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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 님의 서재입니다.

세상의 파멸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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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
작품등록일 :
2017.07.04 19:27
최근연재일 :
2020.09.01 23:59
연재수 :
379 회
조회수 :
164,476
추천수 :
2,936
글자수 :
2,335,429

작성
20.08.15 17:35
조회
169
추천
2
글자
21쪽

파멸? (7)

DUMMY

웅성웅성

제아무리 훈련된 커튼 사냥꾼들 이라고는 하지만 상식 밖의 행태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커튼 본부에 직접 쳐들어 오다니? 그것도 당당하게 정면으로?


아무리 그가 말한 살육 대상들 태반이 이곳에 모여있다고는 해도 적어도 시간을 두고 올 줄 알았다. 채비는 할줄 알았단 말이다.

하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이곳에 왔다. 그게 뜻하는 것은...


'우릴 얕보거나. 정말 완전히 돌아버렸거나...'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었다.

전 세계의 커튼 사냥꾼들을 단번에 제압한 건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모두 침을 꿀꺽 삼키고 좀비처럼 천천히 걸어오는 가온을 주시한다.


"......"


가온은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더니 다시 걸음을 옮긴다.

모두 병장기를 빼들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가온에게서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척까지 다가와야 겨우 슬금슬금 무기를 빼 들까 말까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와중, 드디어 가온이 입을 연다.


"전."


모두 움찔하는 것을 보며, 천천히 뒷말을 잇는다.


"여러분과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

"제가 죽이고 싶은 건 어디까지나 제 원수와 그들을 지키는 자들 뿐. 예전이나마 전우였던 여러분과 생사결을 벌이고 싶진 않군요."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자수하는 건 어때? 정말 네 말이 사실이고, 망상증이 아니라 실제로 뭔가 벌어졌던 거라면 그걸 입증하면 되지 않나?"


가온이 훗 웃었다.


"길게 말하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어차피 서로 이해도 못 할 테고...단지."


가온의 눈이 희번뜩였다.


"절 막는다면, 부득이하게 붉은 커튼으로 변할 수밖에 없겠군요. 여러분은 강하니까요."

""......""


모두 침묵하는 가운데 확성기에서 목소리가 울린다.


[비켜줘라.]


지부장 이이협의 목소리였다.


[내가 막겠다. 괜히 사상자를 내지 말고 비켜라.]


그의 말에 하나 둘씩 주춤주춤 비키기 시작했다.

평소 커튼 사냥꾼들에게 존중을 보였던 가온과는 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와중, 가온만이 조용히 분노했다.


'내가 막겠다고?'


당신이 치우지 못한 원수들을 이 내가 치우겠다는데, 그걸 막겠다고?


"하."


실소한 가온은 커튼 본부 안으로 진입했다.

이제 곧, 여러가지가 끝날 것이다.

아직 전국 곳곳. 세계 곳곳에 간접적으로나마 삼촌 이현수가 죽는데에 동조했던 이들이 남아있지만 원흉이라 할 수 있는 건 이곳에 모인 이들이니까.


가온은 급히 이동하지 않았다.

목표물들이 움직이지 않는데 그럴 이유가 없었다.

중앙 계단이 있는 로비에 들어선 순간 가온은 눈썹을 찌푸렸다.

예상 외의 인물이 그곳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허어. 용감한...건가?"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엄숙한 목소리로 쿵 발을 구르는 인물.

퇴마 이씨 가문의 직계. 이이천이다!

그와 얼마 떨어지지 않으 곳에는 이현이 안절부절 못하며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무슨 상황이긴? 이 내가 너를 심판하러 온 것이다."


이이천이 가온에게 검을 겨누었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네가 가진 모든 정보를 내놓는다면 목숨만은 부지하게 해 주마. 그렇지 않으면 내 검의 맛을 보게 될 것이다."


위협적으로 검을 훙훙 휘두르는 이이천. 확실히 제법 위력적인 검격이었으나 가온은 코웃음만 나왔다. 가온의 그런 태도에 이이천은 분기탱천했다.


"이놈이 정녕!"


말끝에 가온에게 날아드는 이이천. 가온은 검을 들어 가볍게 공격을 막아낸다.


"아직 끝이 아니다!"


