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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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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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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880,019

작성
15.03.12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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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글자
9쪽

마지막 임무

DUMMY

사실 나는 윈더민에서 온 기사들이 불편했다. 그들이 오기 전까지 나는 자유롭게 뛰어노는 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비록 머독의 속임수에 넘어간 머저리였을지 모르지만, 아무 것도 몰랐기에 행복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이 브란트 성에 들어오면서 나의 인생이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다.

나의 주민들이 어렵게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페나의 실세가 머독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구제불능의 머저리에 몰지각한 영주였단 사실을 깨달은 건 충격을 넘어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 백성들을, 정들었던 고향을 맡기고 떠나는 기분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페나를 떠난 이래 계속 우울했다.

물론 이것이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래도 그들과의 만남을 기점으로 너무나도 확연한 차이가 생겼기에... 졸지에 그들이 내 불행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어도 왠지 대하기 껄끄러워서 은근히 피해 다녔었다.


이러한 때에 도적들의 습격은 큰 전환점이 되었다. 우선 다른 사람들처럼 겁에 질려 떨고 있던 나는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정령검에 대해 노드와 묻고 대답하고, 세 정령검의 신비한 마법을 보고 있는 동안 호기심이 점점 증폭되어 고민거리들을 잠시 떨쳐낼 수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기사들에 대한 나의 태도일 것이다. 더 이상 그들은 내게 불행을 가져다 준 존재들이 아니었다. 위기의 순간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영웅이 되었다. 그 동안 그들은 내 머릿속에서 ‘노드의 부하들’로 묶음 처리되고 있었는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달라졌다. 나는 일꾼들과 함께 뒷정리를 시작한 기사들 한 명 한 명을 주의 깊게 살폈다.


짧은 머리를 꼿꼿이 세운 크루거 스웨이츠. 왕궁기사단 제.... 무슨 직위였는지는 잊어버렸다. 그게 그리 중요하겠어? 그는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상관인 노드에게는 깍듯하고 아랫사람들에게는 엄한, 자로 잰 듯 반듯한 사나이였다.

똑같이 말수가 없는 노드와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굳이 차이점을 말하자면 노드는 원래 성격이 과묵한 것 같은데 크루거는 일부러 말을 아끼는 것 같다. 그는 항상 약간의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타인에게 엄한 만큼 자신에게도 엄한 타입인 거겠지.

나는 그를 ‘천하장사’로 단순화시켜 분류했다. 물론 이는 그의 정령검이 힘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켜 주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도끼처럼 생긴 검인데 칼집은 여느 것과 마찬가지로 쭉 뻗은 일자였다. 더 신기한 건 그 도끼의 끝을 칼집에 대는 순간 돌출된 부분이 얌전히 들어가며 평범한 검이 되면서 쏙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정령검은 인간이 정령을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무기입니다. 그래서 정령은 손잡이를 쥔 사람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칼집에 들어가는 순간 정령은 아무런 마법도 쓸 수 없게 됩니다.”

라는 것이 노드의 설명이었다. 그 말대로라면 원래는 평범한 검이었는데 정령이 마법을 써서 도끼 모양으로 변했다는 거구나. 참 신기하네....


유일하게 정령검을 갖지 못한 불쌍한 기사.... 벨포트 스미스는 나보다 겨우 한 살 많은 19살이었다. 다른 기사들의 종자라고 해서 은근히 안쓰러웠는데 경험 많은 기사의 종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젊은 기사들 사이에서는 꽤나 명예로운 ‘업적’에 해당하는 일이라 한다. 즉 그는 또래 기사들 중에서 촉망받는 인재인 것이다. 또 그의 가문은 대단한 명문가인데, 외할아버지와 어머니가 하시는 일에 전혀 무관심했던 나도 그의 성인 ‘스미스’라는 이름은 몇 번 들어봤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그는 대단한 자부심의 소유자였다.


“도적 따위가 기사의 상대가 될 수는 없어.”

일꾼과 하녀들은 전투가 끝난 후에 기사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물론 그 많은 도적들이 한꺼번에 뛰어올 때는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으니 감사를 표시하려는 그들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렇지만 결코 벨포트의 일장연설을 들을 의도는 조금도 없었을 것이다.

겨우 도망치는 두 명을 쓰러뜨린 주제에 벨포트는 그들을 붙잡고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여태까지 다른 기사들에게 막내 취급을 받아서인지 아랫사람을 만난 게 반가워 견딜 수 없나보다.

“너희는 이런 말 못 들어봤지? ‘이 세상의 모든 생물과 종족 중에 인간만이 유일하게 학습이라는 행위를 한다.’ 인간은 교육을 통해 선대가 쌓은 경험과 지식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뜻이야.”

저기.... 꼭 신분이 낮기 때문에 그런 말을 모를 거라고 단정 짓진 말라고. 왕이 되는 사람도 모르는 말일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그리고 뭐 그렇게 어려운 말을 쓰고 그래? 봐봐. 예의상 고개를 끄덕이고는 있지만 눈빛이 흐리멍덩하잖아. 좀 이해하기 쉽게 스승이 기둥 세우면 제자가 지붕 올린다는 것 같은 예를 들었으면 애들이 단번에 이해했을 텐데....


