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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곰곰 님의 서재입니다.

아카데미 고인물이 업적을 다 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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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곰곰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5.08 11:52
최근연재일 :
2024.07.04 22:00
연재수 :
5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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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992
추천수 :
4,529
글자수 :
338,091

작성
24.06.04 22:00
조회
1,993
추천
67
글자
12쪽

낙제생이 힘을 숨김 1

DUMMY

조용한 방 안에 쇠를 갈아내는 소리가 주기적으로 울려 퍼졌다.


“······.”


흑발의 남학생은 말 한마디 없이 긴 시간 동안 지루한 작업을 반복했다. 쳐둔 커튼 바깥으로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때에야 그는 어렴풋한 햇빛에 검날을 비쳐 보았다.

원래 같았으면 늦잠꾸러기 룸메이트가 불평을 중얼거리며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으나 오늘만큼은 조용했다. 아니, 오늘이 아니라 한동안은 줄곧 이렇게 조용할 것이다.


검을 원래 있어야 할 검집에 되돌려놓고 남학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룸메이트는 힘들었던 학업을 잠시 내려놓은 채 오랜만에 고향을 향해 떠나고, 좁은 기숙사 방엔 갈 데 없는 한 사람뿐.

칼라일은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걷었다. 떠오르는 태양이 그의 검은색 머리카락을 눈부시게 수놓았다.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금발의 눈매 사나운 남학생이었다.

벌써 세 번째 삶을 살고 있는 칼라일이지만, 아즈일. 그는 예상하지 못한 이레귤러였다.


생각한다. 그 숲의 북쪽 끄트머리에서 있었던 일을.


- 칼라일 그리미어. 내 말 잘 들어.

- 여기엔 고대의 괴수가 살아.

- 칼라일. 지금의 넌 못 이겨.


도대체 아즈일 그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던 걸까.

처음엔 아카데미에 잠입한 사교도라고 생각했다. 네드빌의 뒷목에 붙어있던 벌레를 죽인 것이 만약 그라면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허나 그 이후의 행동은 무엇이란 말인가.


- 하여튼 주인공이란 새끼들은.


그러고 그는 칼라일을 막아섰다.

고대의 괴수를 지키기 위해서? 아니었다.


- 살아라 썅놈아.


뒤늦게서야 그 지하에 도착했을 때, 그는 홀로 <발락>을 빈사 상태로 만들어둔 뒤였다.

칼라일이 한 일이라고는 마지막 일격을 내지른 것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아즈일의 업적이었다.


“······.”


생각한다.

첫 번째 삶에서 그는 <결말>을 해치우지 못했다.

그 무시무시한 드래곤의 눈 아래에서 수십 번을 죽었다 되살아나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힘으로 그 드래곤을 해치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시간을 감았다.

두 번째 삶에서 그는 동료들과 힘을 합쳤다.

운명의 인도로 편입하게 된 아카데미엔 그가 차마 눈치채지 못했던 눈부신 재능이 가득했다. 칼라일은 빈말로라도 사교적인 성격이 못 되었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았기에 그들에게 맞춰줄 수 있었다.

어려움에 빠진 주변 인물들을 도와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니 그들 또한 칼라일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모두와 함께 <결말>을 무찌르는 것은 가능했다.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드래곤은 결국 그의 발 아래에 피 흘리는 머리를 뉘었다.

허나 그 과정에서 모두가 죽어버리고 말았다.

살아남은 건 칼라일 혼자였다. 다른 이들은 드래곤의 광풍을 이겨내지 못했다. 주변엔 오직 시체, 너무 많은 시체뿐이었다.


그는 세상을 구했으나 스스로를 구하지 못했다.


자문했다. 이런 결말에 의미가 있는가?

그렇기에 그는 한 번 더 시간을 감았다.


세 번째인 이번 생에선 아무것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칼라일은 미리 모든 위험 요소를 제거해두려고 했다. 미래에 나타날 거악들을 초기에 밟아두면 끝내 <결말>에만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 그에게만 모든 힘을 다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 시작이 바로 고대의 괴수 <발락>이었다. 미래에 큰 분수령이 되는 강력한 마수.

