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너, 나 보이지? 피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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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 너, 나 보이지? 피핏?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것 같은데 새벽부터 뚝딱뚝딱 망치로 못 치는 소리가 울린다.
조금 더 자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켄손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뒤 밖으로 나가자 밖은 여전히 캄캄했다.
하인이 횃불대에 횃불 하나를 꽂은 채 어두컴컴한 데서 창문에 못을 치고 있었다.
작은 새 때문에 구멍이 난 곳이다.
"주인님, 일어나셨습니까."
"이른 시간부터 수고하네."
"오늘은 행상이 오는 날이니까요. 할 일은 빨리빨리 처리해 둬야지 안 그러면 나중에 제가 힘들어요."
하인이 해맑게 웃었다.
부지런한 사람이다.
이 하인과 그의 아내가 이 집안의 거의 모든 일을 한다.
원래 요리장은 남자가 하는 일이지만 이 집에서는 그의 아내가 요리장이다.
처음에는 이곳까지 오겠다는 요리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부인은 정말 요리를 잘한다.
"어제는 괜찮았나?"
"... 그게... 정말 생기가 완전히 빨릴 때까지 시달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두운데도 알 만큼 하인 얼굴이 퍼렇다.
"쯧쯧, 자네가 예쁜 여자 왔다며 소란 피울 때부터 이럴 줄 알았지."
하인의 아내는 은근히 질투가 심하다.
행상인이 개척마을의 신부를 데려올 때 어쩌다 하인이 그녀들을 칭찬하거나 관심을 보이면 다음 날 하인의 얼굴이 반쪽이 되곤 했다.
그의 아내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밤일이 치열해진다고 한다.
다른 여자한테 신경 쓰기는커녕 눈도 돌리기 어려울 만큼 힘쓰게 한다고 들었다.
어제 마그리트가 예쁘다고 난리를 쳤으니 이렇게 되는 건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오늘은 행상인이 신부들을 데리고 오기로 되어 있으니 더욱 밤이 힘들 거다.
게다가 오늘 켄손이 떠나면 이 저택에는 아무도 없다.
오늘 하인은 모르긴 해도 반 죽는다.
그걸 감안해서 하인도 미리미리 일을 처리해 두려는 것이다.
아내 엉덩이에 깔려 살아도 하인은 행복한 모양이다.
퍼런 얼굴로 헤헤 웃으며 다시 못질하기 시작했다.
하아, 나도 행복하고 싶다.
켄손은 작게 한숨 쉬었다.
잠시 이런저런 일을 하는 동안 마그리트에 관해서는 신경 쓰지 못했다.
오늘 출발하기 전까지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해가 높이 떠 정오가 될 무렵까지 정신없이 일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하인은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고개를 들자 문이 열리고 마그리트가 들어왔다.
"식사 준비가 다 됐습니다."
"아니, 마그리트 아가씨가 왜...."
"음, 공짜 밥 먹기가 좀 미안하기도 하고, 개척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요리하는 것도 좀 배울까 해서요."
"그럼 지금까지 주방에 있었습니까?"
놀라서 묻자, 마그리트가 방긋 웃었다.
"네, 요리장께서 굉장히 친절하시네요. 이것저것 가르쳐 주셔서 몇 시간 동안 많이 배웠습니다."
켄손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씩씩한 아가씨다.
엉뚱한 죄를 짓고 이런 곳에 노예로 와 불안할 텐데.
다른 귀족 아가씨라면 지금쯤 반미치광이가 되어 있을 거다.
원래 가난한 남작가 출신이라더니 어느새 예절이나 동작 면에서 힘이 많이 빠져 있었다.
하루 만에 평범한, 그리고 가난한 귀족 아가씨로 돌아간 모양이다.
'정말 씩씩한 사람이네.'
켄손은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그녀의 머리 위를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마그리트의 머리 위에서는 팝콘 정령이 엉덩이를 한쪽으로 삐딱하게 내민 채 빙글빙글 돌며 춤추고 있었다.
왜 그런 포즈로 춤추는지 전혀 모르겠다.
'다른 정령은 멀쩡하던데.'
그녀를 따라다니는 정령이 매우 많지만, 다른 정령은 다들 우아하게 날아다닌다.
저렇게 묘한 포즈를 하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정령은 없었다.
그러려고 하지 않았는데, 정말 애써 피하고 있는데 문득 팝콘 정령과 눈이 마주친 것 같다.
팝콘 정령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쪽으로 날아왔다.
여전히 삐딱하게 엉덩이 내밀고 춤추면서.
'안 보인다, 안 보인다, 나는 안 보인다.'
