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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조회수 :
63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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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29
글자수 :
1,880,019

작성
14.12.12 10:23
조회
8,000
추천
165
글자
20쪽

왕녀, 공주, 여왕

DUMMY

왕녀(王女). 공주(公主)와 조금 의미가 다른 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공주가 더 좋다. 왕녀는 왕가의 핏줄을 이어받은 여자들을 전부 싸잡아 부르는 말이고, 넓은 의미로 쓰일 때는 결혼을 통해 왕가에 들어온 여자들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반면에 공주는 정식으로 즉위한 왕의 딸만 콕 집어 가리키는 말이다. 평균값을 따져보면 아무래도 왕녀보다 공주쪽이 좀 더 지체가 높은 느낌이라고 할까.

어떤 사람들은 왕의 딸 중에서 결혼한 사람만을 공주로 부른다. 이런 습관도 꼭 틀린 것만은 아니다. 남편의 세력까지 등에 업었으니 왕녀보다 한 단계 위를 뜻하는 공주라는 단어에 더 어울릴 테니까.

책을 싫어하는 나지만 두 단어의 차이는 명확히 구별할 수 있다. 내가 바로 저 호칭에 해당하는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내 몸에는 바르테인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고, 왕녀 중에서도 평범한 왕녀가 아니다. 나의 할아버지 웰링턴은 바르테인의 왕이었고, 아버지는 그 분의 첫째 아들인 다이슨 바르테인이었다. 불행한 사건만 없었으면 아버지는 왕이 되셨을 테고, 나는 공주라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기억조차 희미한 어린 시절, 나는 윈더민 왕성에 살았었다. 왕이 사는 성은 내게 막연히 크고 밝은 이미지로 남아있다. 정말로 성내가 웅장하고 화려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린 내 눈에 모든 것이 크게 보였기 때문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어쩌면 아버지의 기억이 남은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는 나를 참 예뻐하셨다. 두 팔 높이 번쩍 나를 들어 올리시며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 분은 마치 노래를 하는 것처럼 흥에 겨운 목소리로 나를 얼러주시곤 했다.

‘나의 작은 공주님.’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공주라고 부르셨다. 아! 지금 생각해 보니 항상 그러셨던 건 아니다. 가끔.... 나를 왕녀라고 부르실 때도 있었다.


어렸을 때 나는 대단한 말괄량이라 온 성 안을 헤집고 돌아다녔었다. 걸음마를 완벽히 터득한 뒤 질주의 시기가 찾아왔을 때는 심지어 성 밖으로 뛰쳐나간 적도 있다. 고작 네다섯 살인 꼬마 아이가 혼자서 말이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나를 찾아 나서셨다.

자상한 아버지였지만 이 때만큼은 화가 나셨는지 나를 공주가 아니라 왕녀라고 부르셨다. 물론 당시의 내가 공주와 왕녀의 미묘한 뜻 차이를 알지는 못했다. 다만 아버지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건 아무리 어린 나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진귀한 구경거리에 정신이 팔려있다가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면 부리나케 그 쪽으로 달려가곤 했다. 어지간히 아버지가 화를 내시는 게 무서웠었나 보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기억들은 워낙 어릴 때라 내게 희미하게 남아있다. 슬프게도 나는 아버지와 함께 한 추억들 대부분을 잊고 말았다. 나중에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하나하나 소중히 간직했을 텐데....

나는 뒤늦게 무심코 흘려보냈던 순간들, 아버지와의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행복했던 순간들보다, 내가 성 밖을 나갔을 때.... 그러니까 아버지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셔서 날 찾아다니실 때의 기억이 훨씬 선명하다. 긴장해서 그런가? 이때 나를 찾으시며 하신 말씀은 특히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기억이 났다.