지금도 어둠 속에서 사교도들이 그를 부활시키기 위해 힘쓰고 있을, 반드시 거쳐 가야만 하는 위협.


준비만 되면 칼라일도 곧바로 토벌하려 했다. 구태여 제 힘을 되찾아 부활할 때까지 기다려줄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숲의 북쪽 끄트머리. 아즈일이 귀신처럼 그 자리에 있던 것이다. 마치 자신의 행동을 전부 읽었다는 것처럼.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에 대한 것들이 궁금해졌다.

쟝 드 아즈일 브리오트.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


허나······, 칼라일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를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좀 더 신중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었고.

다 떠나서 아즈일 그 또한 귀족이니 돌아갈 고향이 있을 것이다. 자신과 같은 고아와는 달리.


잘 갈아낸 검을 챙겨 들고서 칼라일은 방을 나섰다. 평소보다도 훨씬 조용한 기숙사를 걸어 나갔다.

그런 그가 향하는 곳은 아카데미가 아니었다. 입고 있는 옷이 교복인 것도 아니었다.


용병 시절에나 입던 투박한 갑옷을 입고서, 칼라일은 아카데미 부지 곳곳에 비밀스럽게 열려있는 던전을 향했다.

이번 삶이 처음이 아니기에 알고 있는 것. 동료들과 친분을 쌓을 시간에 대신 강해지기 위해 찾아둔 장소.


오늘부터 여름방학의 시작이었다.


* * *


파란만장했던 1챕터도 어떻게든 마무리되었다.


<발락>은 나중 챕터의 보스로 등장할 예정일 텐데 여기서 잡아버리면 어떻게 되는 건지. 게임에서처럼 버그 취급해버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등장할지.

그런 게 궁금하기야 했다만 당장 신경 쓸 건 아니었다.

한때는 어떻게 되나 했던 배드 엔딩도 잘 넘어간 것 같고, 내 목숨줄도 붙어는 있었다. 그거면 됐지 일단은.


지금은 커튼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침대에 그냥 누워있었다.

[Goddess & Bravers]는 챕터가 끝난다고 해서 바로 다음 챕터가 시작되진 않았다. 이 게임엔 챕터 사이에 ‘사이드 스토리’라는 게 있었다. 말하자면 쩜5챕터 정도일까.


말이 거창하지 그냥 방학이란 소리였다. 일단은 배경이 아카데미니까.

수업도 없고 진행되는 메인 스토리도 없는 시간. 쉬어가는 타이밍.


게임이었다면 이때 ‘호감도’를 올릴 수 있었다. 메인 캐릭터 중 한 명을 골라 그 캐릭터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소리였다.

지금 열려있는 메인 캐릭터는 루펠카리야와 피리스 둘. 그중 루펠카리야를 고르면 아카데미에 남아 임시 호위를 맡게 되고, 피리스를 고르면 그녀를 따라 공작저에 불려 가게 된다.

여기서의 선택지에 따라 나중에 캐릭터 루트가 갈리게 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야 중요한 이벤트긴 했지만.


“하아······.”


그게 엑스트라인 내 알 바는 아니지.

칼라일이 누구랑 어디서 뭘 하며 시간을 보내든 그건 나랑은 상관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방에 누워 뜨뜻한 햇빛이나 받으며 한숨을 내쉴 뿐.


1챕터.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것만으로도 나 같은 엑스트라한텐 감사할 일이겠다만은······, 모든 게 해피엔딩인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도 내 탁자 위엔 끝없는 한숨을 유발시키는 문서가 놓여 있었다. 찾아가서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도감을 펼쳐봅니다.]

[ >>> ]


───


[기말고사 시험 성적표]


쟝 드 아즈일 브리오트 귀하께 드립니다.


이번 3학년 1학기 기말고사에서 귀하가 받게 될 성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초등 교양 마법 : A. (+6)

기초 약학 : A. (+8)

.

