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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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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05 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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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정치라는 이름의 작업

DUMMY

동시에 그들이 나를 멀리한 이유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삼촌이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윈더민에 초대받지 못했다. 삼촌과 하워드에게 있어 나는 참으로 미묘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들이 적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기에 가까이 둘 수 없으면서도, 그 오점을 벗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하워드 왕자의 약혼녀이면서 알트론 왕의 장례식의 참석할 수 없었던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나 역시 내가 하워드의 신부가 된다는 것도, 더 나아가 내가 바르테인가의 일원이라는 것도 거의 실감하지 못했다.

마음이 온통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어서인지, 웰링턴 바르테인이 꽤 난폭한 왕이었음을 알려주는 또 다른 일화를 최근에 들었던 것이 문득 생각났다. 그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바이우스였다.

“뤼프 경의 전임자도 할아버지한테 죽었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이유가 뭐였었죠?”

“에네버의 침공 소식을 다급한 얼굴로 전달했기 때문입니다. 전황을 비관적으로 전망하게 만들고, 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는 이유로 극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랬지... 생각해보면 바이우스가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 연습한 것도 당시의 왕이 할아버지였던 까닭이 아닐까 싶다. 바로 전임 성장이 표정을 드러내다가 죽었으니 그런 이상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던 것이다. 여기까지 들은 나는 화를 이기지 못해 무심코 한 마디를 던지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굉장한 폭군이었군요....”

나는 이 깍듯하고 올바른 노신사라면 자기 할아버지를 험담하는 내 말을 못 들은 척 점잖게 넘기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바이우스는 예상 밖의 반응을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전설의 폭군인 할크루와 비교하기도 했었죠. 적어도 피를 좋아하셨던 분인 건 분명합니다. 다이슨 왕자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그 정도가 심해졌습니다. 비단 제 전임자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작은 실수 때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때까지 바이우스는 예의범절의 정석이자, 매우 객관적인 사람으로 내게 인식되고 있었다.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고 먼저 처벌을 바란 오전의 일도 있어 그 둘 중에 예의범절이 이 사람에게 더 우선적인 가치라 생각했다. 그런데 실상은 순서가 반대였다. 이 사람은 진실을 숨기지 않고 얘기하는 사람이었다. 설사 그 대상이 왕이라 해도 말이다.

문득 스펜서가 전대 왕들에 대해 바이우스에게 물어보라고 한 데는 어떠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을 배려하는 게 몸에 배인 스펜서는 이미 죽은 할아버지를 위해 아버지의 초상화는 그린 적도 없다고 내게 거짓말을 했다. 그 대신 나를 위해서는, 본인 대신 진실을 말해줄 바이우스와 연결해 준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내친 김에 다른 바르테인들에 대해서도 바이우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일단 나는 할아버지와 같은 폭군은 절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다른 왕들의 선례까지 듣는 것이 향후 내가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삼촌은 어떤 왕이었나요?”

“알트론 왕은 조용하신 분이셨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태풍이 지나간 후 정적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덕분에 왕성의회는 웰링턴 선왕이 계실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국사를 돌볼 수 있었죠.”

으음. 사실 초상화로 본 사람 중에 제일 인상이 안 좋았던 사람이 삼촌이었는데, 뜻밖에도 꽤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겉모습만 보고 선입관을 가졌던 것이 왠지 미안해진다.

“하지만 작위의회의 말을 들어보면 우유부단한 면도 지니고 계셨다고 생각됩니다. 웰링턴 선왕대에 벌어진 에네버와의 전쟁은 알트론 선왕 대까지 이어졌고, 그 분께서는 이 기회에 에네버를 완전히 정복할 목적으로 국가의 총력을 그 전쟁에 쏟아 부었습니다. 하지만 압도적인 병력을 보유하고도 결단력의 부족으로 적군을 격퇴하지 못했습니다. 에네버와의 전쟁은 결국 수년간의 대치 끝에 정전 협정을 맺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만, 그 전쟁에 들인 비용을 생각하면 사실상 저희가 패배했다고 봐야 옳을 것입니다. 소크초를 치외법권으로 인정해준 것도 뼈아픈 손실이었습니다.”

“소크초라면 바르테인의 유일한 항구 도시잖아요? 그런데 치외법권이라면....?”

“윈더민에서 내리는 정책을 따르지 않고 영주가 마음대로 영지를 다스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바르테인의 영토이고, 타국이 침략할 시 윈더민에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교전이 길어지면서 알트론 선왕께서는 소크초 영주에게 막대한 군자금을 빌리셨습니다. 그 대가로 소크초의 자유로운 통치를 보장해주셨죠.”

