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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사탕의 책장입니다.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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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사탕
작품등록일 :
2014.06.28 12:48
최근연재일 :
2015.10.05 14:53
연재수 :
2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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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7
추천수 :
63
글자수 :
141,630

작성
14.07.0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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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첫 번째 이야기 (4)

DUMMY

*


피엔르나로 가는 길은 한적하다. 말을 타고 반나절, 걸어서 이틀이 걸리는 짧은 길이라 길도 잘 정비되어 있었고, 도적떼 같은 것의 걱정은 할 필요도 없었다. 도적보단 길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에게는 도둑보다 사람들이 더 두려운 존재였다. 이미 그들을 찾는 황령이 온 제국으로 퍼진데다 꽤 상세한 생김새까지 그려진 벽보도 여기저기, 사람이 자주 다니는 곳이라면 죄다 붙어있었다.


그래서 출발하기 전날 밤, 이안은 염색약을 사왔다. 흔히들 범죄자들이 특징을 바꿀 때 애용하는 것들이었다. 삼류 연금술사의 주 수입원이기에 가격도 딱히 싸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돈은…?”


걱정스러운 눈을 한 리지가 물었다. 물론 그녀는 구체적인 액수까지는 몰랐지만, 요 며칠 내내 돈을 벌 일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직 많이 남았어.”


이안은 그녀의 머리를 매만지며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이었다. 조금 전 나와서 아주 친절한 건달들의 지갑을 털어 다시 채워놓았기 때문에 아직 많이 남아있게 되었다. 딱히 거짓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이안이 단도를 들었다.


“조금 잘라야겠다.”

“응.”


리지는 마치 미용실에라도 온 것 마냥 그에게 무방비로 머리를 내맡겼다. 하지만 정작 망설이고 있는 것은 그였다.


이안도 머리를 잘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여자의 머리라니,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망치지 않기 위해 그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 사락사락 손가락 끝에서 흐트러지는 금발이 조금씩 잘려 바닥으로 떨어져갔다. 미리 종이를 깔아놓아 천만 다행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그럴듯한 모양으로 성공해냈다. 머리의 반절이 잘려 어깨를 살짝 넘는 길이가 되었다.


그녀도 고개를 끄덕이며 맘에 든다는 표시를 하자 이안이 단도를 다시 검 집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아주 얇은 장갑을 끼고는 약병을 열었다. 쓴 냄새가 훅 풍겼다. 피부에 닿지 않게 조심하며 머리카락에 아주 조심스레 약을 발랐다. 독한 냄새에 그녀도 얼굴을 절로 찌푸렸다.


검은 약물이 금빛 머리카락을 마치 탐욕스럽게 먹어치우듯 물들였다. 오랜 시간에 걸쳐 아름답던 금빛은 점점 그의 손 안에서 사그라지듯 사라지고 말았다.


“이대로 오래 두어야 한다니까 움직이지 말고 있어.”


담담한 말투로 약을 판 술사에게 들었던 설명 그대로 전하고는 그는 이제 거울을 보며 제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이안의 머리는 이미 충분히 짧았기에 그는 더 자르지 않고 다른 약병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 리지에게 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머리카락에 약을 바르기 시작했는데, 조심성이 조금 덜했다.


하지만 자기 머리를 만지는 것은 조금 더 힘든지 거울을 보며 고생하고 있는 그를 보다가, 리지는 어느새 깜빡 잠에 들었다.


“음….”


다시 눈을 뜨자 갈색머리의 이안이 그녀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앗!”


그녀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갈색머리라니!


“하나도 안 어울려.”


오랜만에 얼굴에 웃음기가 머물렀다. 웃고 있는 그녀를 보며 이안도 마주 웃었다.


“네 머리도 그럴걸. 씻고 와봐.”


리지는 약이 옷에 묻지 않도록 조심하며 욕실에 들어가 담겨있는 물을 바가지로 펐다. 딱 좋을 정도로 미지근했다. 이안이 준비해 둔 것이었다.


