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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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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사탕
작품등록일 :
2014.06.28 12:48
최근연재일 :
2015.10.05 14:53
연재수 :
27 회
조회수 :
11,206
추천수 :
63
글자수 :
141,630

작성
14.08.21 15:25
조회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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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2쪽

첫 번째 이야기 (15)

DUMMY

어느새 이사카가 그녀를 향해 많이 다가왔기 때문에 전장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그 혼란한 평야에는 마치 떨어진 설탕조각에 모여든 개미떼처럼 한명의 이사카를 잡기위해 수백의 기사가 몰려들어 있었다.


흰 말을 탄 리지가 가까이 가자 가장자리에 있던 이들은 그녀를 위해 상처입은 몸을 움직여 길을 비켜주었다. 때때로 이미 쓰러진 이들을 밟고 지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리지는 개의치 않았다.


활을 맞출만한 거리에 도달하자 호위기사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등에 맨 활을 손에 쥐었다. 이사카가 움직이는 평야의 가운데를 노려보면서.


전장의 한 복판에서 기사들은 리지를 지키기 위해 제 몸을 아끼지 않고 이사카에게 들이밀었다. 홍염에 제 몸이 녹아내릴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리지는 그들에게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고 이제는 제 수족같이 느껴지는 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녀는 이사카를 겨냥해 화살을 걸지도 않은 채 현을 당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활이 스스로 빛을 내뿜어 그녀의 화살을 만들어 주었다. 은은한 달빛으로 만들어진 화살은 그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이사카는 미소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움직임을 방해하기 위해 달려드는 날파리 같은 인간들은 그에게는 귀찮기만 했다.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그는 기꺼이 리지가 쏘는 화살 앞에 제 몸을 맡길 것이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로써는 그저 제 목숨을 불태워가며 그를 붙잡는데 여념이 없었다.


주변에서 마치 화산이 폭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홍염이 흘러내려 사람들을 휩쓸어갔지만, 그의 시선은 오로지 리지에게 박혀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리지가 손을 놓자 빛의 화살은 비명소리와 화염으로 가득한 공간을 가르며 날아 그에게 박혔다.


“후우.”


화살이 몸을 찌르는 순간, 그는 탄식의 한숨을 내뱉었다. 아니 어쩌면 탄식이 아니라 탄성이었을지도 몰랐다. 죽음으로 가까이 가는 고통은 그에게 있어서는 축복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화살이 박힌 곳은 그녀가 겨냥했던 곳과는 꽤나 거리가 있었다. 빛의 화살은 그의 왼 어깨를 꿰뚫고 마치 연기처럼 녹아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순간에 그를 향해 달려든 기사 덕택에 빗맞고 만 것이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기쁨의 외침을 내뱉었지만 그도 잠시였다. 이사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성한 반대쪽 팔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었다. 홍염이 주인 된 자의 의지에 따라 그의 손으로 모여들며 창의 모습을 취하기 시작했다.


리지는 그것을 바라보며 어깨를 한번 부들 떨었다. 이안의 가슴을 뚫었던 것과 같은 창이었다. 금속도 녹이는 불꽃이지만 제 주인을 태우지는 않는지 그는 불꽃의 창을 손에 쥐고 크게 휘둘러 제 주변을 방해하는 병사들을 도륙했다. 그 무자비한 불꽃에 사람들은 제각기 신체의 일부를 잃고는 쓰러졌다.


주변이 조금 정리되자 그는 창을 바닥에 꽂고는 성한 손의 엄지로 제 왼쪽 가슴을 가리키며 리지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이곳을, 조금 잘 맞춰보라는 뜻이었다.


“여기를 노려. 그래야 내가 영원한 잠속에 빠져들 수 있으니까.”


그는 리본 묶인 선물을 코앞에 둔 어린 아이 같은 표정으로 리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가 세는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긴 세월 염원해온 것이 드디어 이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주변의 병사들은 주춤대며 다시 그를 향해 달려들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편이 더 좋았다. 이제 그들은 화살을 빗나가게 하지 못하리라.


