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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조회수 :
63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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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880,019

작성
15.04.12 03:42
조회
3,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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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글자
11쪽

뜻밖의 실수

DUMMY

바이우스의 뒤를 따라 회의장을 나오는데 문 밖에 라울이 서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이유를 물으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라울 백작의 팔에 왕궁기사단장만이 입을 수 있는, 녹색과 노란색의 망토가 걸려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제 보니 라울의 손에는 푸른 정령검도 쥐어져 있었다. 그 검은 식사할 때조차 떼어놓지 않고 애지중지하던 노드의 보물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갑옷도 망토도 걸치지 않은 그냥 노드 체스터가 서 있었다.

저 뒤쪽에서 크루거와 앤디가 서둘러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회의에서 결정된 대로 이제 그 둘이 나를 경호할 모양인가 보다. 그 말은 노드는 더 이상 내 옆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회의결과를 전해 듣고 달려 왔습니다. 여왕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족하지만 목숨을 바쳐 여왕님을 지키겠습니다.”

두 기사가 정중히 인사를 마치고 난 후에 스펜서가 앤디에게는 검을, 크루거에게는 망토를 각각 건네주었다. 왠지 그 광경이 잔인하게 느껴져 나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노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입을 굳게 다문 노드의 얼굴이 왠지 허전해 보이는 것이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그 얼굴이 나를 향하더니 천천히 입이 열린다.


“저는 여기서 여왕님께 인사를 드릴까 합니다.”

노드가 윈더민을 떠나 어베레드 원정군에 합류하는 건 예정된 일이었지만 이건 내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회의가 끝난 직후라니.... 아무래도 명예롭지 못한 기사인 까닭에 퇴임식도 없이 그냥 떠나는 모양이다. 스펜서가 기다리고 있었던 까닭을 이제 알 것 같다. 노드와 작별해야하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왕궁기사단장이 아닌 까닭인지 노드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딱딱하지 않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 숙여 인사하는데 그 동작도 날이 서 있지 않고 한결 부드러웠다. 고개를 들자 수염에 파묻힌 미소가 무척이나 써 보인다. 까만 눈동자는 우수에 젖어 있었다. 왠지 모를 슬픔이 울컥하고 치밀어 나는 가만히 눈물을 흘렸다.

“여왕님은 정말 천생 소녀셨군요....”

노드은 난감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왠지 이 말은 그가 기사일 때 결코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와 작별을 하면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몸조심하세요, 체스터 경.”

노드는 우리의 배웅을 받으며 윈더민 성을 떠나갔다. 상관을 떠나보내는 앤디와 크루거의 표정이 몹시 섭섭해 보인다. 노드가 얼마나 존경받는 기사였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스펜서는 끊임없이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는 다른 사람도 아닌 스펜서였다. 그냥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상처를 어루만져주려 했다. 하지만 나는 굉장히 낙담해 있어 그의 배려에도 쉽게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비장한 각오로 결심한 목표는 결국 결정적인 실수 때문에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고 두 번 다시 노드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충고를 무시한 것 때문에 바이우스는 왠지 내게 화가 난 것 같다. 게다가 회의에서 막상 결정권이 주어졌을 때 아무 것도 하지 못한 것도 돌이켜 생각할수록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고맙게도 스펜서는 쭉 내 곁에 남아 점심식사까지 함께 있어주었다. 이는 꽤 고마운 배려였다. 비록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그가 든든히 옆을 지켜주었기에 더 큰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여왕님께서 체스터 경을 이렇게까지 아끼시는지 몰랐습니다.”

식사 중에 스펜서가 넌지시 말했다. 왠지 그 말이, 왜 그렇게 노드를 아끼는지 묻는 질문처럼 들려서 나는 페나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해주었다. 머독 그 개자식이 나 몰래 페나의 실세들을 전부 자기편으로 만들었다는 것, 그걸 깨달았을 때는 외부에서 온 노드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던 상황이었다는 것까지 모두 이야기했다.

말문을 연 것만으로도, 아무 말 없이 속으로 끙끙 앓던 때보다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긴 이야기를 마치고 나니 갑자기 허기도 느껴져서 손이 가지 않던 식사에도 열중하게 되었다. 적당히 분위기가 누그러졌을 때 스펜서가 내게 물었다.

“그래서 그 머독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떻게 하긴요? 브란트 성 감옥에 가뒀죠.”

“아아.... 그렇습니까?”

나는 스펜서의 얼굴에 일순간 ‘뭔가 할 말이 있지만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으니 그만두자.’는 표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뭔가 말하려 했죠? 솔직하게 얘기해 보세요.”

스펜서는 머뭇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럴 때 내가 솔직하게 말하는 걸 좋아한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끝내 더 버티지 못하고 털어놓는다.

