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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 님의 서재입니다.

세상의 파멸을 원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현대판타지

ITE
작품등록일 :
2017.07.04 19:27
최근연재일 :
2020.09.01 23:59
연재수 :
379 회
조회수 :
164,487
추천수 :
2,936
글자수 :
2,335,429

작성
20.08.31 20:00
조회
157
추천
3
글자
26쪽

소(牛) 토끼(兎) 양(羊) 닭(鷄) 뱀(蛇) 돼지(豚) 말(馬) 호랑이(虎狼) 용(龍) 고양이(猫)

DUMMY

쿠구구구구...


고요한 세계 어딘가에서 뭔가가 파괴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잠시 멈춰 서 있던 마우스는 이내 지상으로 추락했다.

그걸 다급히 쫒아가 마우스를 부축하는 가온.


"왜 맞아줬어요...?"

"맞아주긴...네가 셌던 거 뿐이야."

"......"

"이곳의 시간은...현실보다 훨씬 빨라...지금쯤 현계는 초토화가 되어 있을 거다. 서둘러라."

"하지만..."

"왜? 겁이 나? 음...그럼 놈에게 맞설 공간장악에 대한 구결을...알려주고 싶지만. 너에겐 '자유'가 있으니까."


가온이 새로 손에 넣은 힘. 그게 있다면 흐름은, 자신은 이제 필요 없다고 느낀 마우스가 쓰게 웃었다.



"미안하다."

"......"

"널 이용하려고 했던 것. 내 욕심만을 채우려 했던 것...전부 미안하다."

"아니, 그건..."

"생각해 보면, 난 항상 나대는 주제에 뒷감당을 못했어. 에메라가 신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는 걸 알고, 신을 죽이겠다고 했지만 결과는 봉인."


핫. 하고 웃은 마우스가 자조하듯 말했다.


"내 연인도, 동료도,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도, 내가 좀더 똑바로 했으면 살았을 거야. 원망받고 있겠지 난..."

"그렇지 않아요! 적어도 에메라는 마우스를 그리워하는 느낌이었어요!"

"......"

"마우스가 없었으면 전 옛적에 죽었을 거라구요! 당신의 인생에 의미가 없었다는 듯한 말은...!"


말을 잇지 못하고 다물자 마우스가 히죽 웃었다.


"고오맙다."


손을 들어 머리를 툭툭 두드린 순간, 쿠궁. 세계가 뒤흔들린다.


"이건..."

"이 세계에도 조건이 있었거든. 내가 진 이상 더 이상 유지가 되지 않는다는 거겠지."

"그럼, 마우스는요?"

"어떻게 되긴...죽지."

"......"


눈을 크게 뜨는 가온을 보고 마우스는 아무렇지 않게 웃는다.


"가온. 너라면 할 수 있다."

"......"

"내 비원을 대신 이루어달라고는 안 할게...하지만, 찾았으면 좋겠다. 네 삼촌이랑. 여친."

"여, 여친은 아닌데..."

"아직도 품속에 피 묻은 천조각 고이 넣고 다니면서 발뻄은..."


씨익 웃은 마우스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모든 힘을 쏟아붓는다.


"어?"


가온의 몸이 두둥실 떠오른다. 저항도 힘들다! 아직도 이런 힘이 남아있었단 말인가?


"출구는 저기다. 그 유적지 어딘가에 떨궈질 거다. 착지 잘 해?"

"아니, 잠깐만요 마우스...!"

"가온."


마우스가 가온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나보고 삼촌 같았다고 했지?"

"......"

"이제와서지만 말이다. 나도, 네가 내 조카 같았다."


쿠우우우우우우!


"마, 마우스! 잠깐...이런 식은...!"


속절없이 위로 향하는 가온이 처절하게 외쳤다.


"마우스! 함께가요! 그냥 제 안에 있으면 문제 없는 거 아니에요?!"

"나 같은 이물질이 있으면 네 힘이 크게 상쇄된다. 어쩔 수 없어."


힘이 상쇄되면 신을 이기지 못하고, 여기서 구하지 못하면 마우스란 존재는 사라진다.

