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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곰곰 님의 서재입니다.

아카데미 고인물이 업적을 다 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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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곰곰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5.08 11:52
최근연재일 :
2024.07.0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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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557

작성
24.05.1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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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글자
12쪽

호수가 그래봐야 3

DUMMY

탁자에 놓인 홍차는 향긋한 김을 피워올리는 중이었으나 루펠카리야의 손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


매일 아침의 식사 후 시종이 준비해주는 최고급품이었음에도 루펠카리야는 홍차가 식을 때까지 가만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신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어제, 약학 실습 시간에 숲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였다.


필수 교양도 아니고 인기가 많은 것도 아닌 올리비아 교수의 약학 강의. 루펠카리야가 굳이 그 수업을 찾아 들은 이유는 사실 별 건 아니었다.

올리비아 교수는 황녀 루펠카리야를 특별취급하지 않는 몇 안 되는 교수 중 한 명이었다.


루펠카리야가 아직 신입생일 때, 교수고 학생이고 너 나 할 것 없이 황녀를 두려워하고 거리를 두던 가운데 우연히 올리비아 교수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녀는 루펠카리야를 두고서도 놀라거나 허둥대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다른 학생을 대하는 것과 똑같이 점잖게, 그리고 친절하게 대해줄 뿐이었다.


그때부터 루펠카리야는 올리비아 교수의 강의를 듣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강의 안에서라면 그래도 조금 편하게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허나 제3황녀 루펠카리야라도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분명 올리비아 교수는 감히 외진 숲으로 황녀를 불러내는 위인이었지만, 수업에 함께하는 학생들마저 배포가 큰 건 아니었다.


주변의 학생들이 자연스레 모임을 이루어 약초를 캐기 시작할 때. 그곳에 황녀가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함께 다니다 자칫 실수로라도 허언을 내뱉는다면. 쓸데없는 농담이 황녀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아예 황녀가 넘어져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랬다간 황가의 심문관들에게 끌려가 극형에 처해질지도 몰랐다. 간이 부은 인간이 아니라면야 누구라도 황녀 가까이 있고 싶진 않을 거다.


학생들이 그럴진대 루펠카리야라고 별수가 있을까. 모두가 저마다 숲으로 흩어질 때 분위기를 짐작하고 조용히, 홀로 빠져나왔다.

항상 따라다니던 호위 네드빌은 그날 아침에 벌인 일 때문에 하루 근신에 처해졌고, 시종들 또한 숲까지 불러들이는 건 너무 커다란 일이었기에 루펠카리야 본인이 직접 물렸다. 별일이라도 있을 리가 없다고 여겼다.

실제로 별일은 없었다. 그저 숲에서 혼자가 되었을 뿐.


황녀라고는 하지만 황가의 품위를 한 꺼풀만 벗겨보면 루펠카리야도 평범한 학생이다. 그 전까지 연금술이나 약학에 관심을 가진 적도 없었다.

<백약초>를 찾아오라고는 해도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 알 리가 없었다. 하물며 어떤 풀이 1년을 지났고 어떤 게 아닌지, 그걸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하리라.


주변에 도와줄 인물도 없고, 손에 든 약초 배낭은 낯설기만 하고.

벌써 3학년이나 되었는데 그녀가 목표한 것은 조금도 진전이 없고.


어딘가 모든 게 우스워지는 것만 같은 그런 때였다.


- ······브리오트 자작공자?


숲에서 만나게 된 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남자였다.

쟝 드 아즈일 브리오트. 그 자는 황녀를 만나고도 놀라지 않고 공손한 인사를 건넸지만 루펠카리야는 절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 학생의 관심도가 낮다고 하여서 그 강의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수준마저 낮다고 보증할 수는 없는 법이겠지.

- ······.

- 오히려 관심도가 높은 학생들만이 신청하기에 문외한에게는 더욱 혹독한 강의가 될 수도 있지 않겠나? 이는 어찌 생각하지, 공자?


에둘러 말하기는 했으나 속뜻은 명확했다.

네가 이 강의에 참석한 정확한 이유를 말하라, 그것이었다.


루펠카리야 스스로도 언어 선택이 날카로워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물론 당장의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처했던 상황에 스스로 자조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이유가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루펠카리야는 아즈일의 소문에 대해 세세히 들어서 잘 알았다. 알았다뿐이랴 심지어는 단둘이 마주친 적도 있었다.

이 아카데미의 골칫거리면서 나아가 제 가문의 문제아 아즈일. 지난 2년간 수업엔 관심이 없고 불량한 이들과 무리를 이루었으며 학우들의 학습에도 방해를 끼친 끝에.


그는 황녀의 사물에도 손을 대려 했다.

모두가 실습 때문에 자리를 비운 사이 몰래 교실에 들어와 루펠카리야의 가방을 뒤진 것이다.


루펠카리야는 여전히 그때의 일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찾는 것이 무엇이었는진 모른다. 우연히 루펠카리야만 교실에 돌아올 일이 있었을 뿐. 그러다 단둘이 마주쳤을 뿐이었고.


루펠카리야는 끝내 그를 용서했었다.

