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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와 패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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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19.04.01 11:16
최근연재일 :
2020.02.09 22:13
연재수 :
271 회
조회수 :
116,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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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9
글자수 :
1,047,762

작성
19.12.13 15:55
조회
113
추천
5
글자
7쪽

[외전] 세월 21

DUMMY

*



“그대에겐 정말 미안합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폐하께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뜻밖에도 사과였다. 혼란스러운 정황 속에서 왕비로서 자리를 지키고 왕자들을 무사히 보호한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할 수는 있으리라 여겼지만 미안해 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에 나는 다소 당황하고 말았다.


“듣잡기 황망하나이다. 어찌 극존께서···.”

“아까 어의가 일러주더이다. 국구께서 결국···.”


내 말을 가로막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받은 폐하께서는 말을 끝까지 잇지 아니한 채 흐렸다. 그것은 필시 부친상을 당한 내 심기를 헤아린 그의 자상한 배려였으리라.


차라리 눈물조차 흘릴 여유도 없으리만큼 경황이 없을 때가 좋았다. 조정은 숨가쁘게 돌아갔고, 아직 태자는 너무도 어렸으며, 폐하께서 기약 없이 누워 계셨기에 나는 마음 편히 슬픔에 잠길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게 너무도 소중한 두 분이 독을 마시고 쓰러졌다는 참혹한 소식을 접하고도 제대로 울어본 적도 없었고, 그 사실을 미처 자각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폐하께서 기력을 찾으시고, 이리 따스한 눈길로, 다정한 음성으로 내 상처를 어루만지는 언사를 해주시자, 필사적으로 억눌러온 감정의 둑이 일시에 무너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가 싶더니, 눈물이 툭 하고 굴러떨어졌다. 나는 당황하여 고개를 돌렸다.


후두둑. 그러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돌아서려 하였을 때, 태후께서 그러한 내 손을 잡아끌어 폐하 곁으로 데려가셨다. 마치 폐하더러 나를 위로해주라 종용하듯.


폐하와 정혼하기 이전부터 나를 어여삐 여기신 태후 폐하의 마음은 감사했지만, 나는 이런 순간에 강요된 위로를 받고 싶지는 아니하였다. 폐하께서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감정에 민감한 다정한 성정이셨다. 상대가 그 누구이건, 약해진 모습을 보이는 것을 두 눈으로 담고서도 발로 걷어찰 성정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오랜 세월 그를 곁에서 지켜봐 온 내가 가장 잘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폐하께서 손을 내게 뻗어 내 손을 잡으셨다. 그의 마음이 나와 같은 무게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손끝에 닿는 온기에 나는 한 차례 더 무너지고 말았다.


“지금 얼마나 힘듭니까. 혼자 견디기도 버거울 터인데 변변찮은 나는 그대에게 또 크나큰 짐을 얹어주고 말았군요.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줄리에트.”


폐하께서,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마음이 닿지 아니한 존재에게도 헤아림이 깊은. 내가 그 긴 세월 수없이 속고 다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그 곁에 서성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면 때문이었다. 지독히도 성실하고 자상한 그의 면모 때문에. 그 말에 깃든 다정한 울림이 사랑이 아님을 알면서도, 혹시나, 혹시나 하게 되는 어리석은 악순환.


“어리석은 나는 이리도 매번 당신을 아프게 하고 슬프게 만드는데···. 강하고 현명한 당신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늘 부족한 나를 지켜주는군요. 나는 수십 번 다시 태어난다 하여도 이번 생에 당신에게 지은 죄를 다 갚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사랑한다는 말이었다면, 나 역시도 그가 내게 주었던 모든 상처를 다 잊었노라 답할 수 있었을까. 어리석은 나는 그 점에 대해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가 내게 미안하다 하고 고맙다 말을 하면서도 끝내 사랑한다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나 역시도 그 앞에서 그를 용서하노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내게 마음을 열어주지 아니하는 그의 완고한 마음 앞에서 몇 마디 말로 잊을 수 있기에는, 내가 이 차디찬 왕궁에서 홀로 보낸 시간이 너무도 길었고, 그 기나긴 시간이 내게 남긴 상흔이 너무 지독한 탓이었다.