“정말 다정하다니까.”


리지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머리를 씻었다. 검은 물이 점점 빠지면서 미끈한 약의 느낌도 사라졌지만 여전히 머리는 검은색이었다. 마치 다시 검은 머리로 돌아온 것 같아 그녀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별세계에서 원래 세계로의 향수를 느낀 달까, 그녀는 머리를 꼬아 물을 짜내며 생각했다. 여러 번 헹구었는데도 여전히 검은 물이 나온다.


“이안, 검은 색이 자꾸 빠지는데?”

“그냥 나와. 그러다가 색이 다 빠지겠어.”


선반에 올려 진 흰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고 얼추 되었다 싶자 그녀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물론 수건은 검은 물이 들어 엉망이 되었다.


“괜찮아 보여?”

“그래.”


리지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등 뒤의 이안에게 물었다. 그는 성의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리지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에 검은 머리가 되었기 때문일까, 거울 속 검은머리를 한 모습의 그녀는 너무도 낯설었다.


“검은 머리가 어색하다니. 얼굴이 달라서 그런가? 이러다가 내 진짜 얼굴도 까먹어 버리겠어.”


리지로 이 이야기 속을 살아온 게 벌써 네 달, 앞으로 끝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는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녀는 거울 안에 있는 리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대도.”


이안이 그녀의 손에서 수건을 빼내며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네가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가게 될 거야. 네가 걱정할만한 일들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을 거고.”


어쩐지 귀찮다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무드 없는 말투였지만, 리지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래.”


하지만 불안한 기분을 숨기지는 못하고, 어딘가 못내 어색한 모습으로 그녀는 웃어보였다. 물기 젖은 검은 머리칼에 오히려 앙상한 느낌이 물씬 들었다. 가슴 한구석이 따끔따끔한 것을 느끼며 이안은 목덜미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떼어내 주었다.


“그러고 보면, 이안은 어떻게 아는 거야?”

“뭘?”


갑자기 입을 연 그녀 덕택에, 화들짝 놀라며 목덜미에서 손을 떼어 내며 이안은 대답했다. 다행히 목소리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고, 거울을 보고 있던 그녀도 눈치 채지 못했다.


“내 모습이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어떻게 같은 사람인걸 알아?”


이안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생각해 본적이 없던 것이기에 조금 신기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느끼는 기묘한 감각을 설명할 방법을 찾느라 조금 더 멈추었다가, 그는 입을 열었다.


“그냥 너무도 자연스럽게 알게 돼.”


더러워진 수건을 세탁물 바구니에 집어넣고, 몸을 돌려 난로에 다시 장작을 하나 넣으며 그는 말을 이었다.


“책을 보면 주인공은 누구입니다, 하고 적혀있지 않아도 그냥 보기만 하면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듯이, 그냥 그런 느낌으로 알게 돼. 네가 누군지.”

“나 이전에도 이렇게 만나본적 있어?”


에메랄드를 닮은 옥빛 눈이 동그랗게 가득히 의문을 담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안은 난로 근처의 의자에 앉으며 지난 세월을 돌이켜봤다.


“아니 없어.”


아직 조금 물기 있는 머리를 하곤 리지도 그 맞은편에 앉았다.


“나 말고도 여럿 있을 줄 알았는데.”


한참이나 지나 잘 기억나지 않는 헤진 기억을 뒤지며 리지가 말했다. 무채색으로 이뤄진 기묘한 공간에서 이안과 아더가 나누던 이야기는 이제 잘 기억나지도 않았다. 다만 눈이 부실정도로 아름답던 아더의 웃음만이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었다.


“어쩐지 남편을 추궁하는 아내 같은데.”


마치 정말 한때 꾸었던 꿈같은 기억을 떠올리던 그녀는 이안이 한 농담을 듣지 못했다. 괜히 무안해진 이안이 목소리를 키워 단호하게 말했다.


