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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곰곰 님의 서재입니다.

아카데미 고인물이 업적을 다 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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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곰곰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5.08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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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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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라우레아의 밤 2

DUMMY

배드 엔딩.


단순히 주인공 칼라일이 죽는다는 문제를 넘어서, 세상 자체가 잘못되었을 때 나오는 ‘이야기의 결말’.

칼라일이 잘못 선택했을 때, 혹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해버렸을 때. 구해야 할 사람을 구하지 못했거나 다 아니면, 무너져내리고 말았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야기가 다다라버렸을 때, 칼라일의 ‘축복’은 강제로 시간을 되돌리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배드 엔딩의 정체였다. 단순한 실수나 실력 부족으로 칼라일이 사망해버리는 건 이 게임에서 배드 엔딩으로 치지 않았다.

그야말로 모든 게 끝나버렸다고 스토리가 판단했을 때에나 볼 수 있는 엔딩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곧 있으면 마지막을 맞이할 이 게임의 1챕터.

<실습에서 생긴 일>.

그 이름대로 1챕터의 클라이맥스는 1학기 기말고사 실기시험이었다. 거기서 [Goddess & Bravers]의 첫 번째 배드 엔딩을 겪어볼 수 있었다.


기말고사의 과제는 ‘조별 생존 실습’. 약학 강의 때문에 가본 적 있는 그 커다란 숲을 무대로 치러지는 기말고사이며, 그곳에서 학생들은 각기 조를 맺어 교수들이 풀어둔 마수들과 상대하게 된다.

이 마수들은 던전에서 만나볼 수 있었던 고블린 같은 것과는 그 수준이 많이 달랐다. 3학년생 레벨에선 혼자 싸워서는 승리를 점치기 어려웠고, 조를 이루어서도 위험한 상황이 충분히 나올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주인공답게 칼라일은 더 큰 일에 휘말린다.

그가 마주하게 될 보스, <더럽혀진 숲의 주인>. 그건 짙은 마기에 물들어 마수화된 거대한 사슴이었다.

교수들마저 상정하지 못한 일이었다. 엄격하게 제어되는 다른 마수들과 달리 미쳐 날뛰는 사슴은 정말로 숲에 있는 학생들을 무참히 짓밟고 죽음에 이르게 할 위험성을 품고 있었다.


그러면 걔가 바로 배드 엔딩의 원인일까?

설마.

보스는 당연히 잡혀야 하는 거다. 설령 칼라일이 수십, 수백 번의 트라이를 꼬라박는다고 해도 최종적으로 <더럽혀진 숲의 주인>은 무조건 토벌될 거고, 스토리는 그 다음으로 진행되리라.


배드 엔딩은 그런 게 아니다. 그렇게 상냥하지 않았다.

세계에 이른 결말을 불러올 존재는 다른 몬스터였다.


지난 중간고사에서 레어 몬스터 <욕망의 고블린>이 출현했던 것처럼, 기말고사에서도 비슷한 몬스터가 하나 숨어있었다.

다만 다른 점들이 몇 개 있기는 하지.

첫 번째로는 직접 찾아가기 전에는 우연히라도 만날 일이 없다는 것.

두 번째로는 레어 몬스터 수준이 아니라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유니크한 존재라는 것.

마지막으로는, 그럼에도 보스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


왜냐하면 잡을 수가 없어서.

지금 칼라일의 스펙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는 마수가 숲의 북쪽에 잠들어 있었다.


고대의 괴수, 악마 <발락>.

지금은 잠들어서 힘을 키우고 있는 존재지만, 1챕터에서 길을 잘못 들어 실수로 마주쳐버리면 긴 잠에서 깨어나고 만다.

1챕터 시점에서 칼라일이 이길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발락은 이내 칼라일을 잡아먹어버리고 그 힘을 온전히 흡수해버린다.


칼라일은 여신의 축복을 한 몸에 입은 세상의 구원자였다. 그런 존재를 악마가 먹어치우는 순간 세상은 구원될 가능성을 잃는다. 세계관이 그랬다.

