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표류 2화 신분 은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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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신분 은폐
청년의 입술 새로 고통스러운 숨이 흩어졌다.
여인이 말하는 뮤즈 마을이 정확하게 어느 영지에 속하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렴풋한 기억 속의 귀환 경로를 대강 고려해 봤을 때 코네세타 남부의 해안 마을 중 하나일 거라 대충 짐작한 그는 신음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확실히 여인의 말대로 일단은 몸의 회복이 우선일 듯하였다.
자신을 구한 이가 작고 외진 마을에 사는지라 그의 신분을 상상조차 하지 못할 만큼 어수룩하고, 이 집의 위치 역시 동떨어져 있어 마을에 외지인이 들어왔는데도 소문이 퍼져 나갈 염려가 없다는 점은 분명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천운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같은 이유에서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본래 변두리에 놓인 작은 마을일수록 외지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법이었다. 몸도 성치 않은 마당에 공연한 의심을 사게 되어 성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되면 그보다 더 큰 낭패는 없을 터였다.
코네세타는 그의 조국인 세레즈와 적대 관계에 놓인 나라였으며, 그는 저들로서는 대천지수나 다름없는 적국의 태자였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나라 안팎에 수많은 적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왕위계승문제를 두고 대립 중인 계모가 자신이 다친 몸으로 적국에 홀로 표류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나올지는 불문가지였다.
일단은 신분을 감추고 저에 대한 모든 것을 숨겨야겠다고 그는 통증의 여파로 판단력이 흐려진 머리로 결론을 내렸다. 적어도 운신이 가능해지고, 다음 행보에 대하여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때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네즈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열린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 향긋한 수프 냄새가 한달음에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기척을 느낀 청년이 끙끙거리며 몸을 어떻게든 일으키려고 하자, 아이네즈는 들고 들어온 수프를 탁자 위에 놓아두고 빠르게 침대로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아직은 조심해야 해요. 몸도 여기저기 아프겠지만, 며칠을 고열에 시달렸어요. 열이 다 내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일어나면 어지럽거나 메스꺼울 수 있어요.”
“경황이 없어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녀의 도움으로 간신히 몸을 추슬러 앉을 수 있게 된 청년은 열꽃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열어 감사를 표했다. 기운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메마르고 까칠하게 일어난 음성이었다.
“이렇게 구해주시고 지금껏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밖에 되지 못하는걸요.”
아이네즈는 푹신한 베개를 뒤에 세워 청년이 등을 기대고 앉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그가 침대 위에서 편하게 자리를 잡자 갓 끓인 수프를 내밀었다.
“드세요. 시장하실 것 같지만, 수프 이외에는 아직 드시기 힘들 것 같아서.”
육신이라는 것은 참으로 비루하기 이를 데 없어서 이런 상황에서도 허기가 졌다. 우습고도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그릇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일평생 본 적도 없는 소박한 음식이었지만, 그는 먹기 전에 다시금 인사를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시중을 받는 것이 일상이었던 그에게 대단찮은 먹을거리를 챙겨준 일이 인사치레를 할 만큼 굉장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녀와 그녀의 동거인이 바다에서 그의 목숨을 건져준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겉보기에 궁색하다 할 만큼의 살림은 아니나 평민의 삶이란 고만고만한 법이었으니 넉넉하지 않을 형편에 아무런 대가 없이 일면식도 없는 저를 구하고 지금껏 돌보아 준 것은 분명 고마움을 표할 만한 일이었고, 평생을 남에게 떠받들려 살아온 그에게도 그 정도의 상식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반지나 시계, 혹은 팔찌라도 끼고 있었다면 이럴 때 사례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장시간 파도에 휩쓸리면서 그마저도 다 빠져버린 모양이었다.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다시 눈을 뜨지도 못했을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보은을 하고 싶지만 당장 가진 것이,”
“사람 목숨을 구하는 일에 무언가를 바라면 천벌 받을 일이지요. 마음 쓰지 마세요. 아버지도 저도, 그런 것은 눈곱만큼도 바라지 않았어요. 사는 데 큰 모자람도 없고요. 정말이에요.”
청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네즈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덧붙였다.
“지금은 그저, 이렇게 무사히 깨어난 것만으로도 기쁘네요. 열이 심해서 내심 걱정했거든요.”
뜻밖의 반응에 그는 다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보아도 지금의 자신은 그녀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순수하게 호의를 보이는 아이네즈를 그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가······.”
무어라 운을 떼려던 그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진 까닭이었다.
그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태자가 아닌 위치에서 타인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왕성이 아닌 곳에서 신분이 다른 상대를 이리 가까운 자리에서 이토록 오래 마주 대한 경험 또한 없었다. 머리로야 이러저러해야지 해도, 막상 닥치자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가 아가씨를 어떻게 불러야 하지요?”
자신을 아가씨라고 칭하는 것이 많이 어색한 모양이었다. 수프 그릇에 눈길을 준 채 들릴 듯 말 듯 물어오는 작은 목소리가 묘하게 귀여워 보여서 아이네즈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성장기에 있는 얼굴이라기에는 이목구비가 지나치게 뚜렷하고 태도가 의젓하여 저보다 연상일 거라 짐작하였으나, 의외로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네즈, 저는 아이네즈 티아르예요. 당신은?”
“저는,”
무심코 운을 떼려던 청년이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살짝 벌려진 입술 새로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주친 눈동자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멍하니 입술을 벌린 청년의 얼굴 위로 서서히 경악과도 같은 감정이 떠올랐다.
“왜 그래요?”
본인의 이름을 알려주면 상대의 이름 또한 알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그녀의 이름을 물어봤을 때 그가 그러하였듯 아이네즈 역시 별 뜻 없이 물어본 질문이었다.
“아······.”
청년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고통스러운 잇새로 신음이 흩어지는가 싶더니 그가 머리를 움켜쥐며 다리를 웅크렸다.
그 서슬에 청년의 무릎 위에 있던 나무그릇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졌다. 수프가 청년이 덮고 있는 이불과 아이네즈의 치맛자락 위로 흘렀으나 놀란 아이네즈는 뜨거움조차 느끼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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