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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곰곰 님의 서재입니다.

아카데미 고인물이 업적을 다 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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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곰곰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5.08 11:52
최근연재일 :
2024.07.0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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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557

작성
24.06.0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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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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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글자
12쪽

엑스트라 스토리 3

DUMMY

······손에는 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어쩐지 그 감촉이 익숙해서 잠시 매만지고 있었다. 신기하네, 검 같은 걸 언제 써봤더라.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아름다우면서 처절하고, 고우면서도 곧 부서져 내릴 것만 같은.

그래, 어딘가 위태로운 목소리였다.


“······?”


허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봐도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저 텅 비어있는 공간뿐이었다.

바닥도 벽도 천장도 없는 단순한 세계에서 들고 있던 검을 천천히 늘어뜨렸다. 목소리는 어디도 아닌 곳에서 뒤이어 울려 퍼졌다.


“당신은······, 내가 선택한 자가 아니군요.”


음······, 그렇군요.

대뜸 오해받았지만 별 감흥이 들지는 않았다. 애초에 선택이 뭔지도,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겠다.

입을 열어 물어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입이란 것이 원래부터 내게 있기는 했는지 싶었다.

이곳에서 나는 목소리를 낼 권리가 없었다.


“······선택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미안하게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요.”


그럼에도 의문의 말소리는 재차 들려왔다.

어딘가 걱정하는 듯, 상냥한 듯.


“다만 한 가지. 이것만은 기억해줘요.”


나를 응원하는 듯, 묘하게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이곳에 왔다는 건, 당신 또한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

“용기 있게 나아가세요.”


그 말을 다 듣고.

나는 다시금 내 손에 들린 검을 내려다봤다.


도대체 이 검을 어디서 봤더라. 이렇게까지 익숙한 걸 보면 하루 이틀 잡아본 검은 아닌데.

이 검으로 도대체 나는 무엇을 했더라.


“······.”

“······, ······!”


그러는 사이 저 멀리서부터 다른 목소리가 잡음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자작······, 죽······!”


그건 그래도 익숙한 목소리여서 떠올려보려 노력했다. 누구였더라, 내가 아주 오랜 시간 반복해서 들은 목소리 같은데.

안 되겠다. 점점 잠이 와.


“정신 차······, 공자······!”


검을 든 채로 다시금 눈을 감았다. 제대로 된 생각은 안 되고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 나를 애타게 찾아준다는 건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고.


“절대로 죽게 두지 마라! 절대!”


그 한마디를 듣고 나서는 꿈 없는 잠에 깊이 빠져들었다.

얼마 만에 맛보는지 모를 깊은 숙면이었다.


* * *


눈을 뜨니 그곳은 낯선 천장이었다.


“······뭐야 여긴?”


나도 모르게 그런 말부터 튀어나왔다. 양질의 수면을 취하고 자연스럽게 눈이 떠진 것까지는 아주 좋긴 한데, 그렇게 깨어난 곳이 어디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잠들기 전의 기억조차 희미했다. 어땠더라. 뭔가 아주 더웠던 거 같은데.


아 그렇지. 어렴풋이 기억이 되살아난다. 나는 <발락>을 트라이하다가 어처구니없는 실수 때문에 실패해서······.


“······헉!”


급하게 이불을 박차고 상체를 일으켰다. 내 얼굴을 매만지고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나 그 자리에서 죽은 건 아닌가? 그러면 여긴 혹시 현실 세계?


모든 게 헛된 꿈이었고 나는 원래대로 돌아온 거라면?


“정신이 들었나?”


그때였다. 저 앞의 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을 숨길 생각은 없는 듯 그녀는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건 백은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편안한 실내복이지만 어딘가 고급스러운······.


어딜 어떻게 봐도 오해할 수 없는 제3황녀 루펠카리야였다.


“상처가 심했다. 일류의 의료진이 당장 투입되어야 할 문제였지. 그리하여 우선은 급한 대로 이곳에······.”

“······.”

“음 왜 그렇게 보지?”


왜 그렇게 보냐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제3황녀가 대체 여긴 왜 계신 건데요.


내가 뭐라 입을 열어 묻기도 전이었다. 루펠카리야는 이해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정신이 없나. 그럴 법도 하지. 이틀을 내리 잤으니.”

“······이틀이요?”

“그렇다, 브리오트 자작공자. 그대는 이곳에서 대략 40시간 정도를 수면했다.”


40시간. 이틀을 내리 밤새 게임하다가 곯아떨어졌을 때에도 그렇게 오래 자진 않았다. 그 정도면 잔 게 아니라 죽어있다가 부활했다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충격적이기야 했다만 그것까진 좋았다. 이틀이 순식간에 녹아버린 거야 그렇다 쳐.

그보다 중요한 사실이 아직 남아있었다.


“‘이곳’······이라 하심은?”


내가 40시간을 잤다는 ‘이곳’. 여기가 도대체 어딘데.


“······.”


