에 리지는 아무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그 공간에서 불안감에 떨고 있는 것은 오직 리지 뿐이었고 그 불안감은 실체도 확신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기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야영장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녀님이 뻣뻣하기가 통나무보다 더하다는 것은 이미 교황청에서 몇 번이나 들어왔던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울릴 수 없는 이 공간에서 잠시 몸을 떨며 서있었다. 저 멀리 폐허 사이로 보이는 검은 숲의 입구가 마치 짐승의 벌린 입인 양 끔찍하기만 했다.


“역시 주교에게 다시 한번….”


그녀는 스스로에게 중얼 거리며 몸을 돌렸다. 어둠이 내렸을 때의 마을을 수색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몸을 돌리려는 리지의 눈에 붉고 붉은, 타오르는 듯이 밝은 짐승의 눈이 보였다. 이제는 하나만 남은 그 흉성의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사카!”


그녀는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비록 그녀의 외침이 들리진 않았지만 리지가 저를 바라본 것을 알아채고 그는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은을 세공해 만든 안대가 비어있는 왼쪽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인간의 모습을 한 그는 여전히 그 잔혹한 짐승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남자였다.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리지를 따라 기사들 몇 명은 눈을 돌렸다. 대개 성녀에 대한 불만을 가진 채였다. 이사카에 대한 리지의 반응은 히스테릭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랬던 이들도 곧 험한 말을 내뱉으며 제 갑주와 무기를 급히 찾기 시작했다. 웃고 있는 이사카를 그들도 봤던 탓이다.


시끄럽던 야영장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가 다시 왁자지껄 시끄러워졌다. 급히 갑옷을 찾는 기사와 그를 도와주는 종자들로 떠들썩했다. 단장들은 갑옷을 걸치며 고래고래 지휘를 내리고, 먼저 준비가 된 기사들은 급히 말에 올라타 진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한 복판에서 활을 움켜쥐었지만 곧,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성녀님, 이리로!”


교황이 내어준 그녀의 호위였다. 그는 리지를 주교의 옆자리로 데려갔다. 대주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제 실수입니다!”


그녀가 다가서자마자 주교는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꽤나 침통한 얼굴이었다.


“신성한 달빛의 수호를 받는 성녀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기다니.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주교의 사과란 아무나 받아보지 못할 것이다. 리지는 불편한 마음으로 손을 잡아 뺐다.


“움직인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 말의 투레질 소리로 시끄러운 와중에 큰 외침이 모두의 귀를 꿰뚫었다. 주교는 뒤를 이을 사과의 말을 삼키곤 다급히 기사단장들을 불렀다.


천막의 천을 걷어내고 급히 만든 막사에서 리지는 연신 바깥을 돌아보며 초조해했다. 괜히 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아무도 그녀를 이사카의 앞에 보내려 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녀가 이뤄야 할 단 한가지의 것이 있다면 바로 복수였다.


기사단중 몇 명이 대열을 갖추고 부서진 잔해들을 뛰어넘으며 말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저 멀리 숲의 근처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이사카를 향해 보기만 해도 예기가 흐르는 검을 들고서.


발을 옮기던 이사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드디어 그의 염원이 이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를 방해하려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마치 여름철 음식에 꼬이는 쉬파리들을 보는 주부가 느낄법할 감정을 그는 지금 느끼고 있었다.


“절정을 맞이하기 전에 전희도 나쁘진 않겠지.”


귀찮음이 역력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가 말하자 발길을 따라 홍염이 치솟기 시작했다. 달려오던 말들 중 서넛이 불꽃을 보고는 주춤했다. 잘 훈련된 군마는 여지간해서는 명령 없이 속도를 늦추지 않지만 비정상적인 이사카의 기세는 그를 가능케 했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가운데 서넛이 주춤하자 대열이 망가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대여섯이 낙마해 바닥을 굴렀고 그 위로 군마의 말발굽이 지나갔다. 이사카가 손을 한번 휘두르자 그의 발밑에 흐르던 홍염이 제 주인의 의지를 받들어 한번 으르렁 대더니 마치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스물의 기사들이 제 몸을 땅에 뉘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리지는 멀리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교는 침통한 표정으로 손을 모아 쥐었고 기사 몇 명은 굳은 표정으로 막사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 후로도 오십쯤 기사들이 더 달려 나갔지만 이사카의 발걸음을 멈추게 조차 할 수 없었다. 리지는 주교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를 보내주세요. 제가 그를 죽이겠어요.”

“성녀님!”


주교는 이미 얼굴에서부터 거절의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지만, 엘리시아는 그를 누를 방법을 이미 생각해두었다.


“아까 제게 사과하셨지요.”


주교가 무어라 말하려던 입을 한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제 말을 너무 가볍게 여기지 말아주세요. 제가 그를 상대할 사람이라는 것은 주교님께서 더 잘 아시지 않나요? 제게 알려주신 분이 대주교님이시잖아요.”


리지는 예언도, 라샤도, 루쉐도 믿지 않았지만 여기에는 온통 신자들뿐이었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선 그 단어가 꼭 필요했다. 주교는 인상을 한번 깊게 쓰더니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성녀님께서 지척까지 가는 것은 허락할 수 없어요. 마침 활을 쓰시니 더욱 잘된 일이지요.”


