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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맨

잘생김을 연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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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맨
작품등록일 :
2021.10.18 01:01
최근연재일 :
2023.09.08 15:36
연재수 :
120 회
조회수 :
168,300
추천수 :
3,574
글자수 :
645,036

작성
21.10.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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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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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글자
11쪽

005 캐리어

DUMMY

“책들은 뒷자리에 올려 뒀습니다. 강배우님”


오늘 배정된 로드 매니저 김정수와 진철은 축제차량을 타고 촬영장으로 출발했다.


“네. 고마워요”

“별말씀을. 가시죠”


운전을 하다가 룸미러로 진철의 얼굴을 살핀 김정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강배우님”


진철은 살짝 웃었다.

인기가 없거나 어린 배우에게도 언제나 정중하게 대하는 백실장에게 배워서 그런지 김정수 매니저도 말끝마다 배우님이라는 말을 붙인다.

그리고 사람 정중하게 대하는 건 진철도 마찬가지다.


“아뇨. 회사일로 그런 건데 정수씨가 미안할 일은 아니죠”


진철은 촬영 스케쥴이 있을 때 마다 회사에서 로드 매니저와 차량을 지원받는데 특별한 일이 없다면 거의 대부분 김정수가 배정된다.

어제는 그 특별한 경우에 해당한 거고.


“그래도···그런데 강배우님, 오늘따라 더 잘생겨 보이네요? 뭐 좋은 일 있으세요?”


정수가 룸미러로 진철의 얼굴을 힐끔 보면서 말했다.


“아. 네. 좀 좋은 일이 있기는 했죠”


진철은 옆자리의 책꾸러미를 슬쩍 확인하며 대답했다.

그래도 지금 당장 읽을 생각은 없다.

책은 나중에 원룸으로 돌아가서 읽고 오늘은 오늘의 촬영에 전력을 다할 생각이다.








오늘 촬영하는 영화의 제목은 [캐리어]다.

국제 테러조직이 국내에 폭탄을 밀반입해 테러를 일으키려는 걸 국정원 비밀 에이전트팀이 막는다는 내용이다.

진철은 그 안에서 영화의 주무대가 되는 택배 물류센터가 있는 동네의 양아치를 병수를 연기한다.

촌스러운 츄리닝 입고 건들거리며 동네를 배회하며 양아치 짓을 하다가 국제 범죄조직과 경찰, 국정원이 얽힌 사건에 멋모르고 끼어들어 물류센터에 잠복하고 있던 주인공과 그 동료들에게 두들겨 맞고, 또 다른 등장인물들에게도 돌아가며 수난을 당하는 역할이다.

사건 사이사이에 끼어들어 경직된 분위기를 한 번씩 풀어주는 그런 감초 캐릭터다.


[와글와글]

[시끌시끌]


오늘은 영화의 가장 하이라이트를 찍는 날이자 마지막 촬영일이라 택배 물류센터 세트에는 어느때 보다 사람들이 북적댔다.


“안녕하세요”

“아! 강진철씨 분장 순서는 이따가 여섯시예요. 촬영 시작은 여덟시로 예정이 되어 있고 끝나는 시간은 일단 두 시입니다. 그리고, 알고 계시죠? 어쩌면 내일도 촬영을 해야 할 수 있습니다”


조연출이 진철과 김정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네. 우리 배우님 내일까지 스케쥴 비워 놨습니다”


조연출이 시간 설명을 해줬지만 영화 촬영이라는 게 그 계획대로 진행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진짜 운이 기가 막히게 좋은 날이 아니라면 배우를 포함해 촬영장의 그 많은 인물 중 누구 하나는 반드시 실수를 하고 촬영은 늘어지는 게 당연하다.

세금 같은 거다.

진철은 감독에게 인사를 할까 생각을 하다가 현장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정신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분장을 하러 갔다.








“액션!”


꽤 큰 택배 물류센터 앞의 넓은 차량 계류장.

택배차들이 몇 대 늘어서 있고 한쪽으로는 간이 차량 점검센터가 있다.

얼굴 여기저기 멍을 달고 점점이 피자국이 뭍은 츄리닝을 너저분하게 걸친 병수가 택배회사 로고가 그려진 조끼를 입은 주인공을 향해 떠들어댔다.


“사람 치기 싫어서 맞아 주니까 아주 사람이 졸로 보이지? 응?”