그리고 도감에 한 줄 추가되긴 하지.


업적 <배드 엔딩 수집가>가 진행되었습니다, 라고.


“으음······.”


거기까지 생각을 되짚어보고서 생각했다. 너무 최악의 결과로만 상정하기는 했다.

칼라일이 나처럼 도감 수집하고 싶어 하는 별종일 리도 없고, 당장 숲의 중심에서 날뛰는 보스를 놔두고서 굳이 꼭 발락을 만나러 갈 일은 없을 거다.

만에 하나 억에 하나 길을 잃을 수는 있지. 그때는 뭐 귀띔 한 번만 해주면 그만이었다. 이쪽으로 가면 죽는다고.


배드 엔딩 자체는 막을 수 있을 거다. 그래, 스토리가 너무 틀어지지만 않는다면.

최악을 생각했다면 이제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점검해볼 차례였다.


틀어져 봐야 중간고사 때랑 비슷할 거다. 그러니까······, 보스전에서 누가 공격을 잘못 얻어맞아 죽어버린다든가.

칼라일이 그렇게 둘 것 같지는 않지만, 또 보스전답게 나름대로 난이도가 있단 말이지. 1챕터라고는 해도 사람이 죽을 대미지는 충분히 나왔다.


일단 걔네가 죽지 않도록 손을 써두는 게 최우선.

그 외엔 정말 크게 바라는 게 없었다. 나는 이번 기말고사에서 구태여 얻고 싶은 것이 없었다. 정말 무사히 지나가기만 하면 그걸로 족했다.

말하자면 안전하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


“후.”


계획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서는 앉아있던 침대에서 일어섰다. 바로 옆에는 시종들에게 절대 만지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한 더러운 자루 하나가 놓여있었다.


들쳐메고서 심호흡과 함께 방을 나섰다. 향하는 곳은 성 레미엘 기숙사.

다른 이름으로는 평민 전용 기숙사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 * *


기말고사에서 캐릭터들이 죽지 않도록 손 써두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미리 가서 보스 자체를 약화시켜둘 수도 있었고, 전투에 참여할 캐릭터들한테 좋은 장비를 몰래 지급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니면 아예 보스 공략법 자체를 은근슬쩍 흘리는 것도 방법이다.


그치만 뭘 하려고 해도 다 돈이 필요했다.

보스 약화 포션을 만들든, 좋은 장비를 사서 돌리든, 하다못해 소문을 퍼뜨리는 데에도 다 돈이 들었다.


이 고블린 자루는 나만을 위해 아끼고 싶었지만······, 그것도 스토리가 꼬여버리면 말짱 도루묵이다. 속된 말로 아끼다가 뭐 된다니까.

써야 할 때는 팍팍 쓰자. 돈이야 또 벌면 되지. <식물학자>나 <곤충학자> 같은 칭호라도 따면 또 그걸로도 왕창 벌 수 있으니까.


날 좋은 5월의 초입, 따사로운 햇빛 밑을 걸어간 끝에 평민 기숙사 건물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그 건물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짙은 그늘에는 자그마한 가판대 하나가 위치 해있었다.


인적 드문 그곳에 찾아가자 발랄한 목소리가 날 반겼다.


“어라, 손님인가요?”


트윈테일이 트레이드마크인 아카데미 1학년생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캐릭터는 아니었다.


“어서 오세요, 줄리아의 ‘어디서든 상점’입니다!”


‘상점’ 줄리아.

그녀는 이 게임에 등장하는 NPC 중 한 명이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NPC라는 건 좀 편의적인 뜻이었다. [Goddess & Bravers]는 1인용 콘솔 게임이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주인공 빼고 모두 NPC지.

말하고 싶은 게 뭐였냐 하면, 칼라일의 ‘공략 대상’이 아닌 캐릭터들.

즉 배정받은 스토리가 없는 캐릭터들을 말했다.