이이천이 검이 어지러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가온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처음보는 검격이다.


"호오."


마치 검을 휘감기는 듯한 느낌!

상당한 흡착력에 움직임이 상당히 제한되었다.


"하앗!"


깡!


"읏."


이번엔 호쾌한 쾌검!

가온의 몸이 주르륵 밀려난다.


"우물 안 개구리놈. 네놈은 직계의 검술을 하나도 배우지 않았지. 힘만 크다고 해서 전부일 거라고 여겼느냐?"


이게 퇴마 이씨 가문의 직계에게 내려져 오는 검이란 말인가.

가온은 조금 놀란 눈을 했다. 이이천은 말만 있는 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질만한 자였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이천의 말대로 검격은 점점 강해져갔다.

가온은 점점 밀리더니 팔 다리에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어떠냐 이놈!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겠느냐?!"

"......"

"결국 네놈은 이 정도! 다른 허접한 녀석들에겐 통했을지 모르나 이 내게 걸리면 결국 이렇게 된다는 것이다!"


까깡! 깡!


그의 검격이 어찌나 거셌던지 로비의 여기저기가 슉슉 파여나갔다.

그걸 보면서 이현은 불안에 휩싸였다.


'뭐지? 가온이가...이가온이 저렇게 약할 리가 없는데?'


지금까지 보여준 무위라면 이렇게나 밀릴리가 없었다.

주특기인 실전된 섬광이나 거대한 화염구조차 사용하고 있지 않지 않은가?


애초 본가에서 이가온과 맞붙겠다며 억지를 부리는 그를 사정하다시피 이곳으로 끌고 온 게 이현이었다.

가온이 오고 나서도 당주에게 맡기자며 한사코 말렸으나 기어이 여기까지 온 이이천을 보며 패 버리고 싶을 정도로 답답함을 느꼈다.

헌데 의외로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지친...건가?'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것이었다.

하기야 미국의 정부공인 순위권자 반 이상과 혈전을 펼쳤는데 지치지 않는 게 인간인가?


'붉은 커튼이란 것이 상당한 힘의 소모가 있는지도 모르겠군.'


전 세계에서 모인 커튼 사냥꾼과 최첨단 화기들을 단번에 잠재운 그 힘에 그 정도 리스크가 있다는 건 납득할 만한 이야기였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 아닐까? 이가온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


이현의 마음 속에서 어두운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떠올린다.

이가온을 바라보는 사랑하는 사람. 이이나의 얼굴을.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이이협에게조차 보여주지 않았던 부당주의 얼굴을!


'이젠 이루어질 수 없는 분이라 할지라도...그 분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들다니.'


질투심이 이현을 휘감는다.

이 정도 일까지 벌였으니 이제 이이나도 그를 포기하겠지만,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 다 네 잘못이다.'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검을 다잡는 이현. 그리고.


까앙!


"우웃?!"


이이천이 깜짝 놀랐며 뒤로 주춤거렸다.

그의 쾌검에 가온이 쾌검으로 맞선 것이다.


"아직 기운은 남아 있느냐!"


다시 검술을 펼치는 이이천.

아까와 똑같이 상대를 빨아들이는 듯한 검술이 펼쳐졌고, 이이천이 빨려들어가 바닥을 구를 뻔 했다.


"엇..."


이번에야말로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이이천.

그도 그럴만 했다.

지금 이건 이이천의 검격. 그 자체였으니까!


"이...놈."


이이천의 얼굴이 경악에서 분노로 바뀌어간다.

그는 인성 면에서는 형편 없었으나 실력만은 진짜. 그랬기에 알 수 있었다.

가온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것을.


"이노옴! 감히 나를 얕봐!! 이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겠다!"


호통을 치며 절기를 준비하는 이이천.

그리고 가온도 이이천을 응시하며 똑같은 자세를 취한다.


"따라하겠다고?! 본 적도 없는 기술을?! 건방진!!"


이이천이 발검한다. 태양과도 같은 빛이 솟구치며 거대한 주술의 검격이 가온에게 쇄도한다.


"막을 수 있다면 막아봐..."


투콰앙!!


"라...?"


이이천은 자신의 절기가 막힌 것에 놀라지 않았다.

그가 놀란것은, 가온이 똑같이 거대한 주술의 검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흠...이런 기술이 있었나."

