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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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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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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29
글자수 :
1,880,019

작성
15.03.26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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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0
추천
94
글자
9쪽

아득한 기억

DUMMY

바이우스도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금 전 일어난 일이 그도 믿기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그만큼 그가 웃는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는 이런 기적이 벌어진 이유가 무언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분명 내가 이 말을 하고 난 직후였지?

‘그거 먹고 떨어지라 그러세요.’

이크...! 나도 모르게 또 저지르고 말았구나. 적어도 말만큼은 정숙한 숙녀답게 하기로 어머니와 약속했는데.... 장례를 치르면서 이 약속만큼은 꼭 지키려고 다짐했는데.... 나 말고 다른 꼬맹이가 왕이 될 수도 있었다는 말에 흥분해서 무심코 험한 말이 나오고 말았구나.

그런데 저 말이 그렇게 웃긴가? 다른 귀족 아가씨들이라면 잘 하지 않을 말인 건 인정한다. 아무래도 그 동안 얼이 빠져 있느라 내 성격을 드러낸 적이 없어서, 바이우스 입장에서는 제법 의표를 찔린 것 같다.

“죄송합니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정신을 차린 바이우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평상시와 별로 다르지 않은 표정과 목소리지만 지금 굉장히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 정도냐면,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한 마음이 생길 정도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이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충분히 불쾌감을 느끼실 수 있는 경솔한 행동을 했습니다.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솔직히 그가 웃었다고 해서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원래부터 나는 남의 실수에 대해서 시원하게 넘어가주는 성격이다. 오히려 지금은 저 바이우스의 인간적인 면을 본 것이 기쁘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은 왕의 입장이기에 약간 고민스러웠다. 내가 하는 말에 아랫사람이 웃음을 터뜨리는 건 별로 좋은 모양새가 아니다. 게다가 그 로크라는 꼬맹이 얘기를 들어서인지 나는 왕으로서의 권위를 도전받는 것에 한층 민감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바이우스의 실수를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평상시 태도로 볼 때 그는 결코 나를 업신여긴다거나 경거망동할 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방금 전도 그가 의도적으로 비웃은 건 아니었다. 그 자신도 부끄러워하고 있는 ‘사고’였다. 재발할 가능성이 없다면 굳이 그를 벌할 필요도 없다.

“만약에 다른 누가 봤다면 본보기로 성장을 처벌해야 했을 거예요. 하지만 다행히 지금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잖아요. 그리고 방금 전 성장은 내게 아주 중요한 정보들을 알려주었어요. 보상을 하면 했지 처벌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바이우스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좀 익숙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표정이 변하지 않아도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감이 온다. 지금 그는 석연치 않아하고 있다. 나한테는 용서를 받았지만 아직 그 자신이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 마음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러면 벌이라 생각하고 지금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해 주세요. 꼭 알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바이우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궁금한 건 못참는 성격이었다. 안 그래도 조만간에 물어보려 했었던 얘기를 이 때다 싶어 꺼냈다.

“제가 여기 도착했을 때 처음 뵙겠다고 인사했었잖아요. 그런데 처음 본 게 아니죠? 제가 어렸을 때도 바이우스는 이 성의 성장이었잖아요.”

바이우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답지 않게 약간 뜸을 들였다. 나는 그가 살며시 긴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왜 처음 본다고 인사했던 거죠?”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 저를 기억하시지 못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성장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것도 굉장히 선명하게요.”

“.....”

“문제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대체 제가 어렸을 때 성장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나는 왠지 여기에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기를 은근히 기대했던 것 같다. 여태까지 몇 번 실수한 것처럼 이번에도 긴장한 바이우스가 한참동안 뜸을 들이다, 무언가 충격적인 진실을 전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바이우스는 어느새 평상시로 돌아와 있었다.


“대부분의 동물은 태어나서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인식한다고 합니다.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물론 내가 들어봤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왠지 굉장히 그럴싸한 이야기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급한 용무가 생긴 세필리아 왕녀님에게서 잠시 부탁을 받았던 일이 있습니다. 바로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는 일이었죠.”

음? 세필리아라면 우리 어머니 이름이다. 그리고 18년 전이라면 그 아기는 왠지 나인 것 같은데? 설마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본 사람이 이 양반이었나?

“아기는 계속 울었습니다. 그 때는 제가 윈더민 왕성에서 일한 지 7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저는 성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에 숙련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는 아기를 달래는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니, 점점 더 결사적으로 울었습니다. 숨이 막혀 기침까지 하더군요.

저는 너무 당황해서 경험 많은 하녀들을 부를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기가 곧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저는 몹시 두려웠습니다. 지금도 그 때만 생각하면 오금이 저립니다.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게 어떤 건지 처음으로 겪어봤습니다.”

이봐.... 그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 딱딱한 목소리로 그런 소리를 해봤자 전혀 설득력이 없잖아.