켄손은 주문처럼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먹으러 이동하는 짧은 시간 내내 팝콘 정령이 그의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며 춤추고, 가끔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너, 나 보이지?' 하고 묻는 것 같아 심장이 쫄깃해졌다.
안 보인다, 안 보인다, 나는 안 보인다, 전혀 안 보인다. 그러니까 그렇게 보지 마라.
식사를 마칠 무렵 행상인이 왔다.
짐 실은 마차 두 대에 신부들이 탄 수레가 하나 추가되어 있다.
이번 신부는 모두 여덟 명, 지난번보다 적다.
많이 적다.
분명 개척마을 남자들이 신부를 더 내놓으라며 난리 칠 거다.
"어쩐다."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는데 행상인 시선이 켄손 뒤쪽을 향했다.
마그리트를 보자 행상인 두 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두 명은 형제다.
그래서인가 똑같이 입을 떡 벌린 두 명의 얼굴은 상당히 비슷했다.
앞에 서 있던 형이 먼저 정신 차리고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켄손님, 드디어 첩을 들이셨습니까. 굉장히 아름다운 분이네요. 잘하셨어요. 여기가 정말 적적하죠. 혼자는 외롭습니다."
"무슨 소리요. 아내가 들으면 울어요."
그래, 켄손이 비록 여기에서 혼자 살고 있지만 아내가 있다.
그것도 굉장히 사랑스럽고 귀엽고 착한 아내가 있었다.
그녀 나이 열다섯 살에 약혼하고, 원래라면 스무 살이 되었을 때 혼인했을 텐데 켄손은 그 무렵 개척지 관리로 한창 일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 있으면서 혼인할 수도 없어서 일 년만, 일 년만 하며 미루다 그녀는 어느새 28살이 되었다.
중간에 그녀 가문에서 파혼하네 마네, 이러다 완전히 혼기 놓쳐 큰일나네 어쩌구 저쩌구 말이 많았다.
켄손 자신도 이대로는 그녀가 너무 불쌍해서 파혼할 생각을 했다.
그때만 해도 켄손은 그녀와 사이좋은 약혼자 정도의 감정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울면서 부모에게 애원했다고 한다.
수도원에 가게 되어도 좋으니 그냥 그 사람과 혼인하게 해달라고.
지참금이나 가문의 다른 사정도 있어서 결국 약혼은 유지되고 이대로는 정말 안 된다고 생각한 켄손의 부모님이 그녀 나이 스물여덟에 강제로 켄손을 불러 혼인했다.
이곳은 귀족 여성이 살 환경이 못 되어 지금도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산다.
그래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어떻게든 시간 내서 그쪽으로 가 지내고, 이제는 자식도 생겼다.
그러는 사이 정이 쌓이고 만나지 못하는 애틋함과 고마움이 사랑으로 변해 지금은 켄손도 그녀를 매우 아낀다.
그녀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이 적적한 생활에서도 여자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신부로 오는 여자도 얼마든지 손댈 수 있는 처지지만 눈도 안 돌린다.
그러면 아내가 슬퍼할 걸 아니까.
"엄한 소리 말아요. 이 여성은 개척마을 신부로 갈 사람이니까."
"엥?"
"예?"
행상인 형제가 동시에 이상한 소리를 냈다.
"켄손님, 제정신입니까?"
"저런 여자가 가면 하루도 못 버텨요."
"진짜 비참한 일이 될 겁니다."
그렇게 말하다 두 사람이 말을 멈추더니 아, 한다.
"그 마을이군."
"그 마을로 가는 거군요."
두 사람 역시 마그리트가 간다면 그 마을밖에 없다고 금방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래요. 좀 묻어갑시다."
켄손 말에 행상인 형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중얼거렸다.
"그건 괜찮지만."
"저 모습 그대로는 곤란하겠네요."
두 사람 말에 켄손은 마그리트를 보았다.
"확실히...."
개척마을에 들르면 모두가 여자한테 몰린다.
마그리트 혼자만 다른 곳에 태울 수도 없으니 난리가 날 거다.
'저 얼굴로 가면 진짜 큰일나겠군.'
개척마을 사람들은 거칠고, 도적이나 강도 살인하던 놈들도 많다.
마그리트를 데려가면 폭동이 날지도 모른다.
개척마을 사람 중에는 생각보다 먼저 욕심과 주먹이 나가는 놈들이 더 많으니까.
그들은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신부가 적으니 더욱 난리가 날 것이다.
하지만 어쩐다.
얼굴에 가면이나 주머니를 씌워 데리고 다닐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마그리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그러면 얼굴에 검댕을 좀 묻힐까요?"
"...."
"...."
"...."