사람 답답하게도 내 짤막한 질문에 루펠카리야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양손에 들고 온 두 개의 머그컵 중 하나를 내 머리맡의 탁자에 내려둘 뿐.

그러고는 자신 몫의 컵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따뜻한 차를 천천히 삼키고 나서야 그녀는 가볍게 입을 열었다.


“여기는 내 개인 숙소다, 자작공자.”

“······.”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했다.


루펠카리야의 개인 숙소, 그렇구나. 여긴 황녀의 기숙사 방이었구나.

근데 내가 왜······, 그런 데에서 일어난 건데?


“흠. 흉이 남지 않아 다행이군.”


식겁한 내 속내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 루펠카리야는 내 몸을 바라보며 그렇게 툭 내뱉었다.

그러고 나서야 문득 몸이 싸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선을 내려보니 그곳엔 이불에 잘 덮여있다가 내가 걷어치워 버려 만천하에 공개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내 상체가 있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반라의 몸으로 황녀의 개인실 침대에서 이틀을 내리 잔 사람이 되어있었다.


환장하겠네.


“전신에 화상을 입어 의료진이 걱정이 많았는데, 과연 능력이 좋았던 모양이야.”

“아뇨 저기······.”


그런 와중에도 루펠카리야는 내 맨몸을 샅샅이 살펴보며 그렇게 말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타인 앞에서 너무 넓은 면적의 살갗을 공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고결한 황녀 저하께서는 신경 쓰시지 않는 것 같았으나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신경 쓰였다. 괜히 부끄러워져 슬쩍 이불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제, 제가 어찌하여······. 저하의 숙소에 있는지 혹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그대의 상처가 너무나도 심하여 집중 치료를 하기 위해서다.”

“······.”


그것만으로는 대답이 되지 않았다. 집중 치료를 할 거라면 의원이나 기도실에 집어넣어 놓는 게 나았을 거다.

그렇다면 숨기는 게 있다는 건데, 뭘까. 황족 앞에서 대놓고 눈살을 찌푸릴 수는 없었으니 속으로만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래, 그 정도로는 대답이 되지 않는다는 거군.”


과연 루펠카리야라고 할지, 고작 그 짧은 침묵만으로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간 모양이었다.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서 머그컵을 한 번 더 입으로 가져갔다. 짙푸른 방 안의 어둠과 어우러져 그 모습이 세밀히 덧칠한 유화와 같았으나, 정작 루펠카리야는 고민이 있는 듯 조용했다.


내가 먼저 입을 열 수는 없었다. 지금은 온전히 그녀의 턴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루펠카리야가 다시금 말을 꺼냈다.


“브리오트 자작공자.”


그녀는 나를 바라보는 대신 자신이 딛고 선 바닥 언저리로 시선을 던졌다.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는 알 수 없는 인물이다.”

“······.”

“악행을 저지르는 데에 거리낌 없다가도 스스럼없이 남을 돕기도 해. 그대의 안위만을 걱정하는가 싶으면, 그 다음엔 이렇게 만신창이로 다쳐있지.”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루펠카리야는 나에 대해, 아즈일이라는 이 인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악행을 저질렀다고 하는데 대체 나의 어떤 악행을 알고 있을까. 내가 남을 도왔다는 것은 또 무엇이며, 그녀는 나의 과거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지금 이 상황. 이건 게임에서 있었던 일이었을까?

과연 아즈일이 이렇게 황녀의 개인 숙소에 들어올 일이 있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러면 원래의 아즈일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어야 할까.


이 엑스트라에게 배정된 이야기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공자.”


그에 대한 생각을 마무리하기 전이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루펠카리야가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말에 나는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숲의 북쪽 끄트머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그리고, 나는 겨우 이 흐름의 끝자락이라는 걸 쥐어볼 수 있었다.


눈앞에 서 있는 이는 제3황녀 루펠카리야.

말로 사람을 옥죄고 말로 사람을 단죄하는 언어의 총아.


그녀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선행이라는 목적으로 날 개인 숙소에 재웠을까?

그럴 리가 있나.

루펠카리야는 직접 본 거다. 아니, 최소한 보고라도 들었을 거다.


내가 숲의 북쪽, 그 지하 동굴 속에 쓰러져있었다는 사실을.


거기서부턴 이야기가 심각하게 복잡해진다. 루펠카리야가 알고 있는 건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 그녀는 고대의 괴수에 대해 들었을까, 아니면 아직 모를까?

내가 마수와 싸웠다는 사실은 알까? 그 모든 것을 공백이라고 가정한다면. 완전히 처음부터 시작한다면.


그렇다면, 내가 그곳에 왜 있었는지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생각이 많은 듯한 얼굴이군.”


심지어 루펠카리야는 느긋하게 기다려줄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한 걸음, 내가 누운 침대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상체를 약간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어둠 속에서 향수와 같은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평온한 눈동자 밑에 먹잇감을 위협하는 맹수의 눈빛을 숨기고서,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본인은 죽어가는 그대에게 인정을 발휘하였다. 본인이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해 그대의 회복에 전념했지.”

“······.”