“현재 페나의 실세들은 머독을 따르던 자들입니다. 반면 헤럴드 쇼라는 분은 여왕님에 의해 갑작스럽게 영주대리가 되기 전에 그들 밑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쯤 성 안의 헤럴드가 아니라 감옥 안의 머독이 페나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됩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머독이 수완을 발휘하여 감옥에서 나와 버젓이 브란트 성 안을 활보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으악!! 듣고 보니 그렇네! 왜 그런 생각을 못했지? 그렇게 뼈저리게 후회했으면서.... 나는 또 다시 페나를 망쳐버린 건가? 한 번으로도 부족했었나? 난 정말 제대로 하는 일 하나 없는 구제불능이구나....

“진정하십시오.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입니다. 아직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스펜서가 황급히 나를 진정시켰다. 여러 가지 안 좋은 일들이 겹쳐 나도 모르게 굉장히 괴로운 표정을 지었나 보다. 스펜서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린 것이, 마치 내가 당장 혀라도 깨물 줄 알았던 모양이다.

겨우 절망에서 빠져나온 나는 식사도 마치지 않고 얼른 페나로 보낼 전령을 불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페나로 달려가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다. 하지만 군주가 된 이상 페나만 특별 취급하는 건 공정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공문을 보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편지의 주요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머독을 페나의 감옥에 가둔 건 사실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해 일부러 한 행동이었다. 그를 죄를 뉘우쳤는지 확인하기 위한 시험이었던 것이다.

2. 내가 페나를 떠난 후 계속 얌전히 갇혀 있었다면 머독에게 5천이넨 상당의 금괴를 내린 후 말레(페나 외곽의 산골마을)로 보내 그곳을 다스리게 하라.

3. 만약 하루라도 감옥을 빠져나온 적이 있다면 말레로 보내 여생동안 벌목작업을 하게 하라.

4. 이 편지가 개봉되는 시점에서 페나의 영주대리 헤럴드 쇼를 정식영주로 임명한다. 그 첫 번째 임무로, 영주 본인 임의대로 페나의 행정조직을 재편성하라.


작성을 마친 나는 그것을 스펜서에게 보여주었다.

“이 정도면 될까요?”

“좋습니다. 머독이 수작 부릴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셨습니다.”

나는 검은 밀랍을 녹인 후 늑대 모양의 인장을 직접 찍어 편지를 봉했다. 그리고 전령에게 다른 누구도 아닌, 헤럴드 쇼에게 그 편지를 전할 것을 엄숙히 명했다. 그것만으로 마음이 놓이지 않아 실상을 직접 조사하라는 주문까지 곁들였다.

이로써 페나의 일에 대해서는 한결 마음을 놓게 되었지만 연속되는 실수 때문에 난 더욱 침울해 졌다. 오후가 되고 왕궁기사단이 내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식이 진행되는 동안 내 마음 속에는 내내 먹구름이 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회의에서 새로 선발된 왕궁기사단장이 이 서약식을 진행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에, 앤디와 크루거가 번갈아가며 기사들을 지휘했다. 어제 하녀들이 방을 돌아다니면서 정복을 걷었던 건 바로 이 서약식을 위해서였나보다. 기사들의 옷은 환한 목련꽃처럼 깨끗했고 손가락이 베일 정도로 빳빳하게 다려져 있었다.


어제 일을 떠올리다보니 문득 그 기사가 생각났다. 하녀로 변장한 나에게 정강이를 얻어맞고도 너그럽게 용서해 주었던 착한 녀석. 분명 이 중에 있을 텐데.... 나는 이백 명이 넘는 기사들의 얼굴을 한 번씩 훑어보며 녀석을 찾아보았다.

그를 찾는 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수월한 작업이었다. 반듯하게 줄을 지어 선 기사들 가운데 그 혼자만 조금 삐딱하게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크루거와 앤디의 따분한 연설을 왕인 나도 참으면서 듣고 있는데 녀석은 고개를 숙인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쪽 뒤에서 스미스 애송이가 째려보는 것도 모르는 채 말이다.

“검을 들어라, 기사들이여!”

크루거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자 그는 비로소 놀라 잠이 깼다. 기사들이 일제히 하늘 높이 검을 드는 것을 보고 허둥지둥 따라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웠다.

“여왕님을 위해!”

앤디가 선창하자 기사들은 모두 큰 소리로 그 말을 따라한다. 근데 저 녀석.... 어쩐지 입만 벌리고 소리는 안낸 거 같은데....? 틀림없다. 목젖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는걸.


