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왕녀의 외출-
계절은 봄.
장밋빛으로 물든 오월.
유난히 햇살이 따스한 어느 날.
상냥한 바람이 불어오는 아침.
일곱 시.
브란트 가의 낡은 성은 경사가 순한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테라스에 서면 페나의 정경이 한 눈에 보였다. 이 작은 도시는 언제나와 같이 얌전하게 잠에서 깨어났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여기저기서 창문이 하나둘씩 열리기 시작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다.
이 일곱 시를 좀 더 특별하게 꾸미고 싶은 마음에 왼쪽 어깨에 바이올린을 올렸다. 사실 내가 정말로 배우고 싶었던 악기는 바이올린이 아니라 류트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불같이 화를 내시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류트는 나그네들이나 쓰는 천한 악기라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날이 밝았음을 알리는 종이 울릴 것이다. 나는 묵직한 종소리가 도시에 깔리기 전에 서둘러 연주를 시작했다. 곡명은 ‘왕녀의 외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다. 왜냐하면 내가 직접 작곡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어떤 싸가지 없는 놈이 어니스트의 명곡 ‘설레는 외출’을 따라 이름을 지은 게 아니냐며 비웃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있는 힘껏 그 놈의 싸대기를 때렸다. 어머니와 외할아버지에게 그 일로 호된 꾸지람을 들었지만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장기라 팔 힘이 충분하지 않았던 게 아쉬울 뿐이다.
사실 이 노래는 나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이 멜로디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따로 있다. 바로 나의 아버지, 다이슨 바르테인이었다. 아버지는 기억도 희미한 어린 시절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 분이 만드신 멜로디만큼은 확실히 내 뇌리에 남아있었다.
왕녀님. 어디 있나요.
세상은 검은 손으로 가득해
먼지투성이가 되어버릴지 몰라요.
왕녀님. 돌아오세요.
그렇다.... 이 노래는 동요다. 아버지도 딱히 노래를 하셨던 게 아니라 어린 나와 놀아주면서 흥얼거리셨던 것뿐이다. 어쨌든 그 멜로디를 뼈대로 살을 붙여 완성했으니 이 노래를 비웃는 건 아버지를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만들어진 목적부터가 다르니 설레는 외출과 비교하는 건 정중히 거부하겠다.
기억 속에 남은 멜로디를 연주하다 보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는 더 없이 상냥하고 따뜻하며 기쁨에 가득 차 있다. 내가 이 멜로디를 노래로 만든 이유도, 이 노래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5월의 어느 날 아침 일곱 시. 나는 이 짧은 노래를 끝마치기 전에 바이올린 위를 거침없이 질주하던 활을 내려놓았다. 종이 울렸냐고? 천만에. 내 계산은 완벽하다. 절대로 이 소중한 노래가 종소리에 파묻히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연주를 멈춘 이유는 성으로 달려오는 마차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마차에는 검은 늑대가 그려진 깃발이 꽂혀 있었다. 검은 늑대는 바로 바르테인 가를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내 이름 휘렌델 바르테인의 성이자 이 나라의 이름인 그 바르테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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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도입부에 제가 좋아하는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봄날 아침’을 어레인지 해보았습니다.
저는 이 시에서도 전반부를 특히 좋아합니다.
일년 중 봄
하루 중 아침
아침 중 일곱 시.
가장 좋은 것만 정성을 다해 추려내는 이미지가 그려지면서
점점 기분이 고조되거든요.
그 상승감이 왕의 이미지와 어쩐지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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