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이건 아빠 선물이야, 피피
#045 이건 아빠 선물이야, 피피
팡!
뭔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병사가 뒤로 날아갔다.
바닥에 떨어진 병사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히... 히이... 맙소사... 정령... 정령이다....."
새한테 코를 물린 병사가 뒷걸음질 쳤다.
"피피피피피피피피!"
정령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병사한테 돌진했다.
병사는 급히 몸을 돌리고 뛰었지만, 정령이 훨씬 빠르다.
"맙소사."
마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마그리트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작은 정령 주위에 공기가 몰려와 거대한 막을 형성한 것처럼 보였다.
공기에 정령의 반짝거리는 빛이 묻은 것 같다.
캄캄한 밤 허공이 은가루 두른 듯 반짝이는 둥근 막으로 가득 찼다.
둥근 막은 정령과 함께 앞으로 달려갔다.
거대한 반원의 공기막이 정령과 함께 날아가 부딪치자, 병사는 거인 손에 맞은 개미처럼 날아갔다.
멀리, 꽤 멀리.
정령은 두 병사에게 날아가 한 번 더 공기막을 부딪쳤다.
이전에 왕궁에서 보았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이번엔 정령이 진짜 화가 났던 것 같다.
이렇게 힘이 강한 존재였던가.
그저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귀여운 정령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마그리트는 이 정령에게 너무 무례했던 게 아닐까.
다른 정령보다 더 고귀한 존재일 게 분명한데.
조금 두려워졌다.
그때 작은 새가 뒤뚱거리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작은 몸으로도 굉장히 빠르다.
'아, 그렇지. 저 아이는 계속 정령을 기다리고 있었지.'
만나서 기쁜 걸까 생각했다.
하지만 작은 새는 병사들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달려가더니 훌쩍 그 위에 올라갔다.
그리고 빙빙 돌며 요란하게 날갯짓한다.
삐, 삐이, 삐, 울음소리까지 크게 지르면서.
"...."
어쩌면 저 작은 새는 정령이 쓰러뜨린 병사를 자기가 잡은 셈 치는 걸까.
"풋!"
마그리트는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던 모양이다.
정령이 빙글 허공에서 몸을 돌렸다.
피이?
고개를 갸웃하며 정령이 소리 내자, 방금까지 있던 거대한 공기막이 환상처럼 사라졌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다.
"피피피피피피피."
정령이 날개를 파닥거려 그녀에게 날아왔다.
품에 뭔가를 안고 있다.
그게 조금 궁금했지만, 마그리트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내밀었다.
정령이 손바닥에 올라오자,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령님. 벌써 두 번이나 구해주셨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피피?"
정령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피피, 소리 내면서 다시 반대편으로 고개를 갸우뚱, 또 갸우뚱한다.
그녀의 행동이 평소와 다르다고 이상해하는 것 같다.
정령은 무릎 꿇고 공손히 대하는 걸 싫어하는 모양이다.
왠지 마그리트도 이상해졌다.
고귀한 존재이니 그만큼 정중히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볼 만큼 본 사이잖아.
후후, 웃자, 그녀 웃음에 정령도 기뻐졌는지 팔딱팔딱 뛰면서 빙글빙글 돌았다.
병사 위에서 춤추듯 돌던 작은 새가 이번에는 또 부리나케 이쪽으로 달려왔다.
"삐! 삐! 삐! 삐약!"
예쁜 금색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났다.
'... 금빛 눈....'
지난번에도 생각했지만 이 새의 눈은 굉장히 특이하다.
마치 태양 가루가 눈동자에 뿌려진 것 같다.
문득 어디에선가 이런 눈에 관한 이야기를 본 듯한 생각이 들었다.
왕족이 되기 위해서라며, 교사들은 마그리트에게 왕족조차 공부하지 않는 걸 많이 밀어붙였다.
왕비의 지시였을 것이다.
거기에는 정말 별 쓸데없는 것도 많아서 마그리트는 반 정도는 그냥 한쪽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렸다.
그래도 마수에 관한 이야기는 재미있었기 때문에 그런 건 제대로 들었는데, 그게... 그러니까 아마....
'어.'
마그리트는 정령을 따라 이리 가고 저리 가는 작은 새를 보았다.
'불타는 듯한 붉은 깃털과 금색의 눈....'
그건 불사조에 관한 이야기였다.
지금의 이 새는 주홍색 깃털이니 아주 조금 다르지만, 아기 때와 성조의 색이 다른 경우는 종종 있다.