나는 내가 직접 만든 멜로디에 그로 붙여 노래를 만들었다. 물론 어린 딸에게 하신 말씀이니 만큼 그 문장들이 다소 유치한 게 사실이다. 그래도 아버지가 직접 하신 말씀이다. 뭐라하는 놈이 있으면 쫓아가 죽여버릴 테다!

언젠가 아버지와 함께 행복했던 순간.... 즉 나를 공주라고 불러주실 때 하셨던 말씀으로 노래 가사를 바꿀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때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아버지 말씀을 있는 그대로 옮기지 않는다면 노래의 의미가 변질된다. 그 노래는 더 이상 아버지와 내가 함께 만든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노래 제목이 '공주의 외출'이 아니라 '왕녀의 외출'이 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뭐 덕분에 노래의 주인공인 내가 공주보다 한 단계 아래인 왕녀가 되었지만 상관없다. 어쨌거나 지금의 나는 왕녀라 부르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기도 하고.... 게다가 나를 애타게 찾으시는 아버지의 애절함이 느껴져 더 마음에 든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무렵에 성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나를 왕녀가 아닌 공주로 불렀을 것 같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왕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왕이 되기를 꿈꾼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꿈이 아니었다. 강철거인의 후예들 중에서 가장 강성한 왕국인 바르테인. 그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인 왕좌는 웰링턴 바르테인의 첫째 아들인 다이슨 바르테인에게 응당 돌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당연한 권리를 누려보시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사인은 두창. 천연두라고도 불리는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그 때 내 나이는 다섯 살이었다. 어린 나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 했다. 두 번 다시 아버지를 볼 수 없는 것이 숨 막힐 정도로 무섭고 슬펐다. 더 가혹했던 건 아버지와의 추억이 잔뜩 남아 있는 윈더민 성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 때 목이 찢어져라 울고 또 울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바르테인의 왕인 할아버지는 아버지 못지않게 나를 귀여워해주셨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태도가 급격히 변하셨다. 결국 할아버지는 우리 모녀를 어머니의 본가가 있는 페나로 보내셨고, 우리는 두 번 다시 윈더민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어린 나는 성을 떠나는 것이 마치 아버지와 헤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때 너무 실망하고 화가 나서일까.... 그로부터 2년 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많이 슬프지 않았다.


지금까지 너무 아버지만 말한 것 같으니 이쯤에서 어머니에 대해 말해야겠다. 어머니는 페나의 영주인 브란트 가문의 외동딸로 태어나셨다. 윈더민의 북서쪽에 있는 페나는 수도와 가깝긴 하지만 작은 도시였고, 브란트 가문 또한 그리 대단한 집안은 아니었다. 골치 아픈 얘기 집어치우고 본론부터 말하자면, 그런데도 우리 엄마는 제1 왕위계승자인 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으셨다. 그 정도로 끝내주는 미인이었다.

윈더민 왕성에서 쫓겨난 후 나는 페나에서 자랐고, 어머니 밑에서 철이 들었다.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음을 미리 고백한다. 어머니는 한 마디로.... 무서운 분이셨다. 왜냐하면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엄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바르테인의 수도 윈더민 왕성에서 제1 왕위 계승자인 아버지의 배우자로 7년이나 사셨던 분이다. 언제 어디서 무얼 하던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셨다.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가 '귀부인'이라는 제목의 그림의 모델이 되는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문제는 나한테도 그런 모습을 기대하셨다는 것이다. 솔직히 인정한다. 난 얌전함과는 거리가 멀다. 절대로 어머니와 같은 요조숙녀가 될 수 없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머니를 만족시킬 수 없었고, 결국 나는 그녀의 잔을 채우는 것을 포기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모범적인 귀부인인 어머니는 나에게 소리를 지르시지도, 벌을 내리시지도 않았다. 단지 그 섬세한 목소리로 사소한 잘못까지 조목조목 짚으시고 나를 설득하려 하실 뿐이었다. 그것이 더 끔찍했다. 그럴수록 어머니와 내가 다르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그녀의 교육법이 굉장한 효과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휘렌델 바르테인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나는 어머니와 내가 다르다는 걸 깨달을수록 더욱 말괄량이가 되어갔다. 시를 읽거나 차를 마시는... 소위 여자아이다운 건 다 집어치우고 산으로, 들로 놀러나갔다가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오곤 했다.


