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대한 기사
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당황했다 해도 죄 없는 사람을 때린 데다 방에서 쫓아버리다니.... 더 이상은 폐를 끼칠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내 정체를 밝히고 사과하는 수밖에.... 냉정함을 되찾은 나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나는 화내지 않고, 흥분하지 않은 채 비로소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땀에 젖은 적갈색 머리. 갸름한 턱. 눈에 확 띄는 미남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조화가 잘 되어 보기 좋은 이목구비를 지닌, 나이는 나와 비슷해 보이는 소년 기사였다. 그 또한 담홍색 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미리 생각한 말을 시작했다.
“미안해요. 오해해서. 그렇지만....”
나는 행여 하녀로 오해받고 험한 꼴을 당할까 서둘러 내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가 대뜸 말허리를 잘랐다.
“너 혹시 전에 나랑 알던 사이였어?”
“에?”
당황하는 바람에 나는 ‘실은 나 왕이야.’ 하고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믿기 어렵지만 그 기사의 표정은 하녀 메리에게 걷어차였단 사실에 별로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잘만 하면 내 정체를 밝히지 않고도 어영부영 넘어갈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아까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왠지 너 낯설지가 않아.”
녀석은 내 명찰을 슥 쳐다본 뒤 말을 이었다.
“메리.”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나는 페나에서 야생마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그게 무슨 짓인가?!!”
갑자기 우리 쪽으로 크게 지른 고함 소리에 소년 기사와 나의 대화는 중단되고 말았다. 그와 나는 일제히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보았다. 기사 몇 명이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 중 선두에 선 기사를 본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긴 갈색 장발....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 잘생긴 녀석의 얼굴이 보다 선명히 보인다.
그는 노드와 앤디, 크루거와 함께 페나를 방문했던 기사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성이 스미스였던 건 기억나는데..... 아무튼 정령검도 없었던, 내가 애송이로 기억하고 있는 젊은 스미스. 그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무엄하기 짝이 없구나!!!”
윈더민에 도착한 후 공식적인 자리에서 나는 늘 화장한 얼굴이었다. 하녀 옷을 입음으로써 정체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 데는 내 맨 얼굴을 본 사람이 극히 드물었던 까닭이 컸다. 그런데 애송이는 페나에서 윈더민까지 삼 일 동안 나와 함께 여행한 바 있다. 화장은커녕 눈곱도 떼지 않은 얼굴을 보인 적도 있었다. 즉 지금 내 얼굴을 보고 내가 왕이라는 걸 간파할 수 있는 극소수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당장 무릎을 꿇지 못할까?!!”
애송이는 이쪽으로 달려오면서 성난 눈빛으로 내 앞에 있는 기사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그 기사가 여왕에게 저지른 무례를 꾸짖으면 내 정체는 탄로나겠지. 나는 그 순간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어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런데 기사를 노려보면서 뛰어온 애송이는 막상 가까이 오자 대뜸 내게 고개를 돌리며 고함을 질렀다.
“감히 천한 하녀 주제에 기사의 몸에 손을 대다니! 엎드려 사죄를 해도 모자랄 판에 왜 지금까지 뻣뻣하게 서 있는 거냐?!”
이 녀석. 나를 못 알아보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혹시 나처럼 사람 얼굴 외우는데 소질이 없는 건가? 나는 이 사실에 기뻐해야할지 아니면 아쉬워해야할지 혼란스러워졌다.
일단 지금 나는 제법 위험한 상황인 것 같다. 하녀로 보이기 때문에 누군가 내게 함부로 대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그 예상이 딱 들어맞은 것이다. 이제는 내 정체를 밝힐 때다!
“벨포트. 그냥 내버려 둬. 보아하니 성에 온 지 얼마 안 된 초보 같은데. 실수할 수도 있지.”
그런데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 젊은 기사가 애송이에게 대답했다. 아 맞다. 저 녀석 이름은 벨포트였지? 이제 기억났다. 언제 또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메담?”
애송이는 이번에는 부릅뜬 눈을 방금 자신이 메담이라고 부른 기사 쪽으로 돌렸다. 눈빛의 기세가 나를 볼 때와 비교해도 별로 수그러지지 않았다. 나는 애송이가 이 젊은 기사를 몹시 싫어한다는 사실을 한 눈에 눈치 챘다. 하지만 메담은 애송이를 별로 싫어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서글서글한 얼굴로 애송이를 설득하려 했다.
“놀라서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야., 의도한 게 아니었어. 네가 그렇게 강조하는 기사도를 발휘하자고. 얘 얼굴을 봐봐. 어리버리하고 멍청하게 생겼잖아. 툭하면 사고를 치고 다닐 상이야. 분명 매일매일 하녀장에게 혼나고 매를 맞고 있겠지. 언제 자살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런 불쌍한 애를 굳이 더 몰아부칠 필요가 있을까?”
