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피이... 푸딩한테 졌어
#055 피이... 푸딩한테 졌어
새집으로 들어가니 나무 냄새가 향긋하다.
아, 이게 천국이지.
나는 벌렁 바닥에 누웠다.
이 세상에도 매트리스 비슷한 게 있다고 한다.
짚을 사각형으로 뭉쳐서 만든 거라던데 도시에서 판매한다.
물론 지금 이 마을에서는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다.
도시가 너무 멀어서 짚 매트리스를 사는 건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보통 농가에서는 수확하고 남은 짚을 모아 나무 침대에 올리고 천을 덮어 잔다고 들었다.
수확을 해야 짚이 나오므로 그냥 짚도 아직은 없다.
가을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나마 초기에 지급받은 모포는 그럭저럭 충분하니 다행이다.
'다음에 행상이 오면 모포를 좀 더 사는 게 좋겠네.'
맥주와 와인 같은 것도 필요하다.
오락거리 없는 이런 마을에서는 그런 게 유일한 즐거움이니까.
마을에 막 도착했을 때는 무슨 술이냐 생각했지만, 이렇게 지나면서 보니 그건 필요비용이다.
그동안 모은 털과 고기를 조금 팔면 그 정도는 살 수 있을 거다.
고기 자체는 어느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거지만 팝콘 덕분에 맛이 월등하게 좋다.
지난번에 행상이 멧돼지 고기에 욕심낸 걸 보면 좋은 값에 팔리지 않을까.
'아, 팝콘을 가죽에 뒹굴게 해 볼까.'
팝콘은 사람 몰리는 곳에서 노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가죽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아직 효과를 본 적은 없지만 가죽의 질이 좋아질지도 모른다.
마침 팝콘이 창문으로 날아들어 왔다.
아이들도 낑낑거리며 팝콘을 따라 창문으로 들어온다.
아니, 문 다 열려 있는데 왜 창문으로 힘들게 들어오는 거지.
아이들이 내 옆에 나란히 누웠다.
"선생님, 오늘은 정령님이 굉장히 많이 빛나요."
"좋은 일 있나 봐요."
"집이 생겨서 그래."
"맞아, 오늘 정령님도 집 생겼지."
"선생님, 정령님도 집이 있으면 행복해요?"
실제로 오늘은 팝콘이 유난히 사방에 빛을 많이 뿌렸다.
뭔가 좋은 일이 있었나.
아니면 정말로 집이 생겨서 좋은 건가.
아이들 말에 일일이 대답하는데 팝콘이 내 코앞으로 날아왔다.
"아! 색 바꼈어."
"진짜 예쁘다."
"오늘은 다른 때랑 빛이 달라요."
"무지개 같아."
"진짜 좋은 일 있대요?"
아이들이 드러누운 채 팝콘을 보며 외쳤다.
내 눈에는 그저 팝콘이지만, 확실히 녀석이 뿌리는 빛의 색이 평소보다 다채롭다.
"피피피! 피피피피!"
내 코를 붙잡고 팝콘이 피피 울기 시작했다.
낼 수 있는 색이 많아졌다고 자랑하는 것 같다.
"그래, 색이 예쁘게 바뀌었구나. 아주 예쁘네. 축하한다."
"... 피... 피이...."
팝콘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피이 피이 피이이...."
팝콘이 두 손을 높이 올려 물결치는 것처럼 아래로 내린다.
그걸 여러 번 반복하지만, 글쎄, 모르겠다.
팝콘에게 배우의 재능은 전혀 없는 것 같다.
지크가 데구르르 굴러 다른 아이들을 밟으며 내 옆으로 왔다.
나 죽어, 깔려 죽는다, 아이들의 비명이 터졌지만 지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옆으로 바짝 붙더니 지크가 말했다.
"선생님, 방금 봤어요? 정령님 빛이 꼭 머리카락처럼 길게 늘어졌어요. 진짜 머리카락이 생긴 건 줄 알고 깜짝 놀랐거든요."
지크 말을 듣고 보니 팝콘의 행동이 머리카락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머리가 길어지고 싶었나."
내가 중얼거리자, 팝콘은 절망한 것처럼 피이, 크게 울더니 내 코에 엎어졌다.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 말이 통한다면 말이지만.
"꾸... 꾸...."
익숙한 소리가 들려 몸을 일으키자 푸딩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한데 평소와 모습이 다르다.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몸이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두더지다!"
"엄청 많아!"
"짱이다!"
"벌레도 있어!"
"엄청나다."
아이들이 벌떡 일어나며 요란하게 소리쳤다.
너무 겹겹이 있어서 순간적으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확실히 푸딩 몸속에 있는 건 두더지였다.
굉장히 많다.
평소에는 한두 마리 먹은 뒤 다시 잡는데.
방금까지 내 옆에 있던 아이들이 다람쥐처럼 잽싸게 달려가 푸딩을 둘러쌌다.
순식간에 아이들 관심을 잃은 팝콘이 어이없다는 듯 푸딩을 보았다.
진짜 빵빵하게 부풀었네.
너무 많이 먹은 것 같다.