“뭐든 좋으니 빨리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당황한 저는 급한 마음에 아기의 입에 손가락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쳤습니다. 아기는 눈물이 맺힌 까만 눈망울로 제 얼굴을 응시했습니다. 그 작은 손으로는 있는 힘껏 제 손가락을 쥐었죠.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지나간 것 같은 고요함 속에서 그 작은 움직임만이 느껴졌죠....”

이 때 또 한 번 바이우스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일렁이는 걸 보았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를 보면서 어쩌면 바이우스가 겉보기보다 훨씬 더 감상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게는 그 순간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에게도 그 순간 제 얼굴이 각인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감상에 빠진 건 그만이 아니었다. 그 얘기를 듣고 있자니 왠지 뭉클해져서 나도 잠시 멍하니 가만있었다. 두 사람 중에 먼저 정신을 차린 쪽은 역시 바이우스 쪽이었다.


"그 갓난아기 때의 일 때문에 성장에게 막연한 친근감을 느끼는 걸까요?"

바이우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후, 회중시계를 한 번 슬쩍 쳐다 보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이제 회의를 재개할 시간입니다.”

“아, 네. 먼저 들어가세요.”

바이우스는 내게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방문을 나갔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언제나와 같이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한 성장으로 돌아가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당황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쓰러지지도 않을 것 같은, 그 한결같은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든든해 보였다. 그가 나간 후 나는 방에 남아 그가 한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생각해 보면 두려움에 빠질 때마다 나는 그에게 의지했다. 윈더민 성에 도착한 직후, 마차 안에서 떨고 있을 때도 그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고 나왔었다. 즉위식 전에, 한창 겁에 질려 도망치고 싶을 때 왕이 되고 싶지 않다는 속마음을 털어놓은 사람도 바이우스였다. 이런 걸 보면 아무래도 그가 한 말은 사실인 것 같다.

처음 볼 때부터 나는 막연히 그를 신뢰했다. 물론 그의 일처리 능력이나 평소의 행동을 보면 그를 신뢰하지 않는 게 더 어려운 일이지만 어렸을 때의 기억이 은근히 작용했었나 보다.


생각이 정리된 후 회의장에 돌아갔다. 그리고 회의가 재개되었다.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갈라반트는 아까 지적당한 게 신경 쓰였는지 더 이상 강한 척을 하지 않았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오티즈를 비롯한 그의 적수들도 특별히 더 나서지 않았다. 대신 바이우스가 모두가 동의했던 그 결론으로 회의를 이끌어 나갔다.

“....그러면 갈라반트 헤니건 경을 어베레드 수복 작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바이우스가 엄숙한 목소리로 결과를 선언하며 나의 첫 회의는 끝이 났다. 물론 갈라반트에게 지원되는 병력은 왕궁기사단 1개 분대에 윈더민 상비군 2천명이었다. 그리고 그 부분은 특별히 내가 이야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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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음? 오늘 당연히 초상화 그리는 에피소드가 진행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옛날 얘기 분량이 많았네요.

역시 머릿속에 구상으로 있을 때와 글로 적을 때가 다른 것 같습니다.


바이우스 : 그런데 저는 그 아기가 누군지는 말 하지 않았는데요?

휘렌델 : 어엇! 진짜네! 설마 내가 아닌 다른....?

바이우스 :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그 아기가 다른 사람이라면 제 이야기는 역대급 동문서답이 되어버릴 겁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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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무단 침입. +8 15.04.01 3,721 121 17쪽
19 나가자, 나가자, 나가자! +8 15.03.31 3,474 122 10쪽
18 바르테인의 전당 +8 15.03.30 3,463 86 10쪽
17 추첨제 +12 15.03.28 3,518 106 10쪽
16 영지 없는 백작 +10 15.03.27 3,908 99 8쪽
» 아득한 기억 +8 15.03.26 3,521 94 9쪽
14 결론 +12 15.03.24 3,845 126 15쪽
13 첫회의 +8 15.03.23 3,722 108 8쪽
12 포커 페이스 +4 15.03.20 3,722 106 10쪽
11 동기 +10 15.03.18 3,855 100 7쪽
10 즉위식 (수정본) +11 15.03.17 4,392 132 16쪽
9 관례 +6 15.03.16 4,351 116 12쪽
8 응징 +10 15.03.15 4,293 122 9쪽
7 마지막 임무 +6 15.03.12 4,130 117 9쪽
6 검에 갇힌 정령들 +4 15.03.11 4,479 151 13쪽
5 노드의 부하들 +7 15.03.09 4,436 134 8쪽
4 일단 저지르고 본다. +8 15.03.02 5,252 149 18쪽
3 분노의 이단옆차기 +17 15.03.01 6,105 150 14쪽
2 왕녀, 공주, 여왕 +10 14.12.12 8,000 165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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