그중 줄리아는 ‘잡화 상점’ 역할을 담당했다.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 없는 잡다하고 신기한 것들을 판매하는가 하면, 칼라일이 주워온 잡템도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구매해줬다.

다른 그 어떤 NPC들보다도. 아니 어쩌면 어지간한 메인 캐릭터보다도 얼굴을 자주 보게 될 캐릭터였다.


“손님?”


그런 줄리아가 고개를 옆으로 갸웃하더니 내게 물었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시다니, 제 귀여운 외모에 반하실 것 같은가요?”


그러고선 생긋, 눈웃음.

어두운 붉은색 머리카락은 양갈래로 단정히 묶인 채 약간 기울어 늘어져 있었다.

딱 귀엽게 보일 정도로 아담한 키와 항상 새것처럼 다듬어 입는 교복. 무엇보다 자신의 매력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는 듯 한껏 뽐내는 저 자신 있는 미소까지. 과연 기억 그대로의 ‘상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마음이 놓였다. 미소에는 미소로 받아쳐 주며 들고 온 자루를 가판대에 툭, 얹었다.


“물건 좀 팔러 왔어.”


상대가 NPC라고 생각하니 역시 가슴 한쪽이 편해지는 감이 있네.

메인 캐릭터들은 함부로 만났다간 스토리가 꼬여버릴지도 몰랐다. 특히 그건 이번 중간고사에서 루펠카리야와 만나며 느낀 바였다.

그렇지만 NPC면? 스토리와 연관 없는 캐릭터라면 괜찮은 거잖아, 그렇지?


줄리아는 내 자루를 보더니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손뼉까지 짝, 치면서는 내게 그림과 같은 미소를 선사했다.


“어머 손님, 이 줄리아의 ‘어디서든 상점’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곧바로 물건을 확인해보겠······.”


그러고는 자루 주둥이를 슬쩍 열어보는데, 내부를 보자마자 줄리아가 잠깐 얼어붙었다.

침묵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고작해야 반 호흡이나 지났을까 싶을 때즈음엔 다시금 상인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물건 전부 현금으로 환전 원하는 거 맞으실까요?”

“응? 어, 응.”


다만 거기선 나도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게임에서는 들어본 적 없었던 말이었다.

이런 스크립트가 있던가? 잠시 양미간을 찌푸리고 생각했다. 줄리아가 금화 말고 다른 걸로 바꿔주기도 하던가. 그랬던 적은 없는 거 같은데.


내가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줄리아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이전까지와 같았지만, 어조는 어딘가 나를 어르고 달래려는 듯 침착했다.


“오해 마시고 들어주세요 손님. 상인으로서 살아가다 보면 골치 아픈 상황을 마주치기도 하거든요. 이를테면 기껏 매입했던 물건의 진짜 주인이 나중에 찾아와 권리를 요구한다든지요.”

“······?”


거기서부터는 정말 본격적으로 들어본 적 없는 얘기였다.

도대체 얘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가 싶어서 가만 듣고 있었다. 줄리아는 내 눈치를 보면서 최대한 친절하게, 그리고 무해하게 설명하도록 노력했다.


“그렇게 되면 저희 같은 상인 나부랭이는 손해를 무릅쓰고 물건을 고스란히 돌려드리는 수밖에 없어서요.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나름대로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는 합니다만, 항상 바라는 대로만 일이 이루어지지는 않는 법이지요. 예에.”


거기까지 듣고 나니 비로소 줄리아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뭔지 알 수 있었다.


“그니까 물건의 출처가 수상쩍다?”

“아뇨 손님! 수상쩍다는 말씀은 아니구요! 다만 거래에 있어서 확실한 신용을 위해 여쭤보고 싶었을 뿐이지요. 아하하.”

“흠.”


상상해본 적 없었던 문제에 부딪치게 되어 잠시 머리를 굴렸다.

내가 칼라일로 게임하면서도 이런 반응이 돌아온 적 있었던가? 단연코 없었다. 처음 보는 대사였다.

