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조회수 :
632,128
추천수 :
14,829
글자수 :
1,880,019

작성
15.04.09 01:55
조회
3,246
추천
82
글자
11쪽

비장한 목표

DUMMY

뤼프가 나간 후 나는 그의 무표정이 얼마나 위력적인 무기인지 비로소 실감한다. 나는 왕의 단점을 꼬집은 그의 지적에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당최 감이 오지 않는다. 연거푸 베푸는 관대함에 바이우스가 감동했을까? 내가 남의 조언을 받아들일 줄 아는 현명한 여성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을까? 혹은 나를 우습게 보는 건 아닐까? 어쩌면 네 명이나 왕을 보필하면서 눈치만 늘어서 나의 반응을 미리 예상했을 수도 있겠네. 그 어떤 것도 답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끈한 호박머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걸 그가 어떤 심정으로 이걸 내게 주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단지 그의 빈틈없는 일처리 능력이 왕이 배고플 경우를 대비하려 했던 걸까? 아니면 저녁을 굶은 나를 순수하게 걱정했던 걸까?

후자였으면 좋겠다. 갓난아기일 때 각인이 된 탓인지 나는 이 목석같은 노신사에게 이유도 없이 마냥 정이 간다. 그 무표정이 장벽처럼 느껴져서 쉽사리 다가갈 수 없지만, 그와는 단순히 왕과 신하의 관계가 아닌, 좀 더 각별한 사이가 되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이러한 까닭에 나는 그의 성의가 담긴 호박머핀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나중에 하녀가 이 방을 청소하다가 이를 보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나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다. 바로 비밀의 방에 보관하는 것이었다. 나는 호박머핀을 여기서 주웠던 빛의 돌과 함께 밀실의 가운데 바닥에 덩그러니 내려두었다. 마법이 깃든 물건은 쥐나 벌레의 접근을 막아준다 하니 장기간 보관이 가능할 것이다.


모든 일을 마친 나는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누웠다. 그대로 누운 채 생각을 시작하면 걷잡을 수도 없는 고민이 시작될 같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잠이 들었다. 하룻밤을 샌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꿈도 꾸지 않고 죽은 듯이 자면서 피로를 회복했다.

이튿날 눈을 뜬 순간부터 나는 비장한 기분에 휩싸였다. 내게는 오늘 반드시 이뤄야하는 목표가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노드의 왕궁기사단장 직위를 보존한다.’

바로 이를 위해 일찍 잠이 들었던 것이다. 바이우스와의 사이가 불편해지는 것이 싫어 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고집을 꺾었던 것이 아니다. 설득 되었던 것이 아니다. 노드가 하워드를 지키지 못한 것은 바로 그의 명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의 직위를 박탈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의 선조 윌리엄이 정한 규칙이라 해도 정당하지 않다면 바꿔야 한다.


이윽고 세안을 담당하는 하녀들이 물이 든 대야를 들고 방에 들어왔다. 나는 이 때 ‘오늘 처음으로’ 열린 문을 통해 노드의 얼굴을 보았다. 어제는 내가 밤을 새웠는데 오늘은 이 아저씨가 밤을 새웠구나. 씩씩하게 자라난 수염들 덕분에 야성미가 물씬 풍긴다. 그 거무튀튀한 수염 때문에 그의 맑은 눈빛이 더 강조되어 보였다. 그리고.... 더 슬퍼보였다.

그는 밤새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알 수 없다. 내가 아는 것은 단지 노드가 밤을 새웠다는 사실 뿐이다. 그렇게까지 해서 왕궁기사단장으로 있을 수 있는 마지막 하루를 가득 채웠다는 사실뿐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동기가 되었다. 다시 한 번 오늘 회의에서 내가 달성해야 할 목표를 상기하고 마음을 굳게 다진다.


