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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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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조회수 :
632,143
추천수 :
14,829
글자수 :
1,880,019

작성
15.04.10 01:36
조회
3,185
추천
87
글자
8쪽

기사 노드 체스터

DUMMY

나는 약간 들떠 있었다. 이대로 진행되면 노드의 왕궁기사단장 지위를 지켜준다는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끌려 다니기만 하던 내가 처음으로 흐름을 주도한다는 사실에 일종의 승리감을 맛보고 있었다. 하지만 바이우스가 열어둔 문 사이로 노드의 표정을 보자 한껏 고조되었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아버렸다.

노드는 바이우스처럼 극단적인 정도는 아니어도 표정의 변화가 별로 없는 침착한 사나이였다. 그런데 그는 내가 본 이래 가장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다. 어쩌면 나는 얼토당토않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닐까?


잠시 휴식한 후에 회의를 재개하자는 바이우스의 제안은 전적으로 나를 배려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진 나는 오늘 아침부터, 아니 어젯밤부터 뚜렷하게 정해둔 목표를 진행시킬 추진력을 잃고 말았으니까. 반쯤 얼이 빠진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여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래요. 그렇게 하죠.”

웅성거리기 시작한 회의실을 뒤로 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착잡한 표정의 노드와 눈이 마주쳤다. 어딜 가냐고 그가 묻기 전에 내가 먼저 답했다.

“갑자기 산책하고 싶어졌어요.”

말을 마친 뒤 나는 바이우스가 따라 나오길 내심 기다렸다. 어제 그랬던 것처럼 내게 와서 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냉정한 조언을 던져 주리라 은연중 기대했다. 그러나 바이우스는 따라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박힌 못처럼 회의장 한 가운데에 꼿꼿이 서서 나를 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따라 나간다는 말 안했습니다.’

바이우스가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다는 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를 보고 다시 생각해보니 굳이 바이우스가 낄 필요가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른 나는 노드를 데리고 성채 밖의 뜰에 나갔다.


여러 가지 일에 정신이 팔린 사이 5월 말의 윈더민 성은 온통 봄에 물들어 있었다. 우리는 싱그럽게 빛나는 녹색 잎 사이사이에 팬지와 라일락, 갓꽃이 알록달록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산책로를 걸었다.

그는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다. 아무리 내 행동이 그의 뜻과 어긋나도 먼저 입을 여는 무례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매우 과묵한 성격이라 반달이 넘는 시간 동안 대화한 적이 별로 없었다. 따라서 그의 속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내 쪽에서 질문을 던져야 했다.

“제가 체스터 경을 편들어 준 게 당황스러웠어요?”

노드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지금은 예의나 격식을 지키는 것보다 진실을 말해줘야 할 때에요.”

내가 이렇게까지 말한 다음에야 노드는 비로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많이 놀랐습니다. 여왕님께서 이렇게까지 저를 위해 마음을 써주실 줄은....”

“제가 체스터 경이 계속 왕궁기사단장을 맡아주기를 바라는 이유는 명확해요. 첫째로 체스터 경은 그 능력이 입증된 훌륭한 기사단장이라는 사실이에요. 이는 함께 여행하면서 제가 직접 확인한 것이죠. 오늘 차기 기사단장 후보로 거론된 크루거 경과 앤디 경 모두 체스터 경을 존경하고 있었어요.”

이미 내겐 그가 왕궁기사단장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타당한 근거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회의장에서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며 그 논리를 그에게 상기시킨다.

“두 번째로, 저는 체스터 경이 해임되어야 하는 이유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제가 물러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왕을 지키지 못한 기사는 왕궁기사단장으로 있을 자격이 없으니까요.”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섬뜩할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아까 느꼈던 불안감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깨닫는다. 나는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처사를 노드는 정당하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이해할 수 없어요. 계속 왕궁기사단장으로 남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본 바로 노드는 이번 일에 매우 유감스러워하고 있었다. 앤디의 정령검도 어쩔 수 없이 왕궁기사단장 직에서 물러나야하는 사실을 꼬집어 그를 도발하지 않았던가. 그 말을 들었을 때 왕궁기사단장을 쥔 노드의 손은 아쉬움에 부들부들 떨리고 있지 않았던가.

“....왕궁기사단장이 되는 것은 젊은 시절 저의 꿈이었습니다. 이렇게 불명예스럽게 물러나는 제 심정을 말로 표현한다면 ‘비통하다’고 하는 게 가장 정확할 겁니다.”

내가 완전히 잘못 짚은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이에 용기를 얻은 나는 그를 설득하려 해본다.

“그렇다면 내게 맡겨줘요. 이대로 계속 하면 왕성의회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왕님.”