“극존께서 소첩의 하잘것없는 수고를 헤아려주시니 그것만으로도 황감할 따름이옵니다.”


나는 눈물을 닦았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세레즈의 왕비로서의 나. 태자 아체프렌과 안타미젤 왕자의 모후이자 왕실의 안주인으로서 줄리에트. 나는 그가 바라는 나를 슬프도록 명확하게 깨닫고 있었다.


“줄리에트. 근위대에게 엄호하라 명할 터이니 사가에 다녀오겠습니까? 입궁한 뒤로 단 한 번도 폰다 영지에 발길을 하지 못하였지 않습니까?”


뜻밖의 권유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폰다, 나를 키운 내 아버지의 땅. 십여 년 가까이 밟아보지 못하였던 고향이 내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말씀은 황공하오나 아직 왕성이 어지러운데 어찌 소첩이 자리를 비우겠습니까.”


가고 싶은 마음이야 가득했지만, 내 처지 상 힘겨우리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주저하는 기색으로 사양했다.


“사려 깊은 생각을 하시었소, 성상. 이번 일로 왕비께서 심신이 고단한 상태이고, 대공의 추도 절차가 아직 마무리되지 아니하였으니 일정을 서두른다면 말미에라도 참석할 수 있지 않겠소? 사가에서 심신을 추스르고 돌아오도록 배려하는 것이 내 보기에도 좋아 보이는군요.”


태후께서도 거들어주시자 내 폰다행은 확정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나는 그 권유를 덜컥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태자 아체프렌이 바로 그 연유였다. 내가 아무리 태자를 안타미젤과 다르지 않게 생각한다 하여도, 민심이 안 좋은 상황에서 그를 데리고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게 아무래도 주저되었다. 성 밖에 나가서 아체프렌이 사정을 모른 채 떠들어대는 뭇사람들의 말에 상처 입을까 저어되기도 하였거니와, 사가에 머무는 것이 아체프렌을 불편하게 할까 근심이 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어머님께서도 권하시고, 내 보기에도 작금의 왕성 분위기가 좋지 아니하니 모처럼 폰다에 가서 이번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쉬고 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이 외려 당신에게 상처가 될까 조심스럽지만, 그대가 망설이는 까닭이 태자 때문이라면, 아체프렌은 그대가 돌아올 때까지 어머님께서 맡아주실 겁니다.”

하지만 국왕 폐하께서는 겉으로 드러내어 말하지 못한 내 우려까지 이미 헤아리고 있었다.


“정녕 그리 하여도 되겠나이까?”


태후께서 그다지 태자를 과히 어여뻐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한 번 더 태후의 의중을 물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는 듯, 태후께서는 과히 언짢은 기색 없이 폐하의 청을 수락하셨다.


“물론이지요, 왕비. 심려 말고 다녀오도록 하세요.”


나는 그 두 사람에게 감사를 담아 고개를 숙여 보였다.


