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징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오른손이 셔벗 경의 허리춤에서 그 망할 자식을 뽑고 있었다. 손잡이를 쥐는 순간 느꼈다. 정령검은 확실히 살아있는 생명이다. 좁은 쇳덩이 안에서 약동하는 의식과 나의 의식이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손은 그대로 통로가 되었다. 놈의 깊은 분노와 검은 증오가 나의 그것과 공명하기 시작한다.
내가 느낀 정령검의 실체는 한 마디로 쇠사슬에 묶여 울부짖는 맹수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놈은 아까처럼 칼날에서 주먹을 뻗어 내 얼굴을 부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손잡이를 쥔 사람에게 위해를 가할 수는 없다. 손잡이를 쥔 사람이 원하지 않는 대상도 공격할 수 없다. 이상과 현실의 완벽한 대치. 절망적일 정도로 절대적인 금제. 몸을 상처 입힐 수 없는 녀석은 그래서 대신 정신을 상처 입힌다.
“앤디, 이 한심한 녀석! 여자 아이에게 검을 빼앗겼단 말이냐? 그러고도 네 놈이 기사라고 할 수 있냐?”
“입 닥쳐!!”
앤디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내 분노가 먼저 터져 나왔다. 나는 그대로 그 검을 내리치려고 바위 같은 것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내가 들고 있는 게 세상 그 무엇보다 단단한 정령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냉정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한다.
어쩌지? 이 빌어먹을 자식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겠는데.... 어떻게 하면 엿을 먹일 수 있지?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경악에 가득 찬 시선들이 나를 향해 쏟아진다. 그러나 나는 크게 개의치 않고 돌아다녔다. 그러다 내 눈에 도적들을 불러들인.... 저녁식사를 위해 피웠던 아름드리 모닥불이 보였다.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놈의 몸을 그 불길에 지지기 시작했다.
“핫핫핫! 멍청한 년! 지금 뭐하는 거냐? 내가 너희처럼 살덩이로 이뤄진 피조물로 보이나? 뜨거움이 내게도 고통일 거라고 생각했나?”
놈은 자신의 말에 가장 크게 동요할 사람을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 처음에는 노드를 노리더니 방금 전에는 앤디, 이번에는 나를 택했고, 녀석의 판단은 정확했다. 안 그래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이 난리를 피우고 있었던 나는 녀석의 조롱에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 약이 올랐다.
확실히 놈의 말 대로였다. 열전도가 높은 쇳덩이는 금세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그 안에 있는 녀석은 거기에 대해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놈을 들고 있는 내손만 더 버티기 힘들 정도로 뜨거워졌다.
하지만 녀석이 모르는 것이 있다. 이 휘렌델 바르테인은 화가 날수록 더 냉정해지는 성격이라는 사실이다. 열 받으면 내 머리는 더 잘 돌아간다. 이렇게 말이지.
“전하! 진정하십시오! 그러시다 다치십니다!”
나는 나를 말리기 위해 바로 근처까지 와 있는 기사들 중에서 크루거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의 정령검도 허리춤에서 뽑아냈다.
천하장사의 검은 칼집에서 뽑히자마자 아까 내가 본 도끼 모양으로 변형되었다. 손잡이를 쥐자 두 번째 정령검과도 교감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변형은 원래 주인인 크루거가 원한 것이 아니라 검에 담긴 정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이 녀석 또한 검에 갇힌 처지에, 자신을 가둔 인간들에게 극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고, 그 분노를 표출하는 수단으로 자신의 육체를 더 공격적인 형태로 일그러뜨린 것이다.
“뭐하는 거냐?! 핫핫핫!”
원래 들고 있던 앤디의 검이 큰 소리로 나를 비웃었다. 녀석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천하장사의 검까지 뽑은 것을 그저 내가 분을 이기지 못해 충동적으로 저지른 기행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하는 행동이었다.
머릿속에 아까 보았던 이미지가 스쳐지나간다. 이 천하장사의 검에 부딪힌 도적들의 검이 힘없이 부러지고 꺾이던 광경이 말이다. 정령검은 타격이나 열에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도 죽음은 두려워한다.
한 번 쥐어보고 내가 정령검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된 점이 있다. 쇠로 만들어진 검은 정령에게 있어 감옥인 동시에 육체다. 그것이 없으면 그 안에 있는 정령들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이 그들의 죽음이다. 그래서 정령검들은 검신이 부러지지 않게 필사적으로 마법을 펼치는 것이다.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물건이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나는 쫑알거리는 앤디의 검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천하장사의 검을 양손으로 잡고 머리 위까지 들어올렸다. 손잡이를 통해 나는 정령에게 내가 요구하는 바를 전달한다.