이 때까지 나는 그가 내 호의를 거부하는 이유가, 군주에게 부담을 주기 싫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이 일이 내게도 중요한 까닭을 설명했다.

“체스터 경. 경은 내가 왕이 된 후 최초로 나의 신하가 된 사람이에요. 또, 한 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적도 있었어요. 그래서 경을 이대로 보낼 수가 없어요. 내게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건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요.”

난 이렇게 말하면 저 충성심 강한 노드가 미안해하는 마음을 한결 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부탁드립니다, 여왕님. 제발 이대로 물러나게 해주십시오.”

충직한 기사인 노드는 단 한 번도 감히 내게 뭔가를 요청한 적이 없었다. 이러한 사소한 것도 무례라 여기는 노드는 그 이전에도 이런 행동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가 이렇게 뭔가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다음으로 놀란 건 그의 요구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어기면서까지 내게 자신의 파면을 부탁하는 걸까? 그것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저는 이미 왕을 지키지 못한 못난 기사입니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뻔뻔한 기사는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어지는 설명을 들은 후에야 나는 비로소 노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건 아니었다. 그의 솔직한 마음은 왕궁기사단장 직을 계속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노드 체스터는 인간이기 전에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였다. 그 자신의 바람을 실현하는 것보다 남의 시선을 먼저 의식해야 했던 것이다.


“..... 왕궁기사단장에서 물러나면 이제 다시 경을 볼 수 없는 건가요?”

“여왕님....?”

노드가 눈을 크게 뜨고 내 얼굴을 바라본다. 그 동안 별로 대화도 한 적이 없는 내가 갑자기 눈물을 흘릴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당연하지. 나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노드는 나를 위로해주려는 듯 환하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헤니건 경에게 합류하여 붉은 바위족 토벌에 참전할까 합니다.”

“어베레드 성으로 가신다고요?”

“그렇습니다. 이는 하워드 선왕의 원한을 갚는 동시에 제 개인적인 원한도 갚기 위해서입니다.”

“....조심하세요.”

“걱정 마십시오. 승전을 전하는 전령 역할을 제가 맡겠습니다. 그러면 토벌군 중에서 가장 빨리 윈더민 성으로 돌아올 수 있겠죠.”


눈물을 닦으며 나는 일어났다. 노드가 내 뒤를 따른다. 나는 회의장으로 돌아가면서 어제 바이우스가 한 말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편을 아직 만들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정한다.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나는 부끄럽기 그지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노드를 위한 목표를 세우면서, 정작 노드를 내 편으로 만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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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노드 : 이대로 저는 퇴장하는 겁니까?

휘렌델 : 적어도 한 동안은 나오지 않을 듯? 왜 어베레드로 간다고 했어요? 죽이되든 밥이되든 윈더민에 남아 있었으면 잠깐씩이라도 얼굴을 비출텐데.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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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8

  • 작성자
    카리황제
    작성일
    15.04.10 01:55
    No. 1

    마지막 말이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휘렌델이 빠졌던 착각은 상당히 많은 리더들이 범하는 실수라 생각합니다.
    당사자의 의견도 들어보지 않고 그 사람들의 최선을 멋대로 판단하는 것 말이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4.11 03:31
    No. 2

    휘렌델이 실수를 저지르는 것도 얼마 안남았습니다 ㅎㅎ
    '가장 솜씨가 뛰어난 사람은 바로 가장 많은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다.'
    라는 말을 휘렌델이 장차 남길 예정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二月
    작성일
    15.04.10 04:04
    No. 3

    왕이 되기 위한 과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네요. 일단 편부터 만들기!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4.11 03:34
    No. 4

    왕녀의 외출에서 다루고 싶은 주제는 리더쉽과 정치입니다.
    개인적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치 말고 단어 그 대로의 뜻....
    나라를 다스리는 바른 방법이라는 뜻의 정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지만
    '편을 얻는다'는 건 현실적인 정치에서나, 이상적인 정치에서나 기본요건인 것 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9 티말
    작성일
    15.04.10 12:02
    No. 5

    노드 : 그게..대본에 그리 말하라고 써있었거든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4.11 03:35
    No. 6

    왕녀의 외출은 쪽대본입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2 공군입니다
    작성일
    16.02.10 21:23
    No. 7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6.02.11 22:39
    No. 8

    으음... 과찬입니다 ^^;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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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노드의 부하들 +7 15.03.09 4,436 134 8쪽
4 일단 저지르고 본다. +8 15.03.02 5,252 149 18쪽
3 분노의 이단옆차기 +17 15.03.01 6,105 150 14쪽
2 왕녀, 공주, 여왕 +10 14.12.12 8,000 165 20쪽
1 프롤로그 -왕녀의 외출- +28 14.12.10 11,783 17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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