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세월 28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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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세월 (종장)
세레즈력 377년 가을, 성도 다이레비드 본궁
가을이 깊어지면서 폐하의 병구완을 구실 삼아 나는 본궁 내 대전 폐하의 침소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였다. 물론 폐하의 급작스러운 서거를 대비한 모든 물밑작업을 끝내놓은 이후였다. 이제 내가 겪어야 할 마지막 절차는 폐하의 죽음, 그것 하나뿐이었다.
원래 권력의 이동을 누구보다 빨리 감지하는 이들이 바로 왕성내 인사들이었다. 국왕 폐하께서는 이미 지는 해였고, 두 번의 역모 사건을 거치면서 조정 내 중론을 주도하던 주요 세력이 사라진 작금, 권력의 핵심은 국왕의 비인 나였다.
닳고 닳아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왕실 인사 가운데는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폐하의 승하를 앞당겨 줄 만한 교활한 것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나는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며 괴로워하는 애처로운 왕비 역할에만 충실했다. 이 시점에 내게 가장 절실한 것은 태자를 앞지를 만한 정당성과 민심의 규합이었다. 어차피 폐하의 병세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고, 돌이킬 수 없을 운명의 시기를 다소 앞당기고자 내게 가장 절실한 두 가지를 눈앞에서 놓칠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나는 오늘도 잠든 폐하의 머리맡을 지키며 앉아있었다.
지난여름 그윈 백작을 내 편으로 끌어들인 것은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백작은 내가 그간 지켜봐 온 그 누구보다도 유능했다.
왕궁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를 대신하여 새로 개편될 조정의 구도와, 그론레이가 누명을 쓰고 처형된 이후에도 태자의 지지세력이 되어온 남부의 개혁안을 마련한 것도 모두 백작이었다. 그는 불과 삼 개월도 지나지 않아 수도의 주요 귀족과 군사력이 강한 중북부의 호족의 태반을 장악하는 성과를 보여 주기도 하였다. 그의 주도 아래 나의 새 정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순조롭게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 폐하의 곁을 지키며 가련한 왕비 역할에 몰두할 수도 없었을 터였다.
나는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잠긴 채 상념에 사로잡혔다. 한때 내가 지극히 사랑했던, 그리고 어쩌면··· 모든 것이 끝나가는 지금도 지독하게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내를 마주 대한 채.
내가 이토록 오래··· 그를 이리도 평안한 심경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어 서글픈 웃음이 흘러나왔다.
너무 어려서는 설레어서.
그가 나를 버렸을 때는 너무도 절망적이어서.
나를 버린 그를 나는 버릴 수 없다는 점이 한스러워서.
그 이후에는 나의 존재가 그에게는 부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것이 슬퍼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 아버지가 돌이킨 운명의 시계추가 한없이 죄스럽기만 하여서.
국왕 폐하는 지나온 반평생 동안 내가 한 번도 제대로 고개 들어 똑바로 마주 대할 수 없었던 사내였다.
“참으로 우습지 않습니까, 국왕 폐하.”
그 좋고 고왔던 시절을 다 지나··· 결코 지울 수 없는 상흔을 서로의 가슴에 남긴 채로, 이렇게 아프고 병들어 사지에 이르러서야 겨우 내 사람이 된 이 남자를, 리온을 나는 슬프게 바라보았다.
“당신의 최후를 지키는 이가, 당신께서 그 긴 세월 한사코 밀어내고자 하였던 나라는 사실이.”
나는 듣지 못할 그를 향해서 한탄하듯 뇌까렸다.
“저는 그 길고 긴 시간이 흘러 이제야 겨우··· 폐하를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는데··· 폐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눈을 감고 저를 외면하시네요. 우리의 관계는 ···결국 이리 끝날 운명이었나 봅니다. 저는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께서는 끝내 저를 외면하시는 채로···.”
그런데도, 당신은 어찌 이리도 아름답습니까. 마음 편히 기대어 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를 잃어버리고, 지독한 고독과 고통스러운 병마에 시달리며 생의 빛을 잃어가는 이 순간조차··· 어쩌면 이토록 처연하게 아름다워 단 한 번도 당신의 마음을 얻지 못한 저를 한스럽게 하십니까.
폐하께서 제게 알려주신 진실이 너무도 아픈 나머지··· 저는 폐하께서 저만치 고통스러우셨으면 하였습니다. 오랜 고독에 병들어 여타 병자들처럼 추하고 괴롭게 눈을 감으셨으면 하였습니다. 잔인하게 제 가슴을 난도질한 것만큼 폐하께서도 아프시기를, 온 몸을 갉아먹는 독에 침잠되어 벌레처럼 바닥을 기며 신음하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끝내 고고하시네요. 마치 십수년 전의 릴리브 숲에서 처음 뵈었을 때와 같이··· 그저 잠시 잠드신 것처럼··· 창백한 안색마저도 밀랍 인형처럼 아름답기만 하군요.