두 가지 문제점이 가온이 숨도 쉬지 못하는데 몸은 계속 솟아올라만 간다.


"마우스도 살고 싶을 거 아니에요!"

"글쎄. 너무 오래 살아서~"

"마우스!!"

"가라. 세상을 자유롭게 만들어."

"마우스으으으으으으으으!!"


메아리 치면서, 가온은 이윽고 하늘 너머로ㅡ, 우주 너머로 사라져간다.




쿠콰콰쾅!!


지근거리의 대지가 부셔지는 소리를 들으며 마우스는 후우. 숨을 내쉬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옆에 누군가가 섰다.


"...어이구. 댁도 진짜 어지간하네."

"칭찬인가?"

"물론이지. 거기서 살아남아? 어이구야~"


옆에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안이었다!

상당히 다친 상태이긴 했지만 그래도 두 발로 멀쩡히 서 있었다.


"왜? 대련이라도 하시게?"

"힘이 없지 않은가?"

"...팩트로 때리네. 진작 나타나지 그랬어? 그럼 같이 탈출시켜 줬을텐데..."


안 또한 현실의 몸으로 이곳에 있다.

이 세상이 박살나면 그도 무사하진 못한다.


"나를 이 곳에서 꺼내주기엔 그대의 힘이 너무 미약해진 듯 하더군."

"......"

"이가온 군이 반항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럼 둘 다 나가지 못했겠지."


이가온이 또 멀쩡했음 모를까 그도 지쳐있다.

안이 나타났다면 상황만 더 악화됐으리라.


"아 까짓 거 내 몸 바치면 둘 다 꺼낼 수 있었어~"

"그런가? 그럼 괜한 짓을 했군."


말없이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안.


"...이봐. 아쉽지 않아? 십이지신도. 신이랑도 못 싸워봤는데."

"무슨 소리를. 이가온군의 그건 십이지신을 아득히 초월한 기술이었네. 그것과 겨뤄본 것에 만족감을 느낄 지언정, 허무함을 느끼진 않네."


거의 평생이 적수가 없던 삶이었다.

시원한 패배는 오히려 후련하기까지 했다.


"음...아쉬운 게 있다면 그대들의 싸움을 보고 터득한 것이 있는데...이걸 신에게 써보지 못하는 게 아쉽군."

"댁도 단단히 미쳤다니까~그래도 뭐...가는 길 혼자가 아니라 외롭지는 않구만"


쿠궁. 쿠구구구궁!


멸망해 가는 세계.

감회에 젖은 마우스는 눈을 감았다.

그래, 이걸로 된 거다.

그 동안 너무 오래 살았고, 너무 지쳤다. 가온의 행보를 지켜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건 욕심이다.


"아~그 놈들한테 사과는 했어야 했는데."


자신 때문에 별안간 제약이 걸리고 비원도 포기하게 된 십이지신들에겐 사과했어야 했다. 자신이 완전히 죽었다는 걸 알면 후련해 할까? 가온이 말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만...


마우스!


가온의 마지막 목소리를 기억하자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가온. 가라. 가고 싶은 곳까지...'


마우스!


'그래...가라니까...'


"마우스!!"

"...엥?"


목소리는 이명이 아닌 현실이었다!


쿠아아아앙!


세상이 일순 하얗게 변하고 하늘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온이 헤엄치듯 내려오고 있었다.


"에엥?!"

"호오..."


마우스가 벌떡 일어나고 안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곤두박질친다는 수준으로 지상에 내려온 가온을 받기 위해 마우스가 허둥지둥 달렸다.


"끄아아! 중력을 위로!"

"우앗!"


떨어지기 직전 간신히 중력으로 받아낸 마우스가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야! 이 씨!"

"아니! 혼자 만족한 듯이 중얼거리면 멋져 보이는 줄 알아요?! 개 오글거리네!"

"임마! 그럴 떈 걍 떠나야지! 지금 이거 어쩔거야! 다 개죽음이잖아!"


진짜다. 이젠 마우스는 탈출시킬 힘이 없고 가온도 더는...


