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만복사저포기(18)
어디선가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내 휴대전화 벨소리다. 멍한 의식 속에서 손으로 머리 위쪽을 더듬어 보지만 이상하게도 휴대전화가 있어야 할 곳에 없다. 바지 주머니에 뭔가가 들어 있는 느낌이 난다. 휴대전화인가보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전화를 꺼냈다. 찡그린 채 살짝 한쪽 눈을 떠 화면을 보니 친구 녀석이다. 아침부터 게임하자고 하는 모양이다. 전화를 받아 본다.
“야 이 너 내가 오늘 아침까지 옷 가져오라 했지. 왜 안 가져와. 너 땜에 지금 세탁기를 못 돌리고 있잖아.”
이 친구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잘 모르겠다. 무슨 옷을 얘기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몸을 일으켜 지금 입고 있는 옷을 본다. 내 옷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한테 옷을 빌린 게 기억이 났다. 하지만 왜 빌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 미안 금방 갖다 줄게.”
“빨리 와라.”
전화를 끊고 휴대폰 화면을 보니 일요일 아침 11시다. 주변을 둘러본다. 나는 절에서 자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곳에서 자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머리도 아프고 몸도 이상하다. 온 몸이 가벼운 화상을 입은 것처럼 후끈거리고 따끔거린다. 뭔가 소중한 것이 사라져 버린 느낌이다. 그런데 그게 뭐였는지 잘 떠올려지지 않는다. 멍한 상태로 기숙사에 돌아간다. 버스에서도 계속 아무생각 없이 먼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기숙사 건물에 도착하여 내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친구의 방으로 향한다. 계속해서 마음속의 답답한 기분과 온 몸의 불쾌한 통증 때문에 괴롭다. 친구의 방에 노크를 하니 친구가 문을 열어준다. 여전히 지저분한 방이다.
“왜 이렇게 늦게 와. 빨리 옷 내놔.”
“미안”
“피곤해보이네. 얼른 들어가서 쉬어.”
그의 방을 나와 다시 내방으로 향했다. 내방 문을 열려고 문손잡이를 잡았는데 내 손목에 하얀 팔찌가 보인다. 머릿속을 답답하게 덮고 있던 무언가가 서서히 걷히고 모든 일이 떠올랐다. 신과의 내기도 만복사도 그녀와의 만남도 그리고 그녀가 사라져버린 마지막 순간까지도 머리가 맑아지면서 모든 게 선명해졌다.
그녀가 사라졌다. 그녀는 점점 희미해지며 사라져버렸다.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믿을 수가 없다.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버린 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어느 봄날에 꾼 짧지만 행복했던 꿈이라고 하기에는 지금 내 손목에 걸려 있는 이 팔찌를 설명할 방도가 없다. 그녀에게 어찌된 일인지 물어보고 싶지만 그녀의 번호도 사는 곳도 몰라 연락조차 할 수가 없다.
혹시나 그녀의 번호가 남아 있을 수도 있어 방 안에 들어와 중3때의 연락처를 찾아보았지만 그녀의 이름 옆에는 번호도 주소도 없었다. 대신에 그녀의 연락처를 알 수도 있는 그녀와 가까웠던 친구에게 연락을 해봤다.
“여보세요?”
“미진아 오랜만이야. 나 중3때 같은 반이었던 양생인데 기억나?”
“응 기억나는데 네가 무슨 일로 전화를 다 했어? 모임도 한 번도 안 나오더니.”
“뭐 좀 물어보려고”
“뭐를?”
“혹시 지연이 연락처 알아?”
“아니 잘 모르는데. 왜? 뭐하려고?”
“아무것도 아니야. 시간 뺏어서 미안해. 끊을게”
“그래 가끔은 연락도 좀 하고 모임도 나와.”
“알았어.”
전화를 끊고 다른 얘들에게도 다 전화를 해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연락처나 주소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무지 단서가 없다. 그저 그녀는 이 팔찌와 행복했던 기억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까와는 다른 답답함이 가슴을 콱 막는다. 아까는 기억이 나지 않아 답답했었다면 지금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하다.
한참을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 마지막 장면만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다. 그녀의 눈물과 미안하다고 말하는 입모양을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 상태로 몇 시간을 계속 생각을 해봐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몇 시간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배가 고픈 걸 느끼지 못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있다. 그녀가 사라져서 다시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절망감만 깊어간다. 그래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그녀와 만났던 곳들을 다시 가면 뭔가 알 수도 있을 거 같아서 따끔거리는 몸을 이끌고 다시 그 곳으로 향했다.
그녀와 처음 만났던 만복사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도 그녀에 관한 생각만 계속 했다. 버스가 도착하고 산을 올라 만복사에 도착했다. 입구에 서 있던 사천왕들은 여전히 부서진 무기를 들고 있었다. 절 안에는 아직 다 치우지 못한 등불이 걸려 있었다. 등불을 보자 그녀가 더 생각났다. 이 곳에서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만복사를 나와 산의 꼭대기까지 걸어갔다. 수선화는 여전히 그 곳에서 아름답게 피어 있지만 수선화를 닮은 그녀는 볼 수 없었다. 그 날의 추억만 더 선명해진 채로 산을 내려왔다. 다시 정류장에서부터 그녀에게 고백을 했던 공원으로 갔다.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공원에서 나온 다음 그녀가 사라져 버렸던 보련사로 향했다. 그 곳에 가면 그녀가 다시 나타나 줄 것만 같았다. 보련사에 도착해서 이곳저곳 둘러봤지만 역시 이 곳에서도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허무한 마음에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절 한쪽 건물에서 사람이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인가 해서 가봤지만 그곳에는 슬픈 얼굴을 한 중년의 부부만 있었다.
그 부부가 가고 건물 안을 들어가 보니 많은 사람들의 영정사진이 보인다. 아마 절 안의 납골당인 모양이다. 그녀가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한 장의 사진을 보았다.
내가 아는 그녀가 사진 속에서 언제나 짓던, 아름다운 그 미소를 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일 리가 없다. 그녀는 어제까지만 해도 나와 같이 있었다. 내가 입을 맞추었을 때 느껴졌던 그 감촉이 거짓일 리 없다. 그녀와 그냥 좀 닮은 사람일 거라 생각하며 이 사진이 그녀라는 것을 계속 부정하였다. 그러다 사진 앞에 하얀 국화꽃과 함께 하얀 실로 엮인 팔찌가 있는 걸 보았다. 세상에 단 두 개밖에 없는 팔찌가 하나는 내 손목에 묶여져 있고 다른 하나는 이 곳에 있다. 그녀에게 있어야할 팔찌가 여기 이 사진 앞에 있다.
나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절망했고 분노했다. 이 복잡한 감정들을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 울음 섞인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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