두 번째 회의는 어제와 같고도 달랐다. 같은 점은 오늘도 바이우스가 회의를 진행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고, 다른 점은 작위의회가 각자의 영지로 돌아간 까닭에 오늘은 어제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만 참석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어제와 달리 오늘은 내에게 확실한 목표가 있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 같은 점은, 어제처럼 내가 없어도 이 회의가 진행되는데 아무 지장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저는 크루거 스웨이츠 경이 차기 왕궁기사단장에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기사의 전형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어제 가장 먼저 발언을 시작한 사람이 헤니건이었는데, 재미있게도 오늘은 그를 적극적으로 막아섰던 남자, 오티즈가 발언을 시작했다. 그는 어제의 헤니건처럼 말을 하면서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나 외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의 얼굴을 차례로 훑어보는데,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어제 헤니건을 대할 때처럼 성난 범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인자한 양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 순간 기분이 확 나빠졌다. 윈더민에 온 후 내가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건 사실이다. 왕이 된다는 사실 때문에 한동안 제 정신이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어제 최소한 내 마음가짐이 달라진 건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신하라는 자들이 왕의 뜻도 헤아리지 못하다니.... 그 무지가 나를 계속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게 만드는 요인으로만 느껴져 몹시 불쾌했다.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다. 내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또 다른 누군가가 앤디를 추천한 것이다. 이름은.... 모르겠다. 분명히 인사를 나누긴 했는데.... 돌아서면 잊어버릴 정도로 평범하게 생겨서 전혀 기억에 남지 않았다. 아무튼 나는 지금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에 더 열이 뻗쳤다. 그래서 더 참지 못하고 외쳤다.


“저도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어제의 그 현상이 또 다시 일어난다. 모두가 일제히 내 얼굴을 쳐다보는 그 현상 말이다. 나는 이번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크루거 스웨이츠 경, 앤디 셔벗 경. 두 분 모두 훌륭한 기사들이에요. 제 눈으로 두 분의 활약을 보았기에 그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그분들보다 노드 체스터 경이 계속 왕궁기사단장을 맡아주셨으면 좋겠어요.”

“....!!”

나를 지켜보고 있던 눈들이 놀라 팽창되는 가운데 나는 잠시 마치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주위 반응을 살피고 있는 바이우스를 주시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표정이 조금도 변하지 않아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기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노드를 지켜라.’ 계획의 첫발을 내딛은 나는 회의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고, 바이우스도 이 때만큼은 그 중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하오나 왕녀님, 체스터 경은 왕궁기사단장 직을 계속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방금 전 앤디를 추천한 사람, 평범하게 생긴 남자가 곤란한 표정으로 정중하게 말했다.

“크루거 경도, 앤디 경도 그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어요. 심지어 그들 두 사람이 힘을 합쳐도 노드 경 하나를 당할 수 없다는 말까지 했어요. 현재 바르테인에서 그를 이길 수 있는 기사가 있다면 한 번 대보세요. 그는 명실 공히 최강의 기사잖아요. 게다가 오랫동안 왕궁기사단장직을 수행해왔고, 기사들을 통솔하는 능력도 부족함이 없어요. 이 정도면 왕궁기사단장을 맡기에 충분한 조건 아닌가요?”

생각했던 일을 저지른 터라 나는 약간 공격적인 상태였다. 그 평범한 남자는 쏘아보는 내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오티즈가 끼어들었다.

“왕녀님 말씀이 맞습니다. 체스터 경이 왕궁기사단장으로서 부족함이 없다는 건 이미 검증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크나큰 과오를 범했습니다. 도저히 왕궁기사단장의 직무를 계속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과오 말입니다.”

아직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한 건 아니지만 분위기로 봐서 오티즈는 그 평범한 남자와 기 싸움을 펼칠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개입하자 오티즈는 오히려 자신의 적을 거들었다. 이상하게 나는 이것이 놀랍지가 않았다. 아마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예측했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이번엔 오티즈를 노려보며 따지듯 물었다.

“과오라면 무엇을 말하는 거죠?”

“그는 하워드 선왕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노드 경은 하워드가 죽을 때 거기 없었어요. 하워드가 명한대로 바르테인군을 통솔하던 중이었다고요. 도대체 그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해야 했던 거죠? 왕의 명을 거부했어야 했나요? 그는 훌륭한 기사지만 미래를 읽을 수는 없어요. 당신들은 하워드가 그렇게 암살당할 줄 알았나요? 그래서 그가 윈더민을 떠나는 걸 보고 있었던 건가요? 도대체 어째서 하워드의 죽음이 노드 경의 책임이란 거죠? ”

“....하지만 왕이 자연사나 병사할 때가 아닌 경우 왕궁기사단장을 해임시키는 건 바르테인 건국왕이신 윌리엄 선왕 때 정해진 수칙입니다. 더구나 왕궁기사단이 본보기로 삼은 소샤이트의 검은 강철기사단도....”