"방법이 있어요."

"엥?"

"자유로 차원구멍을 뚫읍시다. 전에 소 누님이 했던 것도 비슷한 원리일 거에요."

"어...그게 가능해? 너 지쳤잖아?"

"몸은 까딱하기 힘든데 힘 면에서는 글쎄요?"

"...와. 개사기캐네. 이거."



하지만 마우스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왜요?"

"말했잖아. 날 데려가면..."

"힘이 상쇄되요? 그럼 안 씨의 몸에 넣으면 안 돼요?"

"인간 몸으론 감당 안 돼 임마! 실례를 저지르지 마!"


야단을 치는 마우스를 보며 웃는 가온.


"마우스. 전 이제 무엇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

"당신을 살리는 것도. 그 빌어먹을 새끼랑 커튼 새끼들 다 족치는 것도 전부 할 거에요."

"야..."

"전 욕심이 많으니까."


이건 흔들리지 않는다. 직감한 마우스가 하아 한숨을 쉰다.


"어쩌다 이런 또라이를 가르치게 되었담."

"마우스도 만만치 않잖아요?"


그리고 서로를 마주보더니 껄껄 웃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중 미안하네만, 얼마 안 남았네."

"엇?! 진짜네?!"


안의 말대로 세 사람이 디딜 대지는 이제 주택 정도의 크기였다.


"야야 가온. 고고!"

"오케이!"


정신을 집중. 세상이 일순 새하얗게 변하고...그걸 집중시켜 붉게!


콰앙!


"됐다!"

"오오!"


차원구멍이 뚫렸다. 그런데...


"야 근데 문제가 있는데...여기로 가면 어디로 나올지 모른다?"


어쩌면 심해 속일지도 모르고 용암 속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구멍은 시전자에게 익숙한 공간으로 인도하므로 그 가능성은 낮겠지만...


"주술 두르고 버티다가 또 구멍 뚫죠 뭐! 시간 없습니다! 고고!"

"음...나도 가도 되나?"

"안 씨도 싸워야죠! 고고!"


두 사람의 손을 잡고 구멍속으로 들어가는 가온. 그와 동시에 세계가 완전히 무너져내렸고, 작은 점이 되어 어딘가로 훅 사라졌다.







초토화. 황폐화. 포스트 아포칼립스...?


"아, 그건 아닌가."


이젠 더는 구할 수 없는 마지막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아이나는 생각했다.

멸망 후의 세계, 포스트 아포칼립스, 아직 멸망하진 않았으니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인류가 아예 안 남을 것 같고.'



문득 주위를 둘러본다.

어두운 쉘터. 이곳에 남은 건 대부분 커튼 사냥꾼에 주술사이며 힙 없는 일반인은 소수다.


그들은 전부 죽었다.


그 존재가 나타나고 일 주일.

그 시간만에 세계의 정부는 기능을 잃었고 방벽은 무너졌으며 강력한 커튼 사냥꾼도 와해되었다.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건지 빌어먹을 커튼 녀석들은 끝도 없이 솟아났으며 그 강함도 예전보다 몇 배는 강해져 있었다. 아니,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해서 강해지는 중이었다.


더군다나, 그 필두들.

십이지신이라 불리는 괴물...아니. 신.

살아남은 생존자들 중 사이비들은 그들을 신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아니다. 신은 따로 있다. 적어도 스스로를 신이라고 자칭하는 자.


십이지신의 가운데에서 유유자적하게 있는 그 존재는, 세계에 고했었다.


[너희는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 회귀할 때이다.]


선언이 떨어지고 일주일도 안 되어 세계는 거의 멸망. 놈이 진짜 신인지는 몰라도 신에 걸맞은 힘을 가진 것은 틀림 없었다.


인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차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화기를 퍼부었다.

화기는 나비로 변했고, 나비는 새로운 존재. 공중형 커튼으로 변해 사람들을 뜯어먹었다.


2차적으로, 세계의 강자들의 집결.

내로라하는 커튼 사냥꾼들이 모두 모여 총전력으로 부딪혔다.

