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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사탕의 책장입니다.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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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사탕
작품등록일 :
2014.06.28 12:48
최근연재일 :
2015.10.05 14:53
연재수 :
27 회
조회수 :
11,186
추천수 :
63
글자수 :
141,630

작성
14.07.20 20:28
조회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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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7쪽

첫 번째 이야기 (6)

DUMMY

*


“리지, 리지.”


이안은 조용하면서도 확실한 어조로 리지를 불렀다.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아니 거의 돌돌 말려 있다시피 한 그녀를 깨우기 위해선 택 도 없을 정도였지만.


오히려 그녀를 깨우는데 더욱 도움이 된 건 테이블 위에 놓인 고소한 빵 냄새였다.


“으응, 일어날게.”


리지는 배고픔을 알람삼아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녀가 테이블에 앉았을 때 이안은 이미 식사가 반쯤 끝나 있었다. 그녀는 씻고 나와 아직 물기가 조금 남아 촉촉한 눈가를 비비며 다른 한손으로 빵을 집어 들고 입으로 가져갈 때쯤에 그는 이미 접시를 전부 비워놓았다. 빵을 베어 물자 버터와 설탕, 우유의 냄새와 맛이 그녀를 휘감는 듯 했다. 그 익숙한 달콤한 향기는 단숨에 슬픈 기억들을 꺼내놓았다.


고작 세달 남짓한 시간동안 만난 이들이었지만, 정을 주고받았던 사람의 상실은 결코 메워지지 않을 구멍을 가슴에 남긴다. 그리고 이따금씩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무언가가 그 구멍을 후벼 파는 듯하다.


하지만 리지는 이번에는 눈물을 흘리며 비통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저 아주 잠깐 조용히 상냥했던 마가렛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제 몫의 식사를 반쯤 먹다말고 그녀가 이안에게 물었다.


“이안, 위령제가 언제랬지?”

“해가 지면.”


이안은 제 몫의 빈 그릇을 정리하며 짧게 대답했다.


“오늘은 위령제준비 때문에 시장이 열리지 않아. 거리공연도 모두 금지됐고.”


리지가 음식을 먹으며 주변으로 관심을 돌려보자 쉽게 알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창문이 열려 있었지만 어젯밤 그 떠들썩했던 공기는 마치 거짓말인양 조용했다. 조용히 움직이던 사람들은 조의를 표하는 차분한 색상의 옷을 입고 있었다. 종종 꽃을 들고 걸어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스프를 입에 떠 넣는 리지에게 이안이 말했다.


“네가 어젯밤 늦게까지 논 덕택에, 해가 지려면 얼마 남지 않았어. 그전에 꽃은 사야해.”


시간으로 따지자면 사실 점심 즈음 이었다. 겨울인지라 해가 빨리 지는 덕택에 이미 하늘의 중간을 넘어 가고 있는 탓이 컸지만 이안은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


“꽃?”

“그래. 추모에는 회색의 솔리에르, 그 꽃을 가져가야지.”

“꽃 이름이 솔리에르야?”


그녀는 그릇을 싹싹 비우고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털어내며 물었다. 추모를 한다면 제일 먼저 국화꽃이 떠오르는 그녀였지만, 아마도 이 세계에서는 솔리에르라는 꽃을 쓰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굉장히 예쁜 붉은 꽃이지.”

“아까는 회색이라며?”

“원래는 그런 색이었어.”


리지가 물을 마시면서 이안을 계속 쳐다봤다. 아마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것 같아, 이안은 그에 얽힌 간단한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오랜 옛날에 세계가 죽어가고 있었다고 해. 대지는 씨를 품어도 길러내지 못하고, 동물들은 새끼를 낳지 못했고, 나무에선 열매가 맺히지 않았어.”

“왜?”

“글쎄 아무도 모르던데? 그냥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됐다고 해. 마법사들의 연구도 많이 있다고 하던데 아직 아무도 몰라. 그 똑똑하다는 마법사들이 수백 수천이나 매달렸지만 이유도 알 수 없었지.”


이안은 이야기를 계속하며 그녀의 옷을 골라 건네주었다. 그녀는 옷을 들고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방이었기 때문에 욕실 앞에 세워진 거울이 붙어있는 칸막이 안에서 그녀는 옷을 갈아입으며 얘기를 계속 들었다.


“그 시대에는 신들이 직접 사역하며 기적을 행사하고 그랬다고 하더라. 신들도 굉장히 많았고. 근데 그 일에 대해 신탁을 내려주십사 기도를 아무리 올려도,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어.”