“윌리엄 선왕은 저의 선조이시지만 이미 돌아가셨....”

...고 불합리한 수칙은 바르테인의 현재 왕인 내가 고치겠다. 나는 오티즈에게 이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말문이 막혀 그럴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토론은 대강 내 예상 범위 안에 있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내가 개입하는 것이 뜻하지 않았던 사건이겠지만 이 쪽은 어젯밤에 지금 이 토론을 간소하게나마 경험해보았다. 바이우스를 통해 그들이 가장 의지하고 있는 논리가 무언지 미리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에 반박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방금 일어났다. 그래서 나는 준비한 말을 다 끝내지 못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깜빡 잊었습니다.”

이 능구렁이 같은 영감. 그 말을 믿을 거 같아? 누가 봐도 이건 일부러 열어둔 거잖아. 바이우스는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걸어가 열려 있던 회의장 문을 닫았다. 그러자 문틈으로 보이던, 노드의 얼굴이 가려졌다. 하지만 나는 그 전에 하던 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노드는.... 내가 그를 변호하면 할수록 더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불찰로 흐름이 끊겨 버렸군요. 아직 회의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잠깐 쉬었다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문을 닫고 자리에 돌아온 바이우스가 넌지시 내게 물었다. 그의 얼굴은 늘 보던 그대로라 무슨 생각을 하는 지 통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요한 일은 회의장 안이 아니라, 밖에서 결정된다는 바이우스의 말이 때마침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당신의 댓글 하나가 당신이 읽고 있는 글을 바꿀 수 있습니다.


작가의말

가족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대부도에 다녀왔는데 갯벌체험이나.... 이런 것 보다

펜션이 훨씬 더 볼 게 많았던 것 같습니다 +_+

노래방에.... 당구장에.... 오락실에....

세상에 그런 집이 있다니....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왕녀의 외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7 뜻밖의 실수 +4 15.04.12 3,095 83 11쪽
26 회의를 주도하는 자 +6 15.04.11 3,094 83 11쪽
25 기사 노드 체스터 +8 15.04.10 3,185 87 8쪽
» 비장한 목표 +6 15.04.09 3,247 82 11쪽
23 정치라는 이름의 작업 +8 15.04.05 3,219 94 13쪽
22 적자우월주의 +4 15.04.03 3,140 73 8쪽
21 관대한 기사 +10 15.04.02 3,445 97 10쪽
20 무단 침입. +8 15.04.01 3,721 121 17쪽
19 나가자, 나가자, 나가자! +8 15.03.31 3,474 122 10쪽
18 바르테인의 전당 +8 15.03.30 3,463 86 10쪽
17 추첨제 +12 15.03.28 3,518 106 10쪽
16 영지 없는 백작 +10 15.03.27 3,908 99 8쪽
15 아득한 기억 +8 15.03.26 3,520 94 9쪽
14 결론 +12 15.03.24 3,845 126 15쪽
13 첫회의 +8 15.03.23 3,722 108 8쪽
12 포커 페이스 +4 15.03.20 3,722 106 10쪽
11 동기 +10 15.03.18 3,854 100 7쪽
10 즉위식 (수정본) +11 15.03.17 4,392 132 16쪽
9 관례 +6 15.03.16 4,351 116 12쪽
8 응징 +10 15.03.15 4,293 122 9쪽
7 마지막 임무 +6 15.03.12 4,130 117 9쪽
6 검에 갇힌 정령들 +4 15.03.11 4,479 151 13쪽
5 노드의 부하들 +7 15.03.09 4,436 134 8쪽
4 일단 저지르고 본다. +8 15.03.02 5,252 149 18쪽
3 분노의 이단옆차기 +17 15.03.01 6,105 150 14쪽
2 왕녀, 공주, 여왕 +10 14.12.12 8,000 165 20쪽
1 프롤로그 -왕녀의 외출- +28 14.12.10 11,783 173 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