'아니, 아니지. 설마.'
정령도 희귀하지만 불사조는 전설의 새라고 할 만큼 드물다.
진짜 봤다고 하는 목격담은 모조리 몇백 년 전 케케묵은 옛날이야기라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그리트 역시 만일 실존했었다 해도 예전에 모두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불사조일 리가 없어.'
그런 새가 이런 곳에 돌아다닐 리 없다.
비록 정령과 함께지만, 그렇지, 전설의 새인걸.
마그리트는 작은 새를 안아 들어 정령과 나란히 둔 채 말했다.
"나를 구해줘서 고마워, 꼬마 새야. 네 덕분에 남자들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어. 정령님도... 다시 한번 고마워요."
마그리트가 감사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정령과 작은 새가 기쁘게 피피, 삐삐 소리 내며 몸을 흔들었다.
"그런데, 정령님, 품에 안은 건 뭐예요?"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묻자, 정령의 몸이 빛가루 뿌리듯 반짝반짝 빛났다.
이전에는 이렇게까지 빛가루가 요란하지 않았는데 그새 굉장히 많아졌다.
게다가 더 밝아진 것 같아.
어쩌면 공기막을 펼친 것과도 관계가 있을까.
'정령도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크거나 강해지는 건가.'
정령인데.
마그리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인간처럼 정령이 성장한다면 왠지 이상할 것 같다.
마그리트를 따라 정령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걸 새까지 똑같이 따라 하는 게 너무 귀여워, 마그리트는 작은 소리로 웃었다.
"핏!"
생각났다는 듯이 정령이 동그란 몸을 파르르 떨고 품에 든 걸 내밀었다.
"나한테 주는 거예요?"
"피피피!"
눈을 빛내며 쭉 내미는 걸 보면 마그리트에게 주는 게 맞는 모양이다.
정령이 내민 건 동그랗게 말린 꽃잎이었다.
아주 작다.
꽃잎은 가느다란 풀 같은 걸로 빙글빙글 감겨 있었다.
어쩐지 선물 포장을 한 느낌이다.
정령을 보자 두근두근하는 표정으로 마그리트를 보고 있었다.
진짜 선물인가.
정령과 함께 같은 손에 올라가 있던 작은 새도 왠지 모르게 눈을 빛내며 마그리트를 보았다.
이쪽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정령을 따라 한 느낌이지만, 음, 어쨌든 선물이라면 줄을 풀어야 할까.
조금 헤매다 마그리트는 길게 늘어진 줄을 잡았다.
"피피피피피!"
정령의 얼굴이 파아아, 소리 내는 것처럼 밝아졌다.
역시 이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줄을 살짝 당기자, 꽃이 피는 것처럼 활짝 잎이 열렸다.
"신기하네요."
마그리트 말에 정령이 재촉하는 것처럼 피피 울었다.
들고 있던 꽃잎을 더욱 앞으로 내민다.
꽃잎 위에는 작은 물방울이 하나 놓여 있었다.
"피피피!"
정령이 기대하는 것처럼 마그리트를 본다.
꽃잎이 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저 포장지였나 보다.
'이걸 먹으라는 걸까.'
꽃잎을 들어서 입가로 가져가 반응을 보자, 정령은 두 손을 맞잡은 채 기대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역시 먹으라는 거구나.
꽃잎을 살짝 흔들자 작은 물방울은 마그리트 입으로 떨어져 혓바닥에 닿았다.
"...."
정령이 준 거라 달콤하거나 청량한 느낌을 기대했는데, 생각한 것과는 다르다.
조금 짭짤한 느낌이 드는 그냥 물방울이었다.
하지만 마그리트가 그걸 먹는 순간, 정령은 마치 일생의 큰 행복을 만난 것처럼 요란하게 울면서 기뻐했다.
두 팔을 들고 빙글빙글 돌며 춤춘다.
작은 새도 따라서 빙글빙글 돈다.
작은 새의 짧은 날개가 손처럼 삐죽 허공으로 올라가 있었다.
귀엽다.
둘 다 정말로 귀엽습니다.
"선물 감사합니다. 뭔지 잘은 모르지만."
마그리트 말에 정령이 두 팔을 들고 돌다 멈췄다.
그리고 가슴을 삐죽 내밀고 왠지 엉덩이를 옆으로 내민다.
이상한 포즈로 선 채 정령은 마치 자랑하는 것처럼 피피 울었다.
그 옆에서 작은 새도 그 행동을 따라하는 바람에 갸우뚱해졌다.