어설프게 권투 자세를 잡고 주인공 앞의 허공에 원투펀치를 뻗는다.


“이제 용서는 없으니까 맞고 내가 너무 하다고 원망은 하지 마라. 응?”


같잖다는 듯 그런 병수를 보던 주인공은 갑자기 병수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옆방향에서 두 사람을 나란히 찍고 있던 카메라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방향을 바꿔 진철의 뒤 좀 떨어진 곳에 나타난 일단의 무리를 향한다.


“어딜 봐? 딴청 부려도 소용없어. 새꺄! 내가 그런 조잡한 수법에 넘어갈 것 같냐?”


여전히 주인공 앞에서 방방 뜨면서 촐싹거리는 진철을 뚱한 눈으로 보던 주인공은 귀찮다는 듯 육중한 팔을 크게 휘둘러 진철의 뺨을 때렸다.


“악!”


손바닥 부딪치는 소리도 나지 않았으니 진짜 맞은 것은 아닐 거다.

하지만 진철은 마치 거대한 파리채에라도 맞은 것처럼 실감나게 옆으로 날아가 카메라 프레임 안에서 사라졌고 카메라는 그 뒤로 점점 다가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포커스가 맞춰졌다.







“컷! 오케이”


감독이 소리치자 뒤이어 조감독이 배우들에게 다음 촬영순서를 알려 주었다.


“다음에는 병수가 기절해 바닥에 뒹구는 장면 촬영하겠습니다”


감독 백신규는 하루 종일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오늘 시작이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강진철이, 연기 아주 좋았어. 오늘 뭔가 필 좀 받은 것 같은데?”


강진철이 연기를 시작하려고 자리를 잡고 주인공과 대치를 시작할 때부터 백신규는 뭔가 좋은 예감을 느꼈다.

풍겨오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연기를 시작하자 마자 병수의 대사도 움직임도 이전 촬영 때 보여줬던 것보다 훨씬 더 생동감이 넘쳤다.

마치 활어가 퍼덕퍼덕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하하! 네. 감독님. 오늘 아주 컨디션 끝내줍니다. 평생 몇 번 없었을 정도로요”


경쾌한 진철의 대답에 백신규도 기분좋게 말했다.


“좋아. 좋아. 그럼 다음 촬영 가자고”


병수가 기절해 바닥을 뒹구는 연기도 한번의 테이크로 오케이가 떨어졌다.


“30분 쉬고 조폭들과 붙는 씬입니다”


배우들은 대기 장소로 갔고 스텝은 다음 촬영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변했지?”

“네. 확실히 변했네요”

“왜 변했을까? 배우라는 놈들은 참 이상한 놈들이라 이 나이 먹고도 아직 모르겠다는 말이지”

“그러게요. 저도 아직 모르는데 감독님이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제게도 알려 주세요”


백감독이 촬영감독과 주고받는 대화를 듣던 조감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강진철씨 말하시는 거죠? 제가 보기에는 이전 촬영과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던데요?”


백감독과 촬영감독은 피식 웃었다.


“그건 임마. 네 안목이 아직 부족해서 그래”


조감독의 표정이 시무룩해지자 백감독이 말을 덧붙였다.


“나중에 너도 네 영화를 만들다 보면 다 보일 거야. 그 때는 촬영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지니까”


여전히 조감독은 납득하지 못했는지 볼 맨 소리를 했다.


“그런데 촬영장에 있던 사람들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변화라면 아무 소용없는 것 아닌가요?”

“나중에 편집해 놓은 걸 보면 다 알게 된다. 편집이라는 건 보이지 않는 것을 몇 백배 증폭해서 보이도록 만드는 마술이니까”







이후로도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오늘 찍을 장면의 하이라이트는 물류센터 계류장에서 수십명의 사람들이 뒤엉켜 악다구니를 치는 장면이다.

주인공은 박진감 넘치는 싸움 끝에 동네 조폭들을 다 때려 눕힌 뒤 그가 진짜로 노리던 국제 테러조직의 조직원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런데 그 때 병수가 주인공의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 목을 조른다.


“야! 이 개자식아!”


여기저기 멍자국과 뺨에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굉장히 처절하면서도 코믹하게 보인다.


“아 나 귀찮게”


주인공은 짜증을 내면서 엎어치기로 병수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발로 얼굴을 걷어차 버렸다.

병수는 끅끅 거리다 또 기절했다.