이안은 이야기를 하며 그녀가 먹은 접시들을 정리하고 그녀가 칸막이 위에 벗어 올려둔 잠옷을 집어 세탁물통에 넣었다. 어쩐지 그는 이런 사소한 가정 일에 굉장히 능숙했다. 아마도 그것이 이 이야기, 아니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안의 성격일 것이다. 이야기 밖에서 만났던 그는 도저히 이런 일을 잘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분명 눈빛으로 사람을 부리고, 손끝으로 그 목숨을 거둬가도 아무 불평을 듣지 않을 사람이었다. 불평하는 이가 있다면 겸사겸사 그 사람의 목까지 가져갈 것 같달까.


“그때 세상을 다시 살리기 위해 세상의 동쪽 끝에 있는 가장 높은 산 헤페르티나에 태양신 라샤를 찾아간 아가씨가 한명 있었지.”


리지가 옷을 갈아입으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안은 말을 계속 이었다.


“그 아가씨의 이름이 솔리에르. 여러 고생을 하다가 산에 올라가 라샤를 만났는데, 그 태양신은 어쩐지 잔인한 구석이 있어서 그녀가 그 산에서 떨어져 그가 보는 앞에서 죽는다면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고, 그녀는 웃으며 절벽에서 뛰어내렸지. 그때 그녀의 시체 옆에 있던 꽃이 그녀를 애도하기 위해 스스로 제 화려한 붉은색을 버리고 회색이 되었다고 해. 라샤가 사죄하며 그녀를 다시 살리자 꽃도 다시 붉어졌고. 그 아가씨를 기리기 위해 꽃의 이름도 그 아가씨의 이름을 따서 솔리에르. 회색의 솔리에르는 애도의 뜻을, 붉은색의 솔리에르는 재생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스타킹을 정리하고, 리지는 짝짝 박수를 치며 칸막이 뒤에서 걸어 나왔다.


“좋은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이안은 의자에 몸을 기대어 어쩐지 느긋한 느낌으로 앉아있었다. 그 모습을 볼 때면 항상 리지는 나른한 고양이를 떠올리곤 했다.


짙은 갈색의 굽 높지 않은 단화와 흰색의 스타킹. 그리고 발목이 보이지 않게 재단된 길고 긴 검은 드레스. 추모를 위한 위령제에 갈 복장이라 몸에 딱 붙지 않는 디자인으로 된 드레스는 그 바탕 색 만큼 짙은 푸른색 리본으로 장식이 되어 있어,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아무 무늬가 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검게 물들인 머리에 검은 드레스를 입고 보니, 오히려 흰 피부가 더 부각되어 어쩐지 그녀는 굉장히 처연했다.


“예쁘네.”


이안은 짤막하게 칭찬했다. 리지는 방싯 웃다가, 이 모습은 제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에 잠시 멈칫했다. 이안은 눈치 채지 못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제 나가볼까’ 라며 기지개를 폈다.


“이안은? 옷 안 갈아입어?”

“남자는 이런 면에서 참 편하지. 화려한 복장만 아니면 된다니까. 검은 천으로 만든 바지와 겉옷이면 충분해.”

“어차피 이안은 화려한 옷도 없잖아.”


리지는 툴툴대며 그에게 겉옷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제 코트도 팔을 꿰어 입고 난 뒤, 단추를 채울까 말까 망설였다.



*



해가 지자 사람들은 하나둘 위령제가 진행되는 장소로 몰려들었다. 교단의 높은 사람이 직접 인도의 시를 낭송해준다는 이유로 참사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들이 이제는 이곳에 없는 이들의 안식과 자신들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몰려들었고, 그저 단순히 교단의 축복을 받고 싶어 하는 이들, 그리고 그 검은 짐승이 자신을 피해가기를 바라는 이들 또한 섞여 있었다.


리지도 품에 솔리에르 세 송이를 안고 사람들의 물결에 합류했다. 이안은 마가렛과 글랜을 위한 두 송이를 사라고 했다. 그들이 기릴 사람의 수대로 꽃의 수를 맞추는 것이 관례라고 했지만 리지는 두 송이는 너무 적다며, 세 송이를 고집했다. 마을에 있던 인사를 나누던 다른 이들을 위한 꽃이라고 우기면서. 결국에는 그 고집을 꺾지 못한 이안이 지고 말았다.