아직 균형 잡는 게 힘든지 작은 새는 옆으로 넘어졌지만, 그래도 포즈는 유지하고 있었다.
작은 소리로 웃는데, 왠지 기분이 오른다.
지금이라면 정말 좋은 비를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내 비는 정령이 좋아하니까.'
어쩌면 도와준 답례도 되지 않을까 하고 마그리트는 작게 주문을 외웠다.
마그리트 주변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정령과 작은 새는 더욱 기뻐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날아가 비를 맞으며 돌아다닌다.
잠시 그렇게 하고 있는데 멀리에서 뭔가가 반짝거리며 날아왔다.
나비, 벌, 손톱보다 작은 새, 그런 형태의 정령이 수십 정도.
'맙소사.'
그녀는 정령을 빛의 형태로 인식한다.
이렇게 정확하게 본 적이 없었다.
한데 지금은 각기 다른 모두의 모습이 보인다.
게다가 평소보다 비를 내리는 게 많이 쉽다.
정령이 비에 다가오는 것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물방울을 먹은 덕분인가.'
이런 신기한 힘이 있다니, 정령이 준 물방울은 대체 뭐였을까.
다른 정령들이 삼가듯 빗속으로 다가오지 않자, 마그리트의 솜털 정령이 피피 울었다.
그게 허락이었는지, 다른 정령이 마그리트의 빗속으로 들어와 부드럽게 날아다녔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서 우아한 빛이 흔들린다.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건 태어나서 처음.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
몇몇 정령이 이끌린 것처럼 마그리트에게 날아와 머리에 앉았다.
감촉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작은 손이 마그리트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나비나 벌처럼 보여도 정령에게는 손이 있다.
마그리트의 특별한 정령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정령에게도 손과 발이 있었다.
처음 알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령이 더욱 모여들었다.
마치 정령의 축제가 열린 것처럼.
수많은 정령이 서로 어울려 날아다니는 모습은 환상처럼 아름다웠다.
* * *
마부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
때때로 뇌물을 받기도 하고 거기에 따라서 대우를 달리하는 일도 있다.
마부에게 뭔가 할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죄수에게는 요강을 비우거나 물을 공급하는 작은 일조차 생명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죄수 호송은 짭짤한 부수입이 된다.
병사들처럼 가끔은 여자한테 손대는 일도 있었다.
성자가 아닌 거야.
그래도 이번 일에 가담하지 않으려 했던 건 따로 비밀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출발하기 전, 그의 상관은 이 여자에게 혹시 정령이 찾아오는지 지켜보고 나중에 보고하라고 했다.
병사가 아닌 그에게 명령한 건, 아마 잡다한 일을 하느라 여자 주위를 더 자주 살피는 게 마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강 처리나 물 공급 외에 마차에 있는 짐을 올리고 내리고 풀거나 묶어 안에 쌓아두는 것도 마부의 일이다.
아무래도 병사보다는 여자를 더 잘 볼 수 있다.
정령을 확인하라는 것 외에 딱히 다른 말은 없었다.
여자 몸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든가, 다치지 않게 하라든가, 그런 당부 한 마디 없었던 걸 보면 윗사람들은 이 여자가 어떻게 돼도 좋았을 것이다.
아니, 호송하는 병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를 상관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하라는 소극적인 허락이었을지도 모른다.
귀족 여자가 그런 일을 당하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을 텐데.
어쩌면 망가지기를 바랐나.
귀족 아가씨의 호송에는 원래 더 괜찮은 병사가 붙는다.
그런데도 일부러 시정잡배 같은 놈들을 불러 맡긴 걸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이 여자는 어지간히 윗사람들에게 눈엣가시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마부가 능욕에 가담하지 않은 건 정령이 올지 모른다는 그 한마디 때문이었다.
만일 정말로 정령이 찾아온다면 그런 사람은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알았으니까.
그 선택은 옳았다.
마부는 바닥에 넙죽 엎드려 정령과 그 가운데에 있는 여자에게 절했다.
잘은 모르지만 주위에는 다른 정령도 있을 거다.
마부에게는 보이지 않아도 여자가 가끔 시선을 돌리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누가 들어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여자의 머리카락이 몇 가닥씩 허공에 떠올라 있는 걸 보면 여기에 있는 정령은 분명 한둘이 아닐 거다.
'맙소사.'
이 나라 높은 분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어째서 이토록 정령에게 사랑받는 여자를 죄인으로 만들어 개척마을 따위에 보내는 거지.
왠지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마부는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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