그리고, 너무도 손쉬운 패배.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신은 커녕 그 밑의 십이지신 하나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언젠가 이가온이 말했던 것처럼 그걸 감당할 수 있는 건 이가온 밖에 없었다.


그럼 그 이가온은?

신이 나타난 첫 날. 신에 맞서, 죽었다.



"푸우."


풍선껌이 터졌다. 짜증나는 감정이 밀려 들어온다.

죽었다고? 내가 죽이기도 전에...라는 생각과 다른 감정이 뒤섞인다.


"눈 좀 붙이게."

"...4위님."


한국의 4위이자 퇴마 김씨 가문의 당주 김일이 서 있었다.

아무리 그라도 일주일 간 연전, 그리고 처한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매우 초췌해 보였다.

그의 딸 현미는 신의 수중에 잡혀 있다.


정확히는 다른 마녀들이란 자들과 함께 주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당신이야말로 쉬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남들보다는 체력이 있어서 말이지."

"...본부장 님은 어떠신가요?"

"이협이는...글쎄."


최종 싸움 전까지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첫날. 그는 이가온이 죽자마자 이성을 잃고 덤벼들었다. 다른 이들도 가만히 있는데 너무나 의외의 일이었다.

하지만 일격에 당했고, 간신히 김일이 그를 뺴돌렸다.

정확히는 신이 그들을 놔주었다.


[놈에게 가장 소중했던 것들은 천천히 죽이겠다.]


이가온에게 무슨 일을 당한건지 증오가 철철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그렇게 선언했다.

코웃음이 절로 났다. 저게 양아치지 신인가?

어찌됐든 그 말은 확실히 지켜져 가온과 인연이 있었던 이들 대부분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아이나의 눈이 저 멀리 어둠속에 있는 로베르토에게 향했다.

그의 스승 엘런은 총공격때 죽었다.

그리고 팔 하나를 잃은 채 기절해 있는 미헤유. 그녀의 절친이나 다름없는 동료 루카스와 루이스도...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여기에 남은 건 세계에 남은 커튼 사냥꾼들.

정확히는, 신이 마지막까지 발버둥 쳐 보라며 일부러 남겨둔 영토.

아이나가 눈을 붙이지 않는 건 망을 보겠다거나 하는 게 아니다.

어차피 신이 쳐들어오면 이곳은 끝장이다.


그냥, 자면 악몽을 꾸니까, 자고 싶지 않았다.


이제 희망이란 없으니까.


아이나는 몰라도 가온이 죽는 걸 눈앞에서 직접 본 김일의 심정은 어떨까.

처참하면 더 처참했지 못하지는 않을 터인데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이런, 아직 안 자나?"


이럴 떄에도 밝은 목소리를 내다니, 누구일까? 돌아보니 잘생긴 금발의 서양남자. 이런 상황에서도 옷이 깨끗한 그는 피터였다. 쉘터를 제공하기도 했으니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걸까? 나라를 지키는 자들의 수장이기도 하여 아이나의 상사이기도 하다.


"눈 좀 붙여둬."

"...딱히. 그러고 싶지 않은데요."

"그래도 해 둬. 끝까지 싸울 수 있도록."

"...무섭지 않으세요?"

"음?"

"죽음이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인, 이 상황이요."

"흐음...무섭지. 무서운데, 더 무서운 건 그런 부조리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죽는 게 더 무서워."


피터가 웃었다.


"그리고 난, 아직 가온이 죽지 않은 것 같거든?"

"......"


아이나는 그가 죽는 걸 직접 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런 말을 들으면 희망이 생겼다.



'...희망?"


자조적인 웃음.

놈을 언젠가 죽이겠다고 이를 갈면서, 희망이라고?


문득 가영과 가은을 떠올린다. 가온이 죽고 이이나가 잡혀가고 이이협이 기절해 있자 그녀들은 슬픔에 넋을...잃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를 불태우며 결사항전을 외쳤다.


'그러고 보면, 가족끼리 똑 닮았네 진짜.'


가온을 떠올리고 웃음지은 그 순간.


쿠웅.


"!"

"!"