“내일 떠나려면 일찍 자는 게 좋을 거야.”

“머리는 말려야지. 안 말리고 자면 다 눌린 다구.”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항의했지만, 정말 오랜만에 보는 생기 있는 표정이었다. 간만에 기운이 난 그녀의 모습이 맘에 들어설까, 이안도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예상 했던 대로, 여로는 사람들로 끊임없이 붐볐다. 말을 잘 타지 못하는 리지 때문에 속도를 크게 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아침 일찍 새벽같이 출발 한 덕택에 해가 지기 전에는 도착 할 것 같았다.


봇짐을 지고 걸어가는 사람들과, 이따금씩 먼지를 휘몰며 달리는 마차들의 공통점은, 전부 우울했다는 것이다. 검은 깃발을 달고 달리는 마차는 장례식에 가는 행렬이었고, 걸어가는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듯 했다.


여신의 계절, 또는 죽은 여왕의 계절인 겨울에 하는 축제인지라 그리 화려하진 않아도 축제 특유의 유쾌함과 발랄함이 있을 텐데…. 덩달아 리지도 그 우울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이안은 속도를 조금 줄이며, 흘깃 아래를 쳐다보았다. 그새 금발에 익숙해졌는지, 바뀐 검은 머리가 어색했다. 마치 작은 짐승이 어미의 품에 안긴 것처럼 그녀는 이안의 품에 안겨있었다. 그도 알고 있다 시피, 그녀에겐 그가 전부였다. 그의 옷자락을 꼭 쥔 그녀가 애처로웠다.


“괜찮아? 힘들지 않아?”


이안은 다정히 품안의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대답 없이 고개를 저었지만, 그래도 아예 맥이 빠진 예전보다는 조금 나았다. 이안은 한숨을 쉬며 긴장을 풀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와의 사이에 침묵이 존재하는 것은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다. 무엇이던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네 기분이 좋아질지 잘 모르겠으니, 내 이야기를 해줄게.”


리지는 여전히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나은 얼굴이었다. 이안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녀에겐 가장 궁금한 화제였다.


“저번에 네가 물었지, 이야기 밖의 사람인 나는 모를 감정이라고….”


리지는 묵묵히 들었다. 이렇게 우울한 이야기가 되기 전에 마가렛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떠오른, 지금 생각해보면 고민거리도 되지 않는 아주 하찮은 이야기였다. 이안을, 그래. 이안을 좋아한다고 인정했을 때 생겼던 달디단 고민.


문득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리지는 꾹 참고 조용히 이안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니야. 나는 이야기 밖에 있긴 하지만, 너와 마찬가지로 이야기속의 사람이야.”


다각 다각, 말발굽소리가 느긋하게 여로를 채우고, 추운 날씨에 걸맞게 바람은 차가웠다.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은 리지의 눈에 매달려있던 눈물을 단숨에 낚아채갔다. 그녀는 놀라 말을 뱉었다.


“하지만, 아더는….”

“그래. 아더는 이야기 밖의 사람이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이안이 말을 끊으며 대답하자 리지는 모포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이야기 도중에 아더와 계약을 맺었어. 어쩌면 그게 아더가 써둔 이야기의 끝일지도 모르지. 그는 나에게 절대로 내 이야기를 보여주지 않으니까.”


마른 나뭇가지처럼 버석버석한 목소리였다. 리지는 문득,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보고 싶었다. 고개를 돌려 볼 수는 없었지만, 아주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한 것과 반대로 이안은 아주 다정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시간의 개념도 없는 이곳에서 영원에 가까울 시간을 보내왔지.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래도 이제 곧….”


이안의 눈은 앞을 향해있지만 어느 곳도 보고 있지 않았다. 아마 아득히 먼 곳, 리지와 헤어진 뒤 아더와 건넨 약속의 결과를 받아낼 바로 그 순간을 보고 있으리라. 검둥이라 이름붙인 말이 기수의 기색을 읽어내고 불만인 듯 투레질 했다.