"......"

"아까 전 빨아들이는 듯한 검술은 흐름의 하위호환이나 다름 없었는데, 이건 쓸만하군."

"이, 놈...이...노옴!!"


광분하여 미친듯이 검을 휘둘러 오는 이이천.

그걸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검격으로 맞선다.

이현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가온은 지친것도 뭣도 아니다.

이이천의 강한 자존심을 자극하기 위해 똑같은 기술로 맞서고 있었던 것 뿐이었다.

지금까지 완전히 농락당한 것을 꺠달은 이이천은 고함을 질렀다.


"놈! 놈! 당장 무릎꿇어! 무릎꿇고 사죄해라! 건방진 애새끼!!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네놈같은 것에 누님이 신경쓰고! 이이협과 그 건방진 계집이 낳은 우리 가문의 오점!"


깡! 까깡!


이이천의 말을 들으며 콧방귀를 뀌는 가온.


"하하! 어미 욕을 들으니 화가 좀 나느냐?! 엉?! 네놈 따위가 화나면 어쩔 것이냐?! 당장 할복해! 아니, 할복하기 전에 섬광의 구결만은 넘겨라! 내가 익혀주마! 그러지 않는다면 너와 연관된 모두가 불행해질 것이야! 내가 그렇게 만든다!"

"나랑 연관되었던 자들 전부가 댁보단 셀걸?"

"이놈이 그래도!!"


까앙!


검을 맞대고 서로 지근거리에서 노려본다. 식식대던 이이천이 히죽 웃으며 말한다.


"감히 퇴마 이씨 가문의 과분한 은혜를 입고도 실전된 기술을 자기만 가지고 있던 이기적인 쓰레기들...너도 그 새끼랑 똑같아."

"......"

"이현수! 그 새끼는 역시 죽이길 잘했..."


서걱.


"엇..."


뭔가가 잘렸다고 느꼈을 떈, 이미 그의 검이 두 동강이 나 바닥에 떨궈진 상태였다.

그리고 귀에서 불에 덴 듯한 고통이...


"끄아아악?!"


귀를 감싸려는 이이천보다 한 시 빨리 손을 뻗어 그의 귀를 잡아채 주저앉힌다.


"아악! 아파! 아파아아아아!"

"아프겠지 그럼. 이 정도는 일상다반사 아닌가?"


커튼 사냥꾼이라면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가온이었지만 이이천은 평생을 편하게 살았던 자.

이 정도 고통은 그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


"놔! 놓아라! 감히 나를...!"


쾅!


"끄윽...?"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듯 풀린 눈을 하는 이이천. 그의 코에서는 코피가 흘러내렸다.


"왜 그런 표정이야? 재밌어서 좀 놀아줬더니 진짜 나랑 맞먹는 줄 알았어?"

"이, 이 개자식이...!"

"왜? 한 대 갖고는 모자라?"


가온이 주먹을 치켜올리자 이이천이 손을 뻗고 고개를 젓는다.


"자, 잠깐..."

"뭘 잠깐이야 씨발놈아"


쾅! 쾅! 쾅! 쾅! 쾅!


묵직한 타격음이 로비에 울린다.

안면을 얻어맞을때마다 가축같은 비명을 내지른 이이천은 점점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한다는 분노보다는 공포가 커져갔다.


"아각! 히익! 힉! 그, 그만! 제발 그만...!"

"싫은데?"


이번엔 조금 강도를 줄여 안면을 타격한다. 어디까지나 좀 더 즐기기 위함이지 이이천을 봐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맙다. 결심을 더욱 공고하게 해 줘서."


역시 이것들은 다 죽여야 한다. 가온이 그렇게 생각하며 히죽 웃었다.


"그, 그만 두어라 가온아! 더 이상 날뜀으로 뭘 얻는단 말이니?!"


보다못한 이현이 말리려고 달려왔지만 가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뭔가를 날렸다.


"억?!"


어깨에 통증이 느껴져 주저앉은 이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보니 쇳조각이 박혀 있었다.


"너, 너...!"

"아까 뒷통수 치려고 했으면서 말만은 참 올발라. 그치?"

"그, 그건...!"


찔리는 게 있었던 이현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결국 결심한 표정으로 검을 잡고 일어난다.