모두 일제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 기운, 잘못 느꼈을 리가 없다.

신이다!


쩌저저저저저적!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지하 깊숙한 곳에 있을 쉘터의 천장이 두두둑 뜯겨나가고 수 만의 새까만 군세가 보인다.


커튼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거대한 용과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용에 뒤지지 않는 기운을 내뿜는 말과 호랑이.


그리고 한 가운데엔 가온과 비슷한 얼굴을 한 자가 오연히 서 있었다.

그 곁에는 사지가 잘린 원숭이가 둥둥 떠다녔다.



"아이들아. 내가 왔노라."


속삭이는 듯한 소리였지만 확실하게 들려온다.

그리고, 로베르토가, 마인이, 알래인이, 류열이, 호운이...가온과 인연이 있던 모든 이들과 세계의 커튼 사냥꾼들이 분노를 불태우며 일어난다.


그리고.


"어허."


짝짝.


신이 박수를 두 번 치는 것만으로 그 모두가 저절로 무릎을 꿇게 되었다.

서 있는 건 김일이나 피터 정도 뿐.


"자. 세계에 남은 마지막 아이들아. 두려워 말거라, 이것은 회귀이니..."


아무도 말하지 못했다. 무력감에 치를 떨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신 옆에 무릎을 꿇는 세 존재.

각각 소년, 신우. 그리고...흑교아. 그리고 그 뒤에는 엉거주춤하게 선 레임이 있었다.

그녀는 신이 유희라며 살려두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게 했다.

이가온을 기분 나쁘게 하기 위함이라며...



"위대한 분이시여. 이제야 끝이 나는군요."

"음. 너희도 수고 많았다."


소년이 방긋 웃더니 입을 열었다.


"위대한 분이시여. 그럼 저희는 이제 뭘 하면 되겠습니까?"

"음? 그야...다음 때까지 잠들어 있어야 겠지?"

"...네."


그렇게만 대답하고 고개를 수그리는 소년.

그리고 신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흑교아를, 신우를 바라보았다.

신우는 처음엔 기절할 것 같이 굴더니 갑자기 침착해져 신을 따랐다. 태도만큼은 흡족했으나...


"그러고 보니 특이한 아이야. 너는 또 덤비지 않는 게냐?"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됐다."


분명 흑교아는 신을 공격하려 했었다. 그것도 가온이 죽을 시점에!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멈췄고, 신도 딱히 벌하지 않았다.


하긴 이제 와서 뭘 하겠는가?

신은 이제 충분히 즐겼다 생각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네 명의 여자를, 사랑스러운 마녀들을 바라보았다.


"나의 무녀들아. 종말은 어찌 장식하면 좋겠느냐? 너희들이 직접 하는 건 어떠하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이나 정도가 싱긋 웃으려 했지만 그마저도 기력이 떨어져 하지 못했다.


"허어. 아직도 날 비꼬려 들다니."


이이나를 보며 혀를 쯧쯧 차는 신.

그의 입장에서 이번 무녀들은 하나같이 실패작이었다.

그 건방진 이가온놈을 주인으로 모시려 하다니...


'뭐 됐다. 다른 무녀들처럼 해버리면 그만이니...'


심드렁하게 턱을 괴던 신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말아. 호랑아. 너희도 슬슬 활약해야 하지 않겠느냐?"

[......]

[......]


적극적으로 인류를 죽이던 용과 달리 둘은 일반인을 학살하지 않았다.

다만 덤벼오는 커튼 사냥꾼들을 죽였을 뿐.


"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너희는 한 패가 아닌 것 같더냐?"


비웃는 소리에 말과 호랑이가 움직인다.

어차피 놈이 원하면 해야 하니까.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은 신이 지상을 굽어본다. 그리고 눈에 이채를 띄었다.


"호오?"


보석.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아이.

무녀도 아닌데 저 외모! 무녀가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신이 손을 뻗어 그 아이를 끌어당겼다.


"큭?!"


물리법칙을 죄다 무시하고 신의 앞에 묶인 건 다름 아닌 아이나.


"허어...이런 아이가 있었다니!"

