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회의
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바이우스는 그제야 겨우 이 시각에 내 방을 찾은 용건을 꺼냈다.
“그러면 내일 일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오전 9시 30분에 회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왕의 전당에 올릴 초상화를 그릴 예정입니다.”
바이우스는 매일 저녁 9시 반이 조금 지난 이 정도 시각에 찾아와 내일의 일정을 알려주고는 했다. 이제 이는 윈더민에 도착한 이래 나의 ‘평상시’가 된 일상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언제나와 같이 얌전히 있을 수 없었다.
“회의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첫 번째로 참여하는 회의.... 이것은 내게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 회의라는 건 실질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지 않은가! 바르테인이라는 나라가 인형이라면 그것을 실로 조종하는 행위에 비할 수 있다. 내가 왕이라는 사실이 사무치게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이 밀려왔다. 약간 흥분된 상태에서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부담도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패닉에 빠지지 않았다. 나는 감정에 상당히 영향을 받는 기분파다. 내가 왕이 되고자 했던 게 부모님을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로 내 태도는 정반대로 바뀌었다. 내게 일어나는 일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목각으로 만들어진 인형, 바이우스는 회의에 참여하게 되어 들뜬 나를 보면서도 한 마디도 하지....
“기쁘신가 보군요?”
어? 바이우스가 저런 말을 할 줄이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그 특유의 딱딱한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목소리도 살갑지 않았지만 무뚝뚝한 그가 관심을 보인다는 게 굉장히 어색하고도 신기했다.
“떨리기도 하고, 기대도 되요. 내일 회의 주제는 뭐죠?”
“어베레드 성에 대한 대책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회의의 의제로 그 문제보다 더 어울리는 것이 또 있을까.
바르테인의 동쪽 끝에 있는 어베레드 성. 그곳을 침공한 붉은 바위족은 강철거인의 후예도 아닌, 즉 철기도 갖추지 못한 보잘 것 없는 이민족이었다. 그런데 이를 토벌하려다 왕은 죽고 성은 적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강철거인의 다섯 후예 중 최강국이라 평가받는 바르테인의 자존심이 구겨진 것이다.
내일은 내가 왕이 된 지 사흘째 되는 날, 서약이 효력을 발휘하는 첫 번째 날이다. 즉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내가 정식으로 왕이 되는 걸 기다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면 부디 일찍 주무시기 바랍니다.”
바이우스는 공손히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원래 그는 매일 밤 나가면서 ‘편안한 밤 되십시오.’라고 인사했다. 지금처럼 일찍 자라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사소한 변화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왜냐하면 준비할 것이 산더미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오후 내내 읽었던 제왕학 서적 가운데에서 ‘전쟁과 군사학’이라는 제목의 책을 골라냈다. 나는 원래 책을 읽는 것을 싫어한다. 책장을 넘기자 모르는 단어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영주가 되기 위한 공부를 조금이라도 해왔다면 이렇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참회하는 심정으로 그것들을 억지로 씹어 삼켰다.
기왕 마음을 먹은 이상 제대로, 잘하고 싶다. 영주로서는 최악이었으니까.... 이번에 제대로 하지 않으면 작은 시골 마을 페나가 아닌, 바르테인 전체가 불행해진다. 이런 생각을 하니 한 자리에 가만 앉아 있지 못하는 야생마 같은 천성도 억눌러졌다. 어머니가 보시면 기쁨의 눈물을 흘리시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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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하던 첫 회의에 참석할 때 내 눈은 시뻘겋게 충혈 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대화가 통할 정도의 지식만 속성으로 갖추는 것이 목표였는데, 아무리 익혀도 성에 차지 않아 결국 밤을 꼬박 새고 만 것이다.
회의장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3일 전의 즉위식에 참여했던 영주들, 즉 작위의회 구성원들까지 모두 참여하는 ‘대회의’이기에 평상시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왕성의회와 작위의회가 동시에 참석하는 회의는 흔치 않은데, 공교롭게도 얼마 전에 이런 중요한 회의가 한 번 더 열렸다 한다. 바로 그 회의에서 내가 하워드의 다음 왕으로 추대된 것이었다.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나는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아니, 피로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바르테인을 다스리게 된다는 사실이 끊임없이 내 심장을 쥐락펴락했기 때문이다. 나는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그래서 성장인 바이우스 뤼프가 회의장에 당당히 입장하는 걸 보면서도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광경이었다. 브란트 성의 성장 앨런만 해도 회의에 참석하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이지,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바이우스는 무려 회의 진행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이 때까지 너무 긴장하고 흥분된 나머지 이것이 이상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는 윈더민에 도착한 후 내가 주인공인 즉위식에조차 수동적으로 이끌려 가는 입장이었다. 당시 내가 제 정신이 아니었던 까닭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내가 출발하기 전부터 그 즉위식이라는 것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반 쯤 넋이 나간 상태였음에도 나는 주도권을 빼앗긴 것 같은 그 느낌이 무척 못마땅했다. 그래서 이번 회의를 통해 만회하고 싶었다. 끌려가는 입장에서 끌고 가는 입장이 되리라 기대했다.
“지금부터 회의를 개최하겠습니다.”
그리고 바이우스의 엄숙한 선언 후에 회의가 시작되었다. 누군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와 한 번 인사를 했음에도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쩐지 분위기로 보아 꽤나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는, 높은 양반 같아 보였다.
한 시간쯤 지나자 나는 이런 기분이 들었다. 지금 몰래 일어나서 문 밖으로 나가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내가 없어진 걸 눈치 못 채지 않을까....
나는 지금의 내 수준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꿈꾸는 상황....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내가 뭔가 지혜로운 말을 하면 그 때마다 ‘훌륭하십니다. 여왕님!’ 혹은 ‘오오! 어떻게 그런 생각을....’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건 시간이 흐른 후에나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첫 회의에서 내가 바란 건 적어도 사람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 것이었다. 헤럴드 쇼를 페나의 영주대리로 임명했을 때 세율이 높은지도 낮은지도 몰라 헤맨 경험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나는 내가 왕이니까 당연히 최종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 나라고 생각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어림잡아 70명 가까이 되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지금까지 발언권을 얻어 말하는 사람은 6~7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결론을 세워두고 있었다. ‘결정은 왕인 내가 내리고 저들은 내게 정보를 주는 사람’이라는 내 기본 전제부터 잘못되었던 것이다.
내가 가장 먼저 알게 된 건, 회의가 시작하자마자 바이우스에게 발언권을 요구했던 곱슬머리 남자의 이름이었다. 갈라반트 헤니건. 그리고 그는 하워드의 어머니, 에이미 바르테인의 오빠이자 헤니건 가의 당주인 것 같았다. 그는 하워드의 원수를 헤니건 가의 힘으로 갚겠다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주장했다.
복수를 위한 병력을 차출해달라는 것이 갈라반트의 주장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열렬히 그에게 반대하는 중이었다. 이 노골적인 대립관계는 회의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치 챘다.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용어도 반 정도는 내가 이번에 알게 된 말들이었다. 문제는 누구의 주장이 더 타당한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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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바이우스 : 오후에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데 밤을 새시다니....
휘렌델 : 아 그것 때문에 일찍 자라고 한 거였어요?
바이우스 : 설마 제왕학 관련 서적들이 펼쳐져 있는 걸 곁눈으로 보고 밤을 새실 걸 알았겠습니까.
휘렌델 : 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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