어머니는 내게 아버지만큼 애틋한 사람은 아니다. 우리 모녀가 서로에게 살갑지 않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를 응시하는 어머니의 시선에 아쉬움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무엇을 아쉬워하는지 .

어머니와 내가 가까워질 수 없었던 건 내가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남자였다면 겨우 단추 잘못 잠근 일로 잔소리를 듣지 않았을 거란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남자였다면.... 나한테 왕위 계승권이 돌아왔을 테고 윈더민 성에서 쫓겨나는 일도 없었을 거란 뜻이다.

차마 말로 꺼내지 못하는 진심을 눈치챈 후로 어머니의 간섭이 더욱 부당하게 느껴졌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제멋대로 변해갔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내가 분노한 만큼 나쁜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물론 위에 언급한 아쉬움 때문에 가끔씩 필요이상으로 내게 까다롭게 구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가끔씩이었다.

나를 딸로서 사랑하고 아끼셨던 것도 틀림없는 어머니의 진심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한창 반항기 가득한 열네 살이었고, 류트를 배우는 게 금지당한 터라 사이는 최악으로 벌어진 상태였다. 그래도 나는 이틀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같은 병으로 돌아가셨다. 내게 특별한 존재인 아버지와 공통점이 생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착한 딸이 되어드리지 못한 게 죄송했기 때문일까.... 살아계실 때는 불편하기만 했던 어머니의 입장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는 어려서 윈더민 성에 있었던 시절이 얼마나 찬란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는 다르다. 어머니는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아버지에게 선택받으시며 당당히 바르테인의 왕성에 입성했다. 모든 여인들이 꿈꾸는 미래가 그녀의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빛나는 순간이 막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런 결말을 맞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으셨을 것이다.


살아계실 무렵 어머니는 이따금씩 쓸쓸한 눈으로 창가에 앉아 수도 윈더민이 있는 남동쪽 방향을 바라보시곤 했다. 이미 인생의 클라이막스를 누린 그녀에게는 이 곳 페나에 있는 매일매일이 추락이었을 것이다. 그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지 감히 추측할 수도 없었다. 내가 아들이기를 바라신 나약함도 더는 원망스럽지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내게 아버지보다 좀 ‘덜 부모다운 사람’으로 기억될 것 같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허물이나 빈틈은 내가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언제까지나 나보다 몇 배나 큰 거인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으니 이미지에서도 압도적인 차이가 난다. 이런 사정을 이해하시고 너무 서운해 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부모님의 목숨을 앗아간 두창은 내게 있어 재앙과도 같은 병이다. 공교롭게도 외할아버지마저 어머니와 같은 해에 그 두창에 걸려 돌아가셨다. 아버지 대신 왕이 된 삼촌도 일 년 전에 저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를 제외한 가족 전부가 저 끔찍한 전염병으로 죽은 것이다. 이쯤 되면 철천지원수가 아니라 할 수 없다. 저 빌어먹을 병을 내 손으로 없애버리고 싶다.

이 병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최고의 의사들에게 치료받는 왕과 왕자까지 죽였을 정도니 말이다.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보내느니 차라리 내가 걸려서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외할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이 이상하게도 같은 성안에서 먹고 자던 나는 비켜 지나갔다. 그것이 더 무섭고 화가 난다.


어쨌건 그 결과 나는 겨우 14살의 나이에 브란트 성의 주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4년 동안 페나를 다스려온 사람은 따로 있다. 외할아버지.... 노로스 브란트 경은 강철처럼 강직한 분이셨다. 그 어머니조차 흠을 잡히지 않으려고 쩔쩔매셨을 정도였다. 그런 분이 나 같은 천방지축에게 애지중지 다스려온 페나를 맡기실 리가 없었다.