“진짜 세게 한 방 갈길 수 있게 해줘.”
언어의 힘이다. 문장이 되어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은 내 의지를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다듬어 준다. 정령은 물론 내 명을 거역할 수 없다. 녀석이 전해준 마법이 내 팔을 휘감는다. 내 팔뚝은 마치 활시위를 최대한 당긴 것처럼 팽팽한 긴장에 놓이게 되었다.
천하장사의 검은 다른 검들을 가볍게 분질러 버렸지만 저 쫑알거리는 녀석은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했다. 모르긴 몰라도 견고함 면에서는 천하장사의 검이 몇 수 위라는 뜻이다. 단순히 부딪히는 충격이 정령검에게 고통이 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천하장사의 힘으로, 부러뜨릴 기세로 때린다면 어떻게 될까? 녀석은 자신의 육체가 부서지지 않기 위해 버텨야 한다. 필경 한계 이상의 힘을 쏟아야 하는 상황일 것이다.
결론에 다다른 나는 팽팽히 당겨진 양손을 크게 휘둘러 크루거의 검으로 셔벗의 검을 내리쳤다. 도끼의 모습을 한 검이 허공을 가르면서 원심력이 더해진다. 휘두르는 내 간담조차 서늘해질 정도로 무서운 기세로 정령검은 땅에 떨어진 정령검을 내리쳤다. 부딪히는 순간 천둥처럼 쩌렁쩌렁한 소리가 났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논리는 완벽하지 않았다. 크루거가 도적들의 검을 똑똑 부러뜨릴 수 있었던 건 검이 견고해서가 아니라 힘이 세졌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래도 막상 정령검으로 정령검을 내리쳐 보니 다행히 더 단단한 쪽은 크루거의 검이었다. (그 사실도 이 때 밝혀진 것이다.) 과정은 잘못되었어도 결과는 내가 의도한 대로 나온 것이다.
이것은 나만이 가능한 행동이었다. 원래 앤디도 자신의 검에 항상 적지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놈을 벌줄 뾰족한 방법을 찾지는 못했다. 다른 정령검을 이용하다니.... 왕이 아닌 그 누가 이런 해결책을 생각해낼 수 있겠는가.
내가 왕이 아니었다면 기사들이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검을 순순이 내어주었겠는가. 사실 앤디도, 크루거도 나에게 검을 빼앗긴 건이 아니라, 차마 반항할 수 없어 저항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기사도 때문에 여자에게 함부로 손을 대기 곤란했기에 정령검으로 정령검을 때리는 순간까지 몸을 던져 나를 막을 수도 없었다.
또한 아무 것도 몰랐던 때였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정령검은 할크루 시대에만 만들어진 물건이었기에 그 수가 극히 적었다. 윈더민의 왕궁기사단은 전 세계에서 정령검을 가장 많이 보유한 집단이다. 그런데도 고작 여덟 자루밖에 없을 정도다.
그렇게 수가 적은 줄 알았다면, 스웨이츠와 셔벗 가에서 가보로 대대로 물려주는 귀한 물건인 줄 알았다면 아무리 내가 왕이었다 해도 ‘없애버릴’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이 때 앤디의 정령검이 소리를 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비명을 질렀던 건 확실하다.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놈의 비명소리를 느꼈다. 비록 그것이 귀를 통해 들은 건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는 녀석이 고통을 느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정령검은 누군가 손잡이를 잡아주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는 무력한 존재다. 즉, 내가 손에서 녀석을 놓았을 때 이미 목소리를 내어 말을 하는 것조차 대단히 버거운 상태였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녀석의 비명이 느껴졌다.
나는 멱살을 잡듯이 녀석을 다시 손에 쥐었다. 안간힘까지 모두 짜내고 녹초가 된 녀석의 기진맥진한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다행히 그 덕에 검신에는 상처하나 생기지 않았다. 나는 차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더 지껄여봐!”
“.....!!”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처음으로 죽음을 실감한 뒤 놀라고 겁이 난 모양이다. 비에 젖어 잔뜩 쪼그라든, 벌벌 떨고 있는 토끼를 보는 것 같았다. 손잡이를 통해 녀석이 느끼는 감정이 부분부분 어렴풋이 엿보인다. 왠지 나는 녀석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 것 같다. 이 못된 정령검은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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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글을 쓰다 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분량이 많이 나올 때도,
그 반대일 때도 있습니다.
글작성을 시작할 때만 해도
오늘 분량은 너무 적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나눠서 올릴 정도로 많은 양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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