“싸우는 법에 대해 가장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교육 체제를 확립한 집단이 바로 기사야. 그리고 어려서부터 그에 따른 훈련을 시작한단 말야. 이 이상의 최적의 코스는 없는 거지! 그러니 일반인은 기사를 절대 이길 수 없어.”

참 대단한 녀석이다. 자기 잘났단 말을 하기 위해 저렇게 공들여 사전 작업을 다지다니..... 사실 기사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친해지기 쉬울 것 같았던 사람이 바로 벨포트였다. 다른 기사들은 거의 40대 정도인데 유일하게 나의 또래니까.... 게다가 그는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미남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 녀석에게 정이 가지 않는다. 나는 그를 ‘애송이’로 머릿속에 입력시켰다.


솔직히 나는 기사들보다 정령검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유순한 인상의 기사, 앤디 셔벗 경에게 눈길을 돌렸을 때도 그보다 정령검에 먼저 눈길이 갔다. 사실 다른 어떤 정령검보다 나는 그의 정령검에 가장 큰 관심이 있었다.

‘검이 말을 한다!’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한 번 직접 그 검과 말을 해보고 싶었다. 이런 진귀한 경험이 어디 또 있겠는가. 그래서 검에 묻은 피를 닦고 있는 앤디 경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물론 그런 내 뒤를 노드가 따르고 있었다.

“이게 누구신가? 최강의 기사, 왕궁기사단장 노드 체스터 경 아니신가?”

가까이에서 들어보니 셔벗 경의 정령검이 내는 소리는 사람의 목소리와 놀랍도록 닮은 것이었다. 걸걸하고 굵은 남자 같은 목소리였는데, 굉장히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정말 신기했다. 어떻게 검이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정령이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싸움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양반이 왜 이번에는 잠자코 있었대? 이제 와서 그런다고 죽은 왕이 살아돌아오나?”

노드가 한 말이 생각났다. 정령검에 갇힌 정령들은 인간을 증오하고 있다고. 멀리서 봤을 때 셔벗 경이 정령검에게 소리를 지르는 광경은 좀 익살스럽고 재미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전혀 장난이 아니었다.


정령검은 단지 주인인 셔벗 경만을 특별히 미워하는 게 아니었다. 인간이라는 종족 전부를 극도로 증오하고 있다. 녀석은 자신의 목소리가 닿을 수 있는 사람 중에 가장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을 택했다. 이 경우에는 그 대상이 노드였다.

“안됐군. 노드 체스터 경. 이 임무가 끝날 때까지 또 다시 싸울 일이 있을까? 그 검을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르겠....”

정말 부끄럽지만, 난 셔벗 경이 황급히 그 검을 닦다 말고 칼집에 넣을 때 까지만 해도 정령검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노드도 고요한 표정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으십니까, 노드 경?”

앤디가 노드에게 걱정스러운 한마디를 건넨 후에야 비로소 푸른 정령검, 왕궁기사단장의 검을 들고 있는 노드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을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노드는 나의 사촌 하워드 바르테인이 왕으로 있을 때 왕궁기사단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런데 하워드는 전사했다고 한다. 그 지긋지긋한 두창으로,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전쟁 도중에 사고로 죽은 것이다. 왕을 지키지 못한 왕궁기사단장에게 돌아올 운명을 예측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를 윈더민으로 데려오는 것이 기사 노드 체스터의 마지막 임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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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루터 : 일반인은 절대로 기사를 이길 수 없다고? (피식)

벨포트 : 이봐. 당신은 70년 후에나 태어날 사람이잖아!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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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관대한 기사 +10 15.04.02 3,449 97 10쪽
20 무단 침입. +8 15.04.01 3,722 121 17쪽
19 나가자, 나가자, 나가자! +8 15.03.31 3,474 122 10쪽
18 바르테인의 전당 +8 15.03.30 3,464 86 10쪽
17 추첨제 +12 15.03.28 3,518 106 10쪽
16 영지 없는 백작 +10 15.03.27 3,910 99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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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포커 페이스 +4 15.03.20 3,724 106 10쪽
11 동기 +10 15.03.18 3,855 100 7쪽
10 즉위식 (수정본) +11 15.03.17 4,394 132 16쪽
9 관례 +6 15.03.16 4,352 116 12쪽
8 응징 +10 15.03.15 4,294 122 9쪽
» 마지막 임무 +6 15.03.12 4,132 117 9쪽
6 검에 갇힌 정령들 +4 15.03.11 4,481 151 13쪽
5 노드의 부하들 +7 15.03.09 4,437 134 8쪽
4 일단 저지르고 본다. +8 15.03.02 5,252 149 18쪽
3 분노의 이단옆차기 +17 15.03.01 6,107 150 14쪽
2 왕녀, 공주, 여왕 +10 14.12.12 8,001 165 20쪽
1 프롤로그 -왕녀의 외출- +28 14.12.10 11,785 17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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