그 다음 병수의 등장은 진짜 마지막 장면이었다.

주인공과 그의 팀 부하들과 국제 테러단 조직원들, 동네 조폭들, 형사들까지 물류창고 앞마당에서 활극을 펼쳤다.

그 결과 거의 대부분 바닥에 누워 신음하고, 경찰특공대가 물류센터를 포위하고, 경찰의 높은 사람이 싹 다 잡아 쳐 넣겠다고 확성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과 메인 빌런의 싸움 끝에 [캐리어]에 들어있던 폭탄의 기폭장치가 바닥에 떨어져 굴러갔다.

병수의 마지막 씬은 그 때 시작되었다.

진작에 깨어있었지만 기절한 척하고 있던 병수가 눈앞에 굴러온 기폭장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차 지붕으로 뛰어올라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개자식들아, 싸우려면 니들끼리 싸우지 왜 가만히 있는 나를 때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응? 니들이 뭔데 날 무시해!”


병수는 그냥 평소처럼 아무에게나 시비 좀 붙이고 삥 좀 뜯으려 했을 뿐인데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돌아가며 두들겨 맞았다.

맞아서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가장 분한 건 이 놈들이 자기를 개미보다 더 못한 존재로 본다는 거였다.

양아치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에 그건 참을 수 없다.

억울하고 원통해서 계속 달려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주 통쾌하다.

높은 곳에서 폭탄 기폭장치를 들고 있는 이 순간 모두가 그의 아래에 위치해 그에게 애원을 하고 있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소리를 질렀다.


“다 대가리 박아~!”


이 장면은 배우가 처절한 행색으로 그를 때린 놈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내가 제일 잘 났다고 뻐기는 장면이다.

저마다 다른 종류의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잘난척하던 인물들이 별것 아닌 인물이 쥔 쥐꼬리 만한 권력에 굴복해 땅에 대가리를 박는 순간 묘한 카타르시스를 관객에게 느끼게 하는 게 최상이다.

그런데 그걸 연기하는 건 굉장히 어렵다.

조금만 삐끗해도 균형을 잃고 처절이거나 코믹이거나 한 쪽으로 기울어 버리기 때문이다.

[캐리어]는 예술영화가 아니라 오락영화이기 때문에 백신규 감독은 일찌감치 현실과 타협해 코믹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강진철이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딱 균형 잡힌 연기를 해냈다.


“작두 탔네”


백신규 감독이 중얼거렸다.

잘난체 하는 평론가들의 눈을 사로잡을 딱 하나의 장면이 완성해낸 거다.

백프로 오락영화에서.


“이게 우리 영화에 잘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놈에게는 인생이 바뀌는 순간일수도 있겠어”


그런 배우들을 본 적이 있다.

어느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감이라는 걸 낚아채 그 전까지는 한계였던 모든 경계를 깨부수고 완전히 다른 차원의 연기를 보여주는 그런 배우들.

다만 그런 순간은 아무에게나 찾아오지 않는다.


‘천재 소리를 듣는 배우에게나 드물게 오는 게 설마 강진철에게 올 줄은 몰랐는데?’


그가 보는 배우 강진철은 그냥 저냥 괜찮은 배우였다.

현재 연기력은 그럭저럭이지만 앞으로 꾸준히 배우로써 경험을 쌓아 가다 보면 사십대 말이나 오십대쯤 어쩌면 명배우 소리를 들을 가능성도 있는 그런 배우.

그런데 그 강진철이 한계를 뛰어 넘었다.

물론 그렇다고 강진철이 당장 명배우가 되는 건 아니지만 한 번이라도 한계를 뛰어 넘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확실한 차이가 난다.


‘저 녀석은 크게 되겠어. 엄한데로 빠지지만 않으면’







주인공을 비롯해 계류장의 모든 사람이 놀래서 병수를 만류한다.

병수도 위협만 하지 실재로 폭탄을 터뜨릴 생각은 없는데 병수의 꼬붕 두 명이 어설프게 말리다가 기폭장치를 떨어뜨렸다.

등장인물들 모두가 깜짝 놀라서 밖으로 뛰어나가고 물류센터가 폭발에 터져나가며 영화 [캐리어]의 촬영이 끝났다.


작가의말

진철의 배역 병수는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의 김수로 배우님과 유오성 배우님이 맡았던 배역을 적당히 섞었습니다. 


“다 머리 박아!”는 명대사의 오마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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