뭐, 이 자식아? 듣자듣자 하니까 못하는 소리가 없네? 내가 멍청하게 생겼다고?
“그 정도는 나도 간파했어, 메담.”
어쭈? 이 애송이 자식.... 그 말에 동의해버렸다....?!
“이 멍청한 하녀 문제는 그럼 접어두지. 더 심각한 문제가 있으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네 놈은? 여자의 발차기도 피하지 못하다니.... 꼬맹이에게 진 걸로는 부족했나? 그러고도 네 놈이 기사라 할 수 있나?”
말을 하면서 애송이의 분노가 점점 끓어오른다.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나는 잠시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그는 기사를 때린 나보다도, 하녀에게 맞은 방주인에게 더 화가 난 모양이었다. 일그러진 표정이 부르르 떨리는 게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애송이를 상대하고 있는 이 녀석의 표정은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혐오와 분노를 드러내고 있는데 메담은 오히려 웃음을 지었다.
“미안. 방심했어. 설마 하녀가 공격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우리들은 기사다! 그런 핑계로 엉망진창으로 무너져버린 기사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나?”
할 말이 없어진 메담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 잠깐 번 시간 동안 적당한 핑계거리가 생각났는지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방심을 하긴 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피할 수 있었어.”
거짓말!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나는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렇지만 피하지 않은 이유는 내가 기사였기 때문이야. 매일 같이 신체를 단련하는 기사가 이런 말라깽이 계집애의 발차기를 무서워해 피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그래서 일부러 피하지 않았던 거야.”
이놈 봐라? 아까 아파서 죽을라 하는 거 다 봤는데 어디서 이런 허풍을? 하지만 얼핏 듣기에는 꽤 그럴싸한데?
애송이는 그 당시에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대강의 상황만 봤지 세세한 건 인지하지 못했나 보다. 그 말에 더는 트집을 잡지 못했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껏 메담을 째려보다가 옆에 있는 두 기사들에게 말했다.
“가자!”
세 기사가 떠나자 구경거리가 생긴 줄 알고 주위에 모여들었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제 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메담도 드디어 문이 열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황급히 그의 방에 따라 들어갔다.
“저기.... 고마워요.”
뭐 마음에 안 드는 소리도 많이 했지만 일단은 이 녀석 덕분에 내 정체를 끝까지 밝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냐, 괜찮아. 그나저나 정말로 나 생각 안나? 전에 본 적 없어?”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과 전에 만난 적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아마도 이 기사가 내 얼굴을 알아보는 건 공식적인 행사에서 내 얼굴을 봤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더더욱 시치미를 떼야 한다..
“그래? 그런데 왜 이렇게 친숙한 느낌이지....? 아무튼 알았어.”
“그리고 다시 한 번... 미안해요. 당황해서 문도 잠그고....”
“괜찮아. 처음엔 다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지.”
메담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젖혀 턱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 녀석 정말 관대하고 착한 녀석이구나. 진짜 세게 찼는데.... 아직도 절뚝거리고 있는데 화를 안내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이건 방에서 나가 달라는 뜻이야. 아직 못 배운 모양이구나?”
아.... 하녀에게 보내는 특별한 신호 같은 게 정해져 있구나.... 나는 황급히 그의 방을 나온 후 문을 닫았다. 뭔가 마음이 개운하지 않다. 저 녀석의 목걸이는 대체 뭘까? 왜 나는 거기에 정신이 팔렸던 걸까? 이런 궁금증을 더 파헤치고 싶은데, 지금은 하녀의 신분이기에 나에게 주도권이 없었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일단 오늘은 여기서 돌아가기로 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바이우스가 방문할 때가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성 밖으로 나가는 비밀 통로는 다음 기회에 찾으면 될 것이다. 그리고... 메담이 가지고 있는 목걸이의 비밀도 언젠가 풀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비밀 통로를 통해 나의 방에 되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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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노파심에 먼저 밝히는데,
휘렌델이 하녀 복장하는 것을 가리켜
‘메이드’라고 언급하는 댓글이 달리면
매우 죄송하지만 저는 주저 없이 그 댓글을 삭제할 예정입니다.
휘렌델은 앞으로도 종종 하녀가 될 텐데,
이는 그녀로 하여금 가장 밑바닥 계층의 시점을 경험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각자 개인의 취향 차이가 있고 서로 존중해야 할 영역일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예민한 것은 알지만 제 취향은....
제가 만든 자식같은 캐릭터가
조금이라도 성적 뉘앙스가 담긴 단어와 연관지어지는 건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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