"형님을 놔 줘라."

"싫은데?"

"싫다면, 배제하겠..."


말이 끝나기도 전 이현은 공중을 날고 있었다.


"...어?"


콰앙!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바닥에 처박히고 온갖 난타가 꽂힌다.


"크억?! 컥! 어억!"

"내가, 당신은, 건드리지 않으려 했는데, 이 새끼를 보호하겠다니, 그럼... 뒤져야지."


광기어린 얼굴로 이현을 난타하고 또 난타한다.

이이천은 그런 그들을 보며 엉금엉금 기어가 도망가려 한다.


"넌 또 어디가 씹새야."

"히이익...!"

"하여간 이 병신은 주제도 모르고 의리도 없어요. 너 지키려다 이 꼴이 된 놈을 두고 혼자서 도망가?"

"그, 그만! 오, 오지 마라! 명령이다!"

"뒤질라고 씨발. 안 되겠다. 일단 그 엿같은 혀부터 뽑자."

"으아, 으아아아아아!!"


가온이 진짜로 혀를 잡고 힘을 주자 이이천이 바둥댔다. 공포에 오줌을 지린다.

그리고.


슈칵!


날카로운 검격을 감지한 가온이 몸을 틀어 그것을 피해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공격한 사람과 그 곁에 있는 사람을 응시하는 가온.


그건 가온의 누나와 여동생. 가영과 가은이었다.


"현이 오빠. 이모부를 데리고 피신하세요."


훙훙 검을 휘두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는 가영.


"조심...해라.."


이현은 비틀거리면서도 이이천을 부축하며 위로 올라갔다.

그걸 보지도 않고 가영과 가은을 주시하고 있는 가온.

이윽고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가영이 표정을 풀고 평소의 상냥한 어투로 말했다.



"...보내줘서 고마워."

"뭘. 밖으로 나가려고 하면 죽이려 했는데 위로 갔으니 뭐...어차피 좀 있다가 다 죽일건데 맛있는 건 아껴둬야지."

"...가온아."


안타까운 듯한 말투. 동정심 어린 눈길.

그 전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슴 속에서 울컥울컥 뭔가가 솟아오른다.

그걸 간신히 억누르고 가온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비켜주지 않겠어요? 누님이랑, 그리고 너랑 싸우고 싶지는 않은데."


가영과 가은을 번갈아가면서 보고 말하자 그때껏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가은이 얼굴을 쳐 들었다.


"언제부터 그랬다고?"

"뭐?"


가은의 뜬금없는 말에 반문하는 가온. 가은은 표독스럽게 가온을 노려보며 말했다.


"언제부터 현수 삼촌을 그렇게 위했다고 이 난리를 피우는 건데? 너 때문에 죽었고, 넌 그 뒤로 언급도 안 했잖아. 그냥 잊었잖아. 그런데 왜 이제와서?"

"...이제와서라고?"


안 되겠다.

속에서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것이 멈추지 않는다. 참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비틀린 표출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디 한 번 날 막아봐 썅년아."

"...그러려고 온 거야!"


가은이 양팔을 쫙 펼치자 온갖 부적이 사방에 나풀거리며 결계를 형성한다. 가볍게 쳐 내려 했지만 예상 외로 저항이 강해 가온은 깜짝 놀랐다.

보통 결계라면 지금의 가온은 손 한번 휘둘러 불태울 수 있는데 그게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가영이 가온에게 달려든다.


투콰앙-!


"으...읏!"


아까의 이이천처럼 그를 놀리기 위한 빌드업을 쌓기 위해 낸 억지 신음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신음.


대번에 느낀 감정은 강건. 견고.

묵직하다.

어쩌면 김류열보다도 훨씬 더.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수준은 아니었을 텐데...

그새 성장한 모양이었다.


그건 가은도 마찬가지.

순식간에 결계는 물론 온갖 소환수를 소환해냈다.

그 소환수 하나하나가 강력한 커튼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강력했다.

결계는 소환수를 강화하는 힘이 있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이 로비는 가은과 가영에게 굉장히 유리한 지형이 되었다.

세계대회떄 재무진에게 잡혀갔을 때는 상상도 안 되는 실력이다.


약 1분. 그 모두와 진심으로 붙어본 가온은 경악스러웠다.