칼라일로도 수십수백 번을 <욕망의 고블린> 잡고 금은보화 팔러 여기에 왔을 텐데, 이런 반응은 보여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줄리아였다.


그렇다면 뭐 남은 이유는 하나뿐이겠지.

내가 칼라일이 아니라 아즈일이라서.

교양 마법 교수 타일러가 나만 콕 집어 시비를 걸었을 때와 똑같은 거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긴 하네. 평민에 비해 귀족이 이런 데에선 조금이라도 더 신용이 있어야 맞는 거 아냐? 혹시 내가 귀족으로 안 보이나? 그렇다고 해도 솔직히 할 말은 없긴 한데.


아니지, 심지어는 그마저도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제일 큰 문제는 정말로 내가 저 금은보화의 출처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 있었다.

이거 뭐 시종들한테도 비밀로 했으니 데려와서 증언해달라고 할 수도 없고. 진짜 사실대로 지나가던 고블린한테서 뜯어왔다고 말할 수도 없고.


뒷머리를 긁다가 결국 결정을 내렸다. 나 참, 메인 캐릭터도 아니고 NPC를 상대로 뭔 교섭 같은 걸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럼 환전은 됐으니까 물물교환이라도 해줄 수 있어?”

“물물교환······이라 하심은?”


묘한 표정을 짓는 줄리아를 두고서 가판대에 올려두었던 자루를 다시 가져갔다. 그 안에서 끄트머리가 깨진 보석 몇 개를 손에 집어선 가판대에 주륵 늘어놓았다.


“빈 병 두 개랑 <펑펑 벌레> 한 병만.”


<펑펑 벌레>. 그 이름을 들은 줄리아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그 벌레가 대단히 희귀하고 놀라울 만큼 엄청난가?

그건 아니었다.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벌레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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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엑스트라 스토리 3 +8 24.06.02 1,888 7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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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엑스트라 스토리 1 +4 24.05.31 1,954 82 13쪽
25 반데가르의 피리스 4 +6 24.05.30 2,008 79 15쪽
24 반데가르의 피리스 3 +3 24.05.29 2,041 84 14쪽
23 반데가르의 피리스 2 +10 24.05.28 2,134 81 14쪽
22 반데가르의 피리스 1 +6 24.05.27 2,179 85 13쪽
21 기말고사의 에이스 4 +3 24.05.26 2,279 92 13쪽
20 기말고사의 에이스 3 +4 24.05.25 2,339 91 13쪽
19 기말고사의 에이스 2 +6 24.05.24 2,384 88 12쪽
18 기말고사의 에이스 1 +5 24.05.23 2,461 87 13쪽
17 라우레아의 밤 5 +5 24.05.22 2,475 97 13쪽
16 라우레아의 밤 4 +1 24.05.21 2,603 92 14쪽
15 라우레아의 밤 3 +3 24.05.20 2,561 100 12쪽
» 라우레아의 밤 2 +2 24.05.19 2,666 93 12쪽
13 라우레아의 밤 1 +2 24.05.18 2,778 101 13쪽
12 호수가 그래봐야 6 +6 24.05.17 2,775 100 13쪽
11 호수가 그래봐야 5 +1 24.05.16 2,776 95 13쪽
10 호수가 그래봐야 4 +4 24.05.15 2,841 102 14쪽
9 호수가 그래봐야 3 +4 24.05.14 2,916 97 12쪽
8 호수가 그래봐야 2 +5 24.05.13 2,955 115 13쪽
7 호수가 그래봐야 1 +1 24.05.12 3,054 105 13쪽
6 스토리, 그 전 5 +3 24.05.11 3,155 110 13쪽
5 스토리, 그 전 4 +4 24.05.10 3,288 111 13쪽
4 스토리, 그 전 3 +4 24.05.09 3,447 114 14쪽
3 스토리, 그 전 2 +6 24.05.08 3,625 120 13쪽
2 스토리, 그 전 1 +8 24.05.08 3,978 130 12쪽
1 그냥 죽는 엑스트라 +10 24.05.08 5,453 133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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