"......!"


아이나는 검을 뽑으려 했으나 사지가 구속되어 도리가 없었다.

그녀에게 다가가 머리에 손을 짚는 신. 아이나는 어떻게든 뿌리치려 했지만 묶인 상태에선 소용없었다.

신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또 이가온. 그놈인가..."

"크윽...!"

"흐음..."


신의 눈에 탐욕이 차올랐다.

이 정도의 아이라면 크나큰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인류를 수 백 차례 멸망시키면서도 거의 보지 못했던 상등품!


"아이야. 무녀가 되지 않겠느냐?"

"뭐, 뭐?"

"그럼 네 목숨은 부지할 것이다. 아니 그뿐만이 아닌...이 세상에서 얻지 못했던 모든 행복을 하사하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아이나가 겨우 말했다.


"그럼...죽은 사람들을 전부 되돌려. 그렇다면...!"

"아, 그건 안 되고. 이번 인류는 극소수를 제외하여 멸하기로 결정하였느니라."

"......!"


소리지르려던 찰나.


팟.


신의 뒤에 별안간 나타난 하나의 여인.

풍만한 몸매를 갖고 있는 그 여인은 령화의 성인 모습이었다.


"죽어라!"


휘하. 딸과도 같은 판링빙을 잃어 기회만 엿보던, 인류의 최강자의 일격이 펼쳐지고...


파앗.


"으윽...!"


바로 곁에서 휘두른 발톱에 팔이 날아가버렸다.

돌아보자 그곳엔 고양이같은 형상을 이룬 까만 형태가 서 있었다.


[저건...]

[설마 저런 모습으로 살아있었던 건가.]


말과 호랑이가 탄식한다.

십이지신의 수장. 자의 연인이었던 묘!!


그녀가 어찌된 건지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하잘 것 없는 것이..."


재미없다는 듯 령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신. 그러자 이번엔 그녀의 왼발이 터져나갔다.


"아아악..."


고통을 참으려 땅에 엎어지면서도 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령화.

하지만 신은 더 이상 그에 관심을 두지 않고 아이나를 바라보았다.



"아이야. 너희는 이미 버림 받았단다."

"......"

"나에게 그나마 대항할 수 있는 존재는 나를 따르거나 침묵하고 있다. 그리고, 죽기도 했지. 이가온 말이다."


아이나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 놈은 내가 죽였어야 했어. 헌데..!"

"거짓말은 말자꾸나. 놈을 좋아했지 않느냐?"

"......"

"증오보다 사랑이 크다니. 사랑스럽구나 아이야."


신의 손가락이 아이나의 뺨을 어루만진다.


"네가 마녀가 된다면 놈의 기억도 지워주겠다. 아니, 최소한의 기억 말고는 전부 덧칠해 주겠다! 더 이상 괴로움은 없을 것이다."

"......"


아이나는 침묵했다.

지상이, 천공이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이야. 내 무녀가 되거라, 그러면..."

"그게 살아있는 거야...?"

"무어?"

"그게 사람이냐고."


겁먹은, 울분의 표정은 어느덧 사라지고 결의에 찬 표정이 된 아이나.


"그 기억들이 없어지면 더 이상 내가 아니야, 그런 삶. 살고 싶지 않아."

"......"

"애초에 뭐야? 지가 다 없애놓고 뭐? 행복하게 해 주겠다? 병신 새끼가."


거침없는 입담이 신의 귀에 들리고 지상에 무릎꿇었던 이들에게도 똑똑히 들린다.



"네 같은 새끼 밑에서 살아있느니 뒤지는 게 나아. 그리고 너랑 둘이 살 바에는...으..."


생리적으로 무리라는 듯 신을 바라보는 아이나. 신의 혈관이 툭툭 불거졌다.



"애초에 니들은 뭐야!"


아이나가 이번엔 말과 호랑이에게 소리쳤다.


"니들 인류를 살리겠다고 우리 인류를 죽여? 이 놈이 너희 사람을 다시 죽이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

[......]

[......]