가온이 손대중 한 것도 있겠지만 미국의 정부공인 순위권자들과 붙었을 때와 비교하여 밀리지 않는 수준이다.


가온은 새삼 실감했다.

가영과 가은 역시 역사에 남을만한 초천재라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분노가 솟아오른다.

이만한 재능이, 입지가 있으면서.

왜...지금껏...


"가온아."


검을 맞댄 가영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한다.


"그만하자...누나가 도와줄게. 응?"

"...뭘 도와준다는 건가요?"

"전부 다. 네가 다른데에 팔려가지 않게 전력을 다할거야. 이 상황을 무마시킬수만 있다면 뭐든 할 거야. 네가 다시 정상적인 삶을 살도록, 정신적으로 힘들지 않도록 누나가 최선을 다할게. 그러니까..."


돌아와줘. 그 말은 가온의 이 가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가은은 요격을 준비한다.


'정을 없애.'


정을 가지고 상대할 만한 적이 아니다.

움직인다면 적어도 사지 하나는 뭉개버릴 각오로 공격해야 한다. 그래야 그를 막을 수 있다. 이게 최선이다.

유약한 언니와 달리 자신은 정신 차리고 있을 거라고 가은은 마음먹었다.


"가온아...?"


대체 그는 왜 이토록 분노하고 있는 것인가?


"미안해 가온아...누난, 네가 망상증을 앓고 있는지도 전혀 몰랐..."

"망상? 망상이라고요?"


가온이 고개를 쳐 들었다. 그리고 가영은 물론 굳은 결심을 하고 있던 가은조차 깜짝 놀랐다. 분노한 표정이다. 하지만, 그 표정은 너무나 괴로워보였다.

실망한 듯도 한. 울분에 가까운 표정.


"망상...? 망상?! 그럼 누님은!! 정말 지금껏 전혀 알아보지도 않았다는 겁니까?!"

"알아보다니...뭘..."

"삼촌에 대해서! 누가 그 사람을 죽였는지 진짜 조사 하나도 안 했다는 거잖아! 잊었다는 거잖아!!"


어느새 존대조차 관둔다.

누나라 생각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존대를 하던 것을 잊고 감정에 따라 외치며 검을 집어던지고 가영의 멱살을 잡았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 빠르고 강력했던 것도 있지만 가온의 감정에 놀란 가영은 감히 반항할 생각을 못했다.


"삼촌이 나한테, 가은이한테, 누나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그 사람의 죽음이 이상하다고 생각 한 번 안 했어?! 수상한 거 못 느꼈냐고!"

"가, 가온..."


오랜만에 누나라 불렸음에도 가영은 그것에 기뻐할 틈도 없었다.


"나는 그때 애새끼였으니까! 신동이든 뭐라 불렸든 그냥 애새끼에 불과했으니까! 아무 힘도 없었어. 가은이도 그랬고. 근데 누나는 달랐잖아! 그때 이미 가문에 영향력이 있었잖아!! 왜 아무것도 안 했어?! 나 쫒겨났을떄 왜 아무 말도 안 해줬어?! 그냥, 그냥 쫒겨난 나 쫒아와 같이 살아준 걸로 고마워하라는 거야?!"

"아, 아니야...난..."

"너! 방금 뭐라 했었지?!"


가영을 밀치고 가은에게 성큼성큼 걸어가는 가온. 가은은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언제부터냐고?! 언제나 그랬어! 항상 삼촌만 생각하고! 원수만 생각하고 살았어! 그런데 넌 잊었잖아! 몇 년 만에 잊고 잘만 살았잖아!"

"나, 나는...그게 아니라..."


따지고 싶은 말은 가은도 많았다.

하지만 가온이 이렇게 화내는 건 10년 만이었다.

자신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는 건. 1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뭐가 아니야! 쫒겨난 나한테 실망해서 항상 욕만 해대고!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삼촌 죽인 새끼들 득시글하고 감시 당하는 그 상황에서 내가 어쨌어야 했냐고?! 씨발!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고!!"


가은의 어깨를 잡으며 감정을 토해낸다.


