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만복사저포기(12)
“글쎄? 여기가 따뜻해 보여서 잠시 몸 좀 녹이려고 왔어. 그리고 저 아래에서 등불들을 봤을 때 뭔가 여기로 오면 좋은 일이 생길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와봤어.”
실제로 절 주변은 바깥보다는 더 따뜻한 느낌이다. 산 위인데도 등불 때문인지 사람들의 체온 때문인지 초봄의 아직 쌀쌀한 바람을 잘 막아주었다.
“그럼 같이 들어가서 구경하자. 내가 등불 만드는 거 알려줄게.”
중학교 3학년 때의 내가 아니다. 그땐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도 떨려서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봤지만 나도 언제까지나 서투를 수는 없는 법이다. 신이 내린 찬스다. 좀 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어서 저런 제안을 했다.
“어머? 너 등불도 만들 줄 알아? 근데 너 만들기 같은 건 잘 못하지 않아? 너 옛날에 미술시간에 만들었던 걸 내가 기억하는데 말이야.”
그녀의 저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내가 그 당시에 미술시간 수행평가 과제물로 제출했던 것은 다시 떠올리기 싫을 만큼 끔찍했었기 때문이다. 내가 손재주가 없었던 것도 이유 중에 하나였지만, 그때는 꼼꼼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날 그런 평가가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그 당시 미술시간의 만들기 주제가 자신이 미래에 살고 싶은 집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자유였다. 그래서 다른 학생들은 골판지며 찰흙, 스티로폼 등등 여리가지 유용한 재료를 가지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수업시간에 빈손인 채로 있을 순 없기 때문에 나는 조금씩 다른 애들의 재료를 빌리려 했다. 하지만 모두들 완성하기까지 재료가 얼마나 필요할지 잘 몰랐기 때문에 그들도 많이는 못 빌려주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빌린 정도로는 건물모형을 만드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당황해하고 있을 때 지연이는 자신이 가지고 온 재료를 꽤 많이 건네주었다. 그녀는 과제물의 재료로써 A4용지 한 뭉텅이를 가지고 왔었는데 그 중의 절반 정도를 내게 주었다.
물론 겨우 A4용지 좀 받은 거 가지고 요란 떠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그 전까지 말도 잘 안 해봤는데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도와주니 내눈엔 그녀가 선녀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주었다고 해도 평범한 종이였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던 나를 통해 멋진 조형물이 될 리가 없었다. 같은 종이를 가지고 이리저리 잘라 멋진 건축물구조를 만들던 그녀와 달리 나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바로 전 시간 국사책에서 본 예전 선사시대의 움막을 만드는 것 외에는 떠올릴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작품 제출할 때 미술선생님께서는 이게 도대체 뭐냐고 수업시간에 뭘 배웠냐고 꾸짖으셨고 나는 예전 원시인이 살던 가장 원초적인 건축양식에서 생활하는 것도 해보고 싶기 때문에 이렇게 만들었다고 대꾸하다가 더 혼났다. 그녀가 말한 미술시간이란 이때를 얘기한다.
“에이 그 때랑 지금이랑 비교를 하면 안 되지. 지금은 공대생이야, 등불정도는 쉽게 만들 수 있어. 빨리 와봐. 보여줄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나를 못 믿는 것 같은 표정과 함께 나를 따라 왔다. 둘이서 아까 등불 만들기를 하던 곳에 도착했다. 다행이도 재료는 많이 남아있었다. 나는 아까 한 번 만들어 봤기 때문에 더 빠른 속도로 등불을 완성해 보였다. 그녀는 그녀의 생각과 다르게 내가 등불을 잘 만들자 놀란 것 같다.
“오 대단한데 나도 한 번 만들어 봐야겠다.”
그렇게 말하고선 그녀는 그녀만의 미적 감각을 살려 내가 만든 등불과는 다른 독창적인 모양의 등을 만들었다. 위에서 내려올수록 좁아지다가 중간에서부터 다시 넓어지는 모래시계모양을 한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재밌는 모양의 등이다. 완성된 뼈대에 한지를 다 붙인 그녀는 붓을 집어 들고 겉 부분에 모래를 그려 넣어 작품을 완성한다. 예술작품에서 모래시계는 모래가 계속 떨어지고 있는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그녀의 모래시계 속의 모래는 이미 시간이 다 흘러 밑에 쪽에만 있었다. 그녀다운 참신한 디자인이다.
“어때 나도 잘 만들지?”
그녀는 자신이 만든 것을 만족스러운 듯 쳐다보고 난 다음 내게 내밀어 보이며 자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나도 모르게 그 등불이 아니라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응 예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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