“두 분 폐하의 황감한 배려에 감사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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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외전] 청혼 이후 下 20.02.05 136 4 8쪽
268 [외전] 청혼 이후 上 - 미드프레드의 이야기 20.02.03 125 2 7쪽
267 [외전] 청혼 下 20.02.01 97 4 7쪽
266 [외전] 청혼 中 20.01.31 122 3 7쪽
265 [외전] 청혼 上 - 브라우웰&미드프레드 이야기 20.01.30 127 4 7쪽
264 39장 이삭줍기 7화 악우 20.01.29 141 5 8쪽
263 39장 이삭줍기 6화 베케이노의 기다림 20.01.28 126 5 8쪽
262 39장 이삭줍기 5화 자금의 출처 20.01.27 119 4 11쪽
261 39장 이삭줍기 4화 희소식 20.01.24 123 4 7쪽
260 39장 이삭줍기 3화 다시, 시작 20.01.23 130 3 8쪽
259 39장 이삭줍기 2화 태자가 던져놓은 포석 20.01.22 133 3 7쪽
258 39장 이삭줍기 1화 귀환 20.01.21 126 4 7쪽
257 38장 적의 적 7화 적의 적을 사용하는 법 下 20.01.20 130 5 8쪽
256 38장 적의 적 6화 적의 적을 사용하는 법 上 20.01.18 135 5 8쪽
255 38장 적의 적 5화 전쟁이란 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20.01.17 135 7 8쪽
254 38장 적의 적 4화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가 +2 20.01.16 142 6 10쪽
253 38장 적의 적 3화 아직은 버릴 수 없는 패 +2 20.01.15 130 6 8쪽
252 38장 적의 적 2화 공짜가 아닌 성의 20.01.14 119 7 7쪽
251 38장 적의 적 1화 늦은 선물 20.01.13 129 5 8쪽
250 37장 붉은 바람 6화 옥좌란 20.01.11 137 6 9쪽
249 37장 붉은 바람 5화 대관식 직전, 흉몽 20.01.10 114 5 8쪽
248 37장 붉은 바람 4화 뿌리는 자, 거두는 자(회차변동) 20.01.09 129 5 8쪽
247 37장 붉은 바람 3화 왕자의 관용 20.01.08 149 7 10쪽
246 37장 붉은 바람 2화 잠 못 이루는 밤 20.01.07 181 8 8쪽
245 <제3부 다이레비드 공방전> 37장 붉은 바람 1화 기만책 20.01.06 134 6 8쪽
244 [외전] 세월 28 (끝) 20.01.04 130 5 10쪽
243 [외전] 세월 27 20.01.03 103 4 9쪽
242 [외전] 세월 26 20.01.02 104 5 9쪽
241 [외전] 세월 25 19.12.28 97 3 8쪽
240 [외전] 세월 24 19.12.20 101 4 8쪽
239 [외전] 세월 23 19.12.18 100 5 7쪽
238 [외전] 세월 22 19.12.17 105 4 9쪽
» [외전] 세월 21 19.12.13 114 5 7쪽
236 [외전] 세월 20 19.12.11 104 5 7쪽
235 [외전] 세월 19 19.12.09 112 6 9쪽
234 [외전] 세월 18 19.12.06 110 6 8쪽
233 [외전] 세월 17 19.12.03 128 5 7쪽
232 [외전] 세월 16 19.11.30 114 5 7쪽
231 [외전] 세월 15 19.11.29 123 4 7쪽
230 [외전] 세월 14 19.11.28 118 4 8쪽
229 [외전] 세월 13 +2 19.11.27 114 4 9쪽
228 [외전] 세월 12 19.11.26 120 5 7쪽
227 [외전] 세월 11 19.11.25 123 5 11쪽
226 [외전] 세월 10 19.11.23 127 5 9쪽
225 [외전] 세월 9 19.11.22 114 5 7쪽
224 [외전] 세월 8 19.11.21 115 5 7쪽
223 [외전] 세월 7 19.11.20 124 4 7쪽
222 [외전] 세월 6 19.11.19 126 5 9쪽