"십 년. 십 년을 기다렸어! 죽을 고비 다 넘기면서 겨우 복수할 힘을 손에 넣었다고! 재무진을 비롯한 쓰레기들을 도륙냈어! 근데 뭐? 망상증? 도와줘?! 뭘 도와준다는 건데! 도와줄 거라면 복수를 도와줘! 그게 내 전부야!! 아님 그냥 들어나 줘! 내가 뭘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대답 좀 해봐! 누나! 가은아! 어린 애새끼였던 내가 뭘 할 수 있었는데...?"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외치는 가온을 보며 가은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한테 그때 아빠 아니면 너랑 누나밖에 없었는데. 니들 모두 날 버렸잖아!! 삼촌을 버렸잖아! 누가 같이 살아달랬어?! 난 그냥...같이 행동해주고, 공감해주길 원했을 뿐인데..."

"......"

"......"


마지막은 거의 흐느낌에 가까웠다.

어느새 결계는 풀렸다. 소환수도 사라진 뒤였다.

그저 감정을 토해내는 가온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식식거리는 가온은 이윽고 가은의 어깨를 놔주었다.


"지금껏 방관했으면, 끝까지 방관해."


검을 집고, 중앙계단을 오른다.


"누나랑 넌 날 성토할 자격없어. 믿지 않아도 좋아. 내가 원수들 죽이는 걸 방해하지만 마. 여기서 더 방해한다면...이제 봐줄 생각은 없어."

"윽...!"


가은이 손을 들어올리려다가 멈추었다.

충격에 뭘 할 기운이 없었다.

그저 가온이 올라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볼 뿐이었다.


만약, 가온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원수들이 있는 거라면.

그녀들은 10년간 가온에게 뭘 했던 것인가. 그런 고뇌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방해 없이 중앙까지 올라온 가온.

그 동안 어떻게든 감정을 추스른다.

가운데는 뻥 뚫린 다리였다. 그리고 난간에 기대있는 존재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뜬다.


"이제 오냐."

"......아이나."


한국의 정부공인 순위권자 9위. 아이나가 대기 중이었다.

그리고 목표물들이 있는 건물 출입구 앞엔...


"......아버지."


이이협이 눈을 부릅뜨고 가온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 토해냈다 생각했던 분노가 다시금 스멀스멀 기어 오르기 시작한다.


"하아."


깊은 숨이 토해진다.

계단을 올라 다리에 서서. 아이나를 바라본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에게 검을 겨눈다.

아직 피곤한 일은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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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 세상의 파멸을 원한다. 20.09.01 153 3 30쪽
377 소(牛) 토끼(兎) 양(羊) 닭(鷄) 뱀(蛇) 돼지(豚) 말(馬) 호랑이(虎狼) 용(龍) 고양이(猫) 20.08.31 157 3 26쪽
376 쥐(誓) 바람의 결말. 20.08.30 156 3 19쪽
375 세계와 내면의 진실 (2) 20.08.29 158 2 16쪽
374 세계와 내면의 진실 (1) 20.08.28 160 3 24쪽
373 절대적인 신(神) 20.08.26 154 3 15쪽
372 소원을 이루어주는 자 (3) 20.08.25 173 3 13쪽
371 소원을 이루어주는 자 (2) 20.08.24 164 3 14쪽
370 소원을 이루어주는 자 (1) 20.08.23 161 3 15쪽
369 소원권 (2) 20.08.22 161 3 20쪽
368 소원권 (1) 20.08.22 163 3 23쪽
367 동기부여 20.08.21 165 4 27쪽
366 에메라의 이야기 20.08.20 164 2 11쪽
365 파멸? (10) 20.08.18 171 4 28쪽
364 파멸? (9) 20.08.17 160 3 20쪽
363 파멸? (8) 20.08.16 157 2 20쪽
» 파멸? (7) 20.08.15 170 2 21쪽
361 파멸? (6) 20.08.14 166 3 16쪽
360 파멸? (5) 20.08.14 167 3 21쪽
359 파멸? (4) 20.08.12 175 3 19쪽
358 파멸? (3) 20.08.11 174 3 23쪽
357 파멸? (2) 20.08.10 177 3 12쪽
356 파멸? (1) 20.08.10 169 3 17쪽
355 파멸의 징조 (3) +1 20.08.08 175 4 15쪽
354 파멸의 징조 (2) 20.08.07 172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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