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그 정령이 마그리트 머리카락을 꼭 붙든 채 쿨쿨 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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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 그 정령이 마그리트 머리카락을 꼭 붙든 채 쿨쿨 자고 있었다
한동안 달리던 마차가 멈췄다.
'무슨 일일까. 아직 식사나 휴식을 취할 시간도 아닌데.'
이상하게 생각하고 창밖을 보자, 마차는 한적한 길 가운데에 서 있었다.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냥 평범한 길이다.
어쩌면 앞에 장애물이 있나 싶어 마그리트는 마차 문을 열었다.
혼자 치울 수 없는 물건도 있고, 만일 그런 게 있으면 도와야 한다.
마그리트가 막 마차에서 내리려는데, 마부가 모자를 벗은 채 가까이 와서 섰다.
"아가씨, 이제 조금만 있으면 도착합니다. 한 시간도 안 걸릴 거예요."
"아...."
거의 다 왔다는 말은 어제 들었다.
그래도 저녁까지는 가야 할 줄 알았는데 벌써 도착할 무렵이구나.
마부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기... 아직 일정에는 여유가 조금 있습니다. 원래 도착하려던 시간보다 며칠이나 일찍 왔으니까요."
병사들이 없다 보니 잡다하게 보내는 시간이 줄었다.
정령 덕분인지 길이 좋았던 것도 시간이 단축된 이유였을 것이다.
정령이 함께 있으면 운이 좋아진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조금만 길을 틀면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마을은 아니지만 행상인들이 들러서 쉬거나 물을 보충하거나, 뭐, 그런 데거든요."
마부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 사람들한테 병사들 몫의 음식이나 술 같은 걸 팔면 돈이 좀 될 겁니다. 그걸로 하루 정도 거기서 쉬셔도 되고, 그냥 갖고 계셔도 되고..."
마그리트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사람은 끝까지 친절하다.
아무리 정령 때문이라 해도 그냥 곱게 데려다주는 걸로 좋았을 텐데.
"감사합니다."
마그리트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물건을 처리해서 나오는 돈은 당신이 가지세요."
"하지만 아가씨, 제가 그곳 사정은 잘 몰라도 뇌물이 필요할 겁니다."
"오라버니가 챙겨 주셨으니까 정말 괜찮아요."
마그리트 말에 마부는 잠시 머뭇거리다 깊이 고개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놔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은 벌써 몇 번이나 들었다.
마그리트는 한 마디 한마디에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당신에게 정령의 축복 있기를."
"...."
마부는 다시 깊이 고개 숙인 뒤 마부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대략 40분가량 달린 뒤 마그리트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 * *
켄손은 일 년 열두 달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만큼 항상 바쁘다.
개척지로 결정된 장소는 정말 광활하게 넓은데 그걸 모두 한 사람, 그가 관리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혼자 그 넓은 땅의 마을을 모두 관리할 수는 없고 밑에 사람을 두었다.
그걸 감안해서 월급과 약간의 보조금 외에 개척지에서 나오는 수입의 일부를 그가 갖는다.
얼핏 들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지만 문제가 있다.
아주 많다.
개척 마을의 수익이라는 것이 정말 코딱지에 붙은 먼지보다도 적은 것이다.
개척지 사업이 1, 2년 된 것도 아니니 슬슬 수익 나는 마을이 생길 법도 한데 굶어 죽고 먹혀 죽고, 어쨌든 사람이 죽는 곳만 늘어났다.
땅을 일구는 것도 힘들지만, 마수와 짐승투성이인 곳에서 살아남는 건 더 어렵다.
툭하면 늑대한테 아이가 잡혀가고 마수가 침입해서 마을 사람을 잡아먹었다.
마을과 사람의 수가 늘어나지 않는다.
계속 공급해도 줄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고정 비용이 나가는 사용인을 많이 고용하기는 어렵고, 별수 없이 켄손은 행상인과 길드를 이용해 개척 마을을 운용했다.
사람을 모아 개척 마을까지 데려다주는 모집책들의 수수료는 원래 켄손이 모두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걸 약간 떼주는 거라서 켄손은 항상 돈이 모자라다.
물론 시간도.
하루빨리 개척 마을이 늘어나고 사람도 늘어나고 그래서 수입도 늘어야 할 텐데.
'그래도 그 마을은 괜찮겠지.'
최근 생긴 마을을 떠올리고, 켄손은 빙그레 웃었다.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그 마을의 작은 정령은 정말 귀엽다.
주위에서는 모르지만 켄손은 정령을 보는 사람이다.
남들보다 훨씬 뚜렷하게 잘 보였다.
내로라하는 마법사 중에서도 아마 켄손만큼 잘 보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의 능력은 보이는 것뿐이다.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법을 할 수도, 정령과 대화하지도 못한다.
정령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그가 볼 수 있다고 알아도 정령은 그에게 관심이 없다.