그제야 이안은 제 품에 안긴 리지와 향하는 도시, 그리고 목적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품속의 여자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투덜댔다.


“아더가 네게 이야기를 보여주지 않는 것 때문에 나한테도 이야기를 보여주지 않는 거지?”

“아니야.”


칼같이 냉정한 목소리로 그가 답했다. 그들의 여행길이 점점 음울해지기 시작할 때 몇 번이고 그녀가 부탁했던 것 중 하나였다. 이야기를 끝내던가, 앞으로의 이야기를 보여주던가. 물론 이안은 둘 다 들어주지 않았다.


“네가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된 이상, 이 이야기의 어떤 단편적인 미래도 보여줄 순 없지. 그건 규칙이야.”

“규칙?”

“그래. 아더가 정한…. 아더야 말로 모든 이야기의 아버지이니까 말이야. 그가 그렇게 정했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모든 이야기의 아버지….”


그녀는 조용히 이안의 말을 되뇌었다. 모든 이야기…. 무언가 망각의 저편에서 아른아른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다시 생각이 날 듯 말 듯, 그녀를 괴롭혔다.


왜 잊었는지, 무엇을 잊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꼭 떠올려야할 것을 잊어버린 기묘한 느낌이 그녀의 몸을 엄습했다.


그녀는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고 몸을 이안의 품에 더욱 깊게 기댔다. 바람을 타고 출렁이는 잔머리가 뺨을 간지럽혔다. 연하게 풍기는 씁쓰레한 약냄새가 거슬렸지만, 곧 그녀는 그 마저도 잊고 제 머릿속을 헤매기 시작했다.


그래. 이안을 처음 만났을 때의 복장. 그녀는 이미 그때부터 낯익은 기시감을 느꼈었다. 아니 낯익다고 해야 할까, 미묘한 위화감이라고 해야 할까, 이름붙이기 힘든 느낌이었지만 아주 강렬한 것만은 분명했다.


부드러운 비단마냥 그가 움직일 때마다 춤추듯 날아다니던 검고 검은 머리, 태어났을 때부터 남의 머리를 밟는 것을 거리끼지 않았을 냉혹한 눈초리. 턱 선을 약간 가릴 정도로 깃이 높은 검은 코트에는 은실로 놓은 자수와 은빛으로 빛나는 해골문양의 단추가….


-안 돼.


그녀는 온몸에 닭살이 돋는 것을 느끼며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눈을 떴다. 한순간 온몸을 잠식한 강렬한 그리움과 낯설음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것보다 더 크게 울렸던 경고음이 그녀를 두렵게 했다. 자신의 머릿속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귓가에 속삭이듯 울려 퍼진 목소리는 너무도 다정했지만 동시에 공포스러웠다.


“왜 그래?”


이안이 말의 속도를 늦추며 그녀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안은 잠시 갸웃했지만 금방 마가렛이나 글랜의 기억을 떠올렸으리라 생각해 스스로 납득했다. 잠시 시선을 내려 제 품에서 꼼지락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앞으로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이안으로서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걱정은 해도 모든 것이 이야기대로 흘러갈 것을 이미 그는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경험했던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걱정을 계속하는 대신 손을 들어 무언가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저기 보여?”


저 지평선 멀리 즈음, 흰 연기가 올라오는 검은 돌 벽이 새끼손톱만 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죽은 여왕을 위한 축제가 열리는 도시, 피엔르나 였다.


제국의 동쪽에 존재하는 중간 규모의 도시인 피엔르나, 평소 열리는 축제의 크기도 그 도시만큼이나 어중간한 규모였지만 올해 열리는 겨울 축제는 위령제 때문인지 몰라도 평소의 열배는 많은 사람이 몰아닥쳤다.