기사들은 치켜들었던 검을 크루거의 구령에 맞춰 일제히 내린 후에 칼집에 넣었다. 이제 서약식은 어느덧 마지막 순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 마지막 순서란 바로 왕궁기사단의 구호를 외친 후에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었다. 기분이 꿀꿀했던 나는 은근히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녀와 하인들이 커다란 포도주 병을 들고 들어와 기사들에게 잔을 나눠주고 술을 따라주었다. 기사들은 그 때까지 반듯하게 유지했던 대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바람에 나는 그만 녀석의 모습을 시야에서 놓치고 말았다. 기분이 우울해서인가. 이 작은 실수마저 뼈아프게 느껴졌다.

“이상은 높게!”

모든 기사들의 손에 채워진 잔이 들려 있는 것을 확인한 크루거가 선창했다. 그러자 기사들이 잔을 머리 위로 높이 들며 우렁차게 후창한다.

“맹세는 무겁게!”

이번에는 앤디가 선창했다. 기사들은 이번에는 잔을 아래로 내리며 구호를 후창했다. 마지막 구호는 앤디와 크루거가 동시에 선창했다.

“검은 공정하게!”

마지막 구호가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여기 오기 직전 스펜서에게 이 구호에 대해 들었을 때는 참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수많은 기사들이 한 번에 외치는 걸 들으니 생각이 달라졌다. 귀가 쩌렁쩌렁 울리는 박력에 절로 피가 끓어올랐다.

덕분에 사기가 고취된 나는 잔을 단숨에 비웠다. 오늘 있었던 모든 안 좋은 일들, 그 숱한 실수들을 이로써 털어버리자고 다짐한다. 이를 본 기사들이 뒤이어 그들의 잔을 비운다. 새로운 왕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는 왕궁기사단의 서약식은 이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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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백발 백중의 활솜씨를 얻기 위해서는

화살이 빗나갈 수 있는 모든 상황을 먼저 경험해보아야 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완벽해지기 위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과정이다.

-바르테인 7대 왕 휘렌델 바르테인-


스펜서 : 그런데 편지의 저 1번.... 정말입니까?

휘렌델 : ....무, 물론이죠! 전부 계획한 거였다고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 작성자
    카리황제
    작성일
    15.04.12 09:19
    No. 1

    퇴고를 안하셨다는 말이 믿기지가 않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4.12 19:26
    No. 2

    저는 정말로 퇴고를 못하나 봅니다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2 FAD
    작성일
    16.12.19 15:25
    No. 3

    전편부터 거슬렸는데 천상은 하늘 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천생 소녀라고 해야 타고난 소녀라는 뜻이 됩니다...

    찬성: 0 | 반대: 1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6.12.20 01:24
    No. 4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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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 뜻밖의 실수 +4 15.04.12 3,096 83 11쪽
26 회의를 주도하는 자 +6 15.04.11 3,094 83 11쪽
25 기사 노드 체스터 +8 15.04.10 3,185 87 8쪽
24 비장한 목표 +6 15.04.09 3,247 82 11쪽
23 정치라는 이름의 작업 +8 15.04.05 3,219 94 13쪽
22 적자우월주의 +4 15.04.03 3,140 73 8쪽
21 관대한 기사 +10 15.04.02 3,446 97 10쪽
20 무단 침입. +8 15.04.01 3,721 121 17쪽
19 나가자, 나가자, 나가자! +8 15.03.31 3,474 122 10쪽
18 바르테인의 전당 +8 15.03.30 3,463 86 10쪽
17 추첨제 +12 15.03.28 3,518 106 10쪽
16 영지 없는 백작 +10 15.03.27 3,908 99 8쪽
15 아득한 기억 +8 15.03.26 3,521 94 9쪽
14 결론 +12 15.03.24 3,845 126 15쪽
13 첫회의 +8 15.03.23 3,722 108 8쪽
12 포커 페이스 +4 15.03.20 3,722 106 10쪽
11 동기 +10 15.03.18 3,855 100 7쪽
10 즉위식 (수정본) +11 15.03.17 4,393 132 16쪽
9 관례 +6 15.03.16 4,351 116 12쪽
8 응징 +10 15.03.15 4,293 122 9쪽
7 마지막 임무 +6 15.03.12 4,130 117 9쪽
6 검에 갇힌 정령들 +4 15.03.11 4,479 151 13쪽
5 노드의 부하들 +7 15.03.09 4,436 134 8쪽
4 일단 저지르고 본다. +8 15.03.02 5,252 149 18쪽
3 분노의 이단옆차기 +17 15.03.01 6,105 150 14쪽
2 왕녀, 공주, 여왕 +10 14.12.12 8,000 165 20쪽
1 프롤로그 -왕녀의 외출- +28 14.12.10 11,783 17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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