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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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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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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880,019

작성
15.03.30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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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2
추천
86
글자
10쪽

바르테인의 전당

DUMMY

사실 초상화를 그리는 건 처음이 아니다. 페나에 있을 때도 몇 번 경험해보았다. 다만 그 때는 화가가 내 얼굴을 화폭에 옮기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거렸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세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얌전히 있었다. 전날 밤을 샌 피로가 몰려왔지만 단 한 순간도 잠이 들지 않았다. 이를 보면 내가 변하기는 확실히 변했나 보다.

“다 되었습니다.”

그 화가는 왕을 대하는 예법에 익숙하지 않았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못 꼿꼿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내가 세 시간 동안이나 무얼 보고 있었는지를 깨닫는다. 나는 아무렇게나 기른 그의 수염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캔버스 위를 자유로이 질주하는 팔의 움직임은 춤사위 같고, 그 거침없는 슥슥거리는 소리는 음악 같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림은 마음에 들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든 것은 그의 솜씨, 그림 자체였다. 거친 붓의 질감을 그대로 살리면서, 그로인해 자칫 산만해질 수 있는 느낌을 섬세한 채색으로 절제시켰는데 그 균형이 매우 절묘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작품의 모델, 즉 왕관을 쓰고 있는 소녀였다.

윈더민에 도착한 후로 나는 매일 안나에게 화장을 받고 있었는데 그 때마다 안나는 만족스러운지 물으며 거울을 비춰주곤 했다. 거울에 비친 소녀는 마론 인형처럼 핏기 없는 하얀 얼굴에, 입술은 붉고 작았고 도톰했다. 그 모습이 너무 낯설어서 그녀가 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림에 담긴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은 첫 번째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안나가 공들여 화장해준 덕분에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나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그림 속의 소녀가 너무나도 불안해 보였다는 점이었다.

음악을 배우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매우 의욕적이었다. 얼마나 의욕적이었냐면 바이올린을 8개나 망가뜨릴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나는 단지 잘하고 싶다, 열심히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소리를 낼 수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악기에 그 열정을 퍼부었고, 그러다보니 활대에 힘이 들어가 줄을 끊기 일쑤였다. 즉 제대로 된 방향으로 노력을 쏟는 법을 몰랐던 것이다. 그림 속의 소녀를 보고 있노라니 왠지 그 때가 생각났다.


“마음에 드십니까, 여왕님?”

스펜서가 내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묻는다. 나는 절반의 진심과 절반의 거짓을 담아 대답했다.

“마음에 들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보글럼 씨.”

라울은 화가의 노고를 치하한 후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액자를 꺼냈다. 그가 정성들여 그 그림을 액자에 넣는 동안 그 화가가 내게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런데 여왕님 인생에는 뭔가 재미있는 일 없으십니까?”

“네?”

그의 말투가 당돌하다고 느낀 스펜서가 액자에서 눈을 떼고 화가의 말을 저지하려 한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화가가 볼멘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깔려죽겠습니다. 그 분위기에.”

스펜서는 창백한 얼굴로 내 눈치를 살핀다. 그러나 나는 화를 내기는커녕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던 말을 그가 대신 해준 것 같아 속이 시원했다. 스펜서가 비로소 안심한 얼굴로 한숨을 쉰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웃는 건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아마 노드를 만나고 왕이 된다는 소릴 들은 후로 단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기뻐한 일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이제야 그림을 그리는 내내 이 화가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고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한 때 내가 꿈꿨던 예술가의 자유분방함을 누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간접경험으로 음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웃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어떻습니까? 원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다시 그려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화가의 제안이 굉장히 매혹적이었지만 굳이 사양한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두 번 다시 방탕한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이 흔들릴까봐 두려웠던 것일까. 아니면 이렇게 화장을 하고 내가 아닌 얼굴을 하고 있는 이상 어떤 그림을 그려도 만족스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쉬워하는 화가를 뒤로 하고 스펜서와 함께 왕의 전당에 입장했다. 엄숙함이 감도는 차가운 방 안쪽 벽에는 이미 6개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 중에서 나는 왼쪽으로부터 네 번째에 있는 액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바로 웰링턴 바르테인, 나의 할아버지였다. 내가 이 윈더민 성에서 태어났을 때 바르테인의 왕이었던 사람이다.