머독 브란트는 병상에 누워계시던 외할아버지가 수소문 끝에 찾아낸 사람이었다. 나이는 38살로 나보다 스무 살 많지만 당숙 할아버지뻘이 되는 먼 친척이다. 성에 불려오기 전에 뭐하고 있었다더라? 듣긴 들었는데 별로 관심이 없어서 기억나지 않는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대신 페나를 다스려 달라고 그 사람에게 부탁하셨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에게 대단히 고마워하고 있다. 나에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라는 말씀도 남기셨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나를 귀찮게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영주 대리라는 위치가 굉장히 마음에 드는 것 같았고 나도 그가 있어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양쪽 모두 이득이었기에 지금까지 우리는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방해를 받았다.


“브란트 경께서 현재 접객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자리니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설마 그 ‘아무’에 나도 포함되는 건가? 나는 이 성의 주인인데? 내가 페나의 영주인데?

경비병들은 떡 버티고 서서 응접실 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로 윈더민 성에서 사람을 보냈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3년 전에도 왕궁에서 사람이 왔었다. 삼촌이 아직 살아계시고 왕이었을 무렵, 내가 영주가 된지 일 년 뒤에. 그 때도 이렇게 경비병들이 나를 막았었나? 아참! 그땐 물놀이 하다가 늦게 돌아왔었구나.


한 가지 정정할 게 있다. 두창이 내 가족들을 전부 데려간 건 아니다. 머덕 브란트 외에도 내 핏줄이 한 명 더 남아 있다. 바로 일 년 전에 돌아가신 삼촌의 뒤를 이어 바르테인의 왕이 된 사촌동생 하워드 바르테인이다. 이 녀석을 잊고 있었다.

이제 생각났는데 그는 내 약혼자다. 3년 전에 윈더민에서 온 사람들은 내게 그 사실을 전하러 온 사절이었다. 하워드를 까맣게 잊은 건 13년 전에 윈더민을 떠난 후 아버지 쪽 친척들과 전혀 교류가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결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내가 장차 왕비가 된다는 사실에 머독은 기뻐하며 축하해줬는데 당사자인 나는 그저 무덤덤했다.

어쩌면 이는 내가 여자답지 않은 성격임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될 수도 있겠다. 나는 땀 흘려 일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있다. 귀족으로 태어나서 이런 이점을 누리는 대신 원하지 않는 결혼쯤은 감수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어차피 왕이 명령한 이상 그 결혼을 피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답 안 나오는 고민에 빠져있는 대신 현재에 충실하기로 한 것이다.


‘혹시 결혼식을 진행하려고 사람을 보낸 게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하워드는 나보다 한 살 어린 17살이지만 일 년 전에 왕이 되었다. 마냥 어린애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난 십여 년간 아버지와 삼촌을 포함한 바르테인 왕족이 거의 다 죽어나갔고 바르테인의 남자는 하워드 한 명 뿐이다. 그걸 생각하면 빨리 결혼해서 후계자를 확보하려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나중의 일로 여겼던 결혼이 막상 눈앞에 닥쳐오자 까닭 없이 숨이 막혔다. 내 성격도 그렇게까지 털털하지는 않았나보다. 3년 전에는 단지 너무 어려서 별 생각이 없었다. 결혼이라는 것이 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릴 수 있는 사건이라는 걸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워드가 어떻게 자랐을지 이제야 새삼스럽게 궁금해진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게 될까? 어머니처럼 요조숙녀가 되어야 하는 걸까? 이제 두 번 다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산과 들을 뛰어다닐 수 없는 건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뿜어져 나왔다.


갑자기 저 문 뒤에 내 운명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 떠들고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경비병들은 이제 어깨에 힘을 딱 주며 버티는 게 노골적으로 나를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눈치를 주었다.