.

.

종합 실기 : 낙제. (실습 중 실종)


종합 성적 순위 : 학년 168위.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종합 성적 순위 5위까지는 소정의 장학금이 지급됩니다.


제국력 822년 6월 10일

성 가브리엘 아카데미 학장 印


───


처음엔 편지에도 오타가 날 수 있는 건가 한참을 들여다봤다.

종합 실기 낙제. 종합 성적 순위 168위.

몇 번이나 확인한 후엔 낙제한 이유 쪽으로 눈길이 갔다.


실습 중 실종이라고.


보이는 마수란 마수는 화염구 완드로 싸그리 구워버리며 대활약을 했던 내가 도대체 어쩌다?

그 이유는 터무니없었다. 고대의 괴수 <발락>의 동굴에서 기절해있는 동안 기말고사가 끝났거든.


······나를 뺀 채로 우리 조에 점수가 매겨졌다는 뜻이다.


당연히 억울했다. 성적 정정 요구라도 할 수 있으면 당장 달려갔을 거다.

근데 그렇다고 변명할 거리가 마땅히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말고사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생존 실습’이었으니까.

실제로 나는 제한시간까지 귀환하지 못했다. 내가 그동안 뭘 하고 있었는지 교수들한테 증명할 방법도 없었다. 생존이 가장 중요한 과목에서 혼자 낙오되어 실종되었다면 객관적으로 할 말이 없지.


숲의 주인이 오염되어 난폭해지는 비상사태가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시험은 시험이었다. 점수는 매겨야 했고 순위는 나눠야 했다.

직접 <오염된 숲의 주인>을 토벌한 칼라일, 루펠카리야, 피리스. 이렇게 세 사람은 최고 점수에 더해 강당에서 상장도 받았다. 그건 내가 기억하는 게임 스토리와 같았다.

그 외에 나와 같은 조였던 다른 두 사람도 위기 상황에서 다른 학생들을 대피시킨 용기가 가상해 추가 점수를 받았다. 그것도 일리가 있어.

그리고 난 단순 실종자였다.


······거기까지 확인했으면 이제 그 다음은 심각한 문제만이 남아있었다.

나는 이미 4번의 학사 경고를 받은 상태였다. 거기서 낙제점 하나가 더 매겨지는 순간?

다섯 번째 학고와 더불어 퇴학 확정이었다.


게임이었다면 게임 오버가 눈앞에서 스멀스멀 모양새를 갖춰가는 것만 같은 그런 상황······이었지만.

이렇게 보시다시피 아직은 기숙사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정말이지 천만다행이게도 퇴학만큼은 면할 수 있었다.


제3황녀 루펠카리야가 나서준 덕분이었다.

내가 기말고사에서 낙제점을 받았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루펠카리야는 벌떡 일어나더니 교무실로 향했다.

그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나는 모른다. 그저 그녀의 교무실 출입 이후 마법처럼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는 것뿐.


정말이지 황녀 저하 만만세시다만은······, 그럼에도 내 입에서 한숨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아아······.”


학사 경고는 물렀다고 하더라도 점수까지 되돌릴 수는 없었다. 제아무리 황녀가 나선다고 해도 이미 다 정해져서 발표까지 나버린 기말고사 순위를 이제 와서 바꿀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내게 내려진 처분이 바로, 보충수업이었다.

방학 첫 주만 쉬고 나는 다음 주부터 다시금 학교에 나가야 했다.


이게 도대체 어디가 방학이냐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그래,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적어도 퇴학보다는 낫지. 아카데미에서 쫓겨나는 것보단 백 배 천 배 낫지.

그치만 이번 기회에 확실히 결심했다.

메인 스토리엔 진짜로 관여하지 말자. 기를 쓰고 악을 써서라도 피해 다니자.

누가 뭐래도 나는 생존이 우선이다. 내 생명과 안전을 보전하는 게 첫 번째인 소시민이다.


그렇게 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뻔하지.