왕이 무언지도 모르는 나이였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극진히 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사실뿐이다. 저 근엄한 눈빛과 수염, 다부진 코의 생김새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혹시 살아계셔서 재회했다 해도 나는 이 분을 못 알아 봤을 것이다.

이렇게 그림으로 다시 뵈도 할아버지는 반갑지가 않다.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죽은 아빠를 잊지 못해 윈더민을 떠나지 않으려는 나를 매몰차게 쫓아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때 정이 확 떨어졌다. 철이 들면서는 나보다 훨씬 더 윈더민에 미련을 두고 계신 어머니를 때문에 그 원망을 쉬이 지울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왜 저희를 페나에 보내신 거죠?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저희 모녀는 이 성에서 지낼 수 있었잖아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스펜서는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면서도 대답을 안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건지 확실치가 않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사람의 험담을 잘 안하는 사람 같기 때문이다. 아까 그가 왕성의회에 대해 말할 때에도, 내가 화장을 하는 중이 아니었다면 내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는 말을 아꼈을 것이다.

나는 다음에 걸려있는 삼촌, 알트론 바르테인의 초상화에 눈길을 돌렸다. 내가 철이 들었을 때 바르테인의 왕이었던 사람. 내게 있어 왕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10년 동안이나 바르테인을 다스리셨던 삼촌이다. 물론 할아버지의 얼굴도 기억 못하는 내가 이 분의 얼굴을 기억할 리가 없다. 이번이 처음 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감상을 말하자면.... 삼촌에게 죄송하지만 좀 느끼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하다못해 저 신경질적으로 찡그린 눈썹에서부터 왕의 위엄이 느껴지는데 삼촌은 뭔가 줏대가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것이 간사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내 눈은 가장 오른쪽 끝에 있는 한 소년의 초상화로 향했다. 나의 한 살 어린 사촌동생이자 1년 전에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경험들을 똑같이 겪었을 하워드 바르테인. 어베레드에서 붉은 바위족에게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나의 남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첫 느낌은.... 그냥 슬펐다. 이렇게 어린 아이였다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보니 벌써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새삼 안타까워졌다. 그는 붉은 머리카락이 마치 타오르는 불꽃이나 피어나는 꽃처럼 보이는, 단정한 이목구비의 미소년이었다. 아버지를 닮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꾹 다문 입술에서는 약간의 고집스러움도 느껴진다. 그가 낯설면서도 새삼 동생 같고 또한 운명의 상대가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나는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에 휩싸였다.


“삼촌은 왜 저와 하워드를 약혼시키셨을까요? 그리고 그랬으면서 왜 저를 한 번도 윈더민에 부르시지 않았을까요? 만약 삼촌과 하워드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우리들은 결혼할 수 있었을까요?”

나는 원래 지나간 일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버릴 사건이라 하나 이미 닫힌 가능성이라면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펜서에게 과거의 일을 계속 물어보는 까닭은 그것들이 전부 왕의 결정이었던 까닭이다. 그들이 그러한 결정을 해야 했던 이유를 파악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펜서는 이번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황송하지만 그것 또한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바이우스 경에게 여쭤보신다면 대답을 들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바이우스 경요?”

“네. 성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선왕들에게 직접 들은 얘기는 없다 해도 적어도 그 단서 정도는 말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전당에 나의 초상화가 걸렸다. 그 밑에 있는 은빛의 명패에는 ‘바르테인 제 7대 국왕 휘렌델 바르테인’이라는 글자가 필기체로 새겨져 있었다. 나는 왕의 전당에서 나 이외의 다른 왕들의 초상화를 다시 한 번씩 눈에 담아보았다. 나의 가족들, 나의 조상들인데 그들과 내가 연결되었다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는다.

나의 성은 바르테인이지만 훨씬 더 오랜 세월을 브란트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곳에 나를 환영해줄 것 같은 바르테인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아버지의 초상화는 없나요?”

물어보는 말마다 모르겠다고 말해왔던 스펜서가 이번에는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다이슨 왕자님의 초상화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도 버틸 기력이 없으셔서....”