솔리에르는 엄지손톱만한 꽃잎이 빽빽한 예쁜 꽃이었다. 붉은 색이었다면 아주 화려한 장미를 닮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품에 안은 것은 회색이었다. 짙은 회색이었다면 신기할 법도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굉장히 옅은 회색빛이었다. 꽃잎의 색이 죽어버리는 덕택에 초록색인 줄기와 이파리가 오히려 눈에 도드라졌다.


사람들은 이미 큰 광장에 와글와글했다. 오늘을 위해 만들어진 큰 연설단 같은 것이 광장 한쪽에 있었고, 품이 크고 발등까지 내려오는 흰색의 사제복을 입은 사제들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보다 한단 낮은 자리에 사제들을 바라보는 방향의 의자들이 놓여있었는데, 그곳에는 추모 복을 입은 귀족들이 여럿 앉아있었다. 피엔르나의 영주와 참사를 당한 마을이 속한 영지의 영주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그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그 귀족들이 둘러싸고 있는 단 한명의 귀족이었다.


중년의 나이대로 보이는 그 귀족은, 검은 머리를 기름을 발라 뒤로 넘기고 푸른 보석으로 만든 불꽃모양의 브로치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 청염은 제국의 5대 공작가중 하나인 인페르트가의 상징이었다. 그가 어제 밤 축제거리를 지나던 마차의 주인이라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공작은 등받이에 기대어 한 팔을 팔걸이에 올려 얼굴을 괴고는 앞에서 떠드는 귀족들의 말을 들으며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으며 얘기를 나누었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리 다정한 인상은 아니었다.


“되도록이면 저쪽은 가지말자.”


일반인들과 귀족들의 자리 사이에 꽤 거리가 있긴 했지만, 높은 악명 탓인지 아니면 귀족들보단 사제들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은 대중의 마음인지, 귀족에게 가까운 곳은 꽤나 자리에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이안은 혹시 모를 사태를 걱정하며 사람들이 많은 쪽으로 가려고 했지만, 리지는 아무래도 사람에 끼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저쪽 널널한 데에 있자. 저기는, 정말 너무 바글바글해. 꽃도 다 찌그러질 테고 사람들 사이에 낑겨서 숨도 못 쉬고 이안을 잃어버릴 수도 있잖아.”


한 손에는 꽃을 나머지 한 손으로 이안의 소매를 꼭 부여잡은 그녀를 보며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녀가 요구하는 것을 이안은 한 번도 거절 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무엇인가를 결정하면 그것은 어떻게든 그녀가 결정한대로 이루어졌다.


어쨌든 그래서 그들은 조금 여유롭게 서 있을 수 있었다. 귀족님들이 앉아 계시는 자리에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뒤편에서.


그녀는 품에 꽃을 안고 앉아있는 사제들과 주변에 서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때때로 열 걸음 앞에 떨어져 있는 귀족들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어쩐지 냉정해 보이는 청염의 공작이었다. 옆모습이긴 했지만 주변을 감싸 떠드는 이들과는 어쩐지 확연히 다른 분위기와 왠지 모를 낯익은 느낌이 계속 콕콕 찌르는듯했다.


갑옷을 입은 남자가 귀족들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여 공작에게 무어라 말을 전했다. 그러자 마치 개미 무리에 물이라도 뿌린 것처럼 모두들 뿔뿔이 흩어져 제 자리에 앉았다. 리지는 이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안, 아무래도 저 공작 너랑….”

“쉿, 이제 시작하나봐.”


그녀의 말을 이안이 잘랐다. 그의 시선은 사제들이 있는 연설 단에 고정되어 있었다. 리지는 귀족들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알아채지 못했지만 어느새 단위에는 한 무리의 사제단이 서 있었다. 게다가 이미 해가 하늘을 붉게 태우고 있었다. 마치 그 타는 듯 한 노을을 배경으로, 사제단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대중들은 온통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지만, 사제단이 입을 여는 순간 모두들 조용해졌다. 그래, 그 찬송가는 실로 강렬했다. 열다섯쯤으로 이루어진 그 사제단은 하나된 목소리를 내며 노래를 불렀다.


가사는 알 수 없었다. 오래된 고대의 언어로 이루어진 노래는 신을 받드는 이들도 잘 알지 못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강렬한 멜로디의 노래는, 무언가를 그들에게 전달하는 듯 했다.


이제 슬슬 자색으로 변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사제단은 끊임없이 저 지평 너머를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다. 달을 탈것으로 삼는 검은머리 여신 루쉐, 그녀가 움직이는 밤이 되면 망자들은 그녀의 마차를 따라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간다고 했다. 아직 보이진 않지만 사제들은 바로 그 마차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나는 신 같은걸 믿지 않지만….”