"배탈 나지 않겠니?"
내가 푸딩한테 묻는 순간이었다.
푸딩이 부르르 몸을 떨더니 두더지와 벌레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살아있었던 모양이다.
푸딩 몸은 순식간에 줄어들고 두더지와 이름도 알 수 없는 벌레가 사방으로 튀었다.
"뭐, 뭐야."
내가 깜짝 놀라는데, 아이들이 벌레와 두더지를 따라 뛰면서 외쳤다.
"축하 선물인가 봐요!"
"푸딩 착하다."
"잘했어, 푸딩아!"
"선생님 좋겠다."
하나도 안 좋다.
푸딩이 얼마나 속에 꾹꾹 눌러 담고 왔는지, 모처럼 새집인데 순식간에 벌레투성이가 되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쨌든 문을 더 활짝 열고 천과 나뭇가지를 휘둘러 벌레와 두더지를 몰아낸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벌레를 잡아 허리춤 갈대 상자에 넣었다.
벌레잡이 용으로 항상 매달고 다니는 모양이다.
"... 꾸... 꾸르... 꾸르...."
푸딩은 우리가 난리 치는 걸 기뻐한다고 착각한 것 같다.
푸르 푸르 몸을 떨며 춤추기 시작했다.
아이들 말대로 두더지와 벌레는 축하 선물이었던 모양이다.
아이들이 기뻐하는 건 사실이지만 집주인인 나는 하나도 안 기쁘다.
푸딩 앞에는 팝콘이 무릎을 꿇은 채 엎어져 있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마치 졌다고 굴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그러고 있던 팝콘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허공을 터벅터벅 걸어 밖으로 나갔다.
피... 피이... 울음소리가 슬프게 들렸지만, 미안, 지금 벌레 잡느라 정신이 없다. 널 위로해 줄 때가 아니야.
* * *
피이... 푸딩한테 졌어.
팝콘도 열심히 아빠 신부 데리고 오는데, 푸딩이 엄청난 걸 가져와서 져버렸다.
피이... 피이....
푸딩은 매우 슬퍼졌다.
아빠랑 아이들이 그렇게 기뻐하다니.
하지만 신부가 도착했을 때의 마을 사람들 얼굴이 떠오르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때는 모두가 굉장히 기뻐했다.
아빠도, 마을 사람들도 모두 신부한테만 시선을 줬다는 걸 팝콘은 안다.
"핏!"
아빠 신부를 데리고 오면 푸딩의 벌레랑 두더지보다 훨씬 기뻐할 거다.
분명히.
새싹도 그렇게 말했으니까.
아빠가 행복할 거라고.
"핏!"
좋아! 힘내서 아빠 신부 데려오는 거야!
* * *
분명 말은 마을인데 도착한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집은커녕 천막조차 없다.
아직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에는 드문드문 돌을 고르다 만 듯 보이는 곳이 있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멀리 물건을 쌓아놓은 장소가 보였다.
저게 지원받은 물건이라고 옆에 있던 신부가 작은 소리로 말해주었다.
너무 두려워서 뭐라도 말해야 했던 것 같다.
숨듯이 마그리트한테 붙어 있던 신부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행상인은 어떤 마을에 가게 되는지, 그 마을에는 몇 명의 신부가 있는지, 사람은 몇 명 정도인지 대강의 정보를 미리 알려주었다.
이 마을에서 내리는 신부는 한 명.
바로 그녀였다.
마그리트는 떨리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눈이 마주치자 신부가 울 것처럼 미소 지었다.
행상 마차와 수레가 안으로 들어가면서 사람들이 이쪽으로 몰려왔다.
백 명은 안 되지만 오십은 충분히 넘을 것 같다.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뿐이다.
'이 마을에도 두 명의 신부가 있다고 했는데.'
그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녀들의 모습을 보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여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왠지 밉살스러운 행동만 하던 안네가 속삭이듯 말했다.
"저기, 저기 구석에 있는 거 여자 아니에요?"
그녀 말에 짐 쌓인 곳을 보자, 여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몸집 작은 걸 보면 여자 같지만, 얼굴이나 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위아래로 긴 포댓자루 같은 걸 입고 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설마... 진짜 저 사람이 이곳의 신부일까.'
다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한 명뿐이다.
포댓자루로 가려진 발밑에 밧줄 같은 게 있었다.
어쩌면 발이 묶여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보니 확실히 저 사람은 여자인 것 같다.
멀리에서, 그것도 짐에 가려 형체만 얼핏 보일 뿐이지만 이곳의 여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대강 알 것 같았다.
"시, 싫어, 여기는 싫어요."
신부가 작은 소리로 울면서 머리를 저었다.
그러나 수레 안에 있는 여자 중 뭔가 말해줄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남은 신부가 갈 곳 역시 똑같을 테니까.
어쩌면 더 심한 마을에 갈 수도 있다.
마그리트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손만 꽉 잡았다.
신부도 손아귀에 힘을 준다.
아플 만큼 강해진 힘이 그녀의 비명 같았다.