"쾅!"

물론 정말로 저렇게 큰 소리가 난 건 아니다. 하지만 내 귀에는 들렸다. 나의 분노와 의지가 오롯이 담긴 오른발이 바닥을 힘차게 딛는 소리가. 경비병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허리와 다리에 힘을 주기 시작한다. 나는 왼발을 옮기며 허리를 뒤로 빼고 한껏 배를 앞으로 들이밀었다.

내가 들어가겠다는데 너희들이 어떻게 막을 거야? 왕의 약혼녀이자 브란트 가의 정식 후계자를 때릴 거야? 그 칼로 찌를 거야? 어디 한 번 해봐. 배 째.

경비병들은 난감하다 못해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결국 무대포로 밀고 가는 내 몸에 차마 손가락 하나 대지 못했다. 두 사람의 사이를 기세좋게 통과한 나는 힘껏 응접실 문을 열어젖혔다. 큰 소리가 났다. 응접실에 안에는 머독과 망토를 두른 세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갑작스런 소리에 놀라 돌아보다가 문을 연 사람이 나란 것을 확인하고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셨습니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머독이 실실 웃는 얼굴로 나에게 인사한다. 나한테 저렇게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건 대체 얼마만일까.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의 키가 꽤 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의 키가 급격하게 작아졌다. 이 기묘한 현상이 내 키가 자란 이유가 아니라는 사실은 열여덟 살이 된 후에야 깨달았다. 그 기적이 일어난 '어느날'이란 바로 내가 하워드와 약혼한 날이었다.

머독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공손했고 부드러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다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어깨에 힘을 주곤 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무방비로 내려놓은 상태였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내심 하워드가 다른 신부를 찾았다고 말하며 약혼을 파기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머독의 태도를 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

“이 분이....?”

머독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갈색 단발머리의 남자가 황급히 일어난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내 신분을 짐작했는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노드....”

나는 그가 자기소개를 마칠 때까지 기다릴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자기 이름을 말하는 중간에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왜 왔어요?”

노드먼인지 노드라인인지.... 어쨌든 그는 대단한 순발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수도에 있던 사람이라 그런가. 당황한 표정을 그야말로 순식간에 감추고 재빨리 내 물음에 대답했다.

“하워드 전하께서 전사하셨습니다.”

"네?"

당황스러웠다. 이것이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솔직히 심정이었다. 나는 하워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결혼할 사이이긴 했지만 약혼하기 전에도, 그 후에도 만난 적이 없다.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목소리로 말하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슬퍼할래야 슬퍼할 수가 없었다. 그냥 또 한 명의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어쩌면 거기 있던 사람들은 내가 약혼자를 잃고 슬퍼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조금 멍해져서 노들턴이 뭐라 하는지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그랬다. 그는 왕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 뒤에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잠시 뒤에 알 수 있었다.

“....비울 수 없어 휘렌델 바르테인 왕녀님께서 왕위에 오르시기를 간곡히 청하는 바입니다.”

“에?”

방금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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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소설을 연재하면서 왕녀와 공주의 차이를 한 번 더 찾아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더군요....

그 중 다수에게 더 알려져 있다고 생각되는 쪽을 택했습니다만

두 단어를 구별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특히나 우리나라와 중국을 제외한 서구 문화권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두 단어를 구분하는 건 소설의 설정임을 밝힙니다.

이럴 땐 판타지를 쓰는게 크나큰 이점이 되네요 ㅎㅎ


루시엘에서 살짝 언급되는데 결국 휘렌델은 두창을 박멸하는데 성공합니다.

아마 여기서 다뤄지지는 않을 사건이지만 후에 휘렌델은 KJH 지도를 만들죠. 

