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만복사저포기(1)
병원에서 퇴원한 후로 이틀간 조용히 책을 읽으며 지냈다. 보험사랑 연락도 해야 하고 가해자와 합의도 해야 하지만 일단은 혼자서 조용히 있고 싶다. 다행이게도 나를 혼란케 했던 그 녀석들은 아직까지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 않다.
다음 시험을 위해 다시 공부를 해야 하는데 도무지 할 맘이 안 난다. 2년 연속으로 시험지도 못 쳐다보고 시험을 포기해야 했었으니 허무 할 수밖에 없다. 이런 기분을 가지고는 의욕이 날 리가 없다. 나는 내가 꿈꿔왔던 삶과는 인연이 없나보다. 운명이 발 벗고 나서서 나를 가로막는 느낌이다.
아침을 간소하게 먹었더니 아직 오전 11시 밖에 안됐는데도 배가 고프다. 점심은 뭔가 기름진 걸 먹고 싶다. 의사 말대로는 당분간 자극적이고 기름진 음식은 피하는 게 맞지만, 기분이 우울할 때는 역시 튀긴 음식을 먹어야 한다.
내 기준으로 점심으로 먹을 만한 튀긴 음식 중에 제일은 돈가스다. 우리 집 근처에 일본식 돈가스로 유명한 집이 있는 데 그 집의 돈가스는 뭔가 다르다. 얇은 고기에 두껍게 튀김옷을 입혀 달짝지근한 소스를 얹어주는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돈가스도 좋아하지만, 두툼한 고기에 가볍게 빵가루를 입힌 바삭한 일본식 돈가스가 더 좋다. 그 집의 돈가스를 젓가락으로 집어 황금빛으로 빛나는 표면에 살짝 새콤달콤한 소스를 찍은 뒤 한 입 베어 물면 바삭한 튀김옷과 육즙이 풍부한 고기를 같이 느낄 수 있다.
그 식당에서 돈가스를 줄 때 밥 한 공기와 김치 그리고 미소장국을 함께 주는 데 이게 또 돈가스와 조합이 좋다. 아무리 맛있는 돈가스라 하더라도 절반정도 먹다보면 조금 느끼하다. 이때 김치와 같이 먹으면 물리지 않고 다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밥과 돈가스만 먹으면 뭔가 퍽퍽하게 막히는 느낌인데 이 때 장국을 마시면 깔끔하게 내려간다.
먹는 생각을 했더니 더 배고프다. 나는 빨리 나만의 작은 진수성찬을 즐기기 위해 나갈 채비를 한다. 지갑과 휴대전화를 챙기고 봄이라지만 꽃을 시샘한 추위 때문에 아직 쌀쌀하기 때문에 한 겹 더 걸치고 나간다.
맛있는 걸 먹으러 갈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걷는다. 이틀 만에 찾은 안정이기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이 여유로움을 계속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내겐 이런 소망은 오래가진 않는 모양이다.
길 한가운데에서 여인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듯 급박해 보인다. 그녀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계속 요청하고 있었지만 모두 무정하게도 무시하고 지나친다. 그들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버린다.
차가운 세상이다. 모두 자기 시간을 소중히 한다. 무시하고 지나치는 그들을 비난 할 수는 없다. 그래도 너무 차갑다. 계속 거절을 당해도 그녀는 주변에 도움을 구한다. 누군가 그녀를 도와줬으면 좋겠다.
불쌍하다고는 느끼지만 사실 나도 별로 관여하고 싶진 않다. 배도 고프고 마음도 지쳤다. 느낌상으로도 괜히 도와주려다가 불길한 일을 겪을 것 같다. 그래서 빠른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하며 그녀가 말을 걸기 전에 지나치려 한다. 그러나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려하였지만 내게 다가와 말을 건다.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다시 쳐다봤다. 눈물이 고여 애처롭게 반짝이는 그 눈을 보고 도저히 바쁘다고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저번 일로부터 하나도 반성을 못 한 모양이다.
“저기 무슨 일인가요?”
처음으로 자신의 말에 반응한 사람을 만나 그녀는 놀란 모양이다. 놀란 표정을 지은 뒤에는 무언가가 벅차오른 듯 눈물을 더 흘린다. 하지만 그녀는 차분하게 복잡한 감정을 가라앉힌다. 좀 더 차분해졌지만 여전히 울먹거리며 말을 꺼낸다.
“사람이 위험해요. 빨리 같이 구하러 가주세요.”
그녀는 금방이라도 사람이 죽을 것 같이 급박하게 말하며 내 소매를 잡아당긴다. 그녀의 말에서 진짜로 긴급하다는 걸 느끼고 그녀를 따라간다. 그녀는 발걸음을 점점 빨리하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서둘러 그녀를 따라갔다. 우리는 어느 아파트 건물의 앞에 왔다. 우리는 그 아파트 건물에 들어가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동안에 계속 그녀는 안절부절 못해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른다거나 엄지손톱을 물어뜯는 다거나 계속 엘리베이터의 올라가는 버튼을 다시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우리는 빨리 들어갔고 그녀는 꼭대기 층의 버튼을 누른 뒤 닫힘 버튼을 몇 번씩 누른다. 엘리베이터의 안에서도 계속 불안한 모습이다. 나는 아직도 뭐가 뭔지 몰라 그저 말없이 있었다. 꼭대기 층에 도착하고 우리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제야 왜 그렇게 그녀가 급박해 보였는지 이해가 간다. 옥상에서는 한 남자가 난간에 서 있었다.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금방이라도 뛰어 내릴 것 같은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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