중죄로 다스려도 모자랄 일이었겠지만 어차피 둘만의 일이었으니까. 다른 인물에게 피해가 간 것도 아니요, 이 일을 크게 키운다 한들 이득될 일도 없었으니까. 그러니 이 자리에서의 비밀로 하고 묻어두겠다 선언했다.


다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있었다.

아즈일이라는 이 자는 어떻게 고쳐 쓸 수 없으리라는 것.

이 자는 아카데미를 졸업할 수도 없을 테고, 브리오트 자작가에서도 버려진 채 불행한 삶을 연명하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것은 그녀의 ‘축복’.

<예지안>을 구태여 발동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으나.


“······.”


아름다운 찻잔을 바라보던 루펠카리야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금, 그녀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제 숲에서 본 아즈일의 태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치부를 자신에게 오롯이 드러낸 전적이 있음에도. 자신만 보면 덜덜 떨며 기어도 모자랄 텐데도.


- 호수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호수를 안다고 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럼에도 자신을 대하는 데에 있어 당황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업신여기거나 깔보지도 않고.


- 깊은 호수 속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진 직접 들여다보아야 알 것입니다.


너무나도 조용하고 당연하게 예의를 차리는 그 모습은 무엇이었단 말일까.


연기? 그렇다면 어느 쪽이 연기였던 걸까? 자신의 가방을 도둑 쥐처럼 뒤지던 그때와 숲에서 당당히 자신을 마주하던 둘 중 어느 쪽이?

아니면, 가능성은 희박하다 못해 가늠하는 것이 우스울 수준이지만. 정말로 아즈일이 하루아침에 개과천선이라도 했다는 걸까?


쟝 드 아즈일 브리오트.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감히 황녀에게 교훈을 늘어놓고서 우스운 뇌물로 입을 막아버린 남자.

자신에게 과제품이었던 <백약초>를 내밀고서도 약삭빠르게 자신의 몫은 더 크게, 무려 <월야초>를 챙겨뒀던 그 남자.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자신이 품고 있던 고민을 내뱉었을 때.


- 뭐, 호수가 그래봐야 호수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달관한 것만 같은 해답을 툭 던지기나 하던 그 남자는 도대체.


“저하.”


그때였다. 옆에서 나지막히 들려온 시종장의 목소리에 루펠카리야는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떴다.

홍차가 담긴 주전자를 받치고 든 시종장이 루펠카리야에게 조심스레 이어 물었다.


“홍차를 새로 따라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


그 말을 듣고 다시 보니 어느새 찻잔에서 피어오르던 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애써서 가장 맛있는 온도를 맞춰주었을 텐데. 미안한 일을 했다며 황녀는 속으로 입을 다물었다.


“부탁하지.”


그럼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게 황녀라는 자리였다.

무심히 버려지고 새로이 차오르는 찻잔을 루펠카리야는 가만히 눈에 담았다. 이윽고 길었던 첫 모금을 입에 머금었을 때, 시종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하, 혹 실습의 피로가 다 풀리지 않으셨는지요. 교수들에게 오늘의 강의는 다음으로 미루라 일러두겠습니다.”


아카데미의 학생이 피곤하다고 교수들에게 일정을 강요하다니. 남이 들으면 기겁할 발언이었지만 시종장은 당연한 이야기를 했다는 듯 담담하기만 했다.

어쩌면 그것이 정말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제국이 있기에 비로소 아카데미가 있는 것이고, 황가가 있기에 교수들 또한 있을 수 있는 것이니까.

이곳에 앉아있는 이는 아카데미의 일개 학생이기 이전에 드높은 황가의 제3황녀였으니까.


허나 루펠카리야는 부정의 뜻으로 짧게 눈을 감았다 떴다. 입에 머금었던 홍차를 충분히 음미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일정대로 참여하겠네.”


생각이 조금 많은 아침이었지만 피곤한 것은 아니었다. 설령 조금 피곤하다고 해도 아카데미 강의에 참석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루펠카리야는 그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 하나 때문에 주변의 모든 것들이 휘말리고 삐걱여야만 한다는 게.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라도 더더욱 루펠카리야는 타의 모범이 되려고 최선을 다했다. 혹여라도 컨디션이 무너지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이 호수에 비친 얼굴에 불과하더라도, 그녀는 그걸 지킬 의무가 있었다.


루펠카리야가 기품 있는 손짓으로 찻잔을 내려놓았을 때, 타이밍을 맞춘 것처럼 멀리서부터 은은한 성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면서 동시에 오늘도 여신의 자비가 우리에게 인도하심을 경건히 기도하는 노래.

아카데미에 발걸음하는 학생들을 축복하기 위한 운율이 이어지는 동안 루펠카리야 또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녀가 일어서자 저 알아서 커다란 방문이 열리고, 그녀가 돌아서자 도열한 수백의 시종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대카탈마이어에 영광 있으라.”


그들이 한입으로 영광을 말하자, 루펠카리야의 손에 비로소 가방이 들렸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저하.”