이를 통해 천연두의 확산보다 종두법이 먼저 보급되니

나름 앙갚음을 하게 되는 셈이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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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0

  • 작성자
    Personacon 二月
    작성일
    14.12.14 08:53
    No. 1

    휘렌델이라니! 휘렌델이라니! 루시엘에서 쉴틈없이줄곧언급되던그 휘렌델이라니!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2.28 00:34
    No. 2

    잠수 복귀 신고하고 왕녀의 외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분량이 너무 적네요 ^^;
    제가 글을 빨리 쓰는 스타일이 아니고
    이번에는 퇴고를 꼼꼼히 하다 보니 연재 속도는 잘 안나올 것 같아요 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7 하늘푸름
    작성일
    15.04.09 13:48
    No. 3

    일인칭 서술임에도 불구하고, 설명이 적절하게 잘 녹아들어가서 글이 부드럽게 들어옵니다.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4.09 21:23
    No. 4

    세계관 설정 같은 걸 극중에 자연스럽게 소개할 수 있는 게
    1인칭 시점의 장점 같아요 ^^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을 휘렌델로 구상하면서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도전 해보자
    하는 마음에 1인칭으로 가게 되었네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5.04.16 16:08
    No. 5

    어? KJH? 후반부에는 은근슬쩍 증발한 그 설정이 여기서 나오네요? ㅋㅋ
    근데 휘렌델은 후반부에서도 가끔 본 것 같은데... 착각인가?
    루시엘을 몇 달 전에 봐서 그런지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4.16 21:41
    No. 6

    휘렌델의 루시엘의 전시대 인물입니다. 배경으로 몇 번 언급됐었죠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 축제일
    작성일
    15.07.10 10:39
    No. 7

    잘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7.10 15:47
    No. 8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6 삶은날계란
    작성일
    16.08.22 22:04
    No. 9

    보고 있던게 있던지라 이건 이번주 안에 몰아봐야겠네요. 제가 정말로 찻던 글입니다.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6.08.23 22:11
    No. 10

    마지막까지 실망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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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의 외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7 뜻밖의 실수 +4 15.04.12 3,097 83 11쪽
26 회의를 주도하는 자 +6 15.04.11 3,094 83 11쪽
25 기사 노드 체스터 +8 15.04.10 3,187 87 8쪽
24 비장한 목표 +6 15.04.09 3,248 82 11쪽
23 정치라는 이름의 작업 +8 15.04.05 3,219 94 13쪽
22 적자우월주의 +4 15.04.03 3,140 73 8쪽
21 관대한 기사 +10 15.04.02 3,448 97 10쪽
20 무단 침입. +8 15.04.01 3,722 121 17쪽
19 나가자, 나가자, 나가자! +8 15.03.31 3,474 122 10쪽
18 바르테인의 전당 +8 15.03.30 3,464 86 10쪽
17 추첨제 +12 15.03.28 3,518 106 10쪽
16 영지 없는 백작 +10 15.03.27 3,909 99 8쪽
15 아득한 기억 +8 15.03.26 3,521 94 9쪽
14 결론 +12 15.03.24 3,845 126 15쪽
13 첫회의 +8 15.03.23 3,723 108 8쪽
12 포커 페이스 +4 15.03.20 3,724 106 10쪽
11 동기 +10 15.03.18 3,855 100 7쪽
10 즉위식 (수정본) +11 15.03.17 4,394 132 16쪽
9 관례 +6 15.03.16 4,351 116 12쪽
8 응징 +10 15.03.15 4,294 122 9쪽
7 마지막 임무 +6 15.03.12 4,131 117 9쪽
6 검에 갇힌 정령들 +4 15.03.11 4,481 151 13쪽
5 노드의 부하들 +7 15.03.09 4,437 134 8쪽
4 일단 저지르고 본다. +8 15.03.02 5,252 149 18쪽
3 분노의 이단옆차기 +17 15.03.01 6,105 150 14쪽
» 왕녀, 공주, 여왕 +10 14.12.12 8,001 165 20쪽
1 프롤로그 -왕녀의 외출- +28 14.12.10 11,785 17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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