"이놈이 살아있으면, 우린 평생 이 놈의 장난감이야. 아니...너희만이 아니지. 다른 놈들도 똑같아! 십이지신인지 뭔지! 힘만 센 병신들!!"


아이나는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나 아이나 R 라인리히...이제 라인리히의 거짓된 이름은 버리고, 무녀직은 거절하지. 체질에 안 맞아."


나라를 지키는 자들이 주었던 성을 버리고, 아이나는 선언했다.


"호오...그럼...최대한 잔혹한 죽음을 내려주겠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에 있던 커튼들이 그녀의 주위로 모였다.

이제 곧 아이나는 산채로 뜯어먹힐 것이다.


그떄. 미헤유가 일어난다.

일어날 수 없을 텐데. 힘으로.


"흐읍!"



대지를 박차고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미헤유.

놀랍게도 신이 만들어낸 투명한 대지까지 한번에 오른 그녀는 전사의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뭐냐? 계집."


신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다 죽어가는 여자. 신이나 십이지신은 커녕 주변의 커튼 하나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심했다. 죽더라도 저 놈에게 한방 먹이기로!


"가는 거에요."

"미헤유. 이것좀 풀어봐. 나도 싸우다 죽겠어."


지상에 있는 이들이 하나 둘 제약을 풀고 일어난다. 신이 입을 일그러뜨렸다.

가벼운 제약이었다고는 하나 저들이 일어나?


심지어 일반인인 영아나 지현등도 국자등을 들고 떨면서도 반항을 준비했다.

한나는 검을 뽑고, 후우 죽음을 각오한다.


신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나 인류는 마지막에 구차하게 죽곤 했다. 헌데 지금은 뭔가?


'또 이가온 떄문인가.'


그놈에게 관계된 자들은 하나같이 역겹다.

감히 법칙을 벗어나려 했던 그 놈은...


"우선 너부터 죽여주마."


신이 손가락으로 미헤유를 가리켰다. 아이나의 구속을 풀려던 미헤유는 그 순간 죽음을 각오했다.


'만나러 가는 거에요. 가온 씨.'


편안한 웃음을 지은 찰나.



[아가씨. 계약하자.]

'어? 네?'


시간이 잠깐 멈추었다. 그 사이 걸려온 말. 신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네 놈...?"

[어서! 한 방 먹이고 싶잖아?]

"어, 어...그게 그러니까...에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미헤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찬란히 빛나면서 잘렸던 팔이 수복되더니 그녀의 등 뒤에 어떤 형상이 나타났다.

그건, 닭.

순식간에 닭의 형상은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이루어진 봉황과 같이 변했다.

십이지신 유가 현계에 강림한 것이다!



"무슨 생각이냐 닭? 겁쟁이처럼 쑤셔박혀 있지 않는 거냐?"

[하하하! 그러려 했는데 병신이란 말 듣고 가만히 있을쏘냐!]

"한심한 놈이..."


짜증을 내며 일어서려는 찰나.


신의 주위에 둥둥 떠다니던 마녀들에게도 목소리가 들려온다.


[옛 공주야~어서어~]

[고대의 가문의 무녀야. 지금밖에 없다. 쉿.]

[크르릉. 나 돼지. 탱킹 진짜 잘한다. 현미라고 했던가?]

[오랜만이다 백발의 마녀. 이번엔 같이 싸워볼까?]


무녀들이 당황하는 사이, 에메라가 중얼거렸다.


"토끼..."


파파파팟!


구속이 풀리고 마녀들이 내려선다.

그리고 그녀들의 뒤로 동물들의 형상이 나타난다!


쿠콰콰콰쾅!!


척 보기에도 닿으면 푹신해 보이는 털로 뒤덮인 구름과 같은 양. 몸체를 드는 것만으로 능히 하늘에 닿는 뱀. 세상에서 제일 단단한 물질로 이루어진 멧돼지.


그리고 토끼귀가 달린 크리스탈 같은 피부를 가진 작달만하고 신비한 지팡이를 가진 소인간까지!


십이지신이 강림한 것이다!!

그들이 내뿜는 기운이 신의 기운을 중화시켜 지상의 인간들을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네놈들이 정녕! 이제와서 무슨 짓이냐!"

