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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조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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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880,019

작성
15.03.20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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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포커 페이스

DUMMY

그날 밤, 나는 내 방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성에 온 후로는 아무래도 노드 혼자 나를 지키기 무리였는지 크루거와 앤디까지 포함한 세 명이 교대로 나를 경호했는데, 이 시각에는 노드가 방 밖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를 위로할 목적으로 연주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한 의식이었다. 이제 왕이 된 나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니 자유와 음악을 좋아했던 예술인 휘렌델과 정식으로 작별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잠을 방해할 거란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방은 왕의 방답게 매우 넓고 컸으며 벽은 매우 두꺼웠다. 게다가 불의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인지 성안 외진 곳에 동 떨어져 있었다. 바이올린 소리는 끽해야 방 밖에 있는 노드의 귀에나 들릴 것이다.

처음 활대를 잡을 때부터 예감하고 있었지만 손이 가는대로 연주를 해나가다 보니 마지막 곡으로 왕녀의 외출이 선택되었다. 나와 아버지가 함께 만든 노래.... 지금의 나에겐 지나치게 쉽고 간단한 멜로디지만 다른 어떤 곡을 연주할 때보다 감회가 새롭다. 이 곳 윈더민 성에서 나와 아버지는 이 노래처럼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지.

문득 나는 기억에도 희미한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졌다. 너무 간절해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나 자신과 헤어진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감상적이 된 모양이다. 나는 바이올린을 놓고 잠시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똑, 똑, 똑.”

애써 기분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갑자기 둔탁한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화들짝 놀란 나는 재빨리 바이올린을 숨겼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바이우스가 들어온다. 브란트 성에서도, 이 곳 윈더민 성에서도 내 방을 방문하는 사람은 거의 성장이었다. 성은 군주에게 있어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일터인 동시에 사적인 휴식처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장은 성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알고 있기에 군주의 스케줄도 모조리 꿰고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사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군주에게 공적인 업무를 일깨워주는 일은 성장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같은 성장인데 이 영감은 앨런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일단 앨런은 항상 나에게 웃어 주었다. 나 역시 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자주 대해야 하는 만큼 성장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가 친절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이우스는 언제나 뚱한 표정이다. 약간 무뚝뚝해 보이면서도 여유로워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절대로 상처받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훅!”

엇! 정말이다! 왠지 눈앞으로 화살이 지나가도 저 표정이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방금 전 나는 그의 얼굴에 한 번 바람을 불어 보았다. 그런데 정말로 조금도 표정을 찡그리지 않았다. 얼굴을 뒤로 빼 피하지도 않고, 심지어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늦은 시각에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내일 일정을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잠깐. 난 방금 당신 얼굴에 바람을 훅 불었는데.... 그것도 살살 분 게 아니라 누가 봐도 일부러 그랬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힘껏 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한 표정으로 자기 할 말을 할 수가 있지? 궁금해진 나는 불쑥 물었다.

“뭐가 문제에요?”

“죄송합니다. 듣기를 원치 않으신다면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바이우스는 깍듯이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어디 아파요?”

“지병으로 약간의 요통을 앓고 있지만 심각한 건 아닙니다. 평상시와 같이 직무를 수행하는데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 얼굴 말이에요. 뭔가 병이 있는 거 아니에요?”

“제 얼굴 말입니까?”

바이우스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표정을 유지한 채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자신의 코와 입을 가리며 뒷걸음질 쳐 내게서 멀어졌다.

“방문 직전 확인했을 때는 전염병의 징후가 없었습니다. 혹시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는 독이 유입되었을지 모르니 멀리 물러나십시오.”

나는 바이우스가 문 밖에 있는 노드를 불러 해독제를 가져오라 말하기 전에 간신히 그를 붙러 세웠다.

“한 번도 그 표정이 변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요. 혹시 나쁜 마법이나.... 저주에라도 걸린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나는 민망하게 웃으며 애써 변명했다. 내 무안함을 덜어주기 위해 함께 웃어줄 법도 한데 바이우스는 얄미우리만치 그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건 제가 젊었을 때 성장이 되기 위해 가장 먼저 배웠던 것입니다.”

“아.... 일부러 노력하셨단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은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한결 같은 표정이 유지되고 있지요.”

그의 표정이 잘 변하지 않는 이유는 이제 알게 되었다. 후천적으로 그러나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게 성장한테 중요한 거예요? 왕을 가장 자주 대하는 사람이라면 좀 더 밝은 표정을 짓는 게 낫지 않아요?”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왕을 가장 많이 접하기 때문이죠. 제 전임자는 침통한 표정과 함께 웰링턴 선왕께 에네버의 침공 소식을 전했었습니다. 그러자 웰링턴 선왕께서는 그의 어두운 표정 때문에 전황을 더 비관적으로 받아들이셨다 하시며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 전에 로클리 시대의 어떤 왕은 몹시 기분이 안 좋은날 성장이 웃었다고 평생 그 입을 다물 수 없도록 아래턱을 뽑아 버렸다고 합니다.”

어? 뭐야? 왜 갑자기 그런 무서운 말을 하고 그래? 그냥 괜히 왕에게 트집을 잡히지 않으려고 연습했다고 하면 되잖아.

“또한 이 표정은 이곳 생활에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어떤 도움이요?”

그의 표정이나 목소리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재미없는 어조와 표정에서 나오는 말을 계속 듣고 싶었다. 이제 막 윈더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내게 그의 경험을 듣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렇게 감정을 숨기고 있으니 사람들은 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얕보이지도 않게 되었죠.”

“....그렇군요....”

