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장 보이지 않는 싸움 2화 공주의 선언
2. 다이엘라의 선언
“상황을 알아보려고 가려는 것이 아니야, 로베르트.”
“압니다. 알고 있으니 이리 말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로베르트는 짧게 한숨을 내쉰 후 다시 말을 이어갔다.
“주제넘게 이런 말씀 올리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도 폐하의 진노를 사시면 그건 쉽게 수습할 수 없을 겁니다. 몇 달 전에도 공주님의 발언이 문제가 되어 사병 해체까지 거론되었는데, 이번엔 그 파장을 또 어찌 감당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러니까 이만 돌아가세요. 그리 하시는 편이 공주님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제발.”
다이엘라는 다정한 시선으로 친구를 바라보며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하게 가라앉힌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걱정해 주는 것은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해, 로베르트. 하지만 나는 커런스를 위해 가야만 해.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나를 믿어줘. 큰 소란이 되지 않도록 노력할게. 정말이다.”
그녀의 진지한 표정에 로베르트는 결국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커런스의 공주가 조국을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로서도 더 이상 그녀를 막아낼 명분이 없는 것이다.
이제 더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는 입술을 깨물며 물러섰다.
그런 로베르트를 뒤로 한 채 쭉 걸어나 간 다이엘라는 회의실 문 앞에 섰다. 어전 회의실 문 앞을 지키고 서있던 근위병 둘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왕가의 둘째 공주를 응시하고 있었다.
“문을 열어라.”
“하오나 공주님, 폐하의 명 없이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신 관계로···”
“무엄하기 그지없구나! 당장 문을 열라 하신 공주님의 분부가 안 들리는 것이냐? 네 어느 안중이라고 가당찮은 구실을 늘어놓으며 윗전의 하명을 거스르려 하는 게냐.”
어느새 다가왔는지 로베르트가 병사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윽박질렀다.
뭐니 뭐니 해도 초록은 동색이고,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라 하더니. 다이엘라는 자신을 돕기 위해 부러 얼굴을 굳힌 채 근위병을 일갈하고 있는 로베르트의 모습에 내심 쓴웃음을 머금었다.
잠시 후 로베르트의 험악한 기세에 떠밀리듯 근위병들이 시무룩한 얼굴로 마지못해 문을 열자, 그녀는 짧게 심호흡을 한 후 안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여러 신료들과,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으로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린 부친의 시선 속에서 그녀는 예법을 갖춰 허리를 숙여 보였다.
“허락 없이 들어온 결례를 부디 용서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 먼저 입을 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조정 신료들의 윗자리에 앉아있던 재상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공주님께서 미처 모르시고 실수하신 것 같사와 말씀드리건대, 지금은 어전회의 도중이랍니다. 소신이 회의가 파하는 즉시 폐하를 알현할 수 있도록 자리를 주선하겠사오니 공주님께서는 이만 돌아가 기다려 주십시오. 게 근위병들은 뭣들 하는 게냐? 어서 공주님을 모시지 않고! ”
평소에도 다이엘라의 영리한 천성과 활달한 기질을 유난히 높이 사고 있던 재상답게, 그는 이번에도 유스티안 Ⅶ세의 진노로부터 그녀를 보호해주기 위해 험한 분위기 속으로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그런 재상의 사려 깊은 배려에는 진정 감사했지만, 그녀는 이대로 아무 말도 못한 채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것이 설령 또다시 부친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이 될 지라도 말이다.
“배려에 진정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 역시 지금이 아니면 안 될 만큼 중요한 용건이 있어 제가 나설 자리가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찾아뵌 것입니다.”
눈빛으로 근위병을 물리친 후, 그녀는 나지막하지만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전혀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이는 그 단호한 얼굴에 애써 눌러 참고 있던 국왕의 분노가 결국 터져 나왔다.
“왕가의 공주가 이 무슨 조신하지 못한 행동이란 말이냐? 아녀자의 하찮은 소견 따위로 국가의 중대지사에 관한 어전 회의를 작파하다니! 네 진정 제 정신으로 역사에도 없는 이런 해괴한 작태를 보일 수는 없을 터. 하나 내 너를 염려한 재상의 사려를 높이 사서 이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책임을 묻지는 않을 것이니, 당장 물러가거라! ”
“소녀, 분명 폐하와 여기 계신 여러 조신(朝臣)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뵈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오니 그 말씀을 드리기 전에 물러갈 수는 없습니다.”