새삼 가슴이 아팠다. 여자인 나도 왕의 전당에 내 초상화를 걸었는데 바르테인의 남자들 중에 유일하게 아버지만이 저 곳에서 빠져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가는 그 분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나에게나 그 분에게나 잔혹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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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코자크 보글럼 : 제 이름은 성만 나오고 말았군요. 뭐 괜찮습니다. 저는 그런 데 신경쓰지 않는 성격일 거 같으니까요.

스펜서 : 그런데 자세히 보면 여왕님께서는 당신의 그 성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전부 화가 화가 화가.....

코자크 보글럼 : 큭....! 못 외우셨단 말인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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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8

  • 작성자
    Lv.89 티말
    작성일
    15.03.30 04:14
    No. 1

    독자 : 그래서 결국..단역이었다는 말이군요.
    코자크 : 윽.. 그래도 언젠가 배경으로라도 등장하고 말테다!
    독자 : 하지만 소설이라 배경에 관해서는 언급이 안될테지.
    코자크 : 윽..
    독자 : 그런데 이름을 안 부른게 아니라 그냥 화가라고 말하라고 써있던건 아니었을까..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3.30 12:35
    No. 2

    스포를 방지하기 위해 웬만하면 이후 전개에 대해 입을 다무는데
    이번만은 특별히 예외로 말씀 드릴게요.
    예상하신 대로 배경이고 단역입니다 ㅋㅋ
    어쩌면 휘렌델이 얼마나 이름을 못 외우는지 증명하기 위해....
    이름을 지어준 걸지도 몰라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二月
    작성일
    15.03.30 11:08
    No. 3

    화가씨는 풀네임이 이미 부여되어 있으니, 언젠가 다시 나올거 같아요.
    그러니 그때까지 코자크씨는 코자~고 계세요. 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3.30 12:32
    No. 4

    코자크 보글럼이라는 이름은 실제 미국에 있는 러쉬모어 산에
    대통령 얼굴을 조각한 미술가들의 이름을 합친 거에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2 사파이어9
    작성일
    15.03.30 22:10
    No. 5

    오늘도 올려주셨네요. 기쁘게 잘 읽었습니다^^ 매일매일 연재해주셔서 넘넘 감사드려요.ㅎ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3.31 00:28
    No. 6

    토요일은 조카들 봐주느라 못 올렸어요 ㅠㅠ
    저는 비축분을 모으질 못하게더라구요.
    그 날 올릴 게 아니라면 글이 써지지가 않는 타입;;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2 만년근산삼
    작성일
    15.04.09 23:12
    No. 7

    "그런데 왕비님 인생에는 뭔가 재미있는 일 없으십니까?" 아마도 여왕님이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4.10 00:38
    No. 8

    앗 저도 이제 발견했네요.
    수정하겠습니다 ^^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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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적자우월주의 +4 15.04.03 3,140 73 8쪽
21 관대한 기사 +10 15.04.02 3,445 97 10쪽
20 무단 침입. +8 15.04.01 3,721 121 17쪽
19 나가자, 나가자, 나가자! +8 15.03.31 3,474 122 10쪽
» 바르테인의 전당 +8 15.03.30 3,463 86 10쪽
17 추첨제 +12 15.03.28 3,518 106 10쪽
16 영지 없는 백작 +10 15.03.27 3,908 99 8쪽
15 아득한 기억 +8 15.03.26 3,520 94 9쪽
14 결론 +12 15.03.24 3,845 126 15쪽
13 첫회의 +8 15.03.23 3,721 108 8쪽
12 포커 페이스 +4 15.03.20 3,722 106 10쪽
11 동기 +10 15.03.18 3,854 100 7쪽
10 즉위식 (수정본) +11 15.03.17 4,392 132 16쪽
9 관례 +6 15.03.16 4,351 116 12쪽
8 응징 +10 15.03.15 4,292 122 9쪽
7 마지막 임무 +6 15.03.12 4,130 117 9쪽
6 검에 갇힌 정령들 +4 15.03.11 4,479 151 13쪽
5 노드의 부하들 +7 15.03.09 4,436 134 8쪽
4 일단 저지르고 본다. +8 15.03.02 5,252 149 18쪽
3 분노의 이단옆차기 +17 15.03.01 6,105 150 14쪽
2 왕녀, 공주, 여왕 +10 14.12.12 8,000 165 20쪽
1 프롤로그 -왕녀의 외출- +28 14.12.10 11,783 17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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