그녀의 말에는 켄손과 행상인 두 명 모두 멍해졌다.
귀족 아가씨인데 검댕이라는 말을 아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걸 묻히겠다고 나서다니.
이 아가씨, 정말 특이하다.
"왠지 모르지만 그 촌장님하고 잘 어울릴 것 같네요."
행상인 동생이 중얼거리자, 마치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것처럼 팝콘 정령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설마 저 정령, 사람 말을 알아듣는 건 아니겠지.
* * *
인생, 한 발만 앞으로 나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거라고 아버지가 종종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렇다.
어머니가 가르친 검댕 묻히는 기술이 이런 곳에서 활약할 줄이야.
마그리트는 검댕을 군데군데 묻히고 문질러 얼굴이 꼬질꼬질해 보이도록 했다.
"피이? 피?"
왜 그런 걸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솜털 정령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피피... 피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정령이 작은 손을 불끈 쥐고 마그리트 얼굴로 날아왔다.
핏, 핏, 소리 내며 작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문지른다.
더러운 게 묻었으니 닦아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후훗, 간지러워. 그게 아니에요, 정령님. 이건 필요해서 하는 거예요."
마그리트가 웃으며 정령을 잡자, 다시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 손안에서 파닥파닥 움직였다.
마그리트 손에 검은 점 같은 게 생겨 보니, 어느새 검댕은 팝콘의 손에도 묻어 있었다.
"피피? 피? 피피피피피?"
깜짝 놀란 것 같다.
정령이 손에 묻은 검댕을 지우려는 것처럼 자기 몸에 문질렀다.
하얀 솜털은 이내 거무스름하게 얼룩졌다.
"핏?"
정령이 튀는 것처럼 마그리트 손에서 빠져나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대로 작은 새가 앉아 있는 가구 위로 향한다.
"피피피피! 피피피!"
자기 손 좀 보라는 것처럼 작은 팔을 내밀자, 작은 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삐약 소리 질렀다.
피피피, 삐삐 삐약, 서로 대화가 되는 걸까. 계속 번갈아 가며 소리낸다.
잠시 둘의 모습을 보다, 마그리트는 다시 몸단장을 시작했다.
검댕을 꼼꼼하게 목과 손까지 문지른 뒤 머리카락은 모두 모아 천 안쪽에 모아 넣는다.
머리가 길기 때문에 천이 빵빵해졌다.
혹시라도 벗겨지지 않도록 잘 매듭짓고 핀으로 찌른 뒤 겉으로 드러난 머리카락에도 검댕을 묻혔다.
화려하게 반짝이던 색은 이내 얼룩덜룩 지저분해졌다.
오라버니가 구해준 옷은 평민용이지만 깨끗하다.
조금 생각한 뒤, 마그리트는 거기에도 검댕을 약간 묻히고 일부분은 모래로 문질러 해진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렇게 하고 켄손과 행상인들에게 가자, 모두의 눈이 등잔만 해졌다.
눈을 껌벅거리는 모습이 정말 많이 놀란 것 같다.
"아니, 무슨 배우 하다 온 사람이에요?"
"극단에 있었습니까?"
행상인들 말에 왠지 조금 자랑스러워졌다.
어머니가 봤으면 분명 칭찬해 주셨을 거다.
'어머니....'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당신이 미래를 위해 가르친 일이 지금 이 순간 정말로 딸을 돕고 있어요.
'어떤 촌장인지 모르지만, 반드시 그 사람 마음을 손에 넣어 주겠어.'
그래서 언젠가 어머니와 아버지, 오라버니들한테 소식을 보내고 싶다.
잘살고 있다고 편지를 낼 수 있는, 그런 삶이 되도록 해야지.
마그리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칠십 먹은 꼬부랑 할아버지든, 사십 먹은 돼지머리 배 불뚝 아저씨든, 오라 이거야.
미모와 젊음으로 뇌쇄해 준다.
관리 켄손이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다 말했다.
"이봐요, 아가씨. 그 얼굴을 보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강 짐작할 것 같기는 한데, 그 촌장은 괜찮은 사람이에요. 나이도 젊고."
"...."
마그리트는 아무 말 없이 빙긋 웃었다.
이 관리는 좋은 사람이지만, 흠.
그가 말하는 것처럼 괜찮고 점잖고 지적이고 젊은 사람이 이런 개척마을에 와 있을 리 없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젊지만 배 나오고 성격 괜찮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비비 꼬이고 지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편협한 남자라도 좋다 이거야, 얼마든지 상대해 주겠어. 마음을 빼앗아준다.
마그리트는 다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피핏!"
마그리트 근처를 날아다니던 정령이 그녀를 따라 하는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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