리지가 꽃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웅얼대듯 말했다.


“그래도 이건 이야기니까. 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되겠지? 죽은 사람들도 모두 이 이야기에 사는 사람들이고 말이야. 그러니까… 사람들이 신화대로 달을 따라 간 거라고 믿어도 될 거야. 그렇지? 이 세계에서 말하는 대로….”


그녀는 질문했지만 이안에게 대답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아마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이안은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지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 주었다.


성가대가 어느새 노래를 마쳤고 광장은 조용해졌다. 연설단 가운데에 앉아있던 교단을 상징하는 흰옷을 입은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주변에 서있던 사제들도 일어나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마도 그가 인도의 시를 읊을 대주교인 것 같았다.


그는 옷만큼이나 흰 머리를 가진 할아버지였다. 그는 강단의 앞으로 걸어 나와 사람들을 바라보더니 옷을 한번 펄럭이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가 두 손을 모아 쥐자 그 뒤에 서있던 신관들도 일제히 같은 자세를 취했다.


“위대한 태양신 라샤의 여동생이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밤의 권속을 인도하시는 아름다우신 여신 루쉐의 이름을 빌어.”


대주교의 이마에 작은 서클릿이 은은하게 빛을 내며 바람을 불렀다. 흰 머리 탓에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웬만큼 거리가 있는 리지와 이안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렐레니흐 케프댜 무니아.”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리지를 뺀 모두는 그 뜻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인도의 시 자체는 워낙 유명해 장례식장에서 빠지지 않을 정도니 무리는 아니었다. 다만 대주교라는 높은 신분의 신관이 무릎을 꿇고 직접 축도하는 고대 신어로 된 시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고귀한 달빛에게 영광을!”

“키텐 프유시라헤 쟈단 무니흐.”

“길을 헤매는 이들이여, 달빛을 따르라!”


사람들은 대주교가 한 소절 읊을 때마다 그들이 아는 인도의 시를 따라 외쳤다. 사실 널리 알려진 인도의 시는 대중이 쉽게 외울 수 있도록 수많은 번역과 의역, 절삭을 거친 것이라 대주교가 암송하는 시의 본뜻과는 사뭇 달랐지만, 그들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샤넨쟈 레타이알헨 프루흐”

“우리가 그대를 잊지 않음을!”


시의 암송을 계속 할수록, 대주교의 서클릿은 빛을 더했다. 그것은 정말로 은은한 달빛을 닮아있었다. 때때로 사람들은 그를 보며 성호를 그었고, 흐느꼈고, 바닥에 엎드려 신의 이름을 불렀다.


“무니흐 게렌하 아크쟌데 프마하”

“여신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안식을!”


마지막 소절을 마치자, 서클릿은 한번 번쩍 빛나며 온풍을 사방으로 뿜어내곤 곧 가라앉았다. 늙은 대주교의 머리와 옷자락은 더 이상 휘날리지 않았고 서클릿은 흰 머리에 가려 여전히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곳에 존재했다. 사람들은 다시 환호하며 품에 들고 있던 꽃을 던졌다.


리지는 뭔가 가슴에 덩어리진 것이 여전히 느껴졌지만 어느새 자기도 모르는 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늙은 사제는 일어나며 잠깐 비틀거렸지만 곧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끔찍한 흉사가 제국을 덮치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 신의 뜻에 어긋난 짐승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모르지만, 곧 위대하신 분들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이겨낼 힘을 안겨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며, 아래의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 짐승에게 스러져간 수많은 이들이 신의 품으로 돌아가 영원한 안식 속에 있기를.”


귀족들도 대부분 상기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라샤와 루쉐에 관한 신화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릴 적부터 들어온데다가, 그 위대함은 제국의 귀족학교에서도 가르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단 한명. 중년의 공작 한명만큼은 굳은 얼굴을 풀 줄을 몰랐다.


짧은 연설동안 멈추었던 꽃 세례는 고막이 터질 것 같은 환성소리와 함께 재개되었다. 꽃이 흩어지며 회색빛의 꽃잎이 마치 잿빛의 눈이 내리는 것처럼 흩날렸다. 여기저기서 작은 흐느낌과 함께 찬송가구절이 들렸다. 자신의 어깨를 꼭 쥔 이안의 손을 느끼며 리지도 품에 안고 있던 잿빛의 꽃을 던졌다. 한 송이, 두 송이 그리고 세 송이 째를 던졌을 때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붉은 색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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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첫 번째 문장 (1) 14.06.28 490 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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