221 [외전] 세월 5 19.11.18 140 5 12쪽
220 [외전] 세월 4 19.11.16 155 5 7쪽
219 [외전] 세월 3 19.11.15 152 5 12쪽
218 [외전] 세월 2 19.11.14 170 5 11쪽
217 [외전] 세월 1 -세느비엔느 여왕의 외전 19.11.13 197 6 15쪽
216 36장 선전포고 6화 무혈입성(2부 完) +2 19.11.12 235 7 11쪽
215 36장 선전포고 5화 백성들의 왕 19.11.11 178 8 9쪽
214 36장 선전포고 4화 태자의 대의 19.11.09 194 9 7쪽
213 36장 선전포고 3화 로크라테군의 대응 19.11.08 173 7 7쪽
212 36장 선전포고 2화 전서 19.11.07 192 7 9쪽
211 36장 선전포고 1화 항복 +2 19.11.06 183 8 8쪽
210 35장 붉은 숲 전투 6화 투항 권유 19.11.05 194 7 7쪽
209 35장 붉은 숲 전투 5화 공세 19.11.04 184 7 8쪽
208 35장 붉은 숲 전투 4화 매복 19.11.02 197 6 9쪽
207 35장 붉은 숲 전투 3화 유인 19.11.01 187 6 7쪽
206 35장 붉은 숲 전투 2장 작전과 신뢰 +2 19.10.30 206 8 8쪽
205 35장 붉은 숲 전투 1화 괴물용병 19.10.28 164 6 9쪽
204 34장 여름 해질녘 향기 6화 첸트로빌 공성군 19.10.25 195 5 10쪽
203 34장 여름 해질녘 향기 5화 전투 준비 19.10.23 312 5 8쪽
202 34장 여름 해질녘 향기 4화 요란한 출병 19.10.21 202 7 7쪽
201 34장 여름 해질녘 향기 3화 관점의 차이 19.10.18 180 7 7쪽
200 34장 여름 해질녘 향기 2화 백의종군 +4 19.10.16 204 7 9쪽
199 34장 여름 해질녘 향기 1화 아크레이드의 입장 19.10.14 183 7 9쪽
198 33장 흑운의 그림자 6화 급변하는 정세 19.10.11 187 8 8쪽
197 33장 흑운의 그림자 5화 미드프레드와 메이샤드 19.10.09 195 6 9쪽
196 33장 흑운의 그림자 4화 유훈 19.10.07 205 6 9쪽
195 33장 흑운의 그림자 3화 음독 19.10.04 202 7 8쪽
194 33장 흑운의 그림자 2화 번뇌 어린 선택 19.10.02 215 6 7쪽
193 33장 흑운의 그림자 1화 짬짜미 19.10.01 202 8 9쪽
192 32장 보이지 않는 싸움 8화 줄다리기 하 19.09.30 187 7 9쪽
191 32장 보이지 않는 싸움 7화 줄다리기 上 19.09.30 183 8 7쪽
190 32장 보이지 않는 싸움 6화 휘장 너머의 소녀 19.09.28 222 8 9쪽
189 32장 보이지 않는 싸움 5화 은밀한 초대 19.09.27 219 8 8쪽
188 32장 보이지 않는 싸움 4화 아비와 딸 19.09.26 206 8 12쪽
187 32장 보이지 않는 싸움 3화 커런스의 입장 19.09.25 189 8 9쪽
186 32장 보이지 않는 싸움 2화 공주의 선언 19.09.24 200 8 9쪽
185 32장 보이지 않는 싸움 1화 공주의 결단 19.09.23 244 8 7쪽
184 31장 풍운재자 6화 승부수 19.09.21 226 7 9쪽
183 31장 풍운재자 5화 태자의 특사 +2 19.09.20 234 8 7쪽
182 31장 풍운재자 4화 싸움준비 19.09.19 287 8 7쪽
181 31장 풍운재자 3화 해적이 된 초원의 아이 +2 19.09.18 245 8 11쪽
180 31장 풍운재자 2화 이이제이의 계책 +4 19.09.17 245 12 8쪽
179 31장 풍운재자 1화 혁자생존 +2 19.09.16 280 10 9쪽
178 30장 흐르는 별 7화 거절할 수 없는 청 +2 19.09.12 251 9 13쪽
177 30장 흐르는 별 6화 원유회 19.09.11 247 11 8쪽
176 30장 흐르는 별 5화 이면의 계책 +2 19.09.10 228 9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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