행상인이 마차를 멈추자 켄손이 신부들 수레로 왔다.
사람들이 이미 몰려와 주위는 시끌벅적해졌다.
"가급적 얼굴을 보이지 말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요. 몇 가지 일만 한 뒤에 곧바로 출발할 테니까 내려오지 말구."
켄손이 사방을 보며 소리를 줄여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마그리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켄손은 조금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보았다.
행상인들이 이쪽으로 와 수레의 걸쇠를 풀었다.
수레는 네 개의 벽으로 되어 있는데 걸쇠를 풀면 뒤쪽 벽이 밖으로 열리게끔 되어 있었다.
행상인 형이 마그리트 옆의 신부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내리세요."
"...."
신부는 움직이지 못한 채 울기만 했다.
어쩔 수 없이 행상인이 손을 내미는데, 덩치가 산만 한 털투성이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어서 오쇼. 그 여자들이 우리 마을 신붑니까."
이 남자가 촌장인 모양이다.
남자가 수레의 신부를 핥는 것처럼 차례차례 보았다.
마그리트는 여자들 사이에 숨듯이 고개를 내렸다.
머리에 쓴 헝겊은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깊숙이 눌러썼다.
겨우 눈만 나온다.
그래도 불안해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옆에 있던 신부가 작게 흐느꼈다.
겁에 질렸는지 숨소리가 불규칙하다.
켄손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이 마을 신부는 한 명이에요."
켄손 말에 털북숭이 촌장의 얼굴이 험하게 변했다.
"뭐, 남자가 이렇게 많은데 여자 한 명이라구? 장난합니까?"
다른 남자들이 가까이 몰려와 항의한다.
"진짜 너무 하잖습니까."
"누구 코에 붙이라고 한 명이요?"
"적어도 세 명은 주고 가세요."
"그렇지. 아홉 명이나 있으니 세 명 정도는 줘도 되잖아."
남자들이 수레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이러다 정말 여기에서 여러 명 내리는 건 아닐까.
신부들이 서로 몸을 붙이고 오돌오돌 떨기 시작했다.
"닥쳐요! 계속 씨부렁거리면 한 명도 안 주고 가버릴 테니까."
켄손이 큰 소리로 말하자, 남자들이 투덜거렸다.
"우리가 와서 이렇게 열심히 땅을 일궈주는데 보람이 없잖아."
"빌어먹을. 어디 갈 수도 없는데 이런 곳에 코 박고 오른손이랑 영원히 살라는 거야, 뭐야."
"진짜 너무하네."
촌장이 이마에 주름을 잔뜩 지은 채 말했다.
"계약이 있는데 당신 마음대로 그러면 안 되지. 아무리 관리라고 해도 우리가 중앙에 꼰지르면 당신 좇 되는 거야."
"하아, 이봐요, 촌장. 촌장이 되니까 뭔가 유식한 사람이 됐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계약서에 여자 얘긴 없어요."
켄손 말에 촌장 얼굴이 더 험악해졌다.
"뭐? 우리가 무식하다고 막 말하는 거야, 뭐야."
촌장이 윽박지르듯 말하는데, 옆에 있던 남자가 황급히 촌장에게 속삭였다.
촌장이 그 남자의 귓속말을 듣더니 켄손을 향해 허허 웃는다.
"뭐, 내가 그건 착각했수다. 하지만 관리 어른, 이렇게 남자가 많은데 여자 한 명은 너무하잖소."
촌장 말에 켄손이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지금까지 그런 천박한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
"너무하고 뭐고, 내 생각 같아서는 한 명도 안 주고 싶어요. 밭 만들라고 돈 주고 물건 주고 신부까지 데려다주는데 이건 뭐, 밭이 만들어지기를 하나, 집이 지어지고 있나. 마을이 전혀 형성 안 되잖아."
"그, 그건."
"게다가 지난번에 보낸 신부는 어디 있어요? 내가 말했지요? 신부는 소중히 하라고. 신부가 어디 땅 파면 나오는 밭작물인 줄 알아요?"
"그러니까 그게... 여자는 워낙 몸이 약하고...."
"그래서 소중히 하라는 거 아닙니까."
촌장 기세가 누그러지면서 슬그머니 몇 발 뒤로 물러서는 남자들이 생겼다.
"그게,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우리가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라는 거 알잖습니까."
촌장은 그렇게 말하며 수레 위를 보았다.
"정 그러면 조금이라도 예쁜 여자를 주세요."
그 순간이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마그리트를 홱 밀었다.
뒤에 있던 여자는 분명 안네였을 것이다.
마그리트는 열린 수레 밖으로 굴러떨어졌다.
그 바람에 머릿수건이 벗겨져 백금색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흩어져 쏟아졌다.
허둥지둥 수건을 주워 머리에 올렸지만 늦었다.
방금까지 시끄럽던 사방이 어느새 숨소리 하나 안 날 만큼 조용해져 있었다.
"뭐, 뭐야, 이 여자는."
"이 여자도 신부인가."
"어차피 한 명이라면...."
남자들 분위기가 확 바뀐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 작가의말
240701 오타를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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