미안하다고 했던 거 취소다. 소크초라면 바르테인에서 가장 풍요로운 도시인데, 그 노른자 같은 땅을 날려먹다니.... 에휴.

“하워드는 어땠나요?”

“하워드 선왕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겨우 1년 동안 바르테인을 다스리셨고, 모든 일이 그 분에게 첫 시도였으니까요. 그것만 보고 그 분이 어떤 왕이었다는 평가를 내린다면 이는 매우 경솔한 판단이 될 것입니다.”

바이우스가 하워드에 대한 평가를 아끼는 이유를 듣고 나는 내심 감탄했다. 동시에 그가 지금까지 왕에 대해 한 이야기들을 한층 더 깊이 믿게 되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여긴 나는 이제 그가 방문한 용건에 대해 말하기로 했다.


“그러면 내일 일정을 말해주세요.”

“오전에는 회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이번에는 왕성의회만 참석합니다. 작위의회 반 이상은 오늘 그들의 영지로 떠났으니까요.”

나는 회의라는 말이 들리자마자 눈을 날카롭게 뜨고 바이우스에게 기습적으로 물었다.

“이번 회의에도 먼저 내려진 결론이 있나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바이우스가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이유는 짐작되지 않았다. 어쩌면 나의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 때쯤 바이우스의 입이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없습니다.”

“그러면 회의 주제는 뭐죠?”

“차기 왕궁기사단장을 뽑는 것입니다. 현재 유력한 후보로 크루거 스웨이츠 경과 앤디 셔벗 경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내일 회의장은 그 두 기사 중에 누구를 지지하는지 드러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거론되었는데도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그 둘 중에 왕궁기사단장을 뽑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밤에는 교대하던 노드가 오늘은 야간까지 경비를 서는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노드는요?”

“오후에 바로 체스터 경의 퇴임식과 왕궁기사단의 충성 서약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기사들과 이야기할 때, 난 알 수 없는 예감 때문에 노드의 지위를 지켜주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가 왕궁기사단장으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쏟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 기회조차 찾아오지 않은 것이다.

“내 생각에는 차기 기사단장을 뽑기 전에, 현 기사단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게 순서 아닌가요?”

“체스터 경의 퇴임은 즉위식으로 왕이 되시기 전에 결정된 사항입니다. 따라서 순서상으로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왕이 없었잖아요.”

나는 노드를 퇴임시키기로 한 것이 하워드의 사후에 결정된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나를 차기 왕으로 정한 그 회의일 가능성이 높다. 시간 상 그 때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때는 나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왕이 아니었을 시기였다. 그 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어떻게든 그 문제를 원점으로 돌려보려 했는데 바이우스에게서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성함은 윌리엄 바르테인이었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렸다. 여기서 바르테인의 건국왕의 이름이 나올 줄이야. 바이우스는 침착하게 설명을 시작한다.

“국왕을 지키지 못한 왕궁기사단장은 그 지위를 누릴 자격이 없다. 그 원칙은 바르테인이 세워질 때 정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통념을 따른다면 체스터 경은 극형에 처해져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그를 불명예 퇴임시키는데 그치는 건 그가 선왕의 명령을 따르다 자리를 비웠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며, 충분히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그렇지만....”


머리로는 바이우스의 말이 타당하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마음속은 불만이 가득해 터져버릴 것 같았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나는 겨우 바이우스에게 따질 거리를 하나 찾아내었다. 안타깝게도 노드의 지위를 보존하는 것과는 관계없는 내용이었지만 말이다.

“아까 성장은 이번 회의에는 이미 정해진 결론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결국은 이번에도 노드의 퇴임이 결정되어 있었던 거네요.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걸 왜 왕만 모르고 있는 거죠?”

“알고 싶으십니까?”

이 순간 나는 깨달았다. 바이우스는 전대 왕들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정한 평가를 내게 말해주었다. 그 말은 지금의 나도 그의 평가대상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는 깍듯함보다 진실을 말하는 걸 우선하는 인물이었다. 나는 곧 그의 말에 난도질당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그런 말을 해줄 편을 아직 만들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편이요?”

“오늘 회의 때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모르는 사이에 이미 결론이 내려지고 있는 게 이상하다고 느끼셨습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더 중요한 건 회의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정치라는 건 회의장 밖에서 하는 작업이라는 걸 깨달으셔야 했습니다.”