리지는 그의 행동에 발끈해 다시 현을 당겨 이번에는 어긋나는 일 없이 그의 심장을 조준했다. 빛의 화살이 흔들림 없이 그의 가슴을 노리고 있었다. 이를 너무 세게 악물어 골이 찡할 지경이었지만 문득 그녀는 이사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보는 이가 아찔할 정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실로, 행복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녀가 이사카를 죽이고자 마음먹은 것은 이안의 목숨을 빼앗은 것에 대한 복수였다. 이안의 생명을 빼앗아간 강탈자인 그의 마지막 숨을 뺏는 것만이 리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사카는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래, 그 짧은 순간에 그가 했던 모든 말이 리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첫 만남, 그는 그에게 맞설 적을 찾고 있다고 했고 피엔르나에서는 사랑스러운 죽음을 찾고 있었다.


마치 하나를 당기면 모두가 풀리고 마는 매듭처럼 생각의 조각 하나가 맞추어지자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는 진실로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세게 깨물며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것이 오히려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리지는 어떻게 해야 그에게 복수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끼고 아끼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상실감을, 어떻게 그에게 맛보게 해줄 수 있는가?


짧은 상념을 끝내고 그녀는 현을 당기던 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활에 걸려있던 빛의 화살은 아침 햇빛에 이슬이 증발하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는 활을 바닥에 내팽겨 쳤다. 그녀를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놀랐다. 대주교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주변의 기사들 또한 모두 놀란 눈으로 그녀와 이사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사카 또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네가 원하는 대론 해주지 않을 거야.”


그녀는 이사카를 바라보며 비뚤어진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아름답지만 참으로 음울한 미소였다. 혼탁한 전장의 한가운데였지만 그녀가 내뱉은 말은 너무도 분명하게 이사카에게 들려왔다. 그리고 리지는 옆의 호위가 말릴 틈도 없이 허리의 단검을 뽑아서 제 목을 그었다.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피가 물이라도 뿌린 듯 뿜어져 나왔다.


호위기사가 놀라며 안장에서 쓰러지는 리지를 부축해 품에 안았다. 리지는 제 목숨이 스러져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웃었다. 이사카가 저를 향한 화살을 보고도 웃었던 것처럼.


리지를 품에 안은 기사는 어떻게든 피를 멎게 하려 손으로 리지의 목을 누르며 주변의 사람을 불렀다. 하지만 그 손가락의 사이로 붉은 피는 꿀럭꿀럭 계속 새어나왔다. 그녀가 타고 있던 백마는 이미 반쯤 피에 절어 있었다. 제 몸을 타고 흐르는 뜨끈한 피가 불편했는지 연신 투레질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한줄기 빛이 하늘을 가르며 대지에 내리꽂혔다. 은은한 한기가 몸을 엄습했고, 사람들은 놀라 움찔했다. 빛은 눈을 멀게 만들 것처럼 번쩍이더니 곧 사라졌고, 그 빛 속에서 나온 것은 한명의 여자였다.


구름을 닮은 투명하고 흰 천을 몇 번씩이나 겹쳐 재단한 드레스가 우아하게 주름이 잡혀 있었고 윤기 넘치는 검고 긴 머리카락의 위엔 금과 은으로 장식된 화려한 관이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익히 여러 번 들어 알고 있는 그들이 몇 번이고 고개 숙여 기도했던 석상의 모습을 꼭 닮아 있었다. 그들이 경배하는 달의 여신, 루쉐의 모습이었다.


기사들 몇 명은 절로 무릎을 꿇으며 그녀에게 경배의 인사를 올렸다. 이사카만이 한쪽만 남은 눈을 찡그리며 그녀를 노려볼 뿐이었다.


“이번에도 내가 이겼어.”


하지만 루쉐는 주변에 그녀를 향해 무릎 꿇은 인간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이사카에게 말을 걸었다. 말투에서부터 이미 오만함이 물씬 느껴졌다. 그는 짐승이 으르렁대듯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끝이야. 이걸로 네 적수는 또다시 사라졌다. 네가 안식을 찾을 방법도 함께 사라졌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 멀리 막사에서부터 말을 달려온 대주교가 그녀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리지가 자해하는 순간 벌떡 일어나, 그대로 전장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오오, 여신이시여.”