“말하자면, 그대는 본인에게 목숨을 빚졌을진대.”


이제야 내 처지라는 게 보였다.

내가 왜 이곳에서 깨어난 건지 겨우 깨달았다.


“그렇다면 본인의 사소한 질문 정도는 대답해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싶다만.”


나는 지금 감금된 거다. 루펠카리야의 개인 숙소에.

여기서 멋대로 나갈 수도 없고, 루펠카리야는 지위상 내게 얼마든 질문할 수 있으며, 내게는 그 질문을 회피할 명분조차 없는 곳.


“······.”


그러나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 이미 침묵하기로 했다면 아예 정답이 설 때까지 입 다물어야 했다. 섣부른 오답보다 더한 독은 없었다.

생각해보자. 정말로 진실을 말한다면?

나는 숲의 북쪽에 고대의 괴수가 잠들어 있는 것을 알았으며 그것을 토벌하려 했다면.

황녀가 그것을 믿지 않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날 허언증 과대망상자로 생각해주면 그게 나았다.


만일 믿어버리면. 날 능력 있는 인간이라고 여기면.

그러면 모든 게 삐걱이기 시작한다.


루펠카리야 라일 오 카탈마이어.

제국의 제3황녀로 태어났으나 계승권을 포기한 채 아카데미에 자진 입학한 인물.

그녀는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이 아카데미에 들어왔다. 그것이 그녀의 목적이자 목표요 그녀가 걸어갈 단 하나의 길이었다.


루펠카리야는 능력 있는 인물을 옆에 두고 싶어 했다. 자신이 <예지안>으로 봐버린 결말을 바꾸기 위해서.

마지막 남은 드래곤 <결말>이 모든 것을 짓밟고 부수며 끝내 제국을 멸망시키는 끔찍한 심상을 제 손으로 되돌리고 싶어서.


그곳에······, 나 같은 엑스트라가 껴있으면 안 된다.

루펠카리야가 나한테 무슨 기대 같은 걸 하게 해서는 안 됐다. 나를 주목하고 내게 관심 가지며 끝내 나한테 희망 같은 걸 걸게 해선 절대 안 된다.

특히 이번에 <발락>을 잡아보며 깨달았다. 이거 목숨이 몇 개라도 부족한 일이다. 칼라일은 실제로 목숨이 무한대니까 가능하지, 나 같은 소시민은 발을 들여도 될 세계가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저, 황녀 저하?”


살아남기 위해선 오직 이것뿐이었다.


“북쪽의 끄트머리······라니요?”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되물었다.


“제가 그곳에 있었습니까?”


아아, 모르는 건가?

이건 기억상실이라는 거다.


작가의말

g6**** 님, 후원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루가 멀다 독자 여러분께서 후원을 해주신다면 제가 또 사리사욕에 아주 행복해 합니다. 기운 받아 또 하루 열심히 쓰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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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엑스트라 스토리 1 +4 24.05.31 1,954 82 13쪽
25 반데가르의 피리스 4 +6 24.05.30 2,008 79 15쪽
24 반데가르의 피리스 3 +3 24.05.29 2,042 84 14쪽
23 반데가르의 피리스 2 +10 24.05.28 2,134 81 14쪽
22 반데가르의 피리스 1 +6 24.05.27 2,181 85 13쪽
21 기말고사의 에이스 4 +3 24.05.26 2,282 92 13쪽
20 기말고사의 에이스 3 +4 24.05.25 2,340 91 13쪽
19 기말고사의 에이스 2 +6 24.05.24 2,384 88 12쪽
18 기말고사의 에이스 1 +5 24.05.23 2,461 87 13쪽
17 라우레아의 밤 5 +5 24.05.22 2,475 97 13쪽
16 라우레아의 밤 4 +1 24.05.21 2,604 92 14쪽
15 라우레아의 밤 3 +3 24.05.20 2,561 100 12쪽
14 라우레아의 밤 2 +2 24.05.19 2,666 93 12쪽
13 라우레아의 밤 1 +2 24.05.18 2,778 101 13쪽
12 호수가 그래봐야 6 +6 24.05.17 2,776 100 13쪽
11 호수가 그래봐야 5 +1 24.05.16 2,777 95 13쪽
10 호수가 그래봐야 4 +4 24.05.15 2,841 102 14쪽
9 호수가 그래봐야 3 +4 24.05.14 2,916 97 12쪽
8 호수가 그래봐야 2 +5 24.05.13 2,955 115 13쪽
7 호수가 그래봐야 1 +1 24.05.12 3,056 105 13쪽
6 스토리, 그 전 5 +3 24.05.11 3,157 110 13쪽
5 스토리, 그 전 4 +4 24.05.10 3,290 111 13쪽
4 스토리, 그 전 3 +4 24.05.09 3,447 114 14쪽
3 스토리, 그 전 2 +6 24.05.08 3,626 120 13쪽
2 스토리, 그 전 1 +8 24.05.08 3,979 130 12쪽
1 그냥 죽는 엑스트라 +10 24.05.08 5,455 133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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