이 모습조차도 로제스티나가 그렇게 죽도록 묵과한 저에 대한 폐하의 복수라면··· 예, 폐하께서 이기셨습니다. 저따위는 감히 어떻게 대항할 여지조차 없이 폐하께서 완전히 승리하셨습니다. 하여 폐하···. 지금은 행복하십니까. 저를 완전히 이기시어 통쾌하시나이까?
“폐하께서는 참으로 어리석나이다. 제 마음을 그토록 잔인하게 짓밟고 돌아서셨다면··· 강건하게 버티셨어야지요. 제 아버지를 친 칼을 들어 당신을 거스르는 모든 것들을 발아래 두셨어야지요. 잔혹한 국왕이 되어 모든 것들을 뜻하신 대로 오래오래 누리셨어야지요. 이 모습이 대체 뭐랍니까. 스스로 하신 결단··· 어찌 그 무게조차 견디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앓다가 이리 허망하게 떠나려 하신단 말입니까···.”
국왕으로서는 잔혹하였으나 인간으로서는 한없이 나약했던 사람, 펠릭스 카르실리온.
모든 것은 다 당신 때문이다. 당신이 고독하고도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당신에게 마음을 주지 아니하였을 것이고, 당신이 본인의 결단에 한 점 미련도 후회도 없는 냉혹한 인사였다면 나는 감히 당신에게 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잔인하되 나약하였고, 당신의 상반된 점들이 나로 하여금 결국은 당신에게서 돌아서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만천하에 드러난 그 잔혹한 밤 비탄과 절망 속에서 죽어버린 열세살의 줄리에트와. 지옥과도 같았던 고통의 잿더미 위에서 새로이 태어난 나, 스물 아홉 살의 줄리에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기에.
“저는 폐하처럼 살지 아니할 것입니다. 저는 당신보다 훨씬 더 잔인하게 당신이 지니었던, 당신이 지키고 싶어 하셨던 그 모든 것들을 움켜쥐기로 다짐하였습니다.”
결심을 굳힌 나는 신전에서 축수를 받는 종이를 물에 적셔 폐하의 핏기 없는 얼굴 위에 올려놓았다. 내 사랑의 시작은 운명의 장난이었으나, 이 사랑이 끝은 나의 의지였다.
“저는 폐하 대신 폐하의 자리에 올라··· 열세 살의 줄리에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당신을 이해해 보기로 하였나이다.”
그는 나를 정신적으로 죽였고, 나는 이제 그를 물리적으로 죽인다. 그러니 우리 둘 다 서로에게 더 이상의 빚은 없는 셈이었다.
“몇 번 거듭 태어나도 제게 지은 죄를 갚을 수 없으리라 하셨지요? 제가 그 빚을 이 자리에 청산해 드리겠습니다, 국왕 폐하. 그러니 이제 더는 제게 미안해하지 마시어요.”
내 손으로 숨통을 조여 죽어가는 그를 보면서도 나는 울지 않았다. 작년 초겨울 진실의 칼을 들어 열세살의 나를 베어낼 때의 그와 같이. ··· 나 또한 그 앞에서 울 자격이 없음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무 근심하지 마시옵소서. 신첩, 폐하께서 저와 안타미젤을 살리신 것처럼··· 저 또한 태자의 목숨만은 거두지 않겠다고 맹세하나이다. ···그가 제 아들을 위협하지 아니하는 한, 말이지요.”
호화로운 대전에 침중하게 내려앉는 나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그의 사지가 부르르 떨렸다. 생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그마저도 완전히 멎고 나서 나는 폐하의 얼굴에서 젖은 종이를 떼어내고 수건으로 고통 속에 잠든 그의 얼굴을 정성스레 닦아준 후 눈을 감겨주었다.
“부디 평안히 잠드세요, 국왕 폐하. 나의 리온, 내 유일한 사랑이여.”
안녕히. 나의 십대와 이십대여. 끝나버린 내 사랑에 작별을 고하고자 나는 폐하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긴 입맞춤이 끝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전의 문을 열었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국왕 폐하께서··· 서거하셨다.”
긴 침묵 끝에 나는 입을 열어 그의 죽음을 알렸다. 그 말을 전하는 내 볼을 타고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에게 바친 내 길고도 외로웠던 사랑이 종막을 고했음에 나는 진한 애도를 표했다.
*
세레즈력 377년 겨울, 폐하의 국장 절차가 끝나고 나는 신료들의 주청과 왕실 종친들의 추대에 힘입어 크레아로드의 대신전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세레즈 35대 국왕 세느비엔느 1세가 되었다.
-세월, 세느비엔느 여왕의 이야기, 끝.-
- 작가의말
세월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 쉬고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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