더더욱 철저하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준비해둔다······!


“브리오트 도련님. 식사에 대해 여쭙고자 찾아왔습니다.”


그때 자그마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밖에서 이어진 건 레일리아의 목소리였다.

처음 빙의했을 때만 해도 그냥 방문부터 냅다 열고 봤는데 이제는 어지간해선 내 대답을 기다려줬다. 이것도 나름대로 달라진 점이라면 달라진 점이겠네.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하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가요 레일리아.”

“예 도련님.”

“아 그리고.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요.”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식당을 향해 앞장서며 내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수련 시간에 혹시 레일리아와 대련할 수 있을까요?”

“······대련, 이라 하심은?”

“말 그대로예요. 실전 감각을 키우고 싶어서.”


레일리아는 고민이 길어지는 듯 잠시 대답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뜸 대련하자는 건 좀 부담스러운 요구였을까. 레일리아는 내 시종일 뿐이고 아침마다 수련에 어울려주는 것도 원래는 추가 업무긴 하지.


그렇더라도, 좀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번엔 레일리아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더 정확히는 레일리아 말고는 이런 걸 부탁할 사람이 없었다.


“하오나 도련님, 제게는 검이 없습니다.”

“그건 검만 구해오면 승낙하겠다는 뜻이죠?”

“······.”


뒤를 슬쩍 돌아보자 레일리아는 조금 난처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와서 그런다고 물러줄까 보냐.

그녀를 향해 생긋 웃으며 확약을 받아냈다.


“그럼 잘 부탁해요.”


곧 다가올 2챕터. [마법과 마법이 아닌 것].

이번 방학엔 내실부터 다져놓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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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제생이 힘을 숨김 1 +5 24.06.04 1,994 67 12쪽
29 엑스트라 스토리 4 +7 24.06.03 2,009 85 12쪽
28 엑스트라 스토리 3 +8 24.06.02 2,032 82 12쪽
27 엑스트라 스토리 2 +2 24.06.01 2,055 80 14쪽
26 엑스트라 스토리 1 +4 24.05.31 2,101 84 13쪽
25 반데가르의 피리스 4 +6 24.05.30 2,153 81 15쪽
24 반데가르의 피리스 3 +3 24.05.29 2,186 86 14쪽
23 반데가르의 피리스 2 +10 24.05.28 2,286 84 14쪽
22 반데가르의 피리스 1 +6 24.05.27 2,328 87 13쪽
21 기말고사의 에이스 4 +3 24.05.26 2,427 94 13쪽
20 기말고사의 에이스 3 +4 24.05.25 2,488 93 13쪽
19 기말고사의 에이스 2 +6 24.05.24 2,531 90 12쪽
18 기말고사의 에이스 1 +5 24.05.23 2,614 89 13쪽
17 라우레아의 밤 5 +5 24.05.22 2,635 99 13쪽
16 라우레아의 밤 4 +1 24.05.21 2,769 94 14쪽
15 라우레아의 밤 3 +3 24.05.20 2,726 102 12쪽
14 라우레아의 밤 2 +2 24.05.19 2,845 95 12쪽
13 라우레아의 밤 1 +2 24.05.18 2,955 103 13쪽
12 호수가 그래봐야 6 +6 24.05.17 2,954 102 13쪽
11 호수가 그래봐야 5 +1 24.05.16 2,955 97 13쪽
10 호수가 그래봐야 4 +4 24.05.15 3,024 104 14쪽
9 호수가 그래봐야 3 +4 24.05.14 3,103 99 12쪽
8 호수가 그래봐야 2 +5 24.05.13 3,143 117 13쪽
7 호수가 그래봐야 1 +1 24.05.12 3,243 107 13쪽
6 스토리, 그 전 5 +3 24.05.11 3,352 112 13쪽
5 스토리, 그 전 4 +4 24.05.10 3,495 113 13쪽
4 스토리, 그 전 3 +4 24.05.09 3,662 116 14쪽
3 스토리, 그 전 2 +6 24.05.08 3,852 12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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