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세월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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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겐 정말 미안합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폐하께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뜻밖에도 사과였다. 혼란스러운 정황 속에서 왕비로서 자리를 지키고 왕자들을 무사히 보호한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할 수는 있으리라 여겼지만 미안해 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에 나는 다소 당황하고 말았다.
“듣잡기 황망하나이다. 어찌 극존께서···.”
“아까 어의가 일러주더이다. 국구께서 결국···.”
내 말을 가로막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받은 폐하께서는 말을 끝까지 잇지 아니한 채 흐렸다. 그것은 필시 부친상을 당한 내 심기를 헤아린 그의 자상한 배려였으리라.
차라리 눈물조차 흘릴 여유도 없으리만큼 경황이 없을 때가 좋았다. 조정은 숨가쁘게 돌아갔고, 아직 태자는 너무도 어렸으며, 폐하께서 기약 없이 누워 계셨기에 나는 마음 편히 슬픔에 잠길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게 너무도 소중한 두 분이 독을 마시고 쓰러졌다는 참혹한 소식을 접하고도 제대로 울어본 적도 없었고, 그 사실을 미처 자각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폐하께서 기력을 찾으시고, 이리 따스한 눈길로, 다정한 음성으로 내 상처를 어루만지는 언사를 해주시자, 필사적으로 억눌러온 감정의 둑이 일시에 무너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가 싶더니, 눈물이 툭 하고 굴러떨어졌다. 나는 당황하여 고개를 돌렸다.
후두둑. 그러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돌아서려 하였을 때, 태후께서 그러한 내 손을 잡아끌어 폐하 곁으로 데려가셨다. 마치 폐하더러 나를 위로해주라 종용하듯.
폐하와 정혼하기 이전부터 나를 어여삐 여기신 태후 폐하의 마음은 감사했지만, 나는 이런 순간에 강요된 위로를 받고 싶지는 아니하였다. 폐하께서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감정에 민감한 다정한 성정이셨다. 상대가 그 누구이건, 약해진 모습을 보이는 것을 두 눈으로 담고서도 발로 걷어찰 성정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오랜 세월 그를 곁에서 지켜봐 온 내가 가장 잘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폐하께서 손을 내게 뻗어 내 손을 잡으셨다. 그의 마음이 나와 같은 무게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손끝에 닿는 온기에 나는 한 차례 더 무너지고 말았다.
“지금 얼마나 힘듭니까. 혼자 견디기도 버거울 터인데 변변찮은 나는 그대에게 또 크나큰 짐을 얹어주고 말았군요.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줄리에트.”
폐하께서,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마음이 닿지 아니한 존재에게도 헤아림이 깊은. 내가 그 긴 세월 수없이 속고 다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그 곁에 서성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면 때문이었다. 지독히도 성실하고 자상한 그의 면모 때문에. 그 말에 깃든 다정한 울림이 사랑이 아님을 알면서도, 혹시나, 혹시나 하게 되는 어리석은 악순환.
“어리석은 나는 이리도 매번 당신을 아프게 하고 슬프게 만드는데···. 강하고 현명한 당신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늘 부족한 나를 지켜주는군요. 나는 수십 번 다시 태어난다 하여도 이번 생에 당신에게 지은 죄를 다 갚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사랑한다는 말이었다면, 나 역시도 그가 내게 주었던 모든 상처를 다 잊었노라 답할 수 있었을까. 어리석은 나는 그 점에 대해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가 내게 미안하다 하고 고맙다 말을 하면서도 끝내 사랑한다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나 역시도 그 앞에서 그를 용서하노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내게 마음을 열어주지 아니하는 그의 완고한 마음 앞에서 몇 마디 말로 잊을 수 있기에는, 내가 이 차디찬 왕궁에서 홀로 보낸 시간이 너무도 길었고, 그 기나긴 시간이 내게 남긴 상흔이 너무 지독한 탓이었다.
“극존께서 소첩의 하잘것없는 수고를 헤아려주시니 그것만으로도 황감할 따름이옵니다.”
나는 눈물을 닦았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세레즈의 왕비로서의 나. 태자 아체프렌과 안타미젤 왕자의 모후이자 왕실의 안주인으로서 줄리에트. 나는 그가 바라는 나를 슬프도록 명확하게 깨닫고 있었다.
“줄리에트. 근위대에게 엄호하라 명할 터이니 사가에 다녀오겠습니까? 입궁한 뒤로 단 한 번도 폰다 영지에 발길을 하지 못하였지 않습니까?”
뜻밖의 권유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폰다, 나를 키운 내 아버지의 땅. 십여 년 가까이 밟아보지 못하였던 고향이 내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말씀은 황공하오나 아직 왕성이 어지러운데 어찌 소첩이 자리를 비우겠습니까.”
가고 싶은 마음이야 가득했지만, 내 처지 상 힘겨우리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주저하는 기색으로 사양했다.
“사려 깊은 생각을 하시었소, 성상. 이번 일로 왕비께서 심신이 고단한 상태이고, 대공의 추도 절차가 아직 마무리되지 아니하였으니 일정을 서두른다면 말미에라도 참석할 수 있지 않겠소? 사가에서 심신을 추스르고 돌아오도록 배려하는 것이 내 보기에도 좋아 보이는군요.”
태후께서도 거들어주시자 내 폰다행은 확정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나는 그 권유를 덜컥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태자 아체프렌이 바로 그 연유였다. 내가 아무리 태자를 안타미젤과 다르지 않게 생각한다 하여도, 민심이 안 좋은 상황에서 그를 데리고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게 아무래도 주저되었다. 성 밖에 나가서 아체프렌이 사정을 모른 채 떠들어대는 뭇사람들의 말에 상처 입을까 저어되기도 하였거니와, 사가에 머무는 것이 아체프렌을 불편하게 할까 근심이 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어머님께서도 권하시고, 내 보기에도 작금의 왕성 분위기가 좋지 아니하니 모처럼 폰다에 가서 이번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쉬고 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이 외려 당신에게 상처가 될까 조심스럽지만, 그대가 망설이는 까닭이 태자 때문이라면, 아체프렌은 그대가 돌아올 때까지 어머님께서 맡아주실 겁니다.”
하지만 국왕 폐하께서는 겉으로 드러내어 말하지 못한 내 우려까지 이미 헤아리고 있었다.
“정녕 그리 하여도 되겠나이까?”
태후께서 그다지 태자를 과히 어여뻐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한 번 더 태후의 의중을 물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는 듯, 태후께서는 과히 언짢은 기색 없이 폐하의 청을 수락하셨다.
“물론이지요, 왕비. 심려 말고 다녀오도록 하세요.”
나는 그 두 사람에게 감사를 담아 고개를 숙여 보였다.
“두 분 폐하의 황감한 배려에 감사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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