“네 정녕···!”
안색이 바뀌어 당장이라도 고함을 내지를 것 같은 국왕을 이번에 붙들어 맨 것도 재상의 간절한 목소리였다.
“폐하,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아직 유소하다고는 하나, 영명하기로 이름 높은 둘째 공주 아닙니까. 분명 뜻한 바가 있을 것이옵니다. 소신 이렇듯 간청 드리오니, 부디 잠시만 진노를 가라앉히시고 발언의 기회를 윤허하시옵소서. ”
못마땅하지만 억지로 눌러 참는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얼굴로 유스티안 Ⅶ세는 마지못해 재상의 청을 받아들였다.
다이엘라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며 허리를 굽혀 국왕에 대한 예의를 표한 후, 느릿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세레즈의 아체프렌 왕자가 칙사를 보내왔다고 들었습니다만, 일각도 아쉬운 작금 대신들께서는 무얼 하시고 있는 겁니까? 대답을 미루면 미룰수록 세레즈 땅에서 우리 커런스가 차지할 수 있는 입지가 점점 줄어들게 된다는 것을 모르시지 않을 분들께서 대체 언제까지 소득도 없는 실랑이만 반복하실 요량이십니까? 여러분들께서는 이대로 머뭇거리다가 새롭게 적을 만들 심산이신 겁니까.”
“사사건건 사내들이 하는 일에 간섭이더니, 네가 이제는 정치에까지 참견하려 함이더냐?”
국왕의 노여운 목소리가 회의실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려댔지만, 다이엘라는 눈썹 하나 깜박이지 않은 채 똑바로 시선을 들어 부왕을 바라보았다.
“한 번 꺼낸 말은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사오니, 소녀 이미 행해진 제 언사에 대해서는 새삼 용서를 구하지는 아니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소녀가 어찌 아버님의 심기를 어지럽히고자 이리 찾아왔겠나이까. 본디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 하였사오니, 부디 소녀의 충언을 끝까지 들어주시옵소서.”
의례적인 말과 달리 다이엘라의 눈빛은 종전보다 한층 더 엄격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찬 서리가 내린 것 같은 눈으로 주위의 대신들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폐하, 그리고 신료 여러분. 상대는 손을 내밀고자 불원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것이옵니다. 하온데 어찌 여러분들께서는 그 손을 잡아주시지 아니하고 내칠 생각까지 하시는 것입니까. 소녀, 이 회의가 끝을 맺지 못하는 것은 불간섭을 주창하는 분들과 세느비엔느를 옹호하는 분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 들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세느비엔느를 도와 이기면 우리는 얻을 것이 없고, 지면 잃을 것이 많습니다. 하나 아체프렌 왕자를 도와 이기면 우리는 얻을 것이 많고, 지면 잃을 것 또한 없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정녕 그 점을 모르십니까? 한 순간의 경솔한 결정의 대가를 차후에 어찌 감당하시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내 재상의 간언도 있었고, 자리도 자리인지라 가만히 듣자듣자 하였더니. 네 방약무도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불경스럽게 예 어디라고, 신료들과 짐에게 그토록 무례하기 짝이 없는 권간을 늘어놓는 게냐! 네 감히 짐을 훈계하려 듦이더냐?”
“어찌 그리 터무니없는 곡해까지 하십니까. 소녀, 진정을 다하여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간언을 올린 것뿐입니다. 하오나 아버님께서는 소녀의 내심을 끝끝내 하찮은 아녀자의 단견이라 치부하시며 일고의 고려조차 없이 물리치시는군요. 정녕 폐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소녀만이라도 세레즈의 태자가 내민 손을 붙잡을 것이옵니다.”
“공주님, 그 무슨···!”
다이엘라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만류하려는 재상에게 스치듯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의 부왕을 응시했다.
“저는 이제부터 커런스 왕실의 일원으로서 세레즈의 정통한 왕위 계승자 아체프렌 왕자에게 신의 어린 지원을 아끼지 아니할 것이옵니다. 제 뜻을 여러 신료분들과 국왕 폐하 앞에서 공식적으로 천명하였으니, 소녀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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