그의 허락에 리지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주교님.”


그리고는 급히 몸을 돌려 그녀의 말을 찾으러 막사 밖으로 나갔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미소에 놀랐던 사람들이 다시 바삐 몸을 움직였다. 주교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단장들이 지휘를 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전투가 진행되면 될수록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고삐를 움켜쥐는 리지의 어깨를 누군가 잡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조금 창백한 얼굴을 한 호위기사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가져가십시오. 성녀님.”


그리고 그가 내민 것은 아름다운 세공이 된 검 집에 들어가 있는 단검이었다. 은으로 만들어지고 보석장식까지 붙어있어 검 집만으로도 가격이 꽤나 나가 보였다. 그리고 검집엔 가죽 끈이 함께 달려있어 허리끈에 묶을 수 있었다.


“이걸 왜 저에게….”

“아무리 성녀님께서 예언의 인물이시고, 여신의 축복까지 있다고 한들 땅에 발을 붙이고 사시지 않습니까. 혹시 모르는 일을 위해서라도 가져가십시오.”


무뚝뚝하지만 다정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리지는 기대하지 않았던 친절함에 당황해 고삐를 쥔 채로 굳어버렸다. 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직접 리지의 허리춤에 단검을 매어 주었다.


“뒤에서 따라가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매듭이 풀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뒤 그는 간단히 목례하고 리지가 말에 오르길 기다렸다. 리지는 그때서야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고마워요.”


그리고는 그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오를 수 있었다. 교황청에서부터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녀의 그림자처럼 호위를 서준 이였지만, 리지는 그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리지가 말에 단단히 몸을 지탱한 것을 확인하고 호위기사도 제 말에 올라 그녀의 옆에 섰다.


“두 번째 뿔피리가 울리거든 달리십시오.”


마침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첫 번째 뿔피리가 크게 울렸다. 그러자 지진이라도 오는 듯, 땅이 울렸다. 200여명의 기사단이 동시에 말을 달려 이사카를 향해 질주했다. 말발굽에 피어오르는 먼지가 마치 폭풍 같았다.


“저들이 성녀님을 위해 짐승의 발을 묶을 겁니다.”


호위가 굳은 말투로 그녀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녀는 땅의 울림을 따라 심장이 함께 뛰는 것을 느꼈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도 느껴졌다. 하지만 심장이 거세게 피를 퍼올리는 것과는 별개로 오히려 손끝은 차가워졌다.


“드디어….”


시끄러운 전장의 소리에 묻혀 그녀의 중얼거림을 호위 기사는 듣지 못했다. 밤 바람에 헝클어지는 머리를 정리하지도 않고 리지는 오로지 전장의 가운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은 그녀에겐 너무 길었다.


그리고 마침내 심장을 파내어버릴 것 같은 거대한 울림과 함께 두 번째 뿔피리가 울렸다.


“이럇!”


리지는 등에 맨 활의 감촉을 느끼면서 발을 굴렀다. 말의 근육이 다리 아래에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점점 속도는 빨라져 바람이 뺨을 할퀴우며 지나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7 두 번째 이야기 (3) 15.10.05 208 1 8쪽
26 두 번째 이야기 (2) 15.09.24 206 0 6쪽
25 두 번째 이야기 (1) +1 15.09.10 212 2 5쪽
24 문장 사이의 간격 (3) +1 14.12.04 201 2 9쪽
23 문장 사이의 간격 (2) +1 14.09.12 525 3 9쪽
22 문장 사이의 간격 (1) 14.09.11 455 1 14쪽
21 첫 번째 이야기 (18) +2 14.09.10 363 2 13쪽
20 첫 번째 이야기 (17) +2 14.09.03 395 1 11쪽
19 첫 번째 이야기 (16) +1 14.09.01 697 3 9쪽
18 첫 번째 이야기 (15) 14.08.21 376 2 12쪽
» 첫 번째 이야기 (14) 14.08.18 218 1 13쪽
16 첫 번째 이야기 (13) +2 14.08.12 373 1 13쪽
15 첫 번째 이야기 (12) 14.08.07 510 4 14쪽
14 첫 번째 이야기 (11) +2 14.08.04 400 1 7쪽
13 첫 번째 이야기 (10) +1 14.08.01 700 1 13쪽
12 첫 번째 이야기 (9) +1 14.07.30 735 4 13쪽
11 첫 번째 이야기 (8) +2 14.07.26 421 3 12쪽
10 첫 번째 이야기 (7) 14.07.23 395 5 13쪽
9 첫 번째 이야기 (6) 14.07.20 314 1 17쪽
8 첫 번째 이야기 (5) 14.07.19 310 2 10쪽
7 첫 번째 이야기 (4) 14.07.02 172 2 18쪽
6 첫 번째 이야기 (3) 14.07.01 393 3 13쪽
5 첫 번째 이야기 (2) +2 14.06.29 445 1 10쪽
4 첫 번째 이야기 (1) 14.06.29 418 1 12쪽
3 첫 번째 문장 (2) 14.06.28 479 4 14쪽
2 첫 번째 문장 (1) 14.06.28 490 9 13쪽
1 시작 이전의 이야기 +2 14.06.28 781 3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