제국에는 흉사였지만 피엔르나에는 길조였을까, 온통 검은색과 짙은 남색으로 조의를 표하는 장식들 속에서도 도시는 축제다운 떠들썩함을 지니고 있었다. 검은 짐승의 발톱이 제국 한편을 할퀴고 있었지만 아직 그 날카로운 할큄에 피흘려보지 않은 살찐 도시는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여관을 정하기 한참 전, 도시에 들어오고서부터 계속 리지는 어쩐지 고약한 기분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 세상의 고생이란 고생은 전부 자신을 따라오는 것 같았지만 적어도 이 도시는 마치 자신 따위 없어도 행복한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어째서 그렇게 심통이 났어.”


짐을 풀고 이안이 부드럽게 물었다. 하지만 리지는 또다시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아까 말에 탈 때부터 두르고 있던 모포를 더욱 꼭꼭 여밀 뿐이었다.


“축제 구경 가볼래?”


낯익으면서도 어색한 검은 머리가 살짝 움직였다. 반응이 있자 이안은 마치 피 흘리는 상처를 찾은 상어처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이 시기에 하는 축제는 마법사들이 많아서 아주 화려해.”


아닌 게 아니라 해가 뉘역뉘역 넘어가 붉게 타오르는 하늘 아래에는 은하수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환한 불빛이 거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가끔 하늘로 튀어 오르는 화려한 색깔의 불꽃은 이안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리지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그리고 위대한 왕과 죽은 여왕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은 항상 있지. 하다못해 아이들을 위한 인형극이라도.”


이제 거의 다 넘어왔다는 것을 이안은 그 뛰어난 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그녀를 뒤흔들 쐐기를 박았다.


“오늘 저녁은 네가 좋아하는 거로 먹자. 밖에서.”

“이안이 그렇게까지 바란다면 구경하러 가보자.”


그녀는 마치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냉큼 모포를 뒤집어 벗으며 일어섰다. 그녀의 얼굴에선 바로 조금 전까지 있었던 심통이 가득한 표정이나, 그녀의 온 기분을 내리 누르던 끔찍한 상상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봐. 제대로 입고 가자. 날이 추우니까.”


느리지만 꽤나 착실하게 움직이는 태양은, 그 잠깐 옷을 입으며 돈을 챙기는 사이에 하늘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벌써 라샤가 없어졌군.”


이안이 창문 밖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라샤?”

“태양의 다른 이름.”


그녀가 팔을 끼우기 편하게 외투를 들어주며 이안이 짤막하게 말했다.


“태양신의 이름이지만, 뭐 그게 그거지.”

“원래 그렇게 부르는 거야?”


그녀가 외투에 팔을 꿴 채 질문하자 이안은 조금 미간을 찌푸리며 외투의 단추를 여미어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니 이 세계에서.”

“그럼 이안이 원래 있던 세계에서는 뭐라고 불렀어?”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거울을 보며 그에게 물었다. 정말로, 무언가 큰 의미를 가지고 물은 것이 아닌 아주 가벼운 질문이었지만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것을 중요하지 않기 생각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침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 하늘에게 감사해야 했을 것이다.


수천 수억의 세계를 넘나들었지만 단 한 번도 도달해 보지 못한 그의 세계. 그것은 아더의 짓임이 분명했지만 그 기나긴 시간동안 이안은 그에게 불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해서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그는 타오르는 푸른 불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안 스스로 눈치 채는 것까지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침묵은 잠시였다. 이안은 다시 능숙하게 자신의 표정을 바꾸어 리지를 불렀다.


“군것질은 뭘 로 할래?”

“음, 어떤 종류가 있는지 잘 모르니까.”


리지는 거울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이안을 바라보았다.


“역시 이안은 검은 머리가 잘 어울려. 갈색머리는 별로야.”

“그래?”


이안은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건넸다. 조금 전 얼음 같던 그와 같은 이라고 상상도 가지 않는 미소였다.


“그래.”


리지도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편의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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