정령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아마 영혼에 특별한 뭔가를 가지고 있을 거다.
보지도 못하면서 정령에게 사랑받는 사람을 드물게 만나는데, 켄손은 그때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부럽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보이는 만큼 더 부러웠다.
그래도 질투 같은 건 없었다.
정령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매우 보람 있는 거라고 알기 때문에.
정령이 풀에서 뒹굴고, 물방울에 갇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켄손외에 아무도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그의 인생은 특별한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더욱 자기가 특별하다는 걸 안다.
켄손은 새로이 생긴 개척 마을의 촌장을 떠올렸다.
그 마을에 도착하기 전부터 정령들이 그 근처에 모여 있었다.
그래서 아, 이 마을에 뭔가 있구나 생각은 했다.
특별한 게 있다고 알았지만, 설마 그런 사람이 있을 줄이야.
정령이 그렇게 사람을 따르는 건 처음 보았다.
'분명 그 촌장의 영혼이 매우 특별한 거겠지.'
그 남자와 귀여운 정령 사이에 오가는 교환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켄손의 인생은 매우 특별하다.
'그 정령도 분명 보통 정령은 아닐 거야.'
다른 정령이 그 앞에 나서지도 못할 만큼 삼간다.
분명 고위 정령이거나 뭔가 특별한 힘을 가진 걸 거다.
'대체 그 정령의 정체는 뭘까.'
그걸 생각하는 게 요즘 켄손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여기가 왕도나 큰 도시였다면 또 다르겠지만, 오락거리라고는 공터에서 똥싸다 남한테 들켜 웃는 것 정도밖에 없는 곳이다.
정령에 관해 알아보거나 고민하는 건 꽤나 유용한 시간 활용법이었다.
문득 전에 만난 노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에는 정령이 꽃이나 나무, 때로는 공기 중에서도 태어났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요. 하지만 정령왕이 죽은 뒤로 새로운 정령은 태어나지 않는다더군요.]
어쩌면 정령왕이 이 세계에 태어난 건가.
그래서 새로운 형태를 가진 정령이 나타났나?
아니면 성녀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그 작은 정령이 정령왕이려나.
'... 아니, 이건 아무리 심심했어도 너무 나갔지.'
켄손은 어깨를 움츠렸다.
정령왕이라는 게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그렇게 작은 정령이 왕 같은 걸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 정령왕이라고 하기엔 그 정령이 너무 작고 귀엽지.
'정령왕이라면 뭔가 거룩한 형태일 거야.'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모습의 정령이라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한 것이다.
켄손은 잠시 웃다 이내 길게 한숨 쉬었다.
일하자.
일이 산더미같이 밀렸다.
문득 켄손의 시선이 책상 한 귀퉁이 놓인 작은 나무 상자를 향했다.
개척 마을의 촌장 인장이다.
하인이 갖다 놓은 모양이다.
'드디어 왔군.'
개척지는 모두가 새로 만들어지는 마을이라서 촌장 인장도 없다.
마을이 하나 서면 그때마다 인장 만드는 장인에게 의뢰해서 하나씩 만들고 있었다.
개척 마을의 촌장은 정식 관리는 아니어도 준 관리 정도의 위치다.
그들이 만드는 신분 증명서나 혼인 서류는 대부분의 도시, 마을에서 공신력을 가진다.
아무나 촌장인 척 서류를 만들어도 곤란하므로 그들에게는 촌장 인장이 지급되었다.
촌장한테 지급되는 인장은 밀랍으로 본뜬 견본이 있어서 켄손과 왕국이 각자 하나씩 보관한다.
켄손이 상자를 챙기는데 하인이 허둥지둥 들어왔다.
"주인님, 왕도에서 죄인이 도착했습니다."
"아니, 죄인이 왜 여기에 와."
또냐.
켄손은 시큰둥하게 반응한 뒤 한숨 쉬었다.
이 나라 관리는 대체 개척지를 뭐로 생각하는지 툭하면 죄인을 보낸다.
그놈들 생각에는 사람이 없는데 보내주면 고마워할 줄 아는 모양이지만, 이쪽에서는 정말 처치 곤란이다.
이쪽에 보내지는 죄인이라고 하면 대부분 살인, 강도, 도적단, 그게 아니면 정치범이나 썩은 귀족이다.
그런 놈들은 어느 마을에 보내도 말썽만 일으키고 제대로 농사짓지 않았다.
모조리 다 죄인을 이쪽으로 보낸 놈한테 되돌려주고 싶다.
'그렇게 할 수 없지만.'
이쪽에 죄인 보내는 놈들은 대부분 켄손보다 고위 관리거나 신분이 좋은 사람들이라 주면 주는 대로 받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짜증 난다.
하인이 머리를 흔들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 그게, 개척 마을의 신부라고 하는데요, 엄청난 미인이에요. 저는 머리털 나고 그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
아니, 이놈의 하인이 너무 휑하고 심심한 곳에서 살다 보니 이제는 헛것이 보이나.