그리고는 경배해 마지않는 여신의 옷자락을 쥐고는 입을 맞추려 했다. 그러나 루쉐가 거칠게 그녀의 옷을 잡아당겨 그의 손에서 제 옷자락을 빼냈다.


“어딜!”


그 표정은 아마 이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고운 얼굴은 마치 더러운 것을 만진 것처럼 무섭게 찡그려져 있었다.


그리고는 한번 크게 손을 휘둘렀다.


“정말 귀찮기 짝이 없어.”


그러자 놀랍게도 정적이 찾아들었다. 남실대던 홍염도 힘을 잃고 이사카의 발밑에서만 작게 남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이사카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루쉐는 고운 얼굴에 다시 미소를 띄우고 그를 돌아보며 짧게 대답했다.


“정리. 솔리에르 이후로 인간들은 너무 시끄럽다니까.”


리지는 흐려지는 시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놀랍게도 그녀를 향해 무릎 꿇던 모든 이들이 얼음동상이 되어버렸다. 잔혹하기 짝이 없는 한기가 리지의 몸도 찢어발길 듯이 노렸지만, 그 차가운 기운은 간신히 리지를 비켜갔다.


이름도 기억 나지 않는 호위는 활이 가지고 있는 치유능력을 떠올려 리지를 구하기 위해 그녀가 던져버린 활을 애타게 찾아 그녀의 품에 안겨다 주었는데, 그 빛이 리지의 상처를 감싸는 것을 보고 안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리지의 옆에 앉은 채로 얼음덩이가 되어버렸다.


“이게 무슨….”


리지는 제 몸을 엄습하는 냉기 덕택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 작은 말소리로도 그들의 주의를 끌기엔 충분했다. 루쉐는 고개를 돌려 소리의 주인을 찾다가 피에 절어 바닥에 쓰러진 리지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서 가느다란 빛을 뿜는 활도. 그것은 분명 루쉐가 그녀에게 내려준 한조각 신의 권능이었다. 루쉐는 단번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았다. 활이 가진 그녀의 기운이 리지가 한기를 피해갈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었다.


“아, 활 덕택에 간신히 살아남았구나. 하지만 조용히 하고 있거라. 네가 낄 틈 따윈 없어. 이미 네 역할은 끝났고 네 손으로 퇴장했지 않니?”


루쉐는 차갑게 일갈하고 다시 이사카를 돌아봤다. 사람조차 얼려버리는 냉기의 가운데에 이사카는 일렁이는 홍염을 발밑에 두고 굳은 얼굴로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루쉐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내 발에 입이라도 맞추는게 어때?”

“닥쳐라. 루쉐.”


이사카는 붉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노려봤다. 한 쪽만 남아있었지만 그 눈동자는 제가 부리는 홍염처럼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네 놈들 따윈 추악하기 짝이 없어. 모든 기억을 잃었어도 그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 붉은 눈에는 분노와 경멸, 그리고 혐오가 가득했다. 하지만 루쉐는 저를 향한 그 분명한 적개심에도 떨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신이었고 또 그는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오라비가 내려준 둘도 없는 특별한 선물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그녀를 찢어발겼을 테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사카는 부글하고 끓어오르는 속을 억누르며 루쉐에게 소리쳤다.


“다시 세계가 부서진다 하더라도 내가 네 종복이 될 일은 없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오라버니도 참, 재밌는 선물을 주셨다니까.”


정말 즐거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잠시 웃던 루쉐는 다시 숲을 가리키며 루쉐는 이사카를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서 헤메이거라, 이름없는 자여. 이번 게임은 끝났으니까.”


그리고 이사카는 으르렁대며 답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단숨에 쓰러진 리지의 앞에 도달해 얼음의 가운데에서 그녀를 꺼내어 안아들었다. 한기 덕택에 그녀가 흘린 피조차 얼어있었다. 활을 품에 안은 리지는 이미 앞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조심스레 그녀를 안는 손이 유독 따듯하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몇번 더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그녀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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