자그마한 끄덕임과 함께 루펠카리야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은 아즈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과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 * *


제3황녀 루펠카리야와의 우연한 인연은 백약초라는 뇌물로 다 끝난 줄 알았다.

그야 당연하잖아. 저쪽은 황녀에다 심지어 메인 캐릭터고 이쪽은 뭔 듣도 보도 못한 자작 엑스트라인데.

숲에서 기이한 한때가 있긴 했지만 그건 그저 사고였을 뿐. 그러니 날이 지나면 완전한 남남이 되어 제 갈 길 가고 마주쳐도 알 반가 하며 인사도 안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


근데, 본다. 이쪽을.


“············.”


루펠카리야가······, 아주 뚫어져라 나를 본다.


왜? 뭐야, 왠데?

덕분에 지난 강의는 머릿속에 뭐 제대로 들어온 게 없었다. 물론 기억은 다 했다지만 신경이 너무 쓰여 차마 추가 점수까지는 얻지 못했다.

설마 그녀가 가진 여신의 축복, <예지안>을 쓰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곧 그 가능성은 부정했다. 그건 그렇게 번갯불에 콩 볶듯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 번 발동하면 마나의 폭풍이 일어나고 하늘이 갈라질 정도니 쓰진 않았을 거다.


아니 그럼 왜?!

도통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숨을 쉬며 오늘도 등교를 마쳤다.

대신 오늘의 목적지는 학교가 아니었다. 숲 근처의 공터에 도착하자 일찍 온 3학년 학생들이 모여있었다.


어제까지 해서 총 일주일간, 각 과목의 필기시험은 다 치렀다. 오늘은 대망의 실기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그래. 어차피 오늘 치르는 중간고사 실기만 지나면 이 기묘한 관심도 사그라들 거다. 그때부턴 주인공 칼라일한테 바통 터치하고 다시 자유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다음, 준비.”


던전 입구 앞에서 긴장한 학생들이 무기를 가다듬거나 기도를 올리거나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가운데에서 나는 하품이나 하며 기다렸다.

살아남는 데에 황녀의 관심 같은 건 필요 없다. 아니 있으면 그게 더 독이다.


“다음, 아즈일 준비.”


챙겨온 짐이나 고쳐메고서 입구 앞으로 걸어갔다. 던전 입구에 서 있던 관리 감독 교수는 내가 등에 멘 묵직한 배낭을 가리키더니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진짜 그거 들고 들어갈 거냐?”

“규정상 문제는 없잖아요.”


문제가 있을 리가 없지. 아마 댁보다 내가 아카데미 규정에 대해 더 잘 알걸.

교수는 곧 포기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입장.”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위풍당당하게 던전 안으로 들어섰다. <반짝이는 돌>이 가득 든 배낭을 메고서.

난 돈 많은 소시민으로 살 거니까 그렇게 알아.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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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엑스트라 스토리 3 +8 24.06.02 1,887 79 12쪽
27 엑스트라 스토리 2 +2 24.06.01 1,910 78 14쪽
26 엑스트라 스토리 1 +4 24.05.31 1,953 82 13쪽
25 반데가르의 피리스 4 +6 24.05.30 2,007 79 15쪽
24 반데가르의 피리스 3 +3 24.05.29 2,040 84 14쪽
23 반데가르의 피리스 2 +10 24.05.28 2,130 81 14쪽
22 반데가르의 피리스 1 +6 24.05.27 2,177 85 13쪽
21 기말고사의 에이스 4 +3 24.05.26 2,278 92 13쪽
20 기말고사의 에이스 3 +4 24.05.25 2,333 91 13쪽
19 기말고사의 에이스 2 +6 24.05.24 2,378 88 12쪽
18 기말고사의 에이스 1 +5 24.05.23 2,455 87 13쪽
17 라우레아의 밤 5 +5 24.05.22 2,470 97 13쪽
16 라우레아의 밤 4 +1 24.05.21 2,597 92 14쪽
15 라우레아의 밤 3 +3 24.05.20 2,556 100 12쪽
14 라우레아의 밤 2 +2 24.05.19 2,660 93 12쪽
13 라우레아의 밤 1 +2 24.05.18 2,773 101 13쪽
12 호수가 그래봐야 6 +6 24.05.17 2,771 100 13쪽
11 호수가 그래봐야 5 +1 24.05.16 2,772 95 13쪽
10 호수가 그래봐야 4 +4 24.05.15 2,836 102 14쪽
» 호수가 그래봐야 3 +4 24.05.14 2,913 97 12쪽
8 호수가 그래봐야 2 +5 24.05.13 2,953 115 13쪽
7 호수가 그래봐야 1 +1 24.05.12 3,053 105 13쪽
6 스토리, 그 전 5 +3 24.05.11 3,153 110 13쪽
5 스토리, 그 전 4 +4 24.05.10 3,286 111 13쪽
4 스토리, 그 전 3 +4 24.05.09 3,443 114 14쪽
3 스토리, 그 전 2 +6 24.05.08 3,620 120 13쪽
2 스토리, 그 전 1 +8 24.05.08 3,970 130 12쪽
1 그냥 죽는 엑스트라 +10 24.05.08 5,450 133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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