그렇게 예쁜 여자가 이런 곳에 올 리 없잖아.
죄인이라고 해도 하인 말처럼 예쁘다면 대부분 중간에서 빼돌린다.
누군가의 숨은 애인이 되거나 창관에 팔리기 십상이었다.
개척 마을의 신부로는 보내지지 않는다.
"진짜예요! 엄청나게 예쁜 여자가 왔어요. 제가 미친 게 아닙니다."
뭐, 정 그렇게 말한다면 정말로 보통 여자가 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주 조금 예쁜.
하인이 말하는 걸 귓등으로 들으며 켄손은 어슬렁어슬렁 밖으로 나갔다.
이곳은 개척지 때문에 새로 지어진 집으로 작다.
으리으리한 귀족 저택과는 달라서 방 몇 개뿐이므로 조금만 나가면 곧바로 밖이었다.
문을 열고 한발 밖으로 디디다 말고 켄손의 동작이 딱 멈췄다.
"...."
눈이 잘못된 것 같다.
정말 너무 휑한 곳에서만 있어서 헛것이 보이나.
정령이 떼거리로 몰려와 있었다.
죄인이 왔다고 들었는데 웬 정령이야.
평소에는 정령을 봐도 모른 척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건 무시하기가 어렵다.
몇백은 족히 되는 정령이 한 명의 여자를 둘러싼 채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멍청하게 서 있는 켄손을 향해, 평민 옷을 입은 정말 예쁜 여자가 정말 정말 완벽한 절을 했다.
"처음 뵙습니다. 마그리트라고 합니다."
귀족이다.
그것도 엄청난 고위 귀족 아가씨.
켄손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이 정도로 완벽한 예절과 동작은 본 적 없었다.
아무리 못해도 상위 백작가, 아마 공작이나 후작가 정도는 될 거다.
가문 명을 대지 않은 건 아마 죄인으로 이곳에 왔기 때문이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켄손의 머리에 마그리트라는 이름이 한 박자 늦게 박혔다.
'어... 어라... 마그리트? 혹시....'
얼마전 왕도에 사는 지인에게 받은 편지가 떠올랐다.
1왕자의 약혼녀가 엄청난 악녀로 성녀를 적대시한다는 이야기였다.
그 악독한 약혼녀가 마그리트라는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개척지에 있는 켄손은 정보가 손에 들어오는 게 느리다.
편지를 받은 게 벌써 한 달 가까이 되니 그새 뭔가 사건이 생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왕자의 약혼녀가 이런 곳에 죄인으로 올 리 없는데.'
아무리 악녀니 뭐니 해도 기껏해야 약혼 파기 정도일 것이다.
거기다 정령이 이렇게 몰려와 있다니, 뭔가 이상하다.
켄손이 멍하니 서 있는데 마부가 가까이 다가와 밀랍으로 봉인된 서류를 내밀었다.
"원래는 호송하는 병사가 두 명 있었는데 도중에 짐승의 습격으로 죽었습니다."
서류의 밀랍은 왕가의 문장이었다.
진짜 이 여성이 왕자의 약혼녀였던 마그리트가 맞는 모양이다.
'왕가가 미쳤나. 이렇게 정령을 이끌고 다니는 사람을 죄인으로 보내다니.'
켄손의 형님도 보는 사람이었다.
마법이나 다른 능력은 없이 오직 보는 것만 가능한, 어떻게 보면 별 쓸모없는 능력을 가졌다.
한데 그 별거 아닌 능력 때문에 형님은 왕가에 끌려가 죽었다.
말은 입양이었다.
왕족의 피를 끄는 가문에서 입양하고 싶다고 해, 부모님도 처음에는 좋은 일이라 생각하고 흔쾌히 보냈다.
왕가는 형님의 정령 보는 능력을 조금 더 개발하려고 했던 것 같다.
정확한 건 모른다.
그 능력을 이용해 정령을 부르려고 했는지, 그게 아니면 정령을 찾아내려고 했는지, 아는 건 형님이 실험당하다 결국 그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버지가 뒤늦게 그걸 알고 형님을 구하려고 했지만 이미 입양으로 공적인 인연이 끊긴 터라 불가능했다.
그 일이 있은 뒤 아버지는 켄손이 정령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왕가는 전혀 모른다.
만일 알았다면 아마 켄손도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 끌려갔을 것이다.
'그렇게 정령에 미친 왕가가 이 여자를 손에서 놓았다고?'
그건 정말 이상한 일 아닌가.
문득 켄손의 시선이 마그리트 머리카락을 향했다.
"...."
그 정령이다.
개척 마을의 촌장과 함께 있던 귀여운 정령.
팝콘이라는 이름의 정령이 마그리트 머리카락을 꼭 붙든 채 쿨쿨 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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