바이우스는 평상시와 사뭇 달랐다. 표정도, 목소리도 그대로였지만 내게는 방금 전에 그가 한 말이 매우 역동적인 열변으로 느껴졌다. 지금 그는 마치 불꽃같았다.

“사람들은 회의장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그 말이 얼마나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하고 그에 따라 찬성반대가 나뉩니다. 회의에서는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선택은 그 전에 열리는 파티와 주고받는 선물 속에서 결정되며 회의장은 그간의 작업 결과를 확인하는 곳에 불과합니다.”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그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는 걸 보면 마음 한편으로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나 보다. 갑자기 내가 속한 이 세계에 대한 혐오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내일 회의에는 미리 결정된 사항이 없다고 말씀드린 건 제 개인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제 기준에서 ‘이미 결과가 결정된 회의’란 앤디 경과 크루거 경 중 누가 왕궁기사단장이 될지 내정된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었으니까요.”

바이우스는 말을 마친 후에 가만히 서 있었다. 다소 무례하기까지 한 발언에 대해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기다리는 것 같았다. 사실, 거의 웃음 같지도 않은 실소 한 번 터뜨린 것보다 지금의 이 당돌한 말과 태도가 내게는 훨씬 더 불쾌감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받은 충격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참을 기다린 후에 내게 나가보겠노라고 정중히 인사했다. 그런데 방에서 나가기 전에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눈으로 보면서도 한참 동안이나 그게 무언지를 인지하지 못했다.

“저녁을 거르셨던데.... 이 시각이 되서 혹시 시장하실까봐 가져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그것이 먹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호박머핀이었다. 사실 호박머핀은 내가 가리는 음식 중에 하나였다.

“고마워요. 마침 배고팠는데 잘 먹을게요.”

어차피 먹을 생각이 없었지만 나는 그에게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모르던 진실을 거의 다 가르쳐 주었다. 역대 왕들에 대해서도, 오늘 회의와 내일 회의의 실질적인 내막이 무언지 말해주었다. 나는 이 시점에서 ‘내 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라고 느꼈다. 그래서 그의 도발적인 발언에도 전혀 화를 내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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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고)웰링턴 : 내 앞에서 저런 소리 했다면....

바이우스 : 가차없이 목이 베였을텐데 지금까지 제가 살아있다는 건 안했다는 뜻이겠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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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뜻밖의 실수 +4 15.04.12 3,097 83 11쪽
26 회의를 주도하는 자 +6 15.04.11 3,094 83 11쪽
25 기사 노드 체스터 +8 15.04.10 3,187 87 8쪽
24 비장한 목표 +6 15.04.09 3,248 82 11쪽
» 정치라는 이름의 작업 +8 15.04.05 3,220 94 13쪽
22 적자우월주의 +4 15.04.03 3,140 73 8쪽
21 관대한 기사 +10 15.04.02 3,449 97 10쪽
20 무단 침입. +8 15.04.01 3,722 121 17쪽
19 나가자, 나가자, 나가자! +8 15.03.31 3,474 122 10쪽
18 바르테인의 전당 +8 15.03.30 3,464 86 10쪽
17 추첨제 +12 15.03.28 3,518 106 10쪽
16 영지 없는 백작 +10 15.03.27 3,910 99 8쪽
15 아득한 기억 +8 15.03.26 3,521 94 9쪽
14 결론 +12 15.03.24 3,846 126 15쪽
13 첫회의 +8 15.03.23 3,723 108 8쪽
12 포커 페이스 +4 15.03.20 3,724 106 10쪽
11 동기 +10 15.03.18 3,855 100 7쪽
10 즉위식 (수정본) +11 15.03.17 4,394 132 16쪽
9 관례 +6 15.03.16 4,352 116 12쪽
8 응징 +10 15.03.15 4,294 122 9쪽
7 마지막 임무 +6 15.03.12 4,132 117 9쪽
6 검에 갇힌 정령들 +4 15.03.11 4,482 151 13쪽
5 노드의 부하들 +7 15.03.09 4,438 134 8쪽
4 일단 저지르고 본다. +8 15.03.02 5,252 149 18쪽
3 분노의 이단옆차기 +17 15.03.01 6,107 150 14쪽
2 왕녀, 공주, 여왕 +10 14.12.12 8,001 165 20쪽
1 프롤로그 -왕녀의 외출- +28 14.12.10 11,785 17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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