[뭐긴. 맞짱 뜨자는 거지 씨발놈아.]


닭이 이죽거렸다.


"죽고 싶으냐! 비원을 이루지 못해도 좋으냐!"

[생각해 보니 정말 이룰 수 있는 비원인지 모르겠더군 쉿.]

[그리고 죽고 싶냐라...너무 오래 살아서, 진짜 죽고 싶더라. 꿀.]




신이 화를 내며 일어섰다. 그리고 아이나를 보았다.

소는 아직 강림하지 않았다. 그 년은 살짝 성가시다.

그년은 저 아이를 탐낼 것이다. 자신도 엿 먹이고 강림도 하고 일거양득 이니까!



신이 손을 뻗어 아이나를 당겨 목을 잡았다.


"윽!"

"아이나! 윽!"


도우려던 미헤유가 소년의 막에 가로막혔다. 잠자코 지켜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제스쳐를 취해보이는 소년.


"안 돼...!"


미헤유가 손을 허우적거렸다. 이럴 떄, 그가, 그가 있었다면!



"자 아이야. 어서 내 무녀가 되겠다고 말하라!"

"으, 윽..."

"어서!"


이번 무녀들은 하나같이 괜찮은 외모를 지녔지만 이 피조물이 무녀로 변했을 떄 만큼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었다. 그래서 고통을 주었다.


"아아아악..."

"자! 어서!"


눈물이 줄줄 흐른다. 이럴 때 왜 녀석이 보고 싶을까.

진짜...죽여버리고 싶은데"


"아아아아아..."


굴욕감에 스스로의 몸을 폭파시키려던 찰나. 아이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신의 바로 뒤에, 있을 리 없는 녀석이 보였기 떄문이다.


"야. 적당히 좀 해."

"...?!"


신이 놀라기도 전, 안면을 얻어맞은 신이 날아가버렸다.

그리고 아이나를 받아 든 그가 후우 숨을 내쉬었다.


"..살아있으면 빨리 좀 와라!!"


아이나의 말에 곤란한 듯 고개를 까딱여 보이는 남자.

그의 등 뒤로 게이트가 열리며 몇몇 존재가 기어나온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자들 뿐. 심지어 그 중에는 십이지신 소도 있었다!


[야 빌어먹을 자식. 이제 끝날때가 된 것 같지 않냐?]


그리고 남자가 외쳤다.


"야. 다시 맞장뜨자."

"이...가온?!"


신의 외침에 가온이 빙그레 웃었다.


"응 나다 씨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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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 쥐(誓) 바람의 결말. 20.08.30 156 3 19쪽
375 세계와 내면의 진실 (2) 20.08.29 158 2 16쪽
374 세계와 내면의 진실 (1) 20.08.28 160 3 24쪽
373 절대적인 신(神) 20.08.26 155 3 15쪽
372 소원을 이루어주는 자 (3) 20.08.25 173 3 13쪽
371 소원을 이루어주는 자 (2) 20.08.24 164 3 14쪽
370 소원을 이루어주는 자 (1) 20.08.23 161 3 15쪽
369 소원권 (2) 20.08.22 161 3 20쪽
368 소원권 (1) 20.08.22 163 3 23쪽
367 동기부여 20.08.21 165 4 27쪽
366 에메라의 이야기 20.08.20 164 2 11쪽
365 파멸? (10) 20.08.18 171 4 28쪽
364 파멸? (9) 20.08.17 160 3 20쪽
363 파멸? (8) 20.08.16 157 2 20쪽
362 파멸? (7) 20.08.15 170 2 21쪽
361 파멸? (6) 20.08.14 166 3 16쪽
360 파멸? (5) 20.08.14 168 3 21쪽
359 파멸? (4) 20.08.12 175 3 19쪽
358 파멸? (3) 20.08.11 174 3 23쪽
357 파멸? (2) 20.08.10 178 3 12쪽
356 파멸? (1) 20.08.10 170 3 17쪽
355 파멸의 징조 (3) +1 20.08.08 175 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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