그가 택한 방법은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일단 나는 왕이니까 그와 입장이 다르다. 누군가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지. 그에 앞서 바이우스처럼 감정을 숨기는 건 내 성격과 절대 맞지 않는 것 같다. 아무리 나 자신을 바꿔가기로 마음먹었다 해도 나는 기본적으로 내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사람이니까.


“죄송합니다. 전해드릴 말씀이 있는데도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먼저 늘어놓았군요.”

바이우스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내심 뿌듯한 성취감을 느꼈다. 원래 그는 내 방에 들어와서 할 말만 하고 나갈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그의 계획을 내가 틀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이우스 기준에서는 ‘당황’이라고 생각하니 몹시 기뻤다. 훅 불어 한 번 그의 얼굴을 찡그리게 해보겠다는 작전이 실패한 것도 더 이상 아쉽지 않게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바이우스의 다른 표정을 보는 것은 나의 소박한 목적 중의 하나였다. 윈더민 왕성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났고, 이제 나는 제법 많은 것들을 기억해냈다. 예를 들어 동쪽 성 하녀장을 맡고 있는 마가렛은 어린 시절 윈더민 성 중앙에 있는 검은늑대상을 올라타려다 떨어졌을 때 약을 발라주었던 하녀였다. 그리고 어렸을 때는 얼굴만 기억했다가 이번에 이름을 알게 된 이완은 그 검은 늑대상을 관리하는 하인이었다. 그는 여전히 그 검은 늑대상을 하루에 한 번씩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닦고 있다.

바이우스도 분명 어린 시절에 내가 만났던 사람 중의 하나다. 하지만 이 사람과 내가 무엇을 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건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가장 선명하게 얼굴이 기억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상이 또렷하게 남는다는 건 그와 내가 뭔가 특별한 경험을 공유한다는 뜻일 텐데, 다른 사람들과의 자질구레한 소동은 기억이 나면서도 끝내 바이우스와 얽힌 사건은 떠올리지 못했다.


나는 이것이 그의 표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저 죽어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 표정. 옛날에 내가 볼 땐 저런 표정을 짓지 않았을 것이다. 어렸을 때 보았던 표정이 아니기에 그와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리라. 이것이 내 결론이었다.

“이왕 죄송한 김에 한 가지만 더 말해줘요. 그러면 어린 시절 제가 여기에 살 때도 계속 그 표정을 하고 계셨었나요?”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성장이 되기 위해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성장에 임명된 건 조부님이셨던 웰링턴 선왕대의 일입니다.”

으음.... 그렇다면 내가 어렸을 때도 저 목석같은 얼굴을 하고 다녔다는 말이네. 이렇게 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난 그렇게 궁금하면서도 어린 시절 나와 무엇을 했었는지 그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윈더민 성에 다시 왔을 때 그가 나에게 처음 뵙겠다고 인사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초면이 아니다. 이제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바이우스는 굉장히 침착하고 냉정해 보였지만 인사를 잘못했다. 그리고 저 철두철미한 영감이 그런 실수를 저질렀던 까닭은 나를 오랜만에 보고 ‘당황’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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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소설의 배경도 가상의 세계관이기에

우리가 사용하는 트럼프와 완전히 똑같은 카드가 있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글의 소제목들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아니라

소설을 보는 독자들, 현실세계에 속한 사람들을 위해 지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외부요인에도 유지하려 하는 인위적인 무표정’ 을 의미하는

가장 대표적인 단어인 포커 페이스를 써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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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89 티말
    작성일
    15.03.20 03:35
    No. 1

    그걸 또 알아보냐..아, 이건.. 회고록 이랄까 그때 쓴거구나. 으음.
    어릴때 보았던 사람들 중 기억나는 사람들을 찾아서..라는 거로 시작하겠군.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3.22 20:26
    No. 2

    왕성을 떠날 때 휘렌델의 나이는 5세, 우리나라에서 세는 나이로는 6세에 해당합니다.
    다 까먹은 듯 하면서도....
    쥐어짜면 기억 날 것 같은 상태에 걸맞는 나이죠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1 닉넴이같아
    작성일
    16.12.02 16:59
    No. 3

    이제 시작하는데 재밌네요. 그런데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주인공이 여자인거랑... 요즘 유행처럼 스트레스 해소에 치중하지 않기 때문인듯...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6.12.02 23:34
    No. 4

    게다가 이 소설은 정치극으로 기획이 되어서....
    처음부터 인기같은 건 바라지 않았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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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관대한 기사 +10 15.04.02 3,446 97 10쪽
20 무단 침입. +8 15.04.01 3,721 121 17쪽
19 나가자, 나가자, 나가자! +8 15.03.31 3,474 122 10쪽
18 바르테인의 전당 +8 15.03.30 3,463 86 10쪽
17 추첨제 +12 15.03.28 3,518 106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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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결론 +12 15.03.24 3,845 126 15쪽
13 첫회의 +8 15.03.23 3,722 108 8쪽
» 포커 페이스 +4 15.03.20 3,723 106 10쪽
11 동기 +10 15.03.18 3,855 100 7쪽
10 즉위식 (수정본) +11 15.03.17 4,393 132 16쪽
9 관례 +6 15.03.16 4,351 116 12쪽
8 응징 +10 15.03.15 4,293 122 9쪽
7 마지막 임무 +6 15.03.12 4,130 117 9쪽
6 검에 갇힌 정령들 +4 15.03.11 4,479 151 13쪽
5 노드의 부하들 +7 15.03.09 4,436 134 8쪽
4 일단 저지르고 본다. +8 15.03.02 5,252 149 18쪽
3 분노의 이단옆차기 +17 15.03.01 6,105 150 14쪽
2 왕녀, 공주, 여왕 +10 14.12.12 8,000 165 20쪽
1 프롤